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60화 (260/307)

# 260

& 전쟁 속에서 (7)

드레퓨스의 황금 궁전 안은 여유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비록 음산함이 감돌지언정 촛대에 붙어있는 불빛은 따뜻했고, 바닥에 깔린 양탄자와 그 위의 소파는 푹신하기 그지없었다.

복도는 넓었고 커다란 실내 창문들을 통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항시 곡을 연주하는 악사들은 솜씨도 매우 훌륭했다.

글리터가 멀리에서 달려오고 있다지만,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한세월이다.

그리고 과연 수많은 난관을 뚫고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물론 지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걷는 가미긴은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닌 존재니까.

그는 세인이 이곳에 도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가미긴은 좀 어두운 통로에 다다랐다.

천장과 벽에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곳이었다.

이를테면 왕궁 내부에 책으로 분위기를 꾸민 셈인데, 지적인 분위기 하나를 위해 족히 수만 권이나 되어 보이는 값비싼 책들이 동원되었다.

책들의 의미는 꺼내서 보라는 뜻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내 장식이었다.

내킨다고 이걸 꺼내 볼 수 있는 자는 지체 높은 귀족이나 가능했다.

그것도 벽 쪽에 있는 책이나 가능할 뿐 아무래도 천장은 무리였다.

천장에 오밀조밀하게 채워진 책 중 한 권을 빼낸다면, 한 면이 통째로 무너져 내릴 테니까 말이다.

과시용 공간을 걷던 가미긴은 갑자기 멈칫했다.

의외의 상황에 맞닥뜨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형형색색의 책 중에 한 권이, 딱 한 권이 살짝 앞으로 나와 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보고 나서 끼워 넣은 걸까?

앞으로 살짝 나와 있는 차이를 발견하려면 우연에 기대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가지각색의 표지를 가진 책이 엄청 많았다.

정말로 이런 책이 왕궁 내에 있었고 누군가가 이것을 봤다면, 그리고 그가 이것을 본 사실을 숨겨야 했다면… 왜 제자리에 그대로 놓은 것일까?

나무는 숲에 숨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서?

책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 가미긴은 검지를 내밀었다.

그때 잠시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고,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가미긴의 검지는 책에 닿았고 천천히 앞으로 밀어 넣는 역할을 했다.

툭.

‘헤카테 왕의 오욕’이라는 책이 뒤로 움직이며 낸 소리다.

그리하여 아주 약간 돌출되었던 책은 다시 주변의 책들과 동화될 수 있었다.

그 후 가미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책을 지나쳤다.

책을 밀어 넣는 동안이나,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

그로부터 30분 후, 가미긴은 바이칼의 침실에서 램프를 들고 서 있었다.

여전한 무표정으로 말이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이칼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램프를 천천히 바이칼의 볼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유심히 바이칼을 관찰했다.

등을 돌리며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이것이었다.

“잠들었군.”

그렇게 가미긴이 사라지고 나면 바이칼이 눈을 뜬다.

어둠 속에서 혼자 누워있는 바이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긍정적인 생각은 아닐 것이었다.

바이칼의 처지를 생각하면 가미긴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후였다.

몬스터가 되더라도 살아있고 싶다는 욕망은 막상 현실을 보니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가미긴의 꼭두각시였고, 가미긴이 마음대로 밤에 찾아와 실컷 내려다보고 사라져도 찍소리 하나 못 내는 처지였다.

여기 어디에 왕의 모습이 있는가?

비단 이불 위로 바이칼의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다음 날 아침 바이칼은 노브 장군을 호출했다.

왕궁으로 불려온 노브 장군은 단정히 빗어넘긴 백발을 가진 노장이었다.

묵묵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매우 믿음직해 보였지만, 주군에게 사랑받는 타입은 아니었다.

노브 장군은 자타가 공인하는 애국자로서 그 애국심은 왕이 아닌 나라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종종 반에게 입바른 소리도 한 모양이다.

바이칼이 권력을 회복한 후 그를 다시 찾았을 때 노브 장군은 섬에 유배된 상태였다.

노브 장군을 다시 복권 시켜준 게 바이칼이지만, 정작 노브는 수도에 들어와서 적극적으로 재충성을 다짐하는 게 아니라 미적지근하게 행동했다.

그런데도 그에게 중책을 맡기려는 이유는 그가 애국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노구를 이끌고 선뜻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나라에 우환이 많은데, 요즘 짐이 모두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하는 건 아니지?”

바이칼이 은근히 떠보았으나 노브 장군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럴 때는 아니라고 손사래 치며 아첨이라도 하면 좋은 데 말이다.

바이칼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노브 장군을 바라보았다.

‘네 침묵이 지금 너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너는 버리는 패다.’

그런 생각을 하는 바이칼도 참 여느 때의 그다웠다.

따지고 보면 가미긴에게 수치를 당하고 있다고 해서, 바이칼이 피해자이고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노브 장군. 현재 남쪽은 환란으로 인해 공격받을 걱정은 없지만, 북쪽은 우리를 치러 오고 있다. 그러니 여기의 나는 당신이 북을 맞이하여 드레퓨스를 수호하길 바라네.”

바이칼의 말을 들은 노브는 당연히 목숨을 바쳐 드레퓨스를 수호하겠다고 응답했다.

그 후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만 노브가 전투를 치르겠다고 요구한 장소가 바이칼에게는 의외였다.

“코포니 성을? 거기를 당신에게 맡기는 건 무리가 없으나 여기에서 너무 먼데? 한참 변방이 아닌가? 나는 장군이 그보다는 수도에 가까운 곳에서 적을 맞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노브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서둘러서 잃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적의 허를 찌르는 게 낫습니다. 우리가 변방의 성에서 진심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네가 싸울 것이니, 자네 마음대로 하게. 군사들이야 팍팍 내어주지. 게다가 특별히 내가 아끼는 결사대도 내어주지.”

그러자 노브 장군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지금 드레퓨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장군으로 앉아 있는 노브도 그렇게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유난히 질색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결사대 같은 놈들도 그중 하나였다.

능력도 애매한 열성 종자들을 어디에다가 가져다 쓴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은 말도 더럽게 안들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 아.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말게. 나라고 생각이 없겠나? 통제 안 되는 병사들을 잔뜩 안겨줄 생각은 없네. 적당한 숫자의 결사대와 거기 소속인 뛰어난 기사들 몇 명을 붙여 주지.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라고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노브 장군은 뒷걸음쳐서 물러나는 게 아니라 등을 돌리고 접견 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방에서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바이칼이 앉아 있는 쪽을 보았다.

혈향이 가득한 붉은 융단 위, 왕좌에 앉아 있는 바이칼의 모습은 괴물과도 같았다.

다른 사람이 봐도 바이칼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울 것이다.

노브 장군이라고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드레퓨스를 지켜야지. 그가 곧 드레퓨스니까.’

노브 장군이 이런 생각 하며 물러날 때 바이칼은 그의 등을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그 눈빛은 왕좌 뒤에 서 있던 가미긴이 가까이 다가오자 금세 끝나버린다.

“노브는 쓸만한 인물이야. 그래서 반도 노브를 쉽게 처리하지 못한 거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써먹을 수 있거든. 그에게 많은 병사를 붙여주고 결사대의 기사까지 보태준다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가미긴은 기꺼운 듯 웃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내용은 웃음과 상반되었다.

“세인은 만만한 놈이 아니야. 저 노브라는 작자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바이칼은 가미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부드러운 미소 속에는 이런 생각이 숨겨져 있었다.

‘바보 같은 놈. 그걸 누가 몰라? 지금의 네놈이,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어주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면서 바이칼은 마음과 다른 소리를 했다.

“그에 대한 보고서를 봤겠지? 그는 주변인을 아껴. 인질극이 통할 거라고 반이 믿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 노브 장군이 세인을 못 잡는다는 것에서는 동의해. 그가 어떻게 세인을 죽일 수 있겠어? 하지만 세인의 병사들이 그 때문에 발이 묶여 있으면, 결국 세인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거야. 그동안 남부 평정에 박차를 가하고, 남쪽의 힘을 흡수하는 거지.”

가미긴은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툭 내뱉었다.

“그렇군. 저 작자 다음엔 누구지? 누구를 보내 싸우게 할 거야?”

바이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꺼내 가미긴을 슬쩍 찔러보았다.

“내가 직접 나갈 수도 있겠지.”

그러나 가미긴이 바라보자 바이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

“농담이야.”

“재미없어.”

“미안하다.”

재깍 사과하는 이 모습을 봤다면, 드레퓨스의 신하들은 현실을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오늘날의 바이칼은 꼴이 말도 아니었다.

오래전에 군왕으로서 신하의 목을 베며 호령하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처지는 비참해졌다.

그걸 바이칼도 아니까, 세인과 손을 잡으려는 것이고 말이다.

그의 처지에서는 유린당하고 있는 남부보다 세인의 힘에 기대고 싶었다.

과거 세인의 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바가 있는 바이칼은 그의 도움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노브 장군은 출전 전날 가족들에게 외딴곳으로 도망가라고 말해주었다.

부귀영화에 취한 식솔들이 과연 그것들을 다 버리고 도망갈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으로서 귀띔은 해준 것이다.

“나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다. 그리고 내가 본 황제의 모습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수도에 흐르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어. 그러니 가망 없는 곳에 몸을 오래 두느니,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해라. 그게 명줄을 늘리는 방법이다.”

“아버님은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왜 전쟁터로 나가십니까?”

“나는 드레퓨스의 제일가는 애국자니까. 내가 전쟁터에서 죽으면, 내 이름은 수도의 오벨리스크에 새겨질 것이다. 역사는 나를 기억하겠지. 그 역사는 불멸의 제국인 드레퓨스의 역사다. 그러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 자격이 있다.”

그리고 노브는 짓궂게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도망가면 황제는 군사를 풀어 나를 쫓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제라도 체면을 구기고 전쟁터로 나가면 되지만, 너희들은? 시간이 지나면 괘씸죄로 처형되겠지. 그걸 원하느냐?”

그러자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식구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브가 수도를 떠날 때 아주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거리에 술과 응원이 넘치고 축복이 가득했다.

허공에 뿌려져서 바닥에 깔린 꽃잎들을 말들의 편자가 밟고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드레퓨스의 수도를 빠져나왔다.

장시간의 연설을 들은 군대는 정의감으로 두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을 벌인 글리터의 행동에 충분히 분노했고, 그 마음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있었다.

“남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우리의 태양은 위급한 쪽에 지원병력을 급파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북부에 휴전 제의를 했던 것이다. 북부는 이를 승낙했다. 남부에는 이미 비밀 사절들이 오가고 파병 직전 단계였지만, 간악한 글리터와 북부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을 구하러 가는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웅변가의 말은 거짓말투성이였지만, 국민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이건 정부가 승인해준 거짓말이다.

“글리터는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마족들이 핵심 권력층이다! 즉 남부를 침범한 몬스터와 한편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그들은 국제적인 윤리도 신경 쓰지 않는 불한당들이다. 우리의 사절을 어떻게 했나? 그들은 최소한의 도의도 없는 민망한 집단! 윤리와 상식을 파괴하는 짐승 같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가 정의로서 그들을 징치하지 않는다면 대륙이 두 번째 환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의 이름을 빌어, 그들의 징벌을 명한다. 대륙에서 북부를 몰아내자!”

노브가 이끄는 군대는 어떻게 해서든 침입자인 글리터를 막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의가 모든 고통을 상쇄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불안감과 행군에 대한 고통.

앞둔 전투 때문에 흥분한 남자들을 제어하는 것도 지휘자들의 몫이었다.

노브는 엄격한 군법을 부하들에게 강요했다.

그 강요는 당연히 그 밑의 병사들에게도 전파되었고 말이다.

“항상 요구만 해서는 안 되지. 당근도 같이 준다.”

대신 풀어줄 때는 파격적으로 풀어주어 사기를 끌어 올렸다.

노브가 이끄는 군대는 근처 영지를 짓밟았고 거의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상소문이 줄을 이었지만, 그걸 바이칼이 받아보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또 일일이 읽어 본다는 보장도 없었다.

노브는 바이칼과의 접견 때 서로의 이익이 일치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정도는 봐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자국의 군대가 자국민을 약탈하는 광경은 드레퓨스에서 그렇게 희한한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제정신 박힌 시인이 이런 광경들을 봤다면 탄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느껴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겠지만, 결정적으로 그런 시인은 없었다.

오히려 도시에 있는 시인들은 노브의 전투를 찬양하는 시를 쓰느라 바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책으로 남겨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노브는, 밤에 병사들을 풀어줄 때는 제약을 두지 않았다.

곡식 창고를 털든, 더 나쁜 짓을 하러 사라지든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낮이 되면 무리한 행군을 강요했다.

그리고 병사들은 받아먹은 게 있으니 군말하지 않고 감당해냈다.

그래서 그 먼 거리를 이른 시일 내에 주파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