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 전쟁 속에서 (6)
보고서를 보던 세인은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힐다를 향해 달려들던 기사들은 패가 나뉘었다.
부리나케 수비대 건물 쪽으로 돌아가는 쪽과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쪽으로 나뉜 것이다.
“바보 같은 놈들.”
세인의 중얼거림처럼 힐다를 향해 달려들던 기사들은 메이스에 맞아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한데 뭉쳐 습격해도 모자랄 판에 흩어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기사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세인은 다시 보고서를 본다.
거기에는 행크와 더이스 그리고 맥이 추린 기사들의 의견이 쓰여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 중에서는 쓸모없는 의견도 있었고, 의도는 좋지만 사장되어야 하는 아이디어도 존재했다.
세인은 어쨌든 그것들을 다 읽긴 읽어 보았다.
그런 그의 눈치를 보던 기사들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는 세인이 말했다.
“해봐.”
뭘 하라는 건지 잠시 의아해하던 기사들은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행크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드레퓨스가 몬스터 소굴이 되었다는 것은 언제 알리실 겁니까?”
“그쪽 생각은 어떻지?”
“최대한 뒤로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한 사실이고 종국에는 모두가 알게 될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런 일을 밝혀서 좋아질 게 없습니다.”
기사들을 납득시킬 근거의 희박함도 문제긴 문제였다.
현재는 세인의 측근들, 핵심 인물들만 아는 진실은 잭의 희생으로 인해 얻어진 정보였다.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드레퓨스가 이미 괴물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증거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라면, 일반인들은 당연히 증거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하지만 기사들 전체에게 공개하는 문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들은 병사를 이끌고 움직이는 두뇌들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번 원정의 끝 정도는 염두에 두어야 그들로서는 전체적인 계획을 짤 수 있겠지. 그리고 군사적인 측면과 아울러 도의적으로도 난 그들에게 정보 공개의 필요성을 느낀다.”
세인은 무시무시한 적에 대하여, 그의 측근뿐만 아니라 기사들 전체에게도 공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정보를 알 권리가 있었다.
회의장에서 ‘나는 바이칼을 몬스터로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이나, 다른 부분에서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줬다 해서 모든 기사가 정확히 현실 파악을 했다고 여기는 것은 과장이었다.
좀 더 확실히 대놓고 중부가 몬스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더 나아가 이노센트에 대해 이야기까지 할 수는 없는 걸까?
“원하신다면 누구도 그걸 막을 수는 없지만, 제 생각도 밝히자면 공개는 늦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알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말로 하려면 시간과 증거가 필요하지만, 눈으로 직접 보여 준다면 오해의 여지도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맥의 말에 세인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시했다.
정말 수정할 수 없는 일은 밀고 나가겠지만, 다른 면에서는 기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거운 책임을 진 자들이고 같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하고 병사가 살아서 귀환했다면 아무도 그걸 가지고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휘관인 기사가 살아 돌아온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네 책임은 어떻게 하고, 혼자만 살아 돌아 왔느냐는 말도 듣게 될 수 있다.
그만큼 기사들에게는 요구되는 의무가 달랐고, 그 안에는 큰 책임과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그런 충성을 받는 자리에 있는 세인은 기사들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런 세인과 같이 있는 세 명의 기사들은, 세인의 그런 점을 이해하고 고마워했다.
하지만 정보의 완전한 공개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밝혀도 사람들이 꼭 믿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혼란이 야기 될 수 있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그보다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깨닫게 될 일이었다.
서둘러서 되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아주 길고 힘든 전투들이 연달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투를 수행하는 쪽도 부담감이 커지고 행동이 굼떠질 수밖에 없었다.
세인이 보고서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컵에 오른손을 가져갔다.
물을 마시려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검지를 들어 컵 안에 든 물을 찍어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손가락을 위로 세워 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세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여기까지 지켜본 기사들은 세인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맥이 세인에게 물었다.
“바로 신호를 보낼까요?”
하지만 세인의 대답은 맥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코포니 성에서는 내가 직접 참여할 생각이야. 하지만 이 전투는 지금 이렇게 관찰하는 거로 끝낼 거야. 이번에 다른 기사들이 내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볼 기회가 되겠지.”
“그렇군요.”
“수비대의 외벽은 여러 겹이지만, 제대로 만든 성벽처럼 높고 견고한 장벽이 아니야. 숫자도 압도적으로 우리가 유리하잖아. 그러니 더더욱 관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정신 무장 상태하며 여러 가지를 알아보겠다는 세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인이 성에 관련된 전투에서 직접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아무도 의외라 생각하지 않았다.
세인은 아주 강했다.
그리고 그가 직접 참가할 것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세리스가 와 있어야 할 것이었다.
이제 언덕 위의 사람들은 글리터의 군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 시선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언덕 아래쪽에 있는 질리언은 동시에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짧은 감탄성을 토해내었다.
“아….”
그건 아주 잠시였다.
그의 주변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리터의 병사들은 여전히 함성을 지르며 적의 진영으로 달려나갔다.
그 선두에 있는 것은 힐다였다.
담 위에서 쏘는 화살을 쳐내던 그녀는 다른 기사들을 불러, 앞쪽을 방패로 가리도록 했다.
그리고 지친 몸을 잠시 다스리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충차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녀 주변에서 방패를 들고 있는 기사들은 달려 나가는 병사들을 격려했고, 담으로 갈고리가 던져지는 것을 보았다.
해자가 없으니 이 모든 게 아주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기다리고 있는 충차가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 점만 빼면.
“왜 저러지?”
힐다는 커다란 사각형 방패가 만든 그늘 속에서 의문을 표시했다.
드레퓨스 수비대의 단단한 문을 돌파할 충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바보처럼 멀거니 서 있는 질리언의 모습만 포착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손짓을 해보려던 힐다는 문득 질리언의 머리카락과 망토가 바람에 휘날리는 방향을 보았다.
바람은 조약한 드레퓨스 군을 향해 불고 있던 것이다.
“으음.”
아니나 다를까.
질리언의 뒤에서 깃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뒤로 물러나라는 신호였다.
“사람들을 뒤로 물려! 거리를 유지하라고!”
그렇게 외친 힐다는 신호하고 있는 깃발을 가리켰다.
뒤늦게 그걸 본 병사들은 몸을 돌리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힐다는 마지막까지 그들을 원호하며 자리를 지킨 후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렇게 질리언에게 다가가는데 그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물씬 느껴졌다.
“설마 불화살이야?”
“바람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어. 화공이라면 적을 전멸시킬 수 있을 거야. 동의해?”
힐다는 기름 먹인 천들을 잔뜩 실은 수레가 덜컹거리며 굴러오는 것을 보았다.
화살 묶음을 든 궁수들도 바삐 움직이며 그녀를 지나쳐갔다.
힐다가 망설인 것은 아주 잠시였다.
“이미 명령을 내려놓고서 내 동의를 구하는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휘파람으로 메릴을 부르더니, 그 위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려는 거지?”
“화공이면 포위를 해야지.”
“그쪽에는 이미 사람들을 보냈어. 여기에서 엄호해주는 편이 나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힐다는 시종이 달려와 건네는 투구를 받아썼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질리언에게 멀어졌다.
질리언이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얼굴을 보니 그의 부관인 월터였다.
월터는 질리언과 눈을 마주치자 다급히 말했다.
“정말로 불화살을 날리실 겁니까? 남부에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화살이 아니라 불화살을요?”
월터가 지금 말하는 것은, 훗날 인간들이 뭉칠 때를 대비해 여지를 남겨놓는 전쟁이기도 했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인 월터는 잭과 질리언이 아끼던 사람이었다.
월터는 머리도 좋았고 싸움도 잘했다.
무엇보다 잭은, 월터에게 신념이 있는 게 마음에 든다고 자주 말했었다.
지금 보이는 드레퓨스의 수비대는 성 규모가 아니었다.
그리고 글리터의 병사들이 나르고 있는 화살의 양은 산더미에 가까웠다.
이 화살들에 몽땅 불을 붙여 날린다면 그건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월터가 생각하기론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그게 인간끼리의 전쟁인 이상,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었다.
“위에서 직접적인 명령이 내려온 것도 아니잖아요. 하루나 이틀. 길어봐야 삼일이면 저긴 점령될 겁니다. 일단 불을 붙이면 아무도 저들을 구제할 수 없어요. 질리언님. 저기에는 병사들만 있는 게 아닐 겁니다. 분명 그들의 가족들도 있어요. 그러니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른 기사들이 불화살 공격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질리언님이라면 말리실 재량이 있잖아요?”
질리언은 잠시 멀리 보이는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확신을 가지고 월터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월터. 여긴 전쟁터고 아군이 죽어가고 있어. 방법이 보인다면 오로지 거기에 매달려야 해.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자 곧 위의 뜻이야. 길이 보였을 때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가파른 길이라고 해도 우린 옆을 보지 않고 사력을 다해 올라가야 해.”
그리고 질리언은 더 망설이지 않고 호각을 길게 불었다.
그 소리가 글리터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드레퓨스 사람들에게도 들렸을지는 모르나, 만약 들었다면 미리 장송곡을 듣는 것과 다름없었다.
글리터의 화살들이 뜨거운 불에 젖는 것을 보며, 드레퓨스의 궁수들도 위급함을 느꼈는지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역풍 때문에 목표물에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에 비해 불을 머금고 날아가는 글리터의 화살들이 높이 떠올랐다가 가파르게 쏟아져 내렸다.
첫 번째는 무딘 반응이었지만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의 화살 세례를 받자, 수비대 진영에서 큰 불길이 일어났다.
일단 불이 붙었다면 상황을 다시 처음으로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할 수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월터는 드레퓨스 쪽을 바라보았고, 옆의 질리언은 계속 발사 명령을 내렸다.
언제 풍향이 변덕을 부릴지 몰랐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수비대 쪽에서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힐다와 여러 명의 기사였다.
힐다가 이번에는 도끼를 휘두르자, 마치 짚단처럼 사람들이 쓰러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에 쌓이는 시체들이 점점 늘어났고, 공격받는 쪽의 문이 활짝 열렸지만 글리터의 군대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건물 안은 이제 가득 찬 연기와 불길로 인해 지옥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불타는 사람들의 비명이 꼬리를 이었고, 몇몇은 담의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물리친 힐다는 활을 들어 불타는 사람에게 겨누었다.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화살을 날리는 이유는 빨리 숨통을 끊어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렇게 쓸 수 있는 화살도 한정되어 있었다.
힐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화살을 다 소비하고 나자 멀리 물러섰다.
열린 문 속으로 불에 타며 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불이 붙어 무력해진 인형과도 같았다.
땅을 잡고 몇 번 경련하더니, 옆으로 쓰러져 꿈틀대는 인간 위에서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불타는 통나무들이 바닥에 굴렀고 그것은 불붙은 행인을 덮쳤다.
무력하게 쓰러져 가는 사람들.
그리고 글리터를 저주하는 소리가 불타는 공간을 가득 채웠다.
불화살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의 병력이 물량 공세를 펼치자, 공격받는 쪽에서는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최소한의 선조차 지키지 않고, 소모되는 화살에도 신경 쓰지 않고 공격을 한다면 능히 이런 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수비대의 건물은 성처럼 돌을 주축 삼아 견고하게 지어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구력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화광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랐고, 살이 녹는 악취가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가장 덤덤해 보이는 것은 멀리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세인이었다.
불바다가 잦아든 후, 세인은 몇 개의 부대에게 생존자를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혹시라도 우물 같은 곳에 몸을 던져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구조 조치 때문에 수색하라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다.
“생존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라.”
그게 바로 세인의 명령이었다.
전쟁을 처음 접하는 월터 같은 사람에게는 오늘의 일이 충분히 충격이었고 비극이었겠지만, 과거 전쟁을 겪어본 사람들에게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진짜 전투다운 전투는 이다음에 놓여 있었다.
코포니 성.
그곳이 바로 다음 전투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