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 전쟁 속에서 (5)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자 글리터쪽 진형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런 움직임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드레퓨스 진영 쪽에서는 분주해지는 글리터의 주둔군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높은 언덕에 있는 세인은 백기가 올라오지 않는 건너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넓은 식탁이 놓여 있었고 주위에 깃발들이 가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북이나 종을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잠자던 천막에서 이제 막 나온 세인은 맥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어수선하게 이게 다 뭐야?”
“예? 직접 지휘하실 것 아니었습니까?”
맥은 당연히 높은 곳에 있는 세인이 전황을 관찰하며 직접 군을 움직일 줄 알았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의자를 끌어내고 식탁 앞에 앉은 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동안 훈련받은 기사와 병사들이 실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번 기회에 보고 싶은 거야. 지금 저곳은 제대로 된 성도 아니니까.”
“그런 생각이셨습니까?”
맥이 자신의 목에 대고 손짓으로 자르라는 시늉을 하자 눈치 빠른 기사들이 깃발을 치우라 명령했다.
물론 북들을 다시 아래로 가지고 가는 것도 포함이었다.
“돌아와 보니 훈련을 잘 받은 정예병들이더군. 낯선 내가 덜컥 군을 맡아서 이래라저래라하기 전에 숙고해야 할 것이 있어. 원래 손발이 잘 맞는 분위기라면 큰 방향을 정해주는 것 정도로 충분하겠지. 굳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혼란을 자초하고 싶지 않거든.”
세인은 식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개봉했다.
그러자 미지근한 밥과 반찬들이 나왔다.
오늘 아침 병사들에게 배급된 것 중 하나를 그대로 세인에게 올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세인의 명령 때문이었다.
세인의 옆에 선 맥은 투박한 음식들이 세인의 입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세인은 오늘 자신이 먹을 호화로운 음식을 기사들에게 돌렸다.
“여기 있는 감 같은 것은 일부러 설탕에 절인 건가?”
“예 이제 곧 싸울 사람들에게는 소금과 당분이 필요할 테니까요. 많이 신경 썼습니다.”
“술은?”
“그건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만, 그날 밤 한정으로 풀게끔 조치했습니다. 경계도 서야 하고 오랜 기간 동안 규칙으로 굳어져서 형평성을 문제 삼는 이가 없죠.”
맥의 말이 끝나자 행크와 더이스가 언덕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새벽부터 전투에 나갈 기사들을 점검하느라 머리가 산발이었다.
옷차림도 제대로 가다듬지 않은 단정하지 못한 차림새였지만, 여기에서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세인은 자리에 앉으라는 듯 검지로 식탁을 톡톡 두들겨 보았다.
그것은 맥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맥도 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수 상태는?”
“아주 좋습니다. 관리도 잘하고 있지만 아직은 따뜻한 지역이 아니니 쉽게 상할 우려도 없고요.”
“병사들의 위생 상태는 아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일단 동상이라는 고비는 넘긴 것 같군.”
“예.”
“투석기는 어떻게 되었지?”
“코포니 성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완성될 겁니다.”
“쓰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미리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세인은 손을 까닥여서 지도를 가져오게 한 후 세 명의 기사와 대화를 이어갔다.
때로는 의논을 하기도 했는데 군대 운영에 대해서였다.
그가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은 사실이고, 그동안 세 명의 기사가 동고동락하며 글리터의 병력들과 함께한 것은 사실이었다.
세인은 그런 현실을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이번 전투를 지켜보고 기사와 병사들의 움직임에 그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어느 정도 독립적인 움직임도 존중해줄 생각이다.
그가 다시 지도를 접었을 때 요란한 북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출전을 요구하는 소리였다.
울려 퍼지는 그 북소리는 넓은 천막 안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몸집이 큰 기사는 존재만으로도 천막 안을 꽉 채우는 느낌이었다.
그는 청동 투구를 쓰고 있었다.
정교하지만 튼튼하게 만들어진 사자머리 투구는 세리스가 기사에게 직접 선사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앉아 있는 기사는 평소에 여러 공을 세워 세리스로부터 많은 훈장도 받았다.
말하자면 여왕의 기사인 셈이다.
발군의 실력을 갖춘 기사는 현재 글리터에서 최고의 기사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도 오랜 시간 움직일 수 있는 그는, 일반적인 갑옷보다 더 두꺼운 철제 갑옷을 걸친 상태였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자 무게에서 해방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두운 텐트 안을 부분적으로 밝히고 있던 천장의 램프는, 일어서는 기사의 투구에 부딪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빛이 고통을 호소하며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자 벙어리 장갑을 연상시키는 철제 건틀릿이 올라와 램프를 잡고 고정했다.
그는 왼손에 두꺼운 건틀릿 끼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무기를 정교하게 휘두르기 위한 철제 장갑을 착용한 상태였다.
사슬과 쇠줄로 만든 오른손의 철제 장갑이 주로 담당하는 무기는 양날 도끼다.
그 도끼도 무게와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가슴 앞에 납작하게 세우면 방패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기사가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가자 분주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랑도 파놓지 않은 주둔지는 무기를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선임들은 소리를 지르며 신참의 엉덩이를 걷어찼고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화살을 한 아름 안고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진창에 뒹구는 청년도 보였다.
평소와 달리 그게 우습지 않은 까닭은 목숨을 건 전투가 목전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오셨어요? 메릴을 끌고 올까요?”
기사의 든든한 모습이 나타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부시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어쩌면 아침 햇빛이 갑옷에 반사된 지라 정말 눈이 부셨는지도 모르겠지만, 기사가 아주 든든한 모습인 건 사실이었다.
시종이 달려와 묻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쪽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기사의 뒤에서 수군거렸다.
“이런 전투에 저분도 참여하시는 건가?”
“다른 기사분들도 다 준비하는 모양이더라고.”
간밤에 이슬비가 내렸는지 붉은 땅은 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 위로 기사의 발자국이 무겁고 깊게 새겨졌다.
망토를 두르지 않은 거구의 기사는 몇 개의 간이 목책을 지나 적의 건물이 잘 보이는 위치에 섰다.
거기에는 질리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질리언은 기사가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고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건너편 진영에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기사전을 하려는 모양이야.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건가? 뒤에 있는 코포니 성에게 여유를 더 주겠다는 거 같아.”
“그렇다면 그 계획은 실패하겠군.”
질리언은 사자 투구 안에서 들려오는 무뚝뚝한 말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직접 나갈 거야?”
“아니면 내가 왜 지금 여기로 나왔겠어?”
그때 멀리에서 기사의 시종이 메릴을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메릴은 아주 커다란 황소였다.
그 거대한 황소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그들이 서 있는 붉은 땅과 매우 잘 어울렸다.
“질리언.”
부름에 질리언이 돌아보자, 청동 사자 투구 안에서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이기면 타이밍에 맞춰서 병사를 전진하게 해.”
고개를 끄덕인 질리언이 두 손을 입에 대고 크게 외쳤다.
“보아라. 글리터 최고의 기사가 나간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질리언을 따라 복창했다.
메릴의 위에 올라가기 전 기사가 소리치는 질리언을 바라보자.
질리언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저렇게 밝아 보여도 잭의 죽음 때문에 속이 얼마나 썩어들어갔는지 알고 있는 기사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았다.
사자 투구를 쓴 기사는 글리터의 환호를 받으며 메릴을 몰았다.
간밤에 내린 비 탓인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메릴은 땅을 박차며 앞으로 쭉쭉 나갔다.
속도감이 느껴지는 유쾌한 움직임이었다.
기사가 메릴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킨 것은 드레퓨스의 기사가 눈앞에 보였을 때였다.
상대는 빼빼 마른 남자였는데 매부리코에 광대뼈가 돌출된 신경질적인 얼굴이었다.
문득 그의 눈가에 번져있는 검은 부분을 보며 그게 절망감 때문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걸 묻기도 전에 드레퓨스의 기사가 선수를 친다.
그것도 자기소개를 생략한 모욕적인 언사로 말이다.
“누군가 했더니 글리터의 암캐로군. 유명한 당신이 냅다 뛰어나올 줄 몰랐어. 의외야.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말이야.”
탁탁.
검지가 투구에 닿아 거친 소리를 냈다.
욕부터 해대는 상대의 모습에 무심코 볼을 긁으려던 글리터의 기사는 자신이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의식했다.
그래서 천천히 사자 투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사각 턱을 가진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전히 주근깨가 가득한 힐다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저는 예의를 지키려고 했어요. 당신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건 방금 철회되었습니다. 저는 죽어가는 당신의 눈을 똑똑히 볼 겁니다.”
그리고서 힐다는 메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닥에다가 침을 탁하고 뱉었다.
그게 신호였는지 매부리코의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제 딴에는 욕설로 상대를 경동시킨 후 이렇게 빈틈을 노려볼 생각인 것 같았다.
서로의 실력이 비등하다면 충분히 먹힐 수도 있는 생각이다.
결과적으로 매부리코의 시도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거대한 도끼 대신 안장에서 육각형의 메이스를 빼낸 힐다는 손을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불똥이 튀기고 매부리코의 검 하나가 허공에 날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날아간 검이 땅에 푹 하고 꽂혔을 때, 힐다와 사내는 서너 번 충돌을 한 상태였다.
“꽃꽂이할 때나 쓰는 얌전한 말버릇은 네가 섬기는 암캐 여왕이 가르쳐준 거냐? 이 상황에서도 점잖은 척 위선을 떠는구나.”
드레퓨스와 글리터의 진영에서 응원이 흘러나오는 상황에서도 매부리코의 남자와 힐다는 서로를 노려보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다시 공수를 주고받았다.
남자는 힐다의 심기를 흔들기 위해 끊임없이 폭언을 내뱉었다.
거기에 대한 힐다의 대답은 일정한 호흡뿐이었다.
쇠뭉치와 다름없는 메이스는 붕붕 소리를 내며 빛으로 화해 허공을 날아다녔다.
거기에 제대로 검이 부딪히기만 하면 사내의 패배였다.
공격을 흘려낸다는 것도 상대의 힘을 어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때 성립하는 이야기다.
지금처럼 쇳덩어리를 짚단처럼 휘두르는데 튕겨 내거나 흘려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힐다는 중갑옷을 걸친 상태였다.
얼굴을 노출한 것도 일부러 그쪽으로 공격을 유도해 빨리 제압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사내는 그 노림수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드워프들이 만든 갑옷은 이음새조차 완벽했다.
도저히 틈을 포착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문 매부리코의 사내가 힐다의 몸에 붙어 발작적으로 검을 떨쳐냈다.
어찌나 혼신의 힘을 다했는지 찔러가는 검날에 공기가 마찰되어 타는 냄새가 날 정도였다.
생과 사를 가르는 절호의 공격인 것이다.
힐다는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뾰족한 검 끝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바람 소리를 내는 검이 볼 옆을 스쳐 지나갔다.
힐다의 시선은 이제 매부리코 남자의 얼굴을 향해 곤두서있었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 힐다의 얼굴에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라 남자의 얼굴이 뭉개졌다.
메이스에 맞아 볼부터 시작된 충격이 코와 눈, 얼굴 전체로 번져 나가는 것을 보며 힐다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남자는 그 순간 눈알이 빠지는 극통을 느꼈을 것이나, 그것을 호소할 사이도 없이 옆으로 누워 버렸다.
힐다는 바둥거리는 남자의 가슴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제 승자의 입장에서 중얼거렸다.
“내가 개라고 치면 이제 당신은 개밥이 되었네요.”
그리고 다시 메이스를 휘둘렀다.
아까처럼 강한 힘은 아니지만, 충분히 상대의 목숨을 끊어 놓을 정도는 되었다.
퍽! 퍽!
땅이 붉어서 좋은 점은 피가 많이 흘러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작살낸 남자에게서 신경을 끄고 얼굴을 들어 올릴 때, 수비대 쪽에서 다시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말에 탄 서너 명의 기사가 힐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기세며, 창을 마신에서 수평으로 올리고 있는 것을 보아.
땅에 서 있는 그녀에게 그대로 랜스 차징을 할 생각인가 보다.
동시에 힐다의 등 쪽에서 큰 호응이 일어났다.
아까 그녀가 질리언에게 언질을 줬던 대로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 비겁한 놈들에게서 아군을 구해라!”
전제적으로는 승리를 거둔 힐다를 구하기 위해 군대가 전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에 따라 기세 좋게 달려오던 드레퓨스의 기사들은 잠시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비대의 기사들에게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지금 힐다는 황소에게서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상태였다.
기사들이 그대로 창을 들고 그녀에게 들이박으면, 제까짓 것이 그래도 사람인데 안 죽고 배길까 싶었다.
그러면 글리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것이다.
비겁함이고 뭐고 그렇게 해서라도 공격을 감행해야 하는 게 지금 드레퓨스 수비대의 처지였다.
하지만 글리터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을 풀어 보였다.
그 증거로 습격자들의 말발굽 소리는 글리터의 군대가 내딛는 땅 울림에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지금 저 여기사를 죽일 수 있다 쳐도 그 후에는?’
수비대는 당연히 빗장을 걸어 잠글 것이다.
병력이 몰려오는데 기사들이 귀환하려고 한다 해서 문을 열어둘 리가 만무하다.
그건 아군 몇 명 구하자고 적에게 문을 개방하는 행위였다.
돌아가려면 지금이어야만 했다.
그것마저도 타이밍이 아주 아슬아슬하다.
힐다를 바라보는 드레퓨스 기사들의 눈에 갈등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