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 전쟁 속에서 (3)
검은 코트를 입은 세인은 천천히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양손으로 문을 밀치고 바깥으로 나가니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가 그의 얼굴을 반겨주었다.
글리터의 성이 있는 지역은 높은 건물들이 너무 많아 돔을 씌울 수 없었다.
그래서 성의 위쪽은 추운 대신 하늘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잠시 하늘을 바라본 그는 지금 보는 하늘이 초록색으로 변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의지를 굳혔다.
그는 이제 난간에 손을 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는 사람들의 바다로 가득했는데, 수많은 병사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물론 드워프나 엘프들도 보였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종족은 더럽고 어두운 곳에서 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오크밖에 없었다.
지금은 작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세인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중 누군가는 세인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세리스가 세운 총사령관 정도로만 알고 있을 터였다.
어느 쪽이든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번 전쟁은 그가 주도할 것이라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들 앞에 나섰을 리가 없었다.
“나는 드레퓨스가 선한지 악한 지 모른다.”
굳이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세인은 그 말로 운을 떼었다.
“누가 먼저 전쟁 의지를 품었고, 누가 시작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늘 난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의무가 있는 자는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글리터를 떠나는 자는 선과 악을 이곳에 남겨둬라. 도덕과 양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정의의 편에 섰기 때문에 오늘날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의 정의를 확신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인의 발아래는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가 박제된 듯 가라앉아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자들아. 나를 보아라. 너희는 싸우지 못하는 자의 의무를 짊어졌다. 이곳을 벗어나면 나의 이름을 빌려 죽이고 또 죽여라. 나는 진심으로 너희들이 살해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곳을 떠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나든 망설이지 말고 살해를 하여라. 글리터의 눈을 빌려서 이렇게 너희를 바라보며, 다시 글리터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적을 죽여라.”
세인이 한 손을 들자 아래에서 물결이 일어났다.
사람들의 손이 들어 올려지는 물결이었다.
그 물결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세인이 밑에서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나갔다.
글리터는 전쟁 안에 있었다.
그 안에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 사랑이 우선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안간힘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원한 것은 세인의 입에서 나오는 사기 진작의 말이었겠지만, 세인이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승리밖에 없었다.
당연히 글리터의 성문을 나서면 수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의 손은 피로 물들 것이었다.
문명의 끔찍한 민낯이지만 똑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눈을 부릅뜨고 살해당하는 상대를 바라보며 두 손으로 전력을 다해 목을 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이쪽이 살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너희들이 지킬 땅은 어디지?”
세인의 목소리에 아래쪽에서 호응이 일어났다.
그것은 처음에는 낮은 웅성거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손을 든 사람들 사이로 점점 번져나가 끝내는 모두가 되었다.
머릿속에서, 혹은 입 밖으로.
글리터라는 소리가 안개처럼 낮게 깔릴 때, 세인이 입을 열었다.
“손에 피를 묻힐 자들치고는 목소리가 작다.”
그의 냉랭한 말에 좀 더 많은 사람이 글리터를 외쳤다.
많은 사람이 한곳에 밀집해 있다는 것이 원인이 된 것일까?
연호하는 관중들이 점점 늘어났다.
군중의 연호는 가파르게 높아졌고, 동시에 넓어졌다.
그 외침은 곧 건물과 땅을 울리며 보이는 모든 것을 잡아 흔들었다.
병사든, 병사가 아니든 사람들은 뭔가에 취한 듯 글리터를 외쳐댔다.
전염병처럼 번져 나가며 사람들의 가슴을 태우는 그 열기는, 어떻게 포장을 해도 광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때론 그런 광기마저 인간에게 있어 공포보다는 나을 때가 있었다.
“사람을 얼어붙게 하지 않고 행동하게 하니까.”
세인의 작은 중얼거림 아래에서 글리터를 부르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사람들의 함성과 흔드는 손들이 세인의 귀와 눈을 어지럽혔다.
“글리터! 글리터! 글리터!”
“전쟁이 끝나고 티끌 같은 영광이라도 있다면 그건 드레퓨스에게 양보하자. 그러나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피의 종결 후엔 우리만이 서 있을 것이다. 그 끝을 위해 죽이고 또 죽여라.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 나의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게 너희들의 의무다.”
글리터를 부르짖는 열광의 손이 세인을 향해 뻗어졌다.
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세인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글리터의 깃발과 사람들의 외침에 뜨거운 바람이 휘날렸다.
세인은 그 열기를 뒤로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앞에는 언제 왔는지 세리스가 서 있었다.
세인의 연설을 들은 세리스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방금 세인이 한 말들은 정상인이 뱉어낼 말은 아니었다.
이런 때에는 무조건 상대가 악이라고 규정해야만 했다.
싸워야 하는 이유로서 저쪽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고, 결과적으로는 악을 징벌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게 사기 진전의 정석이다.
그녀는 아까 세인이 한 말에서 짙은 폭력성을 읽었다.
심지어 앞으로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 하는지 약간 두려워질 정도였다.
만약 세리스가 글리터와 관계없는 여자였고 세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세인에게 호된 질책을 던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세인의 재미없는 농담에 웃어주는 사람일 따름이었다.
그녀가 진짜 객관적인 입장과 선을 고집했다면 지금처럼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그래? 개망나니를 보는 시선이네.”
세리스는 그래도 솔직한 느낌을 말했다.
객관적이지 않은 건 아닌 거고, 할 말은 하고 싶었다.
“재미없는 농담이에요.”
가까이 다가온 세인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무겁지 않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세리스. 나를 사랑하지?”
“방금 말은 재미도 없는 데다가 멍청함까지 추가한 최악의 질문 같아요. 그게 지금 여기 있는 저에게 할 말이에요? 당신의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
“내가 당신에게 미친 짓을 시킨다면 어쩔 거야?”
세리스는 잠시 질문을 던지는 세인의 의도를 몰라 망설였다.
그래서 그의 눈을 응시했지만, 끝까지 질문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당신의 뜻대로 하겠죠.”
“당신에게는 항상 기다리는 일만 시키는 것 같아.”
세인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집무실 중 어딘가에 내 선물이 있어.”
세리스는 그런 세인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짐하듯이 말했다.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저는 싸울 수 있어요. 제 실력은 아시죠? 하나도 녹슬지 않았어요. 오히려 발전했다고요. 그러니 당신의 곁에 제가 있게 해줘요.”
세인은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여기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멜라니와 함께 후방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아까의 말을 한 건가?’
세리스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안심하는 심정이 되었다.
아까의 의미심장한 말은 그런 뜻이었구나.
남으라고 종용하기 위해 한 말일 것이다.
세인은 그녀에게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빈센트를 부탁해. 때가 되면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거야. 그전까지는 그도 모르고 있는 게 낫겠지.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야 하니까.”
세리스는 세인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이 성을 나오자 출정식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출발이었다.
글리터에 살던 사람들도 놀랄 만큼,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어디에서 숨어 있었는지 병사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떠나고 있는데도 글리터에 남겨진 병력이 많다는 것이었다.
드워프들의 힘은 물론이고, 번우드 지역의 군대는 합류 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거대한 군대가 움직이는 앞쪽에는 합류할 북부 연방의 병력도 예상되었다.
훈련을 잘 받은 글리터의 군대는 무장 상태도 아주 좋았다.
머리 숫자만 채우기 위해 끌고 나온 병력이 아님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오와 열을 맞춘 행군이 시작되었고 기사들은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점검이나 보고를 해치웠다.
위생 상태나 보급품의 질도 매우 좋았고 기세도 대단했다.
병사들이 만든 물결이 차가운 북부를 가득 뒤덮자.
인간의 바다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눈을 녹일 정도였다.
동시에 그들의 발 울림이 사방에 지진을 일으키는 듯했다.
이런 움직임에 가장 빨리 반응을 보인 것은 북부 연방이었다.
트리엔 같이 글리터에 친화적인 나라들은 이제 글리터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하며 유대감과 신용도 쌓았다.
하지만 그에 비해 철저히 이익만 노리고 글리터에 붙은 국가들은, 몬스터에 대한 경멸의 시선을 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드레퓨스와 글리터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몇몇 나라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글리터 군의 규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되면 가능한 뜸을 들이다가, 유리한 쪽에 붙어먹으려 했던 계획도 조금 흔들린다.
글리터 군대의 규모에 대해 보고를 받은 왕들은 장고에 들어갔다.
“이제라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까?”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지금 붙는다고 해도 트리엔이나 에릭센 같은 왕을 추월할 수 없는데 뭘. 적극적으로 붙으려면 진작에 붙었어야지. 어차피 그들의 이득을 뛰어넘지 못해.”
결국 머릿수만 채운 농민병이나 붙여주고 물자나 조금 대주다가 끝낼 생각을 가졌다.
그러다가 유리한 쪽이 보이면 확실히 선을 대고 지원할 작정이었다.
십 년을 훌쩍 넘긴 연합이라고 해도 각 나라가 한 몸처럼 구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 역사 깊은 연합체인 남부도 뜻이 일치하기 힘든데, 북부가 하나로 똘똘 뭉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런 왕들의 태도는 세리스라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세리스는 상식적으로 주변을 다스렸다.
최고 자리에 앉은 자가 가급적이면 지켜야 하는 것이 도덕과 중용이다.
그리고 상식이었다.
왕의 자리는 절대적인 기준선이나 마찬가지다.
순간의 분노나 이익 때문에 법도를 어긋난 행동을 보이면 주변의 동요로 이어지고, 품위의 상실을 낳는다.
장사치처럼 얕잡아 보이면 위신이 추락한 왕에게 대중이 등을 돌리며, 결국 훗날 더 큰 것을 잃게 된다.
왕의 힘은 그를 떠받드는 다수에게서 파생되기 때문이다.
그런 다수의 마음을 잃으면 자연스럽게 지지기반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현명한 지배자는 분노조차 주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꾸며낸다.
세인처럼 특수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어차피 연합인데, 몇 명의 국가가 이익을 좇으며 움직였다고 해도 글리터 쪽에서는 섭섭함만을 표시하고 지나갈 일이다.
대놓고 얼굴을 붉힐 수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 글리터가 외교적인 협상과 이의제기로 이득을 얻어낸다면 모를까.
어차피 한 식구라는 틀이니까 큰 후환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미적거리는 것을 어지간히 티 내지 않으면 말이다.
대놓고 등만 돌리지 않으면 세리스에게 규탄 받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 딴생각을 하는 왕들은, 그걸 염두에 두고 이익에 부합된 행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도 상식적인 태도를 가진 세리스에게나 통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말 위에 있던 세인은 하늘 속에서 바쁘게 날아다니는 전서구들을 보았다.
멀리 능선 너머에서 이쪽 군대의 규모를 자국에 알리기 위한 북부 연합 국가들의 행동일 것이다.
그는 그걸 보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동하는 동안 세인은 기본적인 기동 훈련조차 시키지 않았다.
행군하는 모습만 계속 관찰했다.
시간이 흘러 글리터의 군대는 헌터 타워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며칠 앞당긴 속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머독이 달려 나왔다.
그동안 위쪽을 예의주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머독은 말 위에 앉아있는 세인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돌아오셨다는 말은 들었었습니다. 군대의 위세가 대단하군요.”
세인은 그에게 짧게 며칠만 보내고 출발하겠다고 알렸다.
길게 머물러 보았자 일주일은 넘지 않을 것이란 말이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은 대군이 머물기엔 찰나와도 같은 짧은 시간이었다.
헌터들을 잔뜩 무장시키고 있던 머독은 그 기간을 듣고 의외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헌터들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머독은 당연히 세인이 헌터들을 이용할 줄 알았다.
글리터는 부자니까 헌터들의 고용 비용이 부담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인이 원한다면 머독은 헌터들을 어르고 달래서 부담을 줄여줄 것이다.
레인저나 마찬가지인 헌터들이 합류하게 된다면 정찰 및 지원 임무에서 활동 폭이 엄청나게 넓어질 수 있음이다.
하지만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재 둘이 서 있는 곳은 이야기를 나누기 적합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머독은 금방 그걸 눈치챘다.
머독과 세인은 장벽 중에서 유난히 높게 솟아오른 곳으로 이동했다.
때는 해가 진 직후였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어둠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덧 밥 짓는 연기가 멈추고 불빛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구석진 곳이었지만 전망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헌터 타워의 넓은 내부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래서 머독이 그를 이곳으로 안내했나 보다.
그리고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채기 좋았기에, 밀담을 나누기도 좋았다.
세인은 머독이 내민 포도주잔을 들어 옆에 놓았다.
과거로 갔을 때는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지금 시대로 돌아온 이후로는 술 한 모금도 주의하고 있는 그였다.
술은 긴장을 풀게 하고 사람을 느긋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었다.
세인은 항상 그것을 경계했다.
“저는 분명 헌터들을 동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준비를 시켜 왔습니다. 글리터로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준비를 더 하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닌 거 같으니 의외인데요.”
“헌터들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냐. 하지만 그들을 당장 전쟁터에서 쓰고 싶진 않아. 급할 건 없거든.”
“무슨 생각입니까?”
“후방에 힘을 비축해 뒀어. 거침없이 전진해야 하는데 배후가 발목을 잡으면 곤란하거든. 이쪽이 곤란할 때 도움을 주는 역할이어야지 오히려 회군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면 어이가 없는 일이지. 그렇게까지 생각해서 기껏 군대를 남겨뒀는데, 정작 주변 정리가 제대로 안 되어선 곤란하겠지. 허를 찔리고 싶지 않아.”
이제 알겠다는 듯, 머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몇 번 우물우물하다가 목으로 꿀꺽 넘긴 그가 세인의 속내를 알아맞혔다.
“박쥐 같은 나라들을 이야기하는 거군요.”
야경을 등진 세인이 머독을 바라보며 떠보듯 말했다.
“그들은 좋은 사람인 거겠지. 이리저리 재고 있을 뿐 적어도 대놓고 배신하는 종자들은 아니야. 물론 나중에 배신할 수는 있어도 아직 배신한 건 아니니까 말이야. 좋게 말하면 현명한 거지. 꼭 의리대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말이지. 어때? 무리가 많이 가는 일일 텐데 응해줄 용의가 있나?”
그러자 세인의 말장난 앞에서 머독이 씨익 웃었다.
“왕 앞에 선 머독이 아니라 과거의 머독으로서 말을 해도 될까요?”
“지금 여기에는 우리 둘만 있잖아.”
“당신이 오래전 영주가 된다고 하셨을 때, 속으로 걱정이 많았었습니다. 그 후로도 풍파가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진짜 왕이 되셨군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왕 말입니다. 나라가 위험할 때 내빼다가 나중에 빈자리에 들어와 앉은 거짓 왕들 말고요. 자격이 없는 자들이 왕좌에 앉았으니 전쟁이 일어나도 저렇게 이상한 짓들을 하는 거겠죠.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으니 현실 파악을 못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각오조차 보이지 못하고 반대로 가벼운 움직임을 보이는 저들을 보면 한심합니다. 영면하신 선대가 알면 참으로 어이없어할 일입니다.”
지금 머독의 대답은 승낙과 마찬가지였다.
머독은 거기에 질문을 덧붙였다.
“어떤 전쟁을 구상하고 계십니까?”
“전에 방심한 적이 있었어. 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끝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솔직히 말해 여유를 부리고 싶었어. 괴물들을 고통스럽게 괴롭히다가 죽여버리고 싶었지. 어떻게 하면 적의 고통을 즐길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 당시에는 고작 그게 고민이었어. 하지만 결국 적들은 그런 나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였지.”
세인은 자신의 와인 잔을 머독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마저 마시겠냐는 의미였다.
머독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웃으며 그 잔을 받아들였다.
훗날 세인이 권한 술을 마셨다는 게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필사적이었어. 그 필사의 각오 안에는 자신들의 안부조차 배제하는 모습이 들어 있었지. 그래서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허를 찔린 거야.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대머리인 괴물은 날 비웃으며 죽었어.”
“그렇군요.”
“싸움이란 건 그런 거지. 당신의 밑에서 훈련을 받으며 레인저로서 배웠던 경험이나 전술도 필사적인 마음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어떻게든 놈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 녀석들을 세상에서 없애고 싶다. 이 증오를 위해서, 놈들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게 필요한 거야.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도 그렇게 필사적이어야 해. 우리의 적보다 말이지. 그렇지 않는다면 다시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패배와 비웃음뿐이겠지.”
내용에 비해 세인의 어조는 평온했다.
오히려 방금 술을 마신 머독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적어도 놈들보다 더욱 간절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각오가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심으로 상대를 죽이고 싶다고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들보다 더 악랄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면 난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운명이 그에 맞는 나를 만들었고 선택했어.”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머독의 말에 세인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가 당신을 선택한 게 아니라, 당신이 이 자리를 선택한 겁니다. 당신의 각오가 이 자리를 만들었고 이 자리에 맞는 당신을 다듬었습니다.”
머독은 세인에게 웃어 보였다.
신분의 격차를 떠나, 그의 추억 속에 있는 세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하여 말이다.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나는 지금 당신이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혹한 전쟁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