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54화 (254/307)

# 254

& 전쟁 속에서 (1)

갑자기 몬스터들이 나타나고 공격이 시작되자 남부는 혼란으로 들끓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사태를 절망적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상황을 낙관해서가 아니라 잘 몰라서였다.

남부의 땅은 아주 넓었고 공격을 받은 곳은 전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더구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몬스터는 오래전 대패해 증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마당이다.

그런데 이제 와 어디선가 나타난 몬스터의 침공이라니.

현실감이 없었다.

차라리 몬스터들이 여전히 주변에 있었다면 이번 일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게 사실이냐?’라고 묻는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이 남부 전체에 퍼지려면 더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까지가 일반인들의 수준이다.

그에 비해 지배계층의 견해는 아주 달랐다.

그들은 많은 양의 정보를 빨리 받아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보에 예민한 상인들에게 아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며, 나라 자체에서 별도의 정보 수집 기구도 가지고 있었다.

각 나라의 지배계층은 지속적인 보고를 통해 커다란 문제에 직면했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다시 왕과 고위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회의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그들은 강 너머 불구경하듯 여유롭게 회의를 열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당연히 전의 회의와 지금 회의는 분위기가 달랐다.

둥글고 넓은 테이블 위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갑자기 바이테스에서 엉뚱한 주장을 내놓았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의 현재 상황을 북부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동맹 의사를 타진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회의장 안, 황제의 대변인은 종이에 적힌 글을 담담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동안 회의장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정적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침묵이 동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이 바이테스의 주장에 생뚱맞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이테스는 북부와의 동맹 체결안을 염두에 두는 것 자체를 반대했었다.

그것도 쌍수를 들고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 다른 방향의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바이테스의 황제가 세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중 한 사람은 용감히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번 일로 인해 북부는 신경 쓸 여지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북부와 협조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는 지금 전쟁 중입니다. 저희도 예기치 않게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고요. 이 마당에 중부를 가로지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곳과 손을 잡자고요? 글리터에 대한 저희 입장은 이미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 계신 모두의 뜻을 모아서요.”

일어선 남자는 그 주장을 이끌었던 게 바이테스 아니었냐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니라면 그렇게 따져 묻는 발언은 멍청한 짓이었다.

대신 남자는 바이테스의 위상을 생각해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헛기침 후의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에 다들 적극 동감이었다.

“우리는 북부를 지원해줄 수가 없습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지원하자는 소리가 아니라 글리터가 속한 북부 연방과 손을 잡고 함께 이 복합적인 난관을 헤쳐나가자는 소리입니다. 몬스터에 대한 것이니, 인간으로서 하나가 되자고 권유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저쪽에서 제의를 수락할 가능성이 있죠.”

바이테스의 대변인 앞에서 일어나 있는 남자는 최대한 말을 순화해서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저절로 말이 곱지 않게 나가는 걸 제어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각국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오간다는 거 자체가 너무 무가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이테스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만 해도 힘든 시국인데, 드레퓨스라는 호랑이까지 끼어들게 해서 판을 키우자고요? 그런 위험을 감수하자고요? 우리가 왜 그래야 합니까? 각국의 정상들께서 여기에 모인 까닭은, 각자의 소중한 시간을 모아서라도 눈앞의 불행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이상한 주장을 내놓아서 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하십니까? 글리터는 먼 나라입니다.”

“지나친 소리! 너무 예의가 없군요! 저는 인간과 몬스터의 싸움을 이야기했습니다. 누가 압니까? 궁극적으로는 드레퓨스도 광기를 멈추고 몬스터 토벌에 동참할지?”

지금 바이테스의 대변인도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반이 보여줬던 광기는 철저히 인간 이하의 수준이었다.

그 미친 집단이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느 날 개과천선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지금도 몬스터들이 마을을 점령하고 불태우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매일 그들의 진지가 늘어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서 왜 북부가 나옵니까? 우리는 지금 코앞의 생존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단 말입니다. 여기에서 세워질 계획을 기다리는 영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임기응변으로 재난 상황에 대처하며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어요. 한참 후 그들에게 가서 뭐라고 말할 겁니까? 고작 여기에서 북부와 손을 잡자는 이야기나 하려고요? 황금 같은 이 시간에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텐데.”

“말조심하시오!”

각국의 관계자들이 일어나서 호통을 치는 바람에 회의장이 떠들썩해졌다.

넓은 공간은 이제 소리치는 소리와 진정시키기 위해서 달래는 소리로 들끓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4층 높이의 공간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마치 딴 세상을 구경하듯 비스듬히 누워있는 자들은 바로 왕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러하듯, 푹신하고 호화로운 자리에서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드레퓨스와 몇 개의 국가들은 북부의 힘을 잘 알았다.

그리고 드레퓨스와 몬스터 군단이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도 결론으로 굳힌 지 오래였다.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몬스터와 드레퓨스를 아예 한 덩어리로 보고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바이테스의 대변인이 한 드레퓨스 운운은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 바이테스의 주장은 황당한 제안일 것이었다.

그러나 세인의 저력을 아는 자들은 충분히 북부와의 연계를 마음에 둘만 하다.

“으음.”

한 왕은 소란통이 된 회의장을 보고, 턱수염을 쓰다듬는 동시에 앓는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절로 생각이 깊어졌기 때문이리라.

북쪽이 드레퓨스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남부에게 있어 그건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이쪽의 병력과 자원을 소모해가면서까지 그쪽과 손을 잡을 의사는 없었다.

그게 그 당시에 내린 냉정한 결론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이제는 숫자조차 정확히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홍수에 범람하는 강물처럼 무섭게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왕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생각은 적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자들의 패배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적어도 자국의 인재가 죽었다는 소식을 소홀히 할 왕은 없다고 봐도 좋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체감하는 현실의 온도가 달랐다.

그러므로 대비를 해야 할 텐데 해결책에 대해서 이견이 있었다.

그중에서 세인을 염두에 둔 사람은 체면을 구겨서라도 상황을 진전시키려고 굴었다.

바이테스의 황제가 갑자기 연단에 나온 것이 그 맥락으로 해석된다.

새우처럼 등이 굽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회의장은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치렁치렁한 백발을 가진 노인은 몸이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걷는 것조차 시종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발언대까지 걸어가 자세를 고쳐 잡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누구도 그를 독촉하지 못했다.

그게 바로 그의 위치였다.

“우리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각자의 뜻을 존중하지만 바이테스는 북부와의 연대가 이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글리터에게 특사를 보낼 생각입니다. 거리는 멀어도 남과 북이 연대하여 공공의 적과 싸운다면 좋은 결과를 얻어낼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의 대리자로 나섰던 웅변가와 철학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바이테스의 황제는 천천히 물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재개했다.

“저는 분명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 뜻을 같이해달라고 까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런 바이테스의 뜻을 존중해 주십시오. 우리의 해결책을 존중해 준다면 타국의 해결책에도 기꺼이 존중하고 동참하겠습니다.”

지금 황제의 말에는 억지가 있었다.

그가 북부와 손을 잡자고 한다면 남부 전체가 거기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남부의 나라들에서 바이테스만 독단적으로 행동한다는 게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바이테스와 남부 연합이 따로 일수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이렇게 직접 나와 의견을 내는데 누가 거기에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좌중들은 황제의 무리한 의견에 반대나 찬성을 표한다기보다는 대체 왜 그렇게 하면서까지 북부를 고집하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바이테스의 황제는 세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인에 대해 알고 있는 왕이 있다면 마음속으로 동의하겠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출할 수 없었다.

지금껏 그의 존재는 남부의 현실 속에서 필요하지 않았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존재였고 그의 정체가 주목받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힘의 구도를 의식한 사람들이 멍청한 짓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런 이유로 숨겨왔던 것인데 지금 공개를 해버리면,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당신들만 가지고 있었냐고 따져 물으며 또 아수라장이 된다.

많은 사람은 가타부타 말없이 천천히 연단을 내려가는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교황이 나와서 회의를 진행했다.

언제나 소란을 잠재우고 일을 빨리 진행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바이테스의 뜻을 존중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지금 뭐라도 시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이테스의 행동을 응원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미흡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당장 꺼내 들 수 있는 해결책을 생각해 봅시다.”

*  *  *

드레퓨스는 여전히 많은 병력을 국경에 첩첩이 쌓아놓으면서 수비에 집중했다.

그 방어를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로 보였다.

물론 국경 근처에서는 국지전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돌발적으로 성문을 빠져나온 부대들이 북부로 깊이 침투하기 위해 전진하기도 했다.

그 행위는 어떤 성과를 노리고 행해지는 공격이 아니라, 무의미한 전투 그 자체였다.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그 행동이 몇 차례 반복되자 북부는 드레퓨스의 뜻을 확실히 파악했다.

그들은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필시 남부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난하진 않으리라.

남부의 초록빛 하늘은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 재앙이 제대로 날뛰면 드레퓨스는 폭풍의 배후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남부가 점령당하면 반대로 든든한 뒷배를 가진 드레퓨스의 진격이 예상되었다.

다른 나라들도 그렇겠지만 드레퓨스의 왕궁에서도 매일 올라오는 보고가 산처럼 쌓이고 있었다.

그중 쓸만한 정보를 추려내는 것도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서 해야 할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선별 작업이 의미가 없는 게, 정작 그것을 보고 판단을 내려야 할 바이칼이 단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연병장만큼이나 넓은 침실 한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는 소음을 죽이지 않은 채 바이칼이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이어졌다.

어두컴컴한 침실을 밝히는 램프를 손에 들고 온 자는 바로 가미긴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곯아떨어진 바이칼을 내려다보았다.

등을 옆으로 돌리고 잠든 바이칼은 눈을 감은 채로 드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귀청이 떨어질 정도다.

“….”

그러나 가미긴은 손으로 귀를 막는 대신 램프를 들어 바이칼의 얼굴에 가져다 대어 보았다.

환한 불빛이 볼에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칼은 잠이 깨지 않았다.

초지일관하게 코를 고는 바이칼의 볼 옆으로 램프가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불을 담고 있어 매우 뜨거운 램프는 볼록 유리였다.

그 표면에 닿았다간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램프의 열기가 느껴질 만도 한데 바이칼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 바이칼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가미긴이다.

그러던 가미긴은 갑자기 램프를 위로 휙 하고 들어 올렸다.

바이칼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잠꼬대하느라 머리를 돌린 것인데 하마터면 화상을 입을 뻔했다.

“완전히 잠들었군.”

그렇게 중얼거린 가미긴은, 잠결에 입을 쩝쩝 다시며 볼을 긁는 바이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등을 돌렸다.

가미긴이 점점 멀어지고 침실의 문이 닫혔을 때, 거짓말처럼 바이칼의 코 고는 소리도 멈췄다.

바이칼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침실을 떠난 가미긴이 향한 곳은 성의 지하였다.

푹신한 융단이 깔린 계단은 끝도 없이 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가미긴은 그 계단을 참을성 있게 밟아 내려갔다.

한참이 지나 그가 도착한 곳은 아주 커다란 방이었다.

그 방에는 끔찍하게도 사람만 한 거미로 가득 차 있었다.

지하답게 서늘하다 못해 추운 공간 안에서 잠들어 있던 거미들은 가미긴이 오자 반응했다.

커다란 외눈을 뜬 것이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간 가미긴은 반응을 보이는 거미들 속에서, ‘저것 중 한 마리에 루시드의 감각이 연결되어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답은 알 수 없었다.

이 거미들의 정체는 이노센트들과 연결된 통신체였다.

“가미긴. 네 계획대로 북부를 공략 중이다. 지금까지는 매우 순조로운 상태다. 거기 인간들은 정신을 못 차리더군. 방심에 빠져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녀석들도 부지기수야. 하지만.”

거미를 빌어 말하는 이노센트 하나가 잠시 뜸을 들였다.

가미긴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해서였다.

“네 계획에 불만을 품은 동료들도 많다. 우리 중에서 북부를 정리하고 남부를 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남쪽의 생명체들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허약한 놈들이지만 숫자가 너무 많다. 너무 넓은 곳에 골고루 분포 되어 있다.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니야. 차라리 상대적으로 적은 개체들이 살고 있는 북쪽을 정벌하고, 아래쪽으로 내려왔다면 좋았으리라 본다.”

그러자 가미긴이 냉큼 반박했다.

“세상은 아주 넓지. 그 안에서 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디서 어떤 놈이 튀어나올지 몰라. 그래도 주적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지. 전쟁하는데 주적을 모른다면 그것도 문제이지 않나? 세계수는 힘을 잃었다. 자세한 원인은 모르지만, 그녀는 죽은 것이 확실해. 그렇다면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적은 누구일까? 어디에 있을까? 그 방향을 알고 뒤를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계획을 짜야 하지. 그런 의미에서 남부의 공략은 꼭 필요했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풍요로운 곡창지대도 많지.”

“우리와 곡창지대가 무슨 상관이지?”

다른 거미가 투덜거리자 가마긴이 비웃음을 날렸다.

그 웃음을 다른 거미들도 똑똑히 보았다.

“곡창지대는 인간들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의 주적은 어디에 있을까? 누가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까? 그 방향은 북쪽이다. 결전은 북쪽에서 일어날 거야. 어려운 싸움을 먼저 하는 경우는 없어. 남쪽이 뒤를 찌르는 칼이 되면 곤란하다. 남쪽을 제압하고 거기를 식량 창고로 만들면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줄 수 있다.”

가미긴은 거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건 반이 오랜 시간 동안 세인을 연구한 자료였다.

문서를 흔들어 보인 그는 그것을 바닥에 던졌다.

종이들이 바닥 위에 뿌려진 가운데 거미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종이를 눈에 담았다.

어떤 거미는 여덟 개의 다리 중 하나를 들어 콕 하고 종이를 찍었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 올려 다른 거미와 나누어 보았다.

그것을 코웃음 치듯 바라보던 가미긴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적은 세인이라는 놈이다. 물론 그놈은 루시드 님을 만나면 필패다. 죽을 수밖에 없어.”

루시드의 권능은 상대가 누구든 일대일의 상황을 만들고 상대보다 반 배 정도 강해진다.

그러니 아무리 세인이라고 해도 승산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가미긴.”

누군가는 닥치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생명체를 죽이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또 누군가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피의 진흙탕을 보고 싶어 하는 자도 있을 수 있었다.

루시드의 생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아주 폭력적이고 불투명하며 잔인한 집단이 현세에 강림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집단에 구심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통제가 되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긴다. 이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우세해. 하지만 그저 이기는 것만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압도적으로 이겨야만 해.”

가미긴은 거미들 앞에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데 그 음성에는 기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세상의 구성원을 노예나 그 이하로 만들고 마음껏 하려면 적당한 마음가짐 가지고는 안 된다. 모든 걸 가지기 위해서는 그전에 이쪽도 필사적이어야만 해. 우리는 기필코 이긴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어야 해.”

“어둠의 현자. 얼굴이 없는 뱀. 우리도 그 정도는 안다.”

이노센트들은 왜 가미긴을 얼굴이 없는 뱀이라고 말하는 걸까?

지금 이렇게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데 말이다.

거미를 통한 이노센트들의 말에 가미긴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을 얻고 싶으면 최대한 많이 걸어야 하는 법이야. 나는 정말 너희들이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물론 거기에 대한 이노센트들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대답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미쳐 있었으니까.

*  *  *

다음 날 아침.

바이칼은 찾아온 가미긴을 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왜인지 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럴 일이 있었다. 바이칼. 헤카테 왕이라고 아나?”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나이프로 고기를 썰었다.

잘 익은 스테이크는 날이 선 나이프에 의해 금방 두 덩이로 갈라졌다.

“전혀 모르겠어.”

식탁에 마주 앉은 가미긴이 피식하고 웃었다.

오늘의 그는 확실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말까지 해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럴 거야. 역사 속에서 사라진 왕이니까 말이야. 너무 오래전에 기록된 인물이라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아. 아니 못 찾을 거야. 그런 기록은 삭아서 다 없어졌겠지. 어쨌든 그는 엄청나게 강하고 위대한 왕이었어. 아주 거대한 업적도 세웠지. 다시 생각해 봐도 인간치고는 제법이었다.”

‘거대한’이라는 부분에서 가미긴이 유독 짓궂게 웃었다.

“나만 믿고 따라와라. 바이칼. 널 그와 같은 거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겠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넌 아주 커다란 인물로 남을 거야. 업적을 통해 이름까지 날리는 거야. 어떠냐? 아주 좋지?”

내용을 알고 들으면 매우 끔찍한 말이었다.

헤카테 왕처럼 거인화를 시킨 다음에 붕괴시키겠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헤카테 왕은 거인이 된 상태에서 괴로워하다가 소멸하였었다.

하지만 가미긴 앞의 바이칼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거 좋지.”

“너도 분명 만족할 거다.”

“나는 언제나 너만 믿는다. 가미긴.”

가미긴은 웃음을 띤 얼굴로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냅킨을 들어 기름 범벅이 된 바이칼의 입가를 꼼꼼히 눌러 주었다.

제삼자가 그 광경을 볼 수 있다면 친근한 사이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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