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53화 (253/307)

# 253

& 전쟁의 시작 (2)

밤에 남부의 사람들은 유성우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낯선 오로라가 찾아왔다.

오로라는 초록색이었고 축복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으로 남부 극단을 뒤덮었다.

커튼 같이 펼쳐진 파장이 아니라 꿈틀대는 안개처럼 퍼진 오로라였다.

마치 전염병처럼 별과 인간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기현상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뿐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각 영지에서는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덮어놓고, 신기한 일이지만 불안에 떨 일도 아니라는 말을 뿌렸다.

그렇게 입단속 시키는 일이 잦았다.

땅 끝자락에서 하늘이 초록색으로 물드는 일이 중앙에 있는 나라들까지 전해질 리도 없었다.

이때까지도 남부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봐. 짐. 저게 뭐지?”

“뭐? 뭘 말하는 거야?”

“저길 보라고.”

길을 걷던 남자는 친구가 사색이 되어 한곳을 가리키자 눈썹을 좁히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친구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마을에서 가장 높고 뾰족한 지붕 위에 정말로 뭔가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새인가? 새 같은데?”

“새 치고는 몸집이 너무 크지 않아?”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검은 형체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건물로 다가갔다.

그 건물 안에 사는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나타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지붕 위에 있는 것을 확인하려 들었지만, 일단 지붕이 너무 길고 뾰족했다.

다락방에서 나와 지붕을 타기도 여의치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삐끗했다간 바로 추락할 테니까 말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물체는 머리를 몸에 파묻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의 몸체는 크게 부풀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놈이 머리를 몸 위로 뽑아냈다.

날카로운 부리가 햇살에 반짝일 때, 날개를 펼친 새 같은 것이 울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불길한지 등골이 서늘해지고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다.

그때 아이들이 몰려나와 새 비슷한 것에게 돌을 던졌다

겁 없는 행동도 행동이지만, 새가 있는 높은 곳에 아이들의 팔 힘으로 닿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속 돌을 던졌다.

어른들은 그걸 보면서도 말릴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공포에 질려서이기도 했거니와, 새 같은 놈이 날아가서 저 울음소리가 멈춰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이 되자 더욱 짙어진 초록색 하늘에서 바위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지붕을 맞아 반파된 집도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는 반투명한 물질이었다.

땅에 닿은 바위 내부에서 표면을 쪼개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있었으니, 징그러운 모습의 몬스터들이었다.

여러 개의 더듬이를 양쪽으로 펼치며 모습을 보이는 몬스터들의 위로, 무정한 하늘은 계속 바위를 뱉어냈다

사람들은 몬스터의 등장에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명의 사람들은 그대로 달려가 영주관에 도움을 청하려 했다.

그런 사람들의 옆에서 별안간 검은 물체가 튀어나와 그대로 덮쳤다.

먼지를 피워 올리며 몬스터에게 잡힌 사람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뿌리치려 버둥대는 것도 잠시, 이윽고 뼈가 씹히는 소리가 길 위에 울려 퍼졌다.

영주관에서 뒤늦게 소란을 알아채고 병사와 기사들을 풀었다.

그들이 몇 발자국 지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가 영주관 건물을 폭격했다.

그 요란한 공격이 끝나면 부서진 바위는 어김없이 몬스터를 내놓았다.

사람들이 보기에 지금 출현한 것들은 전과 같은 몬스터였겠지만, 정확히 말해 그들은 이노센트들이었다.

체격, 힘, 속도 어느 면에서나 사람들이 여태껏 알던 몬스터와는 차이가 있었다.

충분히 승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달려든 기사들이 종잇장처럼 찢겼다.

비명 후에 살과 피 분수가 허공을 장식하면, 길게 목을 뺀 이노센트가 긴 혀로 뿌려지는 피를 받아먹었다.

녀석의 혀는 연주황색이었고 안쪽으로 둥그렇게 말렸다가 직선으로 풀어지길 반복했다.

딱딱한 막대기처럼 될 때엔 꼿꼿함을 보이는 것이, 마치 혀에 뼈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으로 도망가는 부녀자를 잡아 목에 대롱을 꽂듯이 집어넣었다.

미친 듯이 피를 빠는 녀석의 두 눈은 흥분 상태를 말해주듯 뒤집혀 졌다.

그래서 흰자위만 보였다.

그 상태로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피를 빨았다.

얼굴에 핏방울을 무늬처럼 매단 놈이 앞발을 무너진 돌담 위에 얹고 내는 소리, 그 환희에 찬 기괴한 울림이 사방에 선고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이 시대에 강림했노라고, 너희들을 기꺼이 먹어치우겠노라고 말이다.

농촌과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고 불을 뿜어내는 몬스터들로 인해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기 바빴다.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 건물들이 무너지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사람들은 몬스터들을 피해 지하에 숨었고 심지어 강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면 몬스터 몇 마리도 주저 없이 물에 뛰어들어 사람들에게로 헤엄쳐 가는 것이었다.

그 후 피거품이 일어났고 괴로움에 가득 찬 비명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농작물들이 바람에 불씨를 뱉어냈다.

그 위로 열기에 흔들리는 공기를 헤치며 거구의 몬스터가 일어난다.

넓적한 머리를 가진 몬스터는 몸부림치는 남자를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그는 남자를 자신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순간 남자의 몸은 건물 삼층 높이에 있었다.

아찔한 느낌도 잠시,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땅에 처박혔다.

몬스터는 두 손안에서 부르르 떠는 남자의 느낌을 음미하는 듯 잠시 행동에 뜸을 들였다.

낚시하는 사람들이 손맛을 느끼기 위해 하는 행동과 비슷하게, 피를 뿜는 남자를 땅에 이리저리 문질러대며 손으로 전해져 오는 저항을 느꼈다.

남자의 숨이 완전히 끓어지기 전에 몬스터의 입속으로 그의 머리가 사라진 건 물론이다.

톱처럼 삐죽빼죽하게 솟아난 이빨이 남자의 목을 끊어냈다.

목에서 솟구치는 많은 피가 일차적으로 몬스터의 가슴에 맞았고, 복부를 적시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미 농작물을 태우는 불을 끄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방금 남자를 죽인 몬스터는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떨어지는 피를 느끼며 웃었다.

다리 위에서는 분주히 몸을 놀리는 몬스터가 긴 혀를 개미핥기처럼 내밀고 사람들을 쫓아다니는 광경이 펼쳐졌다.

사방을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한 폭의 지옥도와 같았다.

이건 소도시나 마을 같은 경우였고 큰 도시 같은 곳에서는 이노센트의 습격을 잘 막아냈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노센트가 뭔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차피 몬스터라고 부르겠지만 막아냈다는 게 중요한 것이었다.

빠르게 병력을 돌려 도시를 안정시키고 한숨 돌린 사람들은 향후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수도로 전령을 보냈다.

그러면서 기민한 대응책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이미 지방 차원에서 수습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궁의 도움이 절실해 보였다.

“흥과 배를 가득 채웠으면 이제 일을 시작하자.”

누군가의 명령에 몬스터들이 모여들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을 포착한 수도 쪽의 왕궁에서도 초강수를 내놓았다.

아끼고 있던 강자들과 정예병들을 초반에 풀어버린 것이다.

남부 전체를 보면 구석에서 벌어진 일이고 피해를 입은 나라가 소국이라 해도, 나름대로 빠르고 적절한 대응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대응은 과연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알려진 강자 중 한 명인 로슈는 쑥대밭이 된 마을에 도착했다.

붉고 긴 머리를 가진 그는 창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마음먹고 창을 휘두르면 창대의 궤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유령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가 한번 작심하고 움직이면 수십 명으로도 당해내기 힘들었다.

몬스터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많은 병사를 이끌고 처리한 적도 있는 남자였다.

실력은 물론이고 경험이 풍부하다는 말이다.

위쪽에서는 그런 그에게 기대가 많았다.

그래서 그가 병사를 원했을 때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병사들을 산 뒤에 숨겨놓은 로슈는 엉망진창인 마을을 거닐었다.

그러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부서진 곳을 관찰했다.

마을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는 커다란 진지가 세워지고 있었다.

로슈는 진지를 습격하기 전에 마을을 살펴보며 몬스터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싶었다.

녹아내린 자리가 있다면 산성 타액을 뱉는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이고, 땅에 길고 깊게 파인 고랑이 있다면 전갈 꼬리 같은 몬스터를 염두에 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춰 준비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놈들의 정찰대와 마주친다면 큰 소리 없이 그들을 영원히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실력을 믿을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정작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찰대 따위가 아니었다.

땅 위를 걸어가는 로슈의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슈. 이봐 로슈.”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로슈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아주 커다란 등이 보인다.

인간은 아니고 괴물의 등이었다.

그 등을 바라본 로슈는 첫 번째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가깝게 있었는데도 왜 기척을 느낄 수 없었지?’

두 번째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그러자 긴 부리를 가진 몬스터가 혀를 끌끌 찼다.

몬스터는 새의 머리를 옮겨다 놓은 듯했고, 거칠고 긴 날개 아래로 붉은 팔을 가지고 있었다.

갈색의 깃털들은 커다란 몸집 아래로 잔뜩 떨어져 있어 눈을 어지럽혔다.

“너 같은 유명인을 왜 모르겠어? 이럴 때는 가미긴 같은 놈도 도움이 되거든. 그놈이 끔찍하게 싫지만 꾀주머니인 건 인정해야겠지? 그 꾀주머니가 너를 죽여 달라고 하더라고. 그보다 언제까지 거기에 서 있을 거야? 이리 다가오라고 로슈. 그리고 이걸 봐. 나는 선택하기 힘드니 네가 골라줘야겠어.”

로슈는 창을 등에서 뽑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몬스터의 등에 섰다.

그렇게 멈춘 자리에서 몬스터의 몸 너머로 뭔가가 보였다.

땅에 일렬로 쭉 늘어져 있는 그것들은 끔찍하게도 목 없는 시체들이었다.

그것도 어린아이들의 시체.

“이게 무슨 짓이냐?”

로슈의 날 선 목소리를 감지한 몬스터가 웃었다.

“마을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고작 이걸 보고 놀란 거야? 여리군. 게다가 이 애들은 죽을죄를 지었어. 지붕 위에 있는 내게 돌을 던졌다고. 나는 나를 건드린 놈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아. 백배 천배로 돌려주지. 그게 바로 내 삶의 철학이야.”

물론 그 돌은 몬스터의 몸에 닿지도 않았었다.

“왜 이렇게 시체를 널어놓았지?”

“햇볕에 말리는 거야. 인간들도 물고기를 잡아서 말리잖아. 똑같은 거지.”

그 말에 로슈가 창을 휘둘러 위협을 가했지만, 몬스터는 머리 옆을 지나가는 공격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 시체들을 먹을 거냐는 소리냐?”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은 몬스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놈의 목 언저리를 겨냥했던 로슈의 창이 기울어져 몬스터의 어깨 위에서 흘러내렸다.

아직도 로슈의 얼굴을 보지 않은 몬스터가 그 상태로 탄식을 터트렸다.

그리고 사실을 밝혔다.

“지금쯤 산에 숨겨놓은 네 부하들은 습격을 받고 있을 거야. 아쉽군. 그걸 네가 못 보게 되어서. 실은 나는 네가 강자라는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너와의 결투를 기대한 거야.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넌 상상 이하의 애송이로군. 실망이다. 로슈. 너는 사냥감에 불과했어. 직접 여기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목 없는 시체들을 가리켰다.

“넌 저렇게 되지 않을 거다. 왜냐면 산채로 불에 태워 죽일 거야. 그리고….”

그때 로슈의 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순식간에 나타난 번갯불의 끝은 일곱 개로 갈라지며 몬스터의 등을 찔렀다.

그럼에도 피를 보지 못한 까닭은 그보다 더 빨리 몬스터의 몸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잔상을 남길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빈 공간만을 찌른 로슈의 등 뒤에서 몬스터의 말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불타는 네 머리를 씹겠다.”

‘씹겠다.’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슈의 창이 다시 움직였다.

바람처럼 횡으로 움직인 창이었지만 이번에도 걸리는 감각이 없었다.

커다란 몸집으로 이렇게나 빨리 움직이다니.

로슈는 ‘치잇.’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좀 더 과장되게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끝까지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대가 자신이 흥분했다고 믿어주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을 얕보고 떠들 테니까 말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수다스러운 놈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다.

지금 병사들이 공격 받고 있는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이놈들이 어디에서 왜 나타났는지 밝히는 게 더욱 중요했다.

“사악한 녀석!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대체 네 정체가 뭐냐?”

창의 궤적 사이로 몬스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깃털들이 휘날리는 가운데 창끝은 몬스터를 한번 찔러보지도 못했다.

“난 테러 나이트다. 동료들에게는 웨폰 마스터라고도 불리지.”

“테러 나이트?”

“모르겠어? 강하다는 뜻이야.”

로슈는 자신의 실력을 감추며 상대에게서 정보를 잔뜩 뽑아냈다.

테러 나이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절주절 떠들어댔기 때문에 정보를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묻지도 않은 것까지 설명해 주며 말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신빙성을 떠나 많은 이야기를 건질 수 있었다.

알고 싶은 것을 다 뽑아냈다 판단한 로슈는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창 끝으로 새머리를 가진 몬스터를 겨누었다.

“네놈의 주절거림은 잘 들었다. 이제 최선을 다해 너를 물리치겠다. 각오해라!”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는 로슈의 창에서 붉은 불길이 이글거렸다. 이렇게 보면 로슈에게 붙는 이름은 유령창이 아니라 화염창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야. 넌 일말의 죄책감도 없냐? 내 수다를 듣는 동안 네 부하들이 다 죽어버렸잖아. 나도 그걸 알고 실컷 떠들었고 너도 다 알면서 듣기만 했지. 너 같이 나쁜 놈은 처음 본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이다. 이것을….”

받아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로슈는 순식간에 다가온 웨폰 마스터에게 미친 듯이 얻어맞았다.

지금까지 장난으로 놀아주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웨폰 마스터였다.

압도적인 자신감이 없었다면 떠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웨폰 마스터의 한방 한방은 전광석화와 같았고 끔찍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로슈의 몸 곳곳에서 피가 튀었고 불타는 창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걸레가 되어버린 로슈의 몸에 웨폰 마스터가 발차기를 먹이자.

발이 로슈의 배를 뚫고 나왔다.

로슈가 토해낸 피 화살을 피하지 않은 웨폰 마스터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내가 왜 웨폰 마스터인지 알려줄 기회도 없잖아. 넌 정말 미친 듯이 약하구나. 설마 남부의 강자라는 놈들이 죄다 네 수준이냐? 진짜 최악이네.”

그리고 웨폰 마스터는 자신의 말을 어겼다.

로슈를 불태운 게 아니었다.

그는 로슈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 감고, 주둥이로 로슈의 얼굴을 쪼았다.

로슈의 처절한 비명이 사방을 울렸지만 뾰족한 부리는 강철처럼 그의 비명 중앙을 꿰뚫었다.

그 후로도 집요하게 쪼아대는 행동을 반복했다.

*  *  *

한 달이 지나자 붉은 수염을 가진 노인이 웨폰 마스터가 있는 곳을 방문했다.

로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은 양손에 쌍창을 들고 있었다.

로난은 웅크리고 있는 웨폰 마스터의 주변에 늘어져 있는 것들을 살펴보았다.

어린아이들의 뼈가 가득히 보였고 성인의 뼈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로슈 이후로도 많은 이름난 전사들이 웨폰 마스터를 찾아왔고,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뼈를 남겼다.

물론 뼈만 남기는 결과 전에 웨폰 마스터의 입을 통과하는 중간 과정이 있었다.

“넌 누구지? 너는 초상화에서 못 봤는데?”

웨폰 마스터는 깜박 졸고 있었던 듯 느릿느릿한 음성이었다.

그의 물음에 노인 로난은 뒤로 살짝 물러서며 말했다.

“로슈라는 남자를 기억하는가?”

웨폰 마스터는 로슈를 기억하는지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일어났다.

“아니. 난 하품 나게 허약한 놈 따위는 몰라.”

“난 그 남자의 아버지다.”

“그렇군. 그래서 용건은?”

“그 아이의 복수를 하러 왔다.”

“골고루 하는군.”

웨폰 마스터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초록색의 하늘은 가끔 소환물질을 비처럼 내렸다.

하지만 그 비를 맞고 이동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몬스터는 더 이상 없었다.

소환 의식을 마친 물질은 제 역할을 다하고 힘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초록색 하늘도 본래의 색을 되찾을지도 몰랐다.

분탕질을 할 이노센트들이 없다면 말이다.

가미긴의 말에 따르면 세계수는 죽어버렸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노센트들을 막을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세인이라는 놈이 있다지만 별거 아니겠지. 고작해야 이런 놈들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일 거야. 가미긴. 그놈은 진짜 요란하기만 하다니까? 강자란 놈들도 막상 별거 없었잖아.’

웨폰 마스터는 여기에서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대체 왜 네 장난 같은 실력으로 그게 가능할 거로 생각해? 난 그게 진짜 궁금하다. 그게 가능할 거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온 거지?”

괴물이 주는 모욕 앞에서 로난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그때 콧방귀를 뀐 웨폰 마스터가 자신의 날개를 귀찮다는 듯이 휘둘렀다.

“으윽?”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로난의 쌍창이 주인의 몸을 꿰뚫었다.

로난이 여기에서 갑자기 자해를 할 이유는 없으니, 분명 로난이 든 무기가 웨폰 마스터의 뜻대로 움직인 것이다.

경악에 가득 찬 로난의 얼굴도 잠시, 다시 쌍창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통제하려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피를 흘리며 바닥에 처박히는 로난을 보며 웨폰 마스터가 혀를 찼다.

“길고 짧은 걸 왜 대봐야 해? 그냥 척 봐도 알잖아? 어떻게 한번을 못 막냐? 이번처럼 간단한 지배도 못 막으면서 무슨 복수를 해.”

상대의 무기를 지배하는 기술을 보면 그가 왜 웨폰 마스터인지 잘 알 수가 있었다.

투덜거린 웨폰 마스터는 로난의 시체에 다가갔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로난의 몸에 손을 대기 전,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상대의 허약함에 저절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나름대로 경멸을 표현한 것이다.

웨폰 마스터가 보기에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이 없으면 강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진짜 재수 없을 정도로 약한 놈들뿐이었다.

그리고 더 생각해 보면 가미긴이 최고로 재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죽치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테러 로드인 루시드는 가미긴을 중히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바로 오늘날 웨폰 마스터가 가미긴의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가미긴. 이 망할 놈. 겁쟁이 녀석이 생각만 많아가지고선. 강자는 개뿔.”

웨폰 마스터는 가미긴을 실컷 욕하며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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