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50화 (250/307)

# 250

& 나탈리 (3)

커다란 마차 안이었으므로 중앙에 따로 소파도 있었고 책상도 있었다.

거기 앉아 글을 쓰는 건 불편하겠지만 책을 읽는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인은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었다.

고급 표지에 싸인 책이었는데, 책상 위에 높게 쌓인 것을 보니 꽤 많은 양이었다.

멜라니는 그 책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

구석 창가에 앉아 있는 멜라니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닭살이 돋았어.’

세인이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세리스의 일기였다.

믿을 수 없게도 세리스는 최근 그걸 그에게 선물했다.

세인과 헤어지고 나서 그녀가 어떤 경험을 했고, 사색과 함께 매일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본 멜라니는 자신의 일기를 타인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에 비해 세인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그 옆에 찰싹 달라붙은 세리스는 그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다든지.

하는 등의 짓거리를 해댔다.

이게 멜라니에게 있어 얼마나 충격과 공포의 장면일지 한번 상상해 보라.

멜라니가 평소 알던 세리스와 전혀 일치되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져 있었다.

멜라니는 세리스가 저렇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남자 옆에 달라붙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자리에서 말이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도 싶었다.

‘정확히 표현은 못 하겠지만 왠지 더러운 거 같아.’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멜라니는 막힌 숨통을 트이고 싶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창밖에도 낯선 광경이 펼쳐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이 지긋한 세 명의 기사들이 멜라니를 존중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세리스를 의심하며 두었던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농담을 하긴 했어도 근엄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밖에서 하는 꼴을 보면 개구쟁이들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언제나 까다롭고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던 맥조차 은근히 장단을 맞춰주고 있을 정도였다.

참으로 적응 안 되는 모습이다.

“이상한 나라의 멜라니가 된 기분이군.”

이젠 없는 멀미도 할 지경인 멜라니가 무심코 중얼거린 그 말을, 세인이 받았다.

“그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니?”

멜라니는 세인의 말에 답을 하려다가 세리스의 눈치부터 보았다.

그걸 깨달은 세인이 낮게 웃으면서 책 한 권을 멜라니에게 던져 주었다.

“이게 뭐죠?”

‘뭐냐?’ 라고 말하려다가 세리스를 의식한 멜라니가 물었을 때였다.

세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도서관에서 찾았어. 마법사의 책이라는 기행문이야. 특이하게도 작중 인물이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거든. 그 이름을 가진 인물은 곧 작가이기도 해. 그 작가가 훗날 이상한 나라의 멜라니라는 책도 썼지.”

그러면서 세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데, 멜라니는 그 얼굴이 진심으로 재수 없었다.

저게 그동안 어디 갔는지도 말 안 하고 자리를 비운 남자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면 세리스와 다른 사람들도 이상했다.

만약 자신에게 남편이 있었고, 목적지도 밝히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비웠다면.

‘주리를 틀어서라도 어딜 갔다 왔냐고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니야?’

속으로야 어땠든지 간에, 마법사의 책을 받아든 멜라니는 군말 없이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지 않는다면 맨정신으로 저 꼴을 계속 봐야 할 텐데, 그것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독서의 시간이 이어지고, 마차들은 고른 길 위를 달려가며 미약한 진동만 전해줄 뿐이었다.

밖은 기사들로 인해 매우 안전했다.

모두 다 일당백의 전사들이니까 어떤 문제가 생길 우려는 접어둬도 좋았다.

게다가 멜라니는 모르고 있지만, 세리스와 세인을 생각하면 위기를 가정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일행들은 글리터를 빠져나와 옆으로 길게 달렸다.

중간중간 관문소가 있었지만 물론 빠르게 통과할 수 있었다.

마차는 관문소 앞에서 짧게나마 멈춰 서지도 않았다.

기사들 몇 명이 먼저 나가 통과 절차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마차가 멈춰 설 때는 중간 휴식을 취할 때나 식사나 잠자리가 필요할 때뿐이었다.

맥을 비롯한 기사들은 지금 보내는 시간이 폭풍 전의 고요함을 이용한 여가라는 것을 잘 알았다.

전면전이 시작되면 이런 평화는 금방 끝날 것이다.

그래서인지 웃는 얼굴을 자주 고집했다.

더이스와 행크는 직접 요리에 뛰어들었고 맥은 날아다니는 새를 사냥해 왔다.

그들의 직책상 그런 일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것은 멜라니뿐이었다.

가끔 세인이 기사 셋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너무 선을 넘었다 싶었을 때도 있었다.

글리터 정도의 규모가 되면 밑에 거느린 사람이라고 해서 윗사람이 막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세인은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가끔 짓궂게 더이스를 놀려대기도 했다.

그 수위가 멜라니에게는 아슬아슬하게 보였지만 주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안을 당한 더이스는 죄 없는 아비게일에게 자꾸 뭐라고 했다.

그러면 아비게일은 세리스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세리스는 그걸 말끔히 무시했다.

“책은 어때? 재미있니?”

날이 저물고 삼삼오오 모여 불을 피운 시간이었다.

야식용으로 데워지는 수프의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감도는 밤이기도 했다.

커다란 램프 두 개에 의지해 돌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멜라니에게 다가온 세인이 물었다.

멜라니는 세인에게 대답하기에 앞서 세리스부터 찾았다.

다행히 세리스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옷을 갈아입으려 사라진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도 돼?”

“거짓말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니지.”

“더럽게 재미없어.”

세인은 크게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동의하지 못함으로 받아들인 멜라니는 마법사의 책에 대한 잔혹한 평을 쏟아냈다.

“장소 변환이 너무 불규칙해. 그리고 전개마다 자기 생각을 막 써놓았어.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그리고 여기 말이야. 여기.”

멜라니는 지하의 바다를 건넌다는 대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딱 잘라 말했다.

“지하에는 바다가 없어. 그러므로 이 묘사는 틀렸어. 지하수는 있다고 들었지만 분명 이 정도 규모는 절대 아닐 거라고. 게다가 도대체 누가 거기에 배를 띄우겠어?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이게 꿈을 적어 놓은 건지, 진짜 소설인지를 모를 정도야.”

“그래?”

“그리고 등장인물들도 한결같이 이상해. 특히 쓸데없이 무게만 잡는, 무표정의 왕자병 자식은 정말 압도적이야. 미래에서 왔다고 지껄이는 게 정상이야? 또 이런 정신병자와 여행을 한다는 게 말이나 돼? 위급할 때 등을 맡겨야 하는데 이런 미친놈과 같이 간다고? 신을 추적하는 여행이라면서 이상한 것만 잔뜩 써놨어. 후일담에 있는 젬과 젠의 이야기도 이상해. 이 소설가는 정상이 아니야.”

현재의 멜라니가 과거의 멜라니를 신나게 욕했다.

세인에게는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난 네가 그 소설을 보고 좋아할 줄 알았어. 공감이라도 하거나.”

“공감은 얼어 죽을. 차라리 여제에 대한 이야기나 읽을 걸 그랬어.”

그러자 세인이 그답지 않게 딱 잘라 말했다.

“그 여자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여자가 아니야.”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말하네. 그걸 어떻게 알아?”

멜라니는 그런 세인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갑자기 이어지는 방울 소리에 그런 시선을 관두었다.

야식을 먹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책을 내팽개쳐 놓고 일어난 멜라니가 저만치로 가버리자 세인은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먼지를 툭툭 털었다.

여유가 넘치는 여행은 계속되었다.

글리터에서 날아오는 전서구를 받아보는 일이 있었지만, 그게 급한 일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들 여유를 즐기려 노력했다.

그리고 세리스와 세인은 그동안의 공백을 메꾸려 정성을 들였다.

세인은 자신의 가정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가 책임지지 못한 부분들을 채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리스의 일기를 유심히 읽었고, 세리스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가슴에 새기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짓는 표정과 표현하는 내용을 파도가 지나간 백사장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멜라니에게도 똑같이 통용되었다.

가끔은 마차 밖으로 나가 세 명의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건 아비게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비게일.”

“예?”

“고마워. 눈이 부실 정도였어.”

세인이 글리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비게일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세리스도 물론 노력했지만, 글리터 곳곳이 풍요롭게 된 것에 아비게일의 공이 컸다.

글리터는 아비게일의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석양을 옆으로 둔 세인이 아비게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힘주어 말했다.

“네가 완성한 모두의 집은 나의 집이기도 해. 그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기뻤어. 고맙다. 아비게일.”

눈시울이 붉어진 아비게일은 소매로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떠들고, 마시고, 먹으며 진행되는 여행길은 지도 위에서 긴 선을 그렸다.

그리고 국경을 지나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것만 봐도 목적지는 명확했다.

지도에 그려진 여행 경로는 방황하지 않고 처음부터 한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곳과 가까워졌다.

서리가 맺혀 돌덩이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리는 날.

세인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아차렸다.

밖의 기사에게 소식을 듣고 마차에서 내리려던 세인은 잠시 멈칫했다.

세리스가 그의 소매를 잡았기 때문이다.

“제가 갈게요.”

“당신이?”

“제가 멜라니와 함께 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세인은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그렇게 해서 마차 밖으로 나온 세리스는 멜라니와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이라고 해도 경사가 완만한 산이었다.

탁 트인 곳이었고 옆으로 절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어색함을 깨고 오랜만에 모녀가 함께 걷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멜라니는 뭔가 불안한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걸 보는 세리스가 말을 건넸다.

“뭐가 걱정이니?”

“호위 기사도 없이 이렇게 단둘이서 산을 올라도 돼? 갑자기 불한당들이 에워싸면?”

그러자 세리스가 픽 하고 웃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도 검 좀 쓴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멜라니는 믿지 않았다.

세리스가 홀로 수련하는 연무장을 멜라니가 구경할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세리스가 아랫사람들 앞에서 무력을 보일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멜라니가 알기에 자신의 엄마는 펜대에만 친분이 있는 여자일 뿐이었다.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내 상대가 안 돼.”

멜라니는 이상한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며 세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리스가 엄숙한 얼굴로 딸에게 말했다.

“멜라니. 바닥을 봐야지. 돌에 걸려 넘어질라.”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주저하던 멜라니는 결국 세리스의 손을 잡았다.

아주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역시나 검을 쓸 줄 안다는 세리스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세리스의 허리춤에 있는 검도 장식용일 것이다.

“이렇게 손을 잡아본 게 얼마 만이지.”

“없었어.”

“….”

헛기침을 한 세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따졌다.

“일 년 전에도 한 번 있었잖아. 네가 아팠을 때.”

“꼬치꼬치 따질게 아니라, 내 말은 맥락을 이해해야 해. 그런 적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물어서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라고.”

모녀는 서로 투덜거리면서 산을 올랐다.

그렇게 계속 오르자 낮은 울타리를 경계선으로 가진 작은 마을이 모습을 보였다.

그 마을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세리스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을 꺼냈다.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지? 묻고 싶은데 속으로 삭히는 것도 많을 테고.”

“아니라곤 말 못 하지.”

“멜라니. 그런 것들은 서두르지 않아도 천천히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해. 지금은 다 떠나 이 말을 너에게 해줘야겠구나. 나는 내가 항상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런 부담감을 너에게도 강요했던 것 같아. 그런데도 여유가 없던 나는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자꾸 너에게 무언가를 원하고 요구했던 거야.”

“뭘?”

멜라니의 물음에 세리스의 걸음이 약간 느려졌다.

진심을 담은 말을 하기 위해서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모든 걸.”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세리스가 웃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꼭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때가 있었어. 내가 아닌 남을 위해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넌 그러기 힘들 거야. 누가 결국 왕관을 쓰게 되겠니? 내가 너에게 해주고픈 말은 너무 완벽해지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야. 이제야 막중한 책임감에서 벗어나 보니 알겠어. 그게 다 짐인 것을 말이야. 귀족 신분으로 살 때와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의 책임감은 질이 달라. 가장 넓고 깊은 시각을 가져야 하는데, 정작 시야가 좁아지는 기분이야. 네가 왕좌에 앉는 그때가 오면, 다시 그날의 너에게 말해주고 싶구나. 너무 완벽해지려고 애쓰지 말라고.”

멜라니가 충고는 한번이면 충분하다고 중얼거렸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세리스가 피식하고 웃었다.

자신이 낳은 딸이지만 어지간히도 말 안 듣는 딸이었다.

그래도 둘은 서로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상태로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멜라니가 물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충고를 하자면 태연히 해야 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듯이 말이야. 차라리 감정을 담지 마. 그게 오히려 상대에 대한 배려가 될 거다.”

“알았어.”

소중한 충고에 멜라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탈리의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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