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49화 (249/307)

# 249

& 나탈리 (2)

마을 사람들은 새로 이주해온 나탈리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품있는 나탈리는 이런 곳에서 살 사람처럼 안 보였다.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버림받은 비련의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지나치게 많은 나탈리였다.

그녀는 나무로 만든 식탁에 홀로 앉아 수프를 떠먹는 중이었다.

지금 시각은 야심한 밤이었는데, 그녀는 섬뜩하게도 램프나 양초를 켜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집은 정적과 어둠으로 휩싸여 있는 상태였다.

그 정적을 접시에 부딪히는 숟가락 소리가 깨트렸다.

숟가락은 몇 번 접시를 두드리다가 그 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나탈리의 팔과 함께였다.

나탈리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그녀의 시선 끝에는 살짝 열린 옆방 문이 있었다.

집안은 어두웠지만, 그 열린 문틈이 가장 깜깜했다.

그리고 숨 막힐 듯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나탈리는 말없이 그 열린 문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나무 의자로 바닥을 끄는 소리가 가파르게 귀를 긁어댔다.

나탈리는 천천히 열린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삐쩍 마른 손이 문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그 행동으로 보아 그녀는 문을 닫으려는 것만 같았다.

그때 열린 문틈에서 아주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그 공기는 나탈리를 유혹하는 듯했다.

그녀가 잠시 망설인 것도 사실이다.

열린 문틈은 곧 나탈리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중얼거림과 함께 말이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머지않아 곧….

*  *  *

나탈리가 어둠을 보던 시간, 세인은 빛을 보고 있었다.

그가 지금 있는 공간은 숨을 쉴 수도, 잠들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세인이 입을 살짝 벌리자 공기 방울들이 떠올랐다.

그 방울들은 세인의 얼굴에서 멀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빛에 닿은 걸까?

알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다.

세인은 지금 물속에 있었다.

그것도 깊은 밑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상태였다.

햇빛이 머무는 수면의 가장자리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가 얼마나 이렇게 오래 있었는지는 그 외에 아무도 모른다.

다른 생명체라면 물론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인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며 누워 있었다.

수면과 세인의 중간에서 물고기 같은 것이 지나갔다.

‘같은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검은 형태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물고기가 양옆으로 지느러미를 펼쳤는데, 반투명한 그 피막은 날개를 연상하게 했다.

그 피막이 빛을 가리며 선홍빛으로 위를 덮었다.

그것을 구경하던 세인은 눈을 감으려 했다.

아마 그를 방해하는 소리가 없었다면 눈을 감고 다시 한참을 보냈을 것이다.

세인을 소리 높여 부르던 세리스는 온천 아래에서 뭔가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자세히 보니 물 위로 나타난 것은 세인의 머리였다.

알몸인 세인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깊은 물 속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세리스 근처로 다가가 자신의 옷을 주워 입었다.

“잠수하고 있었어요?”

“그래.”

물론 그 깊이는 세리스의 상상보다 깊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그녀는 세인의 알몸에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상처가 늘었네요. 간밤에는 몰랐는데.”

“불이 꺼져 있었잖아.”

“다음에는 불을 켜고 잠자리를 해야겠어요.”

그들이 있는 장소는 글리터 성의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온천이었다.

그 온천은 지하 영역을 따뜻하게 덥히는 역할을 했다.

온천을 통해서 오는 침입자를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게, 얕은 곳은 쇠창살로 막아놓고 있었다.

그리고 깊은 곳은 수십 킬로미터의 깊이라서 그곳을 통해 아무도 침범할 수 없었다.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세리스는 세인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녀는 글리터에 복귀한 세인이 가장 먼저 그녀가 해왔던 일을 검사해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다시 권력의 중추에 앉아 대사를 맡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세리스가 해온 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드레퓨스의 사신과 대면을 했으되 글리터의 일에 깊게 관여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한다는 게 이렇게 온천 같은 곳에 와서 틀어박히는 일 정도였다.

요즘 세리스는 여행을 마친 그가 잠시 쉬는 기간을 가지려나 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울프크릭에게 시킨 일을 들었어요.”

“시킨 게 아니고 부탁한 거야. 처음에는 드워프 중 아무에게나 요청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렇게 돼도 문제가 생기겠더군. 그를 통해 부탁한다면 괜찮겠지.”

“당신은 여전히 변한 게 없군요. 조금은 감명받았어요.”

그리고 세리스는 상의를 입으려는 세인을 저지했다.

세인은 자신의 양팔을 잡고 주저앉히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돌아온 그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행동해 주었다.

사실 그녀가 요구하는 것 중에 큰일도 없었다.

그저 밤에 같이 안고 있어 주는 것 정도.

“어쩌죠?”

“뭘?”

“당신은 아주 강한 사람이잖아요. 한계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강한 사람.”

그렇게 이야기하는 세리스가 웃었다.

그녀의 하얗고 눈부신 웃음이 천장에 물결무늬를 만드는 온천의 표면에 닿아 부서졌다.

그건 아까 세리스의 부름에 세인이 빗장을 열고 나온 문이었다.

세리스는 언제나 빛과 친한가 보다.

물론, 하는 행동거지는 그렇지 않지만.

세인의 두 손목을 잡고 위로 올린 그녀는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짧은 속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의 포로잖아요.”

그리고 천천히 세리스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때 그녀의 눈이 품은 빛은 두 개의 별 같았고, 벌려진 입술 안의 혀는 용암 같았다.

짧은 입맞춤.

그리고 이어진 긴 입맞춤이 끝나자 남녀의 이마가 포개어졌다.

세인은 말없이 코앞에서 깜박이는 그녀의 눈과 목소리를 음미했다.

“멜라니에 대해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없어.”

“그동안 제가 해왔던 정책에 대해서는요?”

“없어.”

“왜죠?”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워. 외로웠겠지만 견뎌내서 고마워. 그 외에도 내가 고마워할 것은 많아. 살펴보지 않아도, 검사하듯이 조사하지 않아도 내가 알 수 있는 것들이고, 당신을 존중하는 건 내가 가져야 할 감정이야. 정말 고마워. 방금 이게 내 감정에 대한 대답이야.”

세인은 그녀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서 당겼다.

그녀의 얼굴은 자연스레 그의 옆에 묻히게 되었다.

물결치는 금발이 세인의 코와 볼을 간질였다.

그러나 물결치는 것은 그녀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금발뿐만이 아니었다.

세인은 천장에서 일렁이는 온천의 빛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세리스.”

“네?”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꿈꾸는 듯했다.

약간 물기가 눌려 있는 것이 고조된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늦기 전에 우리. 짧은 여행이라도 할까?”

“여행요?”

그녀의 이름을 부른 세인은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이다.

그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던 세리스는 작게 말했다.

“역시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이 지하에서 보이지 않는 햇살처럼”

‘여전히 다정해요.’

*  *  *

“여전히 막무가내이신 거 같아요.”

더이스가 그렇게 투덜거렸다.

말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맥이 눈총을 줬지만, 벌써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온 더이스는 그런 눈치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자다가 봉변을 당한 더이스였다.

“더이스. 이봐. 너같이 하중이 긴 사람이 그렇게 아랫입술을 내밀면 못써.”

“갑자기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냥. 그렇다고. 그렇다는 말이야.”

더이스가 성질을 내자 찔끔하며 물러서는 행크였다.

세 명의 기사는 지금 마차를 호위 중이었다.

새벽부터 글리터를 빠져나온 마차는 총 여섯 대.

호위 병력은 수십 명 정도였다.

중앙에 위치한 마차 안에는 멜라니를 비롯해 세리스와 세인이 타고 있었으므로 호위하는 병력의 수를 생각해보면 상식 이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못해도 수백 명이 붙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외교적으로 빚어질 수 있는 불편함을 건너뛰기 위해 암행과 비슷하게 움직이는 것이니까.

게다가 호위하는 사람들도 전부 쟁쟁한 기사였다.

“왜 뼈가 굵은 우리들이 나와 생고생이지.”

“그래 잘한다, 더이스. 좀 더 해봐. 네가 현실 감각을 잃은 지 오래구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소처럼 끌려 나와 동행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우리 밑으로 거느린 애들이 몇인데요? 이제 우리도 사회적 위치와 지위가 전과 같지 않다고요.”

“그래. 더해라 더이스. 잘한다! 곧 네 목이 장대에 높이 걸리겠구나.”

물통을 꺼낸 행크가 더이스의 투덜거림에 추임새를 넣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면 물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때였다.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호화스러운 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장갑을 낀 손 하나가 빠져나왔다.

까딱이는 그 손은 마치 더이스를 부르는 듯싶었다.

갑자기 속이 찔린 더이스는 말을 몰아 부리나케 앞으로 달려갔다.

“설마 부르셨습니까?”

더이스는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세인의 얼굴과 마주치며 체증이 십 년 치 쌓이는 것을 느꼈다.

설마 들었을까?

에이, 아니겠지.

강한 거랑 귀가 밝은 거랑 상관없잖아.

거리가 꽤 되었는데, 게다가 주변이 이렇게 시끄러운데…. 설마.

뭐 그런 생각들이 더이스의 머릿속을 날아다녔다.

물론 온천 밑바닥에 누워 있던 세인이 세리스가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정도라면, 아까 더이스의 투덜거림을 듣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세인은 딴소리를 내뱉었다.

“더이스 다리가 곧이군.”

“예?”

더이스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입을 벌렸고.

세인의 어조는 시종일관 평온했다.

“그냥 더이스의 다리가 이제 곧 나온다고. 그 말을 지금 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탁.’ 소리가 나도록 창문을 닫았다.

왜인지 무안을 당한 기분인 더이스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다시 후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더이스님이나 다른 기사분들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대체 저는 왜 여기 있는 거죠?”

“세인님이 원하니까?”

행크의 무성 실한 대답 옆에서 아비게일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이 일행에 속하게 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루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개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뭔가 따지기엔 엄두도 안 나고, 결정적으로 무서웠다.

‘떠들썩하게 환영식 비슷한 축제를 했다고 이러는 거 아냐?’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었다.

이번 여행에는 더이스와 맥, 행크 그리고 아비게일이 포함되었다.

전쟁이 성큼 다가왔는데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나 싶을 만큼 거물들이었다.

그래도 세인이 원하니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

후문으로는 울프크릭도 이 여행에 끼고 싶어 했다는 말이 있었다.

눈치도 없이 말이다.

목적지를 들은 사람들은 좀 의아해하다가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역시나 세인이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목적도 동의하고 여행의 의미에도 동의하는데.

“왜 제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죠?”

울상인 아비게일이 다시 중얼거리자 홍당무를 연상시키는 얼굴의 더이스가 짜증을 냈다.

무안함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그 시간 마차 안에 있는 멜라니는 좌불안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멜라니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세리스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녀를 정말로 지치게 하는 건 정작 따로 있었다.

처음에는 탑에 갇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지금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타고 있는 이것이, 굴러가고 있는 마차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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