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47화 (247/307)

# 247

& 당신이 준 선물 속에서 (7)

묘지에서 벌어지는 망자의 연회는 귀족 집안에서 암암리에 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높은음이 있는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고 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과도한 소란을 유발하진 않았다.

아이들이 떠들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정도는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죽은 자라고 해서 지나치게 정적인 것을 좋아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묘지라고 해서 무덤만 빼곡히 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잔디 담장이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는 가운데 공터도 있었고 고급스러운 분수도 보였다.

백조 여러 마리가 모여 토해내는 물이 배수로를 따라 콸콸 흘렀다.

수로는 여러 개의 옹달샘을 만들며 파생되었는데, 그 옆에는 항상 화단이 있었다.

화단에는 사람들이 꽂아놓은 바람개비가 돌고 있었고 말이다.

공짜 음식들이 돌아다녔고 술병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낮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은 달빛 아래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빛을 등진 그림자 속에서 하얗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웃을 때 보이는 이였다.

이렇게 나름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지만 묘지에서 고기를 굽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서 먹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육포나 견과류가 다이다.

치이익.

더이스는 멍한 눈으로 돌판 위에 올라간 고기를 보았다.

붉은 고기는 금세 갈색으로 물들며 익어가고 있었다.

그로서는 지금 상황이 적응되지 않았다.

일단 그들은 마플의 무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세인과 세리스, 맥과 행크 그리고 더이스가 둥그렇게 앉아 있는 가운데 고기들이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며 익어갔다.

여기가 글리터의 밖도 아니고 세인과 기사들이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게 좀 어색했다.

게다가 세리스와 기사들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세인이 돌아왔으니 모든 게 자리를 잘 찾아가겠지만 적어도 화해를 한 상태는 아니었다.

‘어색해. 지나치게 어색해. 지금 이 상황이 미쳐버리게 어색해.’

그렇게 멍하니 고기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왔다.

인상을 쓰며 옆을 보니 행크였다.

“뭐해? 더이스? 뒤집어야지!”

누가 보면 세금이라도 횡령한 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는 행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더이스였다.

하지만 군말하지 않고 고기를 뒤집어야만 했다.

익어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으니까 말이다.

돌에 눌어붙은 고기를 집게로 당기자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늘어났다.

“그런데 마음대로 돌을 뽑아오고, 이렇게 연기를 피워도 괜찮을까요? 여기는 묘지인데 말이죠.”

더이스가 중얼거리자 행크가 그 말을 날름 받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먹는 장소를 따졌다고 그래? 전에는 시체 옆에서도 밥만 잘 먹었구만.”

“그게 아니라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이걸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이 고기를 어디에서 가져온 거 같아? 그놈들 오두막에서 가져온 거야. 걔들도 밤에 몰래 이렇게 먹는다고.”

“적어도 그 치들은 오두막 안에서 먹을 거 아닙니까?”

행크와 더이스가 투덕거리는 가운데 세인이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 잔을 맥에게 주었다.

맥은 세인이 내미는 잔을 얼른 받아들며 이 자리를 파악했다.

지금 술을 따라주는 것으로 보아, 이 자리는 격식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세인으로서는 긴 시간 동안 열심히 자리를 지켜준 기사들에게 이런 식으로 마음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밑의 사람으로서 감동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파격적이기도 했다.

그게 지금 맥이 잔에 든 술을 목으로 넘기며 쓴웃음을 짓는 이유다.

세리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인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마셨다.

그녀는 그동안 세인과의 재회 장면을 많이 상상했었다.

장소와 분위기를 여러모로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인데, 그 수많은 시나리오 중 이런 낯선 장면은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달빛 아래 공동묘지에서 술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은 정말이지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재회를 말하기도 겁났다.

지나치게 엽기적이기 때문이다.

세인이야 세리스와 기사들의 불편한 과거를 모르니 당사자들이 고역인 것을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어색한 순간은 시작도 안 했다.

세인에게서 시선을 돌린 세리스는 멀리에서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굉장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이쪽으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애만 졸이고 있었다.

세리스의 시선을 따라간 세인도 그를 발견했다.

손짓으로 그를 부르자 남자는 의외의 말을 했다.

세인만 빼고 모두가 토끼 눈이 된 가운데, 남자가 간신히 말을 마쳤다.

전령의 입장에서는 높은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말한다는 게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면 여기로 모셔오도록 해.”

“아시고 계셨습니까?”

세인이 태연히 대답하자 전령은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더이스는 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가 뻔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여기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내가 알고 있었겠어? 나도 지금 안 거야.”

기사들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세리스도 안색이 편치 못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몸을 피하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전령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등장한 사람들은 그들의 어색함을 덜어주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설마 지금 무덤 앞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겁니까?”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두르고 있는 코다로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말을 건네 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는 것은 비비안이었다.

비비안은 이제 소녀티를 완전히 벗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코다로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톡 쏘는 듯한 느낌이 많이 무뎌졌지만, 날카로운 시선은 그대로였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같이 하시죠?”

세인의 말에 코다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세인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기사들은 바로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고 말이다.

“만남을 고대했지만 이런 엽기적인 만남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비비안은 세리스의 가슴 안을 들여다본 듯한 말을 하며 세리스의 옆에 앉았다.

비비안과 코다로의 수행원들은 묘지 밖에 몰려들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코다로는 집게를 들어 고기를 돌에서 뜯어냈다.

그리고 그 뜨거운 것을 입에 넣어 그대로 씹었다.

비비안이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손으로 입가의 기름기를 훔친 코다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맛있긴 한데 너무 태웠군요. 고기를 굽는 솜씨는 높게 쳐줄 수 없겠네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정보 수집하는 인물들을 곳곳에 깔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몬먼드에서 이상한 소식이 들리더군요. 앉아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아 오랜만에 외유를 하게 되었죠. 글리터의 경비병들이 문전박대하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빨리 만나보게 되었군요.”

그러면서 내미는 코다로의 손을 세인이 잡았다.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흔들리는 팔 뒤에서 세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그렇게 만나려고 해도 성사될 수 없었던 일이 오늘 너무 수월하게 풀려버린 탓이다.

그렇게 코다로와 세인이 서로의 안부를 교환하고 있을 때 맥이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정말 둔한 행크 마저도 견디기 힘들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맥이 일어나니 잽싸게 따라 일어났다.

고기를 굽고 있는 더이스만이 상대적으로 굼떴을 뿐이다.

“뭐지?”

“여기는 저희가 끼어들 자리가 못됩니다.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세인의 물음에 답하는 맥의 말은 당연한 소리였다.

세리스까진 어떻게 비벼볼 수 있다 치자.

그동안 그녀를 의심하며 세운 대립각이 있었으니 세인이 주선하는 자리를 빌려 마주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오해를 풀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표시로 말이다.

하지만 코다로와 비비안까지 동석한 마당에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정말 아니었다.

코다로와 비비안은 번우드 지역의 왕이었다.

여기가 전쟁터 같은 피치 못할 장소도 아니고, 그 옆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시방석이었다.

세리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인의 생각은 달랐다.

“오늘은 예외로 두는 날이다. 다시 앉아.”

맥은 하지만이라고 말하려다가 난처해졌다.

여기에서 세인의 말에 토를 달면 그것도 이상해진다.

그렇게 기사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데 세인이 코다로를 보았다.

“전 괜찮습니다. 오늘은 친구를 만나러 온 날입니다. 제가 격식을 따지며 이곳에 왔다면 쉽게 글리터로 들어올 수 있었을 리도 없었겠죠? 미리 예고하는 절차를 밟아야 할 테니까요. 그런 번거로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싫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비비안님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 생각을 코다로님이 어떻게 알아요?”

코다로의 말에 비비안이 뾰족하게 대꾸했지만 정작 세인을 보고는 웃어 보였다.

“저도 친구로서 왔어요. 오랜만이에요.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날을 기다려왔어요. 나쁘지 않아 보이는 모습을 보니 정말 좋군요.”

결국 기사들은 다시 그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색함의 극치인 상황이 재개되는 것이었다.

“아비게일도 여기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도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그럴 자격이 있어.”

세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더이스는 꺼림칙한 얼굴을 했다.

아비게일이라면 이런 자리에서 기절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아마도 달구어진 돌판에 이마를 박아버릴 지도 모른다.

세인의 귀환을 축하하는 건배사 같은 것은 없었다.

고기들은 없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돌판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을 불태웠다.

술잔이 돌았고 잔에 입을 가져다 댔지만, 세인은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마시는 흉내만 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다.

기사들도 많이 마셨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마실수록 정신이 멀쩡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얼마나 무르익었을까.

드디어 세인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모인 사람들은 침을 삼키며 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세인의 이야기는 완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미리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 부분 빠져 있었다.

이건 그가 세리스에게 얼마나 솔직해지느냐에 대한 결심과 다른 문제였다.

지금 세인은 세리스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서 유미리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버리면 오히려 세리스에게 공개적인 수치를 주는 상황이 된다.

그녀의 체신을 깔아뭉개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사실을 풀어서 모두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야기 내내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리거나 마른 침을 삼키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화자가 세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그가 지금 여기에서 농담 따먹기나 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좌중을 휩쓸었다.

정신을 차린 더이스는 돌에 까맣게 눌어붙어 있는 고기를 발견했다.

하지만 집게를 가져다 대지 못했다.

오히려 집게를 내려놓으며 진작에 손에서 놓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이걸 소설로 써도, 아무도 진짜라고 안 믿어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코다로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드레퓨스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세인은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바이칼이 이노센트 힘으로 다시 일어났다면, 안타깝게도 인간과 이노센트를 가려낼 수 있다고 장담 못 합니다. 그러니 드레퓨스는 여기보다 좀 더 큰 묘지가 되겠죠.”

참으로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세인이었다.

그가 가진 힘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렇군요. 이거 참. 카드라도 치고 좀 더 천천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코다로는 피식 웃으며 품속에 든 카드를 살짝 보여주었다.

그리고 미련을 털어버리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앉아 있는 세인에게 말했다.

“갑자기 바빠지게 되었군요. 다음은 전쟁터에서 봅시다. 비비안님과 저는 다시 만날 그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 얼마 남지도 않은 것 같지만요.”

“왜 또 저를 끼워 넣는 건데요?”

투덜거리며 일어난 비비안이 세인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세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거짓말도 밥 먹듯이 쳐본 사람이 친다고, 거짓말을 할 때는 코다로님처럼 능숙하게라도 쳐야 하는 거예요. 어중간하게 치면 지금처럼 간파당하기 십상입니다.”

비비안은 노려보는 코다로의 시선을 무시하며 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인은 그 손을 잡았다.

비비안의 손은 매우 부드러웠다.

그리고 따뜻했다.

그녀가 품은 우정처럼 말이다.

“그럼 코다로님의 말처럼 전쟁터에서 뵙겠습니다.”

참전이라는 무거운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버리는 비비안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세인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일단 쉬세요.”

사람은 누구나 기대심리가 있었다.

긴 전쟁은 백 년을 수월히 넘기기도 한다.

그러니 드레퓨스가 전쟁준비를 오래 하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이나 격렬하고 긴 전쟁을 치르겠다는 의지로 해석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뜬구름같은 희망을 품고 기대하기도 했다.

드레퓨스가 야욕을 접고 점령한 땅에 만족해줬으면 하는 기대 말이다.

그 자리에 머물러서 더는 다가오지 말아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로써 산산조각이 났다.

이제는 전쟁이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전쟁이었다.

이노센트까지 얽힌 대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와 웅크리고 있었다.

비비안과 코다로는 세인과 회포를 풀 여유도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붉은 피가 산천을 뒤덮는 미래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미래를 예감한 코다로는 길게 하품을 했다.

그는 비비안이 인사를 마치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일행에게서 약간 떨어져 등을 돌린 상태로 말이다.

그는 갑작스러운 개전 소식에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드레퓨스 놈들과 한바탕할 것은 짐작해본 일이었다.

거기에 이노센트가 끼어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더욱 강한 괴물이든 약한 괴물이든 놀랄 것도 없었고 어차피 인간과 양립할 수가 없었다.

싸워야 할 때가 온다면 전력을 다해 싸우면 그만이다.

생각해보면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중요한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런 전우들과 다시 한번 싸운다니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아니, 한 명이 빠졌나.”

피식 웃는 코다로에게 어떤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환청처럼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여전히 좋아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도련님.”

기억 저편으로 묻어 놓았던 집사의 목소리에 코다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는 비비안뿐이었다.

비비안은 코다로의 표정을 보고 놀리듯이 말을 던졌다.

“뭐예요? 유령이라도 본 그 표정은?”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가… 아, 아뇨. 아닙니다.”

코다로의 말을 들은 비비안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알듯 모를 듯한 얼굴.

하지만 그런 얼굴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앉아 있는 세인과 그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코다로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런 비비안은 세인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접은 모습이었다.

세인의 힘이 강하다고 해서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인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염려했다.

“그만하고 가자고요.”

“착각이었나 봅니다.”

“착각은 아닐 거예요.”

“예?”

“아까 이 묘지에 들어서며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 목소리가 누군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자 기억이 나더군요. 그리고 그제야 내용이 이해가 되었어요. 그 내용이 뭐였는지 알아요?”

“….”

“조카야. 지금 네 모습을 보니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라는 내용이었어요.”

비비안과 같이 걷는 코다로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 후로 둘은 묘지를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말을 아꼈다.

아마도 각자의 여운에 빠져 있는 듯했다.

말에 올라타는 코다로를 보며 비비안이 말했다.

“이제 전쟁이군요. 피할 수 없는 전쟁.”

“이 전쟁은 전과 다를 겁니다. 우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으니까.”

“왜인지 신나 보이는 건 제 착각인가요?”

훈계하려는 듯한 표정의 비비안 앞에서 코다로가 시원하게 웃었다.

참으로 사악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겠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기쁩니다. 전쟁터는 제 남성성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장소거든요.”

왕이 아닌, 미치광이나 할법한 말에 비비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코다로의 남성성이라는 것이 밤에 홀딱 벗고 그림을 그려대는 것이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걸 새삼 전쟁터에서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의식도, 기겁할 정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따위 것을 왜 전쟁터에서 재확인해?

“그건 예술성이고.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남성성이라고요. 차이가 있습니다. 차이가!”

“뭐에요?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뭔가 넘겨짚고 말하지 말아요.”

짜증을 내는 비비안 옆에서 코다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말머리를 돌리며, 세인도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궁금해졌다.

결론만 말하자면 세인은 사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아쉬움도 없었다.

그게 바로 마플의 무덤 앞에서 미련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세인을 주위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묘비에 어떤 글을 새기실 거예요?”

세리스의 물음에 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급할 건 없어. 천천히 생각해봐야지.”

그러면서 손을 내미는 세인이었다.

세인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본 세리스는 그의 손을 잡았다.

지나치게 꽉 잡았지만, 세인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인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뒤늦게 취기가 올라와 더이스의 걸음걸이가 지극히 불안정해 보였다는 것만 빼면 괜찮은 편이었다.

보다 못한 행크가 더이스에게 한소리 했고 말이다.

“더이스. 이봐. 왜 옆으로 걷는 건데? 너는 왜 술만 취하면 그 꼴이냐?”

“저는 멀쩡한데 질문을 던진 쪽의 눈이 옆으로 삐뚤어져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으이그. 많이 취했군.”

그렇게 묘지를 빠져나오는데 세인은 예기치 않은 장소와 맞닥뜨렸다.

들어올 때와 다른 길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처음에 이것을 보지 못한 이유는 안내자가 이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세리스는 멈추어 서 있는 세인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왜 멈춰 서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역시 속내를 쉽게 간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너무 좋았다.

세인의 시선을 따라간 세리스는 공터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무덤을 보았다.

“아는 분의 무덤인가요?”

세인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짓는 표정만으로도 세리스는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하긴 전혀 모르는 사람의 무덤이라면 이렇게 멈춰 설 일도 없는 거겠지 싶었다.

“함께 나눈 시간 속에서 나도 행복했다.”

세인은 작게 중얼거리며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중얼거림은 묘비에 적혀있는 글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세인 일행이 떠나고 나서도 공동묘지 내부에서는 연회가 이어졌다.

세인을 위해 모여든 사람 중에서도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건 알 수가 없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기온이 낮아졌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벌레 소리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을씨년스러움만이 정적과 함께 묘지를 채웠다.

산 자들이 자리를 떠나자 공동묘지는 원래의 풍경을 회복했다.

구석에 있는 무덤은 그대로였다.

묘비에 적혀 있는 글도 여전했다.

「당신이 준 선물 안에서, 나는 행복했습니다.」

- 아스칼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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