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46화 (246/307)

# 246

& 당신이 준 선물 속에서 (6)

글리터 전체가 시끄러울 때.

거리만큼은 아니지만, 평소보다 밝게 빛을 밝히고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외곽지역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라고 해서 을씨년스러운 곳이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자 당연히 시체도 아무 곳에나 버리지 않게 되었다.

아비게일은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묘지를 특별히 따로 조성하는 것을 기획했다.

그리고 그걸 세리스와 의논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이건 세리스로서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세인은 전쟁에 대해서는 평소와 완전히 다른 자세를 유지해왔다.

그러므로 그 보상에 대해서도 차등을 두긴 했는데, 죽은 후에도 그렇게 다른 대우를 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유족 입장에서 누구는 좋은 묘지에 가고, 누구는 그럭저럭인 곳에 묻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돌아온 세인은 그걸 어떻게 바라볼까?

물론 왕족이야 따로 묻히는 장소가 있었다.

문제는 일반인들에 대한 적용이었다.

결국 아비게일의 계획은 완전히 통과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적용하게 된다.

마플이 묻힌 곳은 그렇게 만들어진 영역이었다.

따뜻한 볕이 드는 데다가 잔디가 이불처럼 깔려있고, 풀로 만든 벽과 조형물들이 세워진 곳은 놀이 공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묘지의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많이 가신 곳이었는데 오늘따라 많이 꾸며져서 음산한 기분이 아주 덜했다.

은장식으로 된 램프들과 은빛 줄들이 나무마다 쳐져 은은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심지어 낮은 음악이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넓은 묘지 안은 조심스럽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마족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좋은 묘지에 묘지기가 없을 리가 없다.

평소 튼튼한 장정 다섯 명이 교대로 일을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단 한 명뿐이다.

게다가 그는 평소 묘지기로 일하던 자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오늘은 특별한 날임에 틀림이 없다.

“오시는군.”

램프를 든 아스칼리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도 많이 늙었다.

하지만 줏대만큼이나 꼿꼿이 등을 펴고 서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그렇게 아스칼리온은 공동묘지의 초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램프는 묘터의 마지막 음산함을 씻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멀리에서 아스칼리온을 발견한 세인은 약간 의아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초저녁의 기운과 함께 나타난 세인은 혼자였다.

역시나 그는 시끌벅적한 거리를 선택하지 않고 이곳부터 찾은 것이다.

“아스칼리온?”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시군요.”

“자네는 늙었군.”

세인의 농담 같은 말에 아스칼리온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런 아스칼리온을 바라본 세인은 고개를 돌려 공동묘지를 살펴보았다.

높은 잔디 담장이 쳐져 있었으므로 내부까지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수많은 인기척이 안쪽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망자 연회입니다. 코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지원했습니다. 지원자가 너무 많이 몰려 추첨으로 뽑아야 했는데, 그때 탈락한 사람들의 실망한 표정을 영주님이 직접 보셨어야 합니다.”

아스칼리온은 아직도 세인을 영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긴 아레이즈의 사람들에게는 세인은 영원한 영주님일 것이다.

때론 그게 왕보다 더욱 무게감 있는 호칭일 수도 있었다.

아스칼리온은 램프를 받아들려는 세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제가 안쪽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영주님. 잔디 담장이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어서 길 찾기가 힘들거든요. 할 일 없는 정원사들의 유일한 악취미입니다.”

“망자의 연회라면, 당신 믿음에 반하는 것일 텐데 이렇게 동참하는가?”

망자의 연회란 유령을 적극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의식이었다.

밤이 다가올 때 죽은자의 지인들이 모여 조용한 파티를 열면 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는 미신 같은 것이다.

그 목소리란 것도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접할 수 있다고 쳐봐야 짧은 몇 문장 정도였다.

당연히 아스칼리온이 가진 종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집착과 미련이 빚어낸 환청 정도로 규정하고 있었다.

글리터의 코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아비게일에게 세인이 묘지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묘지로 몰려들어 파티를 열었다.

이는 세인의 귀환을 환영하는 의미이자, 세인을 위로해 주려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 정도라면 저 위에서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장난스럽게 응수하는 아스칼리온의 윙크 앞에서 세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늘의 아스칼리온은 약간 들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오랜 시간 후에 만나는 세인이니까 당연하다고 말해야 할까?

세인은 아스칼리온의 왜소한 등을 보며 걸었다.

노인은 비틀거리지도 않고 좁은 길을 요리조리 돌며 세인을 인도했다.

마플이 잠든 곳을 향해서 말이다.

어느덧 하늘 위에는 불타는 노을의 몸부림이 한창이었다.

낮이 능선이라는 잠자리에 들려 하자, 묘지를 채운 불빛이 밤에 다가서며 더욱 강해졌다.

아스칼리온 뒤에서 걷는 세인은 문득 신부가 생각났다.

하지만 구태여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환생이란 것 역시 아스칼리온의 믿음에 반하는 것일 터였다.

낮게 깔리는 바이올린 소리와 귀뚜라미의 울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다시 입을 연 것은 아스칼리온이었다.

그는 세인에게 어딜 갔다 왔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세인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던질 법한 질문인 것이다.

“요즘은 어떠십니까?”

“뭐를?”

“마음 말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좋진 않지. 그러고 보니 당신과 나는 많은 고행을 함께 하는군. 전에 당신이 내 발을 씻겨줬을 때가 생각나. 그때 정말 많은 위안이 되었었는데…. 그런데 오늘의 이런 연회는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어. 마음은 고맙지만 조용히 왔다 가고 싶었다.”

그러자 아스칼리온이 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죽은 자를 이미 꿈에서 봤거든. 거기에서 그녀와 나는 충분한 교감이 있었어. 그래서 오늘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야. 나도, 그녀도 이제 섭섭함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다시 가능하다면 짧게나마 듣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자 세인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연한 말이었다.

그리고 아스칼리온은 그런 세인의 미소를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인자함과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이었다.

“죽은 사람을 보고 싶은 거야 당연하죠. 최근에 제 친구가 죽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는 아니고, 글리터에 정착하고 나서 새로 사귄 친구입니다. 그는 이상한 노래를 자주 불렀죠. 평상시에 욕도 많이 먹는 괴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괴짜도 가끔 맞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는 이런 말도 있더군요.”

“그게 뭐지?”

“죽음은 이별이 아니라 배웅이라고 말하더군요.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소리입니다. 그러니 나의 현명하시고 자애로운 영주님. 잠시 벌어지는 헤어짐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헤아릴 수 없는 섭리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또다시 말이죠.”

세인은 아스칼리온의 위로 앞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굳어지는 통로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한 사람이 튀어 나왔다.

상대는 낡은 옷을 걸친 마족이었다.

어찌나 오래된 옷을 걸치고 있는지 누더기가 따로 없었다.

저런 옷은 기워봤자 입고 다닐 물건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세인은 감회가 서린 눈으로 마족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그 옷은 아레이즈 시절 병사들에게 지급되던 옷이었다.

코어 지역에 사는 남자.

지금 나타난 남자는 분명 저것보다 훨씬 좋은 옷들이 옷장에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이 옷을 입고 나왔다.

그리고 그동안 잘 보관했다는 것도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세인을 발견한 남자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더니 옆으로 물러섰다.

길을 비켜준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아스칼리온과 함께 남자를 스쳐 지나갔다.

남자가 멀어지자 아스칼리온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저 사람처럼 저도, 다른 사람들도 영주님에게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죽은 자가 있다면 분명 그 선물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영주님. 우리는 모두 그런 시간을 선물 받아서 매우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신 장본이십니다.”

아스칼리온의 한마디 한마디에 무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제 모퉁이만 돌아가면 나올 마플의 무덤 근처에서, 아스칼리온이 멈춰 섰다.

그리고 그때 세인과 그의 눈빛이 마주쳤다.

“고맙다, 아스칼리온.”

그러자 아스칼리온이 웃었다.

주름진 그 웃음이 마플을 만나기 직전인 세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그리고 아스칼리온은 통로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 세인은 옷깃을 매만졌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하얀 꽃들로 장식된 작은 무덤이 보였다.

그건 마플이 잠든 장소였다.

램프의 불빛과 달빛이 섞인 빛을 받으며 침묵하고 있는 곳이 세인을 반겨주었다.

그 장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인을 반겨주었다.

세인은 천천히 걸어가 마플의 무덤 앞에 섰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잠든 장소에 홀로 서 있는 묘비는 밋밋해 보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어떤 글귀를 적어 넣을까 생각하다가, 세인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니 세 명의 기사가 보였다.

맥과 더이스 그리고 행크였다.

마족이라서 나이를 더디게 먹긴 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늘어난 주름이 반가움을 희석할 수는 없었다.

세인이 완전히 돌아서서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세 명의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털썩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은 세 명의 남자는 말을 고르느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숙인 남자들의 꽉 쥔 주먹이 세인의 눈에 들어온다.

맥의 입이 열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저희는 영주님이 아끼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고, 영주님의 가족을 의심….”

“일어서라.”

세인의 차가운 음성이 맥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라.”

약간 커진 눈으로 세인을 바라보는 세 남자에게 세인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고했다. 그리고 자리를 지켜줘서 고마워. 정말 최선을 다해 글리터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나는 당신들에게 감사한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어.”

그리고서 세인이 손을 내미는데 감히 그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 명의 기사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그들의 어깨를 쳐주는 세인이었다.

맥과 더이스 그리고 행크의 얼굴을 바라본 세인은 마지막으로 마플이 잠들어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다행이다.”

그의 말에 세 남자는 가슴이 격동하는 것을 느꼈다.

나이 먹고 주책이지만 코가 찡해지는 느낌도 동시에 받았다.

어디를 갔다 온 거냐?

왜 자리를 비운 거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

‘이랬다, 저랬다.’ 하는 그런 말은 그들 사이에 중요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충성과 그 위에 다져진 유대.

그리고 죽음을 넘나들며 서로를 확인한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원망하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저 다시 이렇게 만나 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인과 세 명의 기사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플의 묘비가 보이는 바로 앞에 앉아,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세인은 기사들의 가족에 대해 안부를 물었고, 건강 상태를 알아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어제 만난 것처럼 행동한다.

여기에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광경에서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동안 힘든 것은 없었나?”

지나가듯 던지는 질문에 맥이 소리 없이 웃었다.

왜 없었겠는가?

세리스와의 마찰도 그렇고 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도 사람인지라 세인의 귀환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너무 길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없었습니다. 이제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인이 돌아옴으로써 모든 매듭은 풀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맥도 그렇고 행크나 더이스도 당연히 그렇게 여겼다.

이제는 세인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 부담감도 내려놓은 듯했다.

맥의 말을 들은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보니, 세리스가 붓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달빛 아래 홀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주위에 숨 막히는 존재감을 피력했다.

세리스는 세 명의 기사에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온 정신은 세인을 향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세리스의 눈과 세인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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