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 당신이 준 선물 속에서 (5)
세리스는 아버지가 없는 멜라니를 단속하기 위해 평소 혹독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건 세리스의 기준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세인에게 딸을 잘 키웠다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딸을 이해하거나, 보듬어 안아주려는 이해심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런 모습은 세리스가 곧잘 하는, 세인에 대한 포용적 행동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또 그건 평소 세리스의 상식적 기준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었다.
세리스는 후작가에서 고등교육 과정을 마쳤다.
대단한 재능을 가진 그녀는 그걸 아주 쉽게 해냈다.
크림힐트가 세리스를 특히 예뻐한 이유가 다 있는 법이었다.
고위 귀족이 받는 교육을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세리스는 그걸 아주 쉽게 해냈다.
그녀는 남들도 그걸 숨 쉬듯이 해낼 수 있다고 믿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세리스니까 모든 게 수월했던 것이다.
멜라니는 훗날 글리터의 주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세리스는 멜라니가 자신보다 더한 과정을 소화하게 밀어붙였다.
교육 사항을 늘린 것이다.
철저히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딸에게 잣대를 들이민 꼴이었다.
멜라니도 물론 보통 소녀가 아니다.
그녀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절대 평범한 소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멜라니가 남들보다 다르고 많은 재능을 가진 아이라고 해도, 당연히 세리스만큼은 아니었다.
훗날 세리스가 멜라니의 평가에서 많은 실망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멜라니도 세리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몇 번 이를 악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더 큰 좌절을 불러일으켰고, 극적인 반항심으로까지 귀결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아버지의 부재에 화가 난 멜라니가 세인이 세리스에게 주었던 편지를 불태운 것도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세리스는 분명 대단한 인간이다.
그녀는 엄청난 능력을 갖췄고,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성검의 힘을 빌려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남의 부러움을 사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신처럼 완벽한 존재는 아니었다.
결국 실수를 한 것이다.
세리스는 교육이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배려라고 착각했고, 정작 어루만져 주어야 할 마음에는 소홀히 했다.
세리스의 딸인 멜라니는 자신의 고민이나 괴로움을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마플이 있다고 해도 그녀의 신분은 하녀장이다.
기사들이야 세리스와 척을 지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세리스는 명령만 내리고 과제를 던져주기 바빴다.
그리고 개인 교사들은 멜라니가 보기에 엄마의 사냥개들이었다.
매일매일 쫓겨나기 싫은 구석으로 자신을 몰아대는 시끄러운 사냥개 말이다.
멜라니의 말을 듣고 난 세인은 에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에스도. 나도. 그리고 너도 평탄치 못한 삶을 살고 있구나.”
그 후에 세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약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리 위에 계속 머물며 에스와 멜라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맞장구까지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듣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라고 밝히기 전에 최선을 다해 멜라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잣대로 멜라니를 평가하거나 폄하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멜라니가 큰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다는 생각만큼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썩 달갑지 않은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도 그러했듯이.
시간이 흘러 별이 총총히 밤하늘에 뜨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수다는 끝날 줄을 몰랐다.
마차 옆에 아예 자리를 펴고 누운 그들은 서두르는 것 하나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에스에게도 뭔가 대화가 필요했다.
그녀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사람은 언어로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고, 이 인간적인 행위가 때로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위안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런 작용이 두 소녀에게 일어났다.
세인은 멜라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쩌면 자신과 할아버지의 관계가, 지금의 자신과 멜라니의 관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인은 할아버지를 이해했다.
할아버지의 상황을 생각하면 후계자를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게 비인간적이라고 해도 누가 그를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해한다는 게 곧 세인이 할아버지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기꺼이 그걸 바라고, 할아버지에게 친밀감을 느끼거나 좋은 감정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해는 하지만, 충분히 공감은 하지만 동시에 증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것도 치가 떨릴 만큼 말이다.
‘지금의 멜라니는 자리를 비웠던 나를 용서할까?’
세인은 멜라니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와 그는 서로 모른 채로 너무 오랜 시간동안 단절되어 있었다.
더구나 가족이라고 해서 관계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족이기 때문에 저절로 성립되는 좋은 관계란 것은 없었다.
거꾸로 가족이기 때문에 소홀히 대하기 쉽고, 관계에 훨씬 더 공을 들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세인의 상황은 최악인 거나 마찬가지다.
‘좋은 관계는 둘째 치고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멜라니와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을까?’
일단 애정도 평소 받아본 사람이 남에게 잘 표현할 수 있기 마련이다.
삭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딸에게 살갑게 굴 수나 있을까?
* * *
느리지만 글리터는 점점 가까워졌다.
공들여 만든 표지판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게 그 증거였다.
세 사람은 처음에 만났을 때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친해졌다.
가끔 세인의 실없는 소리도 받아주는 게 그 증거였다.
“멜라니. 같은 이름을 가지고 환생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뭐?”
“한사람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환생하는 것 말이야.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이름인 거야. 네 전생의 이름도 멜라니인 거지. 그렇다면 다시 태어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이상한 소리야. 그렇다면 동명이인은 어쩔 건데?”
“….”
* * *
글리터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밤.
세인은 멜라니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멜라니. 저번에 너무 심한 소리를 해서. 네 주변인이 죽은 건 너 때문이 아냐. 난 네가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 때문이라고는 해도 내가 너무 심한 소리를 한 거 같아. 네 이야기를 다 들어보니 내 말이 지나쳤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그러니 사과하고 싶어.”
멜라니는 세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인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추측이 맞는다면 세인은 멜라니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그녀에게 명령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세리스보다 더 고압적으로 나와도 되는 사람인 것이다.
기사들에게 전해 들었던 대로, 그렇게 잘나고 대단한 사람이라면 명령을 밥 먹듯이 내려도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상대는 최선을 다해 멜라니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그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으려고 한다는 걸, 멜라니도 이젠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멜라니를 존중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면서도 쉽게 단정하고, 자신의 경험에만 비추어 이해하거나 연륜으로 눌러버리지 않았다.
멜라니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태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멜라니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외면했던 질문을 던져보았다.
“네 이름은 뭐야? 네 이름을 알고 싶어.”
머뭇거리는 세인 앞에서 멜라니가 다시 힘주어 이야기했다.
“성이 가까워졌어. 어차피 나는 곧 진실을 알게 될 거야. 단지 지금은 당신 입으로 그 진실을 듣고 싶을 뿐이야.”
세인은 몸을 숙여 멜라니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가 멈칫거렸다.
그러다 결국 손을 어색하게나마 멜라니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세인. 내 이름은 세인이다.”
세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멜라니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엄청나게 흥분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감을 느끼고 있었어도 이렇게 확답을 듣고 나니 마음이 진정되질 알았다.
방망이 찜질을 당하듯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세인이 다시 이야기했다.
그녀가 가팔라진 호흡을 다듬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난 너의 아버지다.”
멜라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씨발.”
* * *
“멜라니. 내가 욕하지 말라고 그랬잖니.”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세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서 깨었다.
꿈속에서 자신이 무심코 한 말에 자기가 깨어버린 것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살다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눈을 반쯤 뜬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자신의 호화스러운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악몽을 꿔서인지 골치가 지끈거렸다.
방금 꾼 꿈 안에서 세리스는 멜라니가 세인에게 삿대질하며 쌍욕을 하는 것을 보았다.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꿈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세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는 흔히 자식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기 마련이다.
세리스도 멜라니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는 편이었다.
단지 몇몇 충격적인 모습만으로 멜라니가 어느 정도 막 나가긴 해도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다.
끙, 소리를 내며 세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대낮에 깜박 졸은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옷은 불편한 그대로였다.
평소대로라면 깨끗하게 입혀져 있을 흰옷에 주름이 잔뜩 만들어져 있었다.
손으로 그것을 펴보던 세리스는 세인에게 생각이 미쳤다.
“어디까지 왔을까?”
물론 매일 보고를 받고 있으니 지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인이 오늘이나 내일 당장 여기로 온다고 볼 수는 없었다.
언제 글리터에 들어서든 그건 그의 마음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커다란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 있는 세리스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젊었다.
객관적으로 세리스 자신이 봐도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물끄러미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세리스는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귀걸이를 하는 게 좋을까?”
옷은 어떻게 하지?
신발은?
망토는 하는 게 좋을까?
안 하는 게 좋을까?
세인의 소식이 처음으로 글리터 안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세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정말 하고픈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그 인내도 이제 끝이었다.
달콤한 결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현 위치는 글리터의 여왕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자면 아무리 세인이 다가온다 해도 전혀 콧노래를 부를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딸은 불과 며칠 전에 습격을 받았다.
게다가 드레퓨스와의 전쟁이 아주 뚜렷하게 가시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커튼이 쳐진 곳으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녀의 몸짓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희고 긴 손가락을 따라 촤라락 소리를 내며 커튼이 옆으로 젖혀지고, 따뜻한 햇볕이 그녀의 몸에 쏟아졌다.
길고 날렵한 두 다리 사이로 빠져나간 빛이 방에 긴 세리스의 그림자를 부각했다.
그림자를 등진 세리스는 아름답게 번창한 글리터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은 새로 지은 커다란 성안이었다.
증축된 글리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하얗고 아름다운 길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가운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해진 글리터의 모습이 세리스의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세인은 분명 이렇게 거대해진 글리터를 보고 흡족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노고를 인정해 주겠지.
그렇게 그에게 있어 그녀가 얼마나 보배로운지를 확인받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증축된 커다란 성을 중심으로 찌를 듯한 지붕을 가진 고급스러운 건물들이 코어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코어 지역은 전보다 훨씬 확장되어 있었다
그 둘레로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전보다 더욱 넓게 퍼져 있었다.
직선으로 달리는 킹스로드가 도시의 중심선을 그었고, 그 좌우로 높고 넓은 건물들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들을 더욱 잘 정돈하는 것은 아름답게 선을 긋고 있는 도로들이었다.
아비게일의 병적인 섬세함이 잘 반영된 설계와 드워프의 기술력이 만난 건물들은 하나같이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새로 지어진 성벽과 광장.
아름다운 분수대와 식물들이 조화를 이룬 지역이 서로 뽐내듯 밀집해 있었다.
그 안에는 엘프와 드워프, 인간들과 마족이 서로 어울려 살아갔다.
글리터의 외곽 쪽으로는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지역이 물방울처럼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각기 크고 작은 담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것은 성벽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높고 견고한 장벽을 자랑했다.
형식도 가지각색으로 돔을 씌운 작은 도시도 보인다.
북부는 분명 추운 지역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온기로 인해 따뜻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펼쳐진 글리터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세인이 있었다.
물론 그 거리는 너무 멀어서 세인과 세리스가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글리터를 내려다보며 세인을 상상하는 세리스도 자신이 보는 풍경 안에 이미 세인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몰랐고, 그건 세인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시끄럽군.”
세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비게일은 대놓고 세인을 환영하는 대신 갑작스러운 축제를 발표해 버렸다.
그 축제의 주제는 운동경기였다.
세인이 세리스와 헤어지기 전에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고 싶다는 말 때문에 생겨난 대회가 최근에 열렸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한참 후에 열려야 하는데 말이다.
각종 구기 종목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드러내놓고 뭔가 하진 못하지만 결국 이건 글리터에 돌아오는 세인이 벌어지는 경기를 보고 흐뭇한 마음을 가지기를 노린 포석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린 경기장들은 매우 떠들썩했다.
거리도 어린 엘프들이 들쑤시고 돌아다니는 통에 난리가 났다.
전에도 그랬지만 마치 어린 엘프들은 축제를 위해 태어난 생물 같았다.
세리스가 이렇게 위에서 지켜봐도 말이다.
“쓸데없는 짓을.”
세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