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43화 (243/307)

# 243

& 당신이 준 선물 속에서 (3)

“걱정이 많아 보이는군.”

중얼거리는 울프크릭 앞에서 아비게일이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손과 눈동자를 한자리에 못 두고 촐싹거리는 아비게일을 본 울프크릭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방법? 방법이야 찾아보면 당연히 있겠지.”

아비게일은 꽤 나이가 들었음에도 성격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중책을 맡은 그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울프크릭은 가끔 그런 아비게일을 보며 참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어떨 때는 이렇게 여과 없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도 있었다.

“어떨 때 보면 자넨 참 변함없이 등신 같아.”

“….”

“아… 아닐세. 커흠. 커흠흠! 그래 우리가 어디까지 결론 내렸지?”

“아직 아무 결론도 안 내렸는데요.”

“그래. 그러니까 성대한 환영회를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영 아니라는 말이지? 그리고 그 친구는 호화롭고 그런 건 싫어했으니 말이야.”

크릭이 본론을 꺼내 들자 방금 전의 이야기를 잊는 아비게일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속을 털어놓았다.

“세리스님이나 기사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지 못하는 건 이해가 됩니다. 그러기에는 그분들의 마음 안에 깊게 들어와 있는 분이니까요. 그리고 마플님의 죽음은 저도 애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사적인 영역만 볼 게 아니라는….”

그때 크릭이 손을 들며 아비게일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이봐 아비게일. 인간인 자네보다 드워프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이상하지만, 그러다가 자네 사회에서 몰매 맞을 수도 있어. 이건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야. 왕의 귀환이라고. 이럴 때는 보통 때처럼 안 나대는 게 좋지 않겠나? 여태껏 얌전하게 굴다가 갑자기 왜 이렇게 하는 건데? 돌출하려고 하느냔 말이야. 그냥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뒤에서 권력의 단맛이나 즐겨.”

“권력의 단맛은 느껴본 적도 없고요. 이건 공적으로 처리해야 할 영역이라고요.”

“그럼 공적으로 밀고 나가든지. 그래서 몰매 맞으라고.”

아비게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에게도 세인님은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분이십니다. 기사들이 맹목적인 충성심에 기인하는 관계라면, 그분은 저를 인정해줬고 직접 발탁해주셨어요. 그리고 명예도 주셨습니다. 제 이름을 딴 거리가 아직도 버젓이 있는 게 그 증거죠. 저는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 그런 영역에서 제가 할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분의 신분을 생각해 봐도 조촐한 환영식이 말이나 됩니까? 있는 듯 없는 듯의 환영식이요?”

이번에는 울프크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격식에 기대지 않아도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왕이 나오기도 하는데, 울프 크릭이 보기에 세인이 그런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규칙이란 것은 모두를 위해 쓰이기도 하지만 왕권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세인의 경우에는 그런 룰조차 필요가 없었다.

강하고 충성심 있는 핵심인사들을 거느린 그는 마음대로 룰을 만들었다가 무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보통의 왕들은 절대 그렇지 못한다.

왕이라고 다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이 만든 규칙에 갇혀 사는 게 왕이란 존재다.

크릭도 지금 아비게일의 마음을 알지만, 그가 하려는 행동이 현명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언을 해주었다.

“누군가를 생각해 줄 때는 말이야. 좋은 것을 해주려 하는 게 관건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이 첫째라네. 그렇게 보면 자네는 지금 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 거야. 그가 전과 다르게 변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성대한 환영식을 싫어할 거야.”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 백성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포장하느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일단 사람을 보내 의향을 넌지시 물어봐. 그 후에 내가 제안할 게 있네.”

울프크릭의 말을 들은 아비게일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약간 주저하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사람을 보냈다고 세리스님이 화내면 어쩌죠?”

이야기가 끝나가는 듯하자 접시 위에 담긴 빵 위로 손을 올리는 크릭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내게 화내는 건 아니잖아. 상관없어.”

“….”

“그보다 누굴 부추겨서 거기로 보낼 건가?”

*  *  *

호화로운 홀의 중앙에 앉아 있는 바이칼은 자신의 자식인 반의 장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반은 사치스런 건물을 짓게 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기둥의 배치와 벽에 붙어 있는 조각상들이 좋군.”

홀에 펼쳐진 참상에 어울리지 않게 딴소리를 내뱉는 바이칼의 안색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지금 그는 반을 추종했던 열성적인 신하들을 살해한 직후이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발은 시체들이 흘린 피로 축축해져 있었다.

하지만 바이칼은 그 피 웅덩이에서 발을 빼내려고 하지 않았다.

피에 대한 혐오감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바이칼은 병석에 누워있었을 때보다 매우 젊어 보였다.

그리고 얼굴에 위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닌 티가 역력하게 났다.

하지만 드레퓨스에서 그런 반을 보고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다들 충성을 맹세하느라 바빴다.

신하들은 반이 사라지고 바이칼이 나타나자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충분히 감을 잡는 것이다.

눈을 반쯤 감은 바이칼은 포도주를 채운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입가로 가져갔다.

그렇게 바이칼의 입술과 점점 가까워지는 포도주잔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천장에서 떨어진 액체 한 방울은 잔 안의 술과 만나 파문을 일으켰다.

그뿐만 아니라 술이 튀어 바이칼의 뺨에 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이칼은 개의치 않고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기울였다.

그는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던 그가 최근에 극적으로 주목받은 것도 그와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려면 어지간한 기적 가지고는 불가능했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그 의미는 바로 홀 위를 가득 채운 검은 천장이었다.

바이칼의 머리 위에서 스르륵거리며 천장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검은 부분은 이곳뿐만 아니라 궁전 전체를 다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바이칼은 굳이 천장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포도주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리고 장난감처럼 빙빙 돌렸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군.”

바이칼이 앉아 있는 의자 뒤로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무엄하게도 뚜벅뚜벅 걸어와 바이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이칼은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입술이 열리며 나오는 음성에도 노기는 없었다.

“가미긴. 나의 친구. 기분 좋게 한잔하지 않겠나?”

바이칼의 등 뒤에 서 있는 가미긴은 눈가를 좁혔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거부의 기척을 읽었는지 바이칼이 입맛을 다셨다.

“좋은 술인데. 할 수 없군. 혼자서 마셔야지.”

바이칼의 술병 안에 든 것은 순수한 포도주가 아니었다.

홀의 중앙에 작은 언덕처럼 쌓여있는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를 섞었다.

그 함량이 반을 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피의 양이 만만치 않을 텐데 바이칼은 꿀꺽꿀꺽 잘도 마셔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많은 피를 마시지 못한다.

지금 앉아 있는 바이칼이 순수한 인간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잠시 다정하게 바이칼의 어깨를 어루만지던 가미긴은 몸을 움직여 바이칼의 앞에 섰다.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긴 머리의 미남자가 바로 가미긴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이 지나쳐서 여성적인 아름다움마저 지니고 있었다.

지금 피바다가 된 홀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지금의 가미긴일 것이다.

지금의 가미긴은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인간으로 보였다.

그만큼이나 그의 위장은 완벽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서 성전을 잘 이끌길 바란다.”

“물론이지. 네가 날 죽음에서 건져주었으니 뭐든지 하겠다.”

바이칼의 대답에 훌륭한 허수아비를 보는 듯, 가미긴의 눈에 만족감이 서렸다.

왕들은 어둠의 힘이 접근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세인의 시대에 골디온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대의 몬스터들은 왕에게 접근하는 게 힘드니 영웅을 만들어내려고 했었다.

그 허수아비로 세상을 정복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 했다.

그런 몬스터들과 지금 여기에 있는 가미긴은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는 가미긴은 고대의 악이라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있던 몬스터들 보다 가미긴의 힘이 더 우월했다.

과거의 이노센트들은 왕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이건 고대의 헤카테 왕이 휘둘린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노센트라고 해서 왕들에게 접근해 그들을 무조건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두 번째 조건이 필요했다.

왕 스스로 타락을 원해야만 한다.

가미긴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덩치의 바이칼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야수처럼 보였다.

바이칼은 그가 보낸 인생 중 어떤 시기보다도 건강하고 혈기가 넘치는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글리터를 향해 진격할 수 있을 듯 보인다.

그런 그가 지금의 상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가미긴 때문이었다.

가미긴이 접촉했을 때 바이칼이 그를 거부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반에 의해 무기력함을 느끼며 죽어갔던 바이칼.

독살로 인해 무덤까지 들어갔던 바이칼의 입장에서는 그를 다시 살려줄 수 있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만물이 공유하는 공포니까.

솔직히 말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이칼이 스스로 간절히 원했으니 가미긴은 그를 얼마든지 타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바이칼. 너는 네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안겨주었던 자식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네 죽음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거나 호응했던 놈들에게도 벌을 내리고 있어. 반은 이미 죽었을 거야. 그렇다면 이제 남은 복수는 한사람에게로 국한되겠군.”

가미긴의 말에 바이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내 손으로 끝장내야만 했어. 하지만 세인이 죽였다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강해진 내가 그를 죽일 테니까. 글리터를 잿더미로 만들고 세인을 죽이겠다.”

그런 말을 하는 바이칼은 왕도 인간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냥 괴물이었다.

가미긴은 자신이 만든 작품을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대전쟁이다.

드레퓨스와 글리터가 아주 크게 붙을 것이다.

대륙 전체는 전쟁의 참화 안으로 끌려들어 갈 테고 말이다.

그동안 대륙의 중앙에서 자리매김한 드레퓨스의 힘은 엄청났다.

그거야 전쟁을 대비한 글리터 쪽도 마찬가지다.

그런 판국에 이노센트들까지 나설 것이다.

얼마나 큰 소란이 벌어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피의 강 정도가 아니라 피의 바다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바이칼 난 너를 믿는다.”

네가 훌륭한 허수아비라는 것을.

이런 내심이 생략된 말에 바이칼은 다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날의 그를 지탱하는 것은 피에 대한 갈망이었다.

대륙에 대전쟁을 불러일으킬 욕망이라지만, 그 수준은 사람의 피를 빠는 모기가 원하는 갈망만큼이나 조잡했다.

하지만 가미긴은 그걸 비웃지 않았다.

조야해도 좋은 도구 역할을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바이칼에게 등을 돌린 가미긴은 천천히 홀을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쇠사슬로 묶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병사들을 지나쳤다.

그 무리는 바이칼의 다음 제물이었다.

가미긴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의 사람들을 지나쳤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그의 방은 의외로 호화스럽지도 않았고 시중드는 하인들도 없었다.

아주 소박하고 정갈한 방이었다.

침대도 1인용에 낡은 이불만이 전부였다.

침대 위에 팔베개하고 누운 가미긴은 검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을 이룬 검은 물체들은 거미들이었다.

어지간한 성인 남자 크기의 거미들이 천장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털북숭이인 그중 한 마리가 실수로 타액을 바이칼의 잔에 떨어트린 거였고 말이다.

커다란 외눈이 박혀있는 거미의 몸체 하나가 점점 가미긴에게 접근했다.

굵은 실을 타고 내려온 거미의 눈이 가미긴의 잘생긴 얼굴과 접촉할 듯이 가까워졌으나, 가미긴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동류였으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가미긴.”

거미에게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들을 맞이할 준비는?”

“위에서 계속 지켜봤으니 잘 알 거 아닌가? 이미 끝났다.”

“어둠의 현자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도 되나?”

“그분의 궁금증인가?”

“아니.”

루시드를 염두에 둔 말에 거미가 부정을 표시했다.

그러자 가미긴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고개는 끄덕였다.

“넌 왜 우리의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지?”

거미가 질문은 던진 요지는 이것이었다.

가미긴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쭉 존재했던 이노센트다.

그라면 몬스터들이 밀집한 세계수 지역에 들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초반에나 연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줬을 뿐, 대부분 시간은 홀로 세상을 떠돌면서 보냈다.

그리고 이노센트들이 세상에 강림할 시간이 되자 모습을 드러내고 드레퓨스에 수작을 벌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걸 묻는군. 도움을 주면 너희들을 소환하지 않잖아.”

“단지 그것뿐인가?”

“그리고 내가 도움을 주게 되면 재미가 없으니까. 왜 자신들의 기원이 뭔지도 모르고 뿌리를 망각한 놈들에게 계속 도움을 줘야 하지? 배은망덕에는 무시가 답이다.”

역겨운 악취를 내뿜은 거미는 ‘흐음.’이라는 소리를 냈다.

거미는 가미긴 보고 미친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정말로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네가 생각하기에 우리들의 승산은 어느 정도냐? 객관적으로 말해봐라.”

거미의 질문에 가미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승리한다.”

“가미긴. 쉽게 대답할 일이 아니다. 승산을 알아야 대비를 하고, 희박하더라도 승산을 끌어 올릴 수 있다. 계속 세상에 머무르며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본 너라면 객관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 그래서 물어보는 것이다.”

“내 대답은 똑같다. 루시드 님의 힘도 힘이지만, 내가 너희들과 함께한다. 나를 보험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우린 기필코 승리할 것이다. 이건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이야.”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가미긴이 웃었다.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외눈에 담은 거미가 줄을 타고 다시 천장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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