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 당신이 준 선물 속에서 (1)
시간이 흐르자 글리터 쪽에서는 사람들을 몬먼드 시에 파견했다
그리고 그쪽의 책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전까지는 용병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신경을 써도 글리터에 친화적인 헌터들에게 더 썼던 것이다.
헌터들에 비하면 용병들 이야기는 변두리 이야기였다.
그런 일까지 신경 쓰기에는 평소 글리터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글리터도 용병들에 대한 관리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세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납작 엎드려 있던 몬먼드의 권력자들은 글리터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리고 장시간 회의를 거친 끝에, 여러 용병단체에 현상금을 내걸었고 각 자유도시의 치안대를 결집해 추적하게 시켰다.
치안대는 도시 내의 일에만 집중하지 어지간해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데 이번 일로 예외를 둔 것이다.
이것만 봐도 몬먼드 같은 자유도시가 이번 사안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자유도시라고 해서 글리터와 동등한 관계인 것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글리터의 땅에 세를 들어 사는 것에 불과하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공생하고 있다지만 엄격히 굴자면 글리터 쪽이 압도적으로 강자였다.
그러니 글리터의 압력을 받은 자유도시의 권력자들은 보여주기식으로라도 굴기 위해 능동적으로 나섰다.
불시검문이 벌어졌고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잣대가 용병들에게 적용되었다.
물론, 콩과 쌀을 골라내듯 심문하는 통에 반발하는 용병들도 있었다.
하지만 자유도시 쪽에서는 이미 글리터에게 여차하면 군인들까지 동원하겠다는 귀띔을 받은 마당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자유는 반 이상이 날아간다.
결국 알아서 기는 수밖에 없으니 용병들 사정을 봐줄 수도 없었다.
무장 병력이 멀리까지 나가서 쥐 잡듯이 용병들을 잡아댔다.
그중 심심찮게 무력충돌도 일어났고, 그 빈도는 점점 잦아지고 수위가 높아졌다.
도망가서 흩어진 용병 중 시체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호크아이였다.
이렇듯 물밑에 있던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세인의 주변만 쥐 죽은 듯 잠잠했다.
세인이 태도를 바꿔 반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드레퓨스의 상황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려면 글리터에게서 소식을 전해 받아야만 했다.
즉 전서구로 이미 중요한 소식들을 주고받았다는 뜻이 된다.
그게 바로 용병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가운데, 그의 주위가 태풍의 핵처럼 조용한 까닭이다.
주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세인은 이제 때가 되었다 여기자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몬먼드를 떠나려는 세인은 슈나이더가 동행하리란 것을 잘 알았다.
슈나이더 자체가 뛰어난 검사지만 그의 뒤에 있는 블랙 라이어드 상단의 병력도 무시 못 할 사람들이었다.
반의 사병과 싸워 이긴 놈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 부담스럽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멜라니가 세인의 품에 들어온 이상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세인의 능력을 따져 보자면 슈나이더가 가진 힘은 의미가 없었다.
다만 세인이 슈나이더에게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그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이다.
세인도 사람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는 본인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슈나이더의 딸을 무참히 살해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마당에 따라붙는 슈나이더를 내치기 어려웠고, 슈나이더는 반을 배신함으로써 입장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떠나기 전 세인은 에스와 면담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다.
에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밝히고, 에스의 미래에 대해 의논하고 싶었다.
그러나 멜라니 곁에 붙어 있는 에스는 그 자체로 매우 행복하게 보였다.
생을 뛰어넘은 에스메랄다의 모성애가 보답을 받았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세인이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멀리에서 에스를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등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놓아둬 보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세인이었다.
그가 보기에 에스는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놀랄 만큼 성숙한 면이 있는 아이였다.
저렇게 평온한 얼굴을 해 보이는데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닌 것 같으면 나중에 개입해도 늦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멜라니였다.
멜라니는 자신 때문에 호위하던 사람들이 죽었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억지로 의연해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 세인의 눈에 다 들어왔다.
슈나이더도 그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죄책감에 대해서 뭐라 말해주기 이전에, 세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문제가 가장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참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인이야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런 쪽에 아무리 재주가 없어도,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남자가 떡하니 앞에 나타나 ‘내가 네 아빠다.’라고 말한다면 상대방이 누구든 얼마나 부담스러워 하거나 어이없어할 것인가?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성인도 낯선 사람이 나타나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한다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하물며 최근에 호위 기사를 잃은 여자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믿어줄지도 미지수였다.
부녀의 첫 만남에 글리터의 증인을 내세우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고 말이다.
막상 멜라니는 세인을 세리스가 붙여준 비밀 기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몬먼드에 글리터의 사람들이 개입해서 용병들을 쥐 잡듯이 몰아대는 걸 알 테니 말이다.
그와 연계하여 세인을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세인은 글리터의 코어 지역에서만 산다는 마족이었다.
마족이 왕녀인 멜라니를 챙긴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대놓고 물어보기도 했다.
“넌 누구야? 어머니가 내게 붙인 호위기사인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세인의 위아래를 새초롬한 눈빛으로 훑어보는 멜라니였다.
그때 세인은 빨갛게 부어 있는 멜라니의 눈가를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갑자기 정체를 밝히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편할 대로 생각해.”
세인의 반말에 멜라니는 잠깐 당혹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더이스나 맥 그리고 행크도 글리터에서 한자리하는 인물들이긴 하지만, 세리스 앞에서도 삐딱하게 행동할 정도로 간이 부은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멜라니에게 함부로 말하진 못한다.
글리터에서 세리스를 제외하면 누구도 멜라니에게 말을 편하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세인이 보여주는 반응은 멜라니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건 말건, 남들이 보기에 세인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말해주었다.
“이곳을 떠나 글리터로 갈 거야. 서두르지는 않겠지만, 뭔가 놓고 간다고 해도 그걸 챙기러 다시 여기에 돌아올 정도의 여유는 없다. 그러니 떠날 준비는 착오 없이 해라.”
“물건을 놓고 간다고 해서 바보같이 되돌아올 필요가 뭐가 있어? 심부름꾼을 보내면 되잖아.”
뭔가 분한 듯 맞받아치는 멜라니 앞에서 몸을 돌리는 세인이었다.
남겨진 멜라니는 무시당했다는 생소한 기분에 곤혹스러움을 겪었고 말이다.
그날 늦은 점심을 챙겨 먹은 일행은 크고 튼튼한 마차에 올라탔다.
에스와 멜라니는 넓고 아늑한 마차 내부로 들어갔고, 세인과 슈나이더는 마부석이었다.
마차 주위에 슈나이더의 부하들이 포진했다.
사정을 아는 누군가가 본다면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블랙 라이어드의 수장과 글리터의 주인이 마부석에 나란히 앉아 있다니 말이다.
호사가들이 이 일을 알았다면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고삐를 양손에 쥔 슈나이더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이 상황을 소설로 쓴다 해도 아무도 안 믿어 주겠군.”
슈나이더의 손이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이자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마차는 잘 닦인 몬먼드 시의 대로를 지나 바깥쪽으로 향했다.
몬먼드 시의 관리들은 떠나는 마차를 배웅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나와 길에 늘어서 있었다.
그걸 본 시민들은 상당히 어리둥절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관리들이 저렇게까지 하는 광경이 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차 안에 있는 멜라니는 창밖을 보며 소녀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정말이다.
세리스의 화가 가라앉으면 조용히 글리터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멜라니의 심정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마차가 지나가자 다시 허리를 펴는 관리가 옆에 서 있는 선배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모르겠어. 용병들 앞길이 깜깜한 것이야 알겠는데 이 도시의 미래는 알 수가 없군.”
“우리에게 불똥이 튀진 않겠죠?”
“그거야 글리터의 여왕님이 마음먹기에 달린 거겠지. 이게 바로 정체를 숨긴 높은 분이 오시면 내가 짜증 나는 이유야. 우리 앞길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한 사람의 마음에 달렸는데 말이야. 그분의 따님이 처음부터 정체를 밝히고 왔다면 우린 정말 극진히 모셨을 거야. 그런데 지금 우리의 상황을 보라고. 당장 오늘 밤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겠나? 이게 바로 아랫사람들의 고충이지.”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멜라니의 주변에서 용병들이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내막을 모르는 관리들 처지에서 보면 용병들이 억울할 만도 했다.
용병들이야 멜라니가 주변에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너무 물이 맑은 곳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고, 용병들은 자유도시가 보기에 용납 가능한 미꾸라지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된통 걸려버렸다.
자유도시가 아무리 독립적인 위성 도시라고 해도 글리터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유도시의 뒷배인 주변국들조차 글리터의 눈치를 최우선으로 살피는 형편이다.
글리터가 몬먼드에 가혹하게 대한다 해도 다른 나라가 적극적으로 변호해줄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관리들은 세리스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상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몬먼드가 더는 벌집을 건드려 놓은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필요 이상으로 모정이 발휘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염려하는 세리스는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글리터 룸에 있는 세리스.
흑요석과 은을 섞어 만든 왕좌에 앉아 있는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영향으로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 그 모습에 많은 사람이 그녀를 우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물론 그 반대도 있었으니, 그녀를 마녀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는 아비게일이었다.
“예? 준비하지 말라뇨?”
세리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비게일은 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는 요즘 글리터의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인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주변에서 너무 조용한 것이다.
행크나 더이스 그리고 맥 같은 세인의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환영식도, 마중 나가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는 지금 멜라니와 같이 있어요. 부녀 상봉을 할 시간을 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나도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겁니다.”
의자의 팔걸이에 양손을 올려놓고 있는 세리스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안 그래도 요새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그게 다 세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마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딸이 있었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는?
그리고 딸이 존재를 언제 알았을까?
그런 의문들을 염두에 두니 심사가 복잡했다.
세인 때문에 멜라니의 가출 건은 파묻혀 버렸다.
지금은 세인에 대한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마당이다.
그래서 어서 아비게일이 물러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눈치도 없는 인간은 끝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환영식은 제대로 해야죠. 그리고 왕의 귀환인데 마중 나가는 병력도 없다뇨?”
아비게일 입장에서는 환영식을 소박하게 했다가 자기가 욕을 얻어먹을 판이었다.
그래서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 뒷감당은 누가 하는 건데요? 세인님이 소리 소문도 없이 글리터로 들어오신다고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이제 글리터의 실세 중 하나가 된 아비게일은 눈치 보는 몇 사람만 빼면 아주 많이 살만했다.
글리터에서의 그의 입지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물론 그런 현실이 아비게일을 담대하게 만들어 주진 못한다.
눈을 뜬 세리스가 고개를 돌려 째려보자 목이 움츠러드는 게 그 증거였다.
“아… 아니 그렇게 노려볼 것까진 없잖아요.”
“아무리 사석이라 해도 말을 너무 친근하게 하는 거 아니에요? 하라면 하는 거지 무슨 군소리가 그렇게 많아요? 딸과 만날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서로 처음 보는 순간이잖아요. 그런데 다들 몰려가서 시끄럽게 하면 되겠어요? 무엇보다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잖아요. 서신 안 봤어요? 그리고 그분 성격에 환영식을 화려하게 한다고 좋아할까요?”
언제나 차가운 모습만을 보이며 무표정하던 세리스는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이렇게 편하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물론 짜증을 받아내는 사람도 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잔뜩 쫄린 아비게일은 뭐라 말도 못 하고 세리스를 바라보았다.
반발심 때문이었다.
어지간하면 그도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세리스의 말이니 넘어가겠는데, 세인의 경우에는 좀 이야기가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존재감 없는 왕의 귀환이라니 말도 안 돼!’
그러자 세리스도 ‘뭐? 네가 뭘 어찌할 거냐?’라는 식으로 계속 노려보았다.
제삼자가 있었다면 중년인과 젊은 처녀가 눈싸움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둘은 동년배였다.
나이를 먹지 않는 세리스가 이상한 것이다.
결국 아비게일은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가슴을 쳐댔다.
“이건 상식에 기반을 둔 제 책임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뒷감당을 제가 해야 하니까 문제죠. 기사들 등쌀에 시달릴 제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세리스님이 후폭풍 다 막아주실 거예요? 적어도 꽃은 뿌려야죠!”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마플을 생각해 봐요. 그가 여기에 도착하면 그의 성정 상 어디에 먼저 가겠어요? 거기다가 꽃을 뿌리고 싶어요? 눈치가 있어요?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장가도 못 갔지. 지금 가출한 딸이 아버지를 만나고 있는데 제 심정이 어떨 거 같아요? 마플에 대한 제 책임감은요? 어떻게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해요? 지금 당신의 책임감 따위나 신경 써줄 분위기에요? 떠들썩하게 할 분위기가 아니라고요!”
‘이 악마 같은 여자!’
아니 여기서 장가 못간 이야기가 왜 나온담?
은근히 비꼬는 말투에 아비게일은 작게 이를 갈았다.
분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아비게일은 세리스를 이길 수가 없었다.
힘으로도, 지위로도 완패였다.
결국 최후의 선언까지 해야만 하는가?
이번에는 아비게일이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럼. 써주세요.”
“뭘요?”
“후폭풍을 막아준다는 각서요.”
유치한 그의 말에 다시 자기 생각에 잠기려던 세리스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비게일.”
세리스가 목소리를 깔자 아비게일은 눈을 떴다.
세리스는 그런 아비게일을 바라보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글리터 내에서는 극소수 외에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이 어찌나 절절하게 짜증을 담고 있는지, 아비게일이 흠칫하며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세리스는 그 표정 그대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어조로 진심을 담아 내뱉었다.
“꺼져요.”
그 앞에서 아비게일은 냉큼 꺼질 수밖에 없었다.
* * *
말이 네 마리나 붙어있는 마차는 정작 빠르게 달리지 않았다.
흘러가는 세월의 뒤태를 감상하려는 듯 유유자적했다.
주로 하품이 나오도록 느리고 단조롭게 이동했다.
이래서야 걸어가는 건지 뛰어가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에스는 입이 찢어지라고 하품을 하는 멜라니를 보며 토끼 눈이 되었다.
높은 사람들은 하품도 하지 않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스의 눈과 마주친 멜라니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달팽이도 이것보다는 빠르겠다. 너무 느리네.”
멜라니는 두툼한 방석에 머리를 기댄 채 의자에 가로로 누워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두 발은 창문에 올려놓고 말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스가 그런 멜라니를 감탄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때, 멜라니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럼 너 집도 없는 거야?”
“예.”
“나랑 같이 살래?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저는 동행하는 기사분과 함께해야 할 것 같아요. 은혜를 갚아야 하니까요.”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저 사람이 대체 누군데?”
“그러니까 저분은….”
멜라니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본 에스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세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냥 착한 분이에요.”
“에이. 뭐야 그게.”
멜라니가 김 샜다는 표정으로 돌아누웠다.
그 바람에 멜라니의 치맛자락이 의자 아래로 내려갔고, 손을 뻗은 에스가 조심스럽게 치맛단을 올려주었다.
이렇듯 손이 많이 가게 행동하는 멜라니다.
하지만 에스는 그런 멜라니를 챙기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멜라니 쪽에서도 에스가 싫지 않았다.
그게 바로 아까 같이 살자고 말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두 소녀 사이에는 둘이 모르는 묘한 유대감이 있었다.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두 당사자가 알 리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제 에스는 손을 위로 뻗어 흘러내린 멜라니의 머리카락을 올려 주었다.
그런 에스의 손길이 싫지 않은 멜라니는 수마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결국 기분 좋은 어루만짐 속에서 단잠에 빠진다.
급속도로 말이다.
에스는 그런 멜라니의 곁에서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코를 고시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멜라니는 무릎으로 소파를 치며 잠꼬대도 했다.
나중에 깨어난 멜라니는 기억도 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듣는 입장에선 꽤 이상한 내용의 잠꼬대다.
귀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에 걸맞지 않았다.
“이 바보가~ 미래에서 왔다고?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유치하다 정말.”
그러면서 킬킬거리는 멜라니였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에스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도 갈고 계시네.”
소녀가 품었던 귀족에 대한 환상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