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 리턴 라메아 (12)
지하실은 코를 찌르는 혈향으로 가득했다.
피 냄새의 중심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반이 있었다.
그녀의 옷은 누더기 상태였다.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반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깊게 찔린 상처가 숨을 편하게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건 상식 밖의 일이다.
드레퓨스의 황제가 이런 누추하고 좁은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싸늘한 현실은 문밖에 도달해 있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의 문이 열릴 때 반이 몸을 떨었다.
그동안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본인도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세인이었다.
그는 밧줄을 손에 들고 있었다.
굵고 꺼끌꺼끌한 밧줄이었다.
일단 저걸로 목을 조르면 피부가 다 상하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죽게 될 것이다.
반의 앞으로 다가온 세인은 잔인하게도 밧줄을 그녀의 무릎 위에 던져 놓았다.
반이 그를 올려다보자 세인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어떻게 죽여 줄까?”
물어본 세인은 정작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반의 얼굴을 때리자, 반이 의자 째로 옆으로 넘어갔다.
이제 세인은 그녀와 의자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그냥 순수하게 밧줄과 검 사이에서 고민했다.
“안 돼! 나를 죽이면 안 돼!”
죽음 직전임을 예감한 반이 소리를 질렀지만, 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현재 반의 상태를 보면 드레퓨스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왕이라고 해도 한계 직전까지 몰린 반이니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반의 꼴을 보니 기대 심리가 생길 만도 하다.
하지만 그가 거짓된 정보를 흘릴지도 모르니 세인은 깨끗이 단념해 버렸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너를 이해한다. 우린 적으로 만났고 이기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해야 할 운명이었어. 마플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게 네 전략의 일환이라면 그건 정당해.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복수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의 복수다. 이런 나를 실컷 비웃고, 죽어서 조롱해도 좋아. 그 비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세인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검을 택한 모양이다.
차가운 검날이 반의 얼굴에 닿자 그녀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차피 죽음 앞에서는 자존심이나 오만함, 그 무엇도 유지될 수가 없었다.
죽으면 다 끝이니까 말이다.
반은 자신을 종교로써 사람들에게 강요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죽어 버리면 정말로 끝이다.
내세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 의미가 피맺히고 갈라진 그녀의 입술을 더욱 메마르게 만들었다.
세인은 자신의 발치에서 반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반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반이 지금은 이렇게까지 망가져 버렸다.
“이건 꿈이야!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내가 고작 이렇게 죽는다고? 말도 안 돼! 이건 연극이야! 거짓말이야! 새빨간 거짓말!”
그때 세인이 중얼거렸다.
“세상은 연극이 아니야.”
반의 눈이 부릅떠졌을 때 세인의 검이 그녀를 찔렀다.
그러자 반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너무 아팠다.
끔찍할 정도로 아팠다.
세인은 한번 찌른 것도 모자라 다시 검을 들어 그녀를 찔렀다.
계속 무자비하게 찔렀다.
칼이 파고들어 올 때의 감촉은 벌침 정도가 아니었다.
육신이 벌벌 떨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피로 붉게 물든 검은 멈출 줄을 모르고 연거푸 움직여, 자제를 몰랐던 그녀의 심장에도 파고들었다.
그 쇠붙이가 가져다주는 살벌한 감촉에 반은 입을 살짝 벌리고 이런 소리를 냈다.
“윽.”
그리고 세인은 마지막으로 반의 목을 베었다.
반 정도를 죽이려면 확실한 게 좋았다.
드레퓨스에 어떤 신비한 물건이 있어 반을 살려낼 수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넓은 땅을 가진 나라라면 뭔들 없겠는가.
그는 그녀의 시체를 끌고 가서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
야외에서 사람을 태운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치안대가 아무리 유명무실하다고는 하지만 거기까지도 눈감아줄 수 있을까?
물론 눈감아주었다.
세인의 정체에 대해 굉장한 귀족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치안대를 매수한 슈나이더도 이제 세인의 편이 아니라고 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슈나이더는 세인이 반을 불태우는 광경을 멀리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혀를 차며 돌아섰다.
지금 본 광경을 곱씹기엔, 당장 그의 코가 석 자였다.
슈나이더도 마음이 심란하고 정리할 것도 많았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위치가 있으니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황당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의 슈나이더일 것이다.
그의 지척에 아내였던 사람과 딸이었던 사람이 함께 있었다.
반의 시체를 태우던 세인은 자신의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마플이 짜준 목도리다.
그걸 풀어 펼쳐보니 거기에 박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금빛 실로 써진 글자.
멜라니, 몬먼드, 반, 슈나이더 등의 단어가 박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온이라는 글자에 눈이 간 세인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품은 마플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이게 그녀가 남긴 유일한 물건도 아니다.
글리터로 돌아가면 마플의 물건들을 잔뜩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인은 그녀의 물건에 반 같은 인물의 이름이 박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선물이라는 의미만 버린다면 이 유품을 놓아줄 수 있었다.
결국 세인은 마플을 애도하는 의미로 목도리를 불길 속에 던져 버렸다.
목도리가 시체와 함께 불타는 것을 보며 세인은 그 자리에서 한참 서 있었다.
재만 남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다가 등을 돌렸다.
그는 마플이 준 암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상황들을 다 알고 있었느냐에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니까 메시지를 준 것도 초자연적인 현상의 하나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왕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적인 복수가 끝났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전.
세인은 기세등등한 반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반의 처지에서는 세인이 왜 태도를 바꿨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는 행동에 그녀만 수난을 당할 뿐이었다.
세인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서 말없이 내려다보는데 그 시선이 아주 싸늘했다.
하지만 반은 그때까지만 해도 기가 죽지 않았다.
일주일 후에 죽게 되는 운명을 몰랐으니까 말이다.
결국 믿는 게 있었다.
“지금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
“반. 미안하지만 전문적인 고문자를 고용할 수는 없어.”
엉뚱한 답변에 반이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갑자기 돌변한 세인의 기세가 의아했다.
그리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런 반의 앞에서 세인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네 신분을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누구에게 네 몸에 손대라고 하겠어? 네 정체를 속이고 고통을 주라고 하는 것도 그 당사자에게 못할 일이야. 사실 이런 상황 자체가 비정상이긴 하지. 그래도 내가 직접 손 써볼게. 네가 부서지고, 다시 부서져서 눈빛 안에 절망이 깃들면, 그때 비로소 너를 죽여주마. 약속한다.”
그때 세인의 눈빛은 정의를 실현한다든가, 분노한 눈빛이 아니었다.
오로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묵묵히 해내겠다는 눈빛이었다.
도살자도 지금 그의 얼굴보다는 덜 무서울 것이다.
세인은 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반이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지지 않으려는 듯 악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다고 내가 굴복할 것 같아?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아!”
그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
* * *
그로부터 삼 주일 전.
잭은 자신의 방에서 매 한 마리를 팔 위에 올려놓았다.
매의 발에는 전통이 매달려 있었다.
글리터에 소식을 보내기 위한 매였다.
“네가 부디 무사히 도착하길 바란다. 세상을 위해 힘내줘. 부탁한다.”
그리고서 잭은 축복의 의미로 매의 머리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그때 나무로 된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부지런하고 바쁜 소리는 앞다투어 잭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폴리오와 잭은 일부러 낡은 나무복도가 있는 집을 골라서 묵고 있었다.
여러 개의 발소리를 들으며 잭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와 눈을 맞춘 후, 그 매를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매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땅 위를 벗어났다.
잭은 그런 매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무사히 도착하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런 기도는 당장 잭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발소리들이 잭의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똑똑똑똑똑.
똑똑똑똑똑똑.
비처럼 쏟아지는 노크 소리를 들으며 잭은 두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인가?
그래도 글리터에 소식은 전달했다.
그것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은 후 태연함을 위장하며 대답했다.
“밖에 누구죠?”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여느 때의 음성이 아니고 아주 지친 음성이었다.
“폴리오 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똑똑똑똑똑똑.
똑똑똑똑똑똑.
* * *
그로부터 한 달 전.
드디어 잭은 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커다란 광장에 서 있었다.
그런 잭의 주변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모두 고급스러운 옷에 화려한 치장을 한 상태였다.
광장의 가장자리에는 수많은 귀족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반을 영접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좀처럼 정체를 노출하지 않는 반이 드디어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그 소식은 드레퓨스의 고위귀족들을 격동시키게 하기 충분했다.
기껏 왕성의 귀족 중 극소수만 보았을 반이 공개석상에 나타난다니, 아마 표라도 팔았다면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잭은 긴장한 기색을 지우려 노력했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다가와 결사대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자 음악이 멈췄다.
그리고 연단 위에 서는 존재가 있었다.
처음에 연단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깜박였다.
지금의 상황이 굉장히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의 정적은 금방 끝났다.
“오오! 저분이 드레퓨스의 태양!”
“찬양하라! 달과 별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찬양할지어다!”
꽃잎들이 휘날리고 웅장한 음악이 흘렀다.
아주 높은 단상에 선 인물은 한 손을 들고 만인에게 웃음을 보였다.
약간 날카롭긴 했지만 어쨌든 친근함이 섞인 웃음이었다.
그걸 멀리에서 보고 있는 잭은 얼굴이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맞아?’
인물의 눈빛은 너무 이상했다.
쏟아지는 태양 빛 아래에서 눈이 노랗게 보였다.
게다가 얼굴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나타난 사람은 너무 이상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상함을 넘어서 기괴했다.
인간이 아니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장님인가?
저 괴상한 분위기를 인지 못 하는 거야?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그런 생각이 든 잭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금세 상황을 알아차렸다.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도 난감한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손뼉은 열심히 치고 있었다.
여기에서 돌발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목숨을 내놓는 행위였다.
고위 귀족들 같은 경우에는 얼굴이 경직되었지만, 어쨌든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마치 충성 경쟁을 하듯이 말이다.
지금 저기에 서 있는 존재가 누구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게 핵심이 아니었다.
저기 서 있는 존재는 드레퓨스의 주인이다.
일단 그의 눈 밖에 나면, 기다리는 것은 비참한 죽음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옳은 소리를 낸다 해도, 그의 끝을 불명예로 채색시킬 수 있는 것이 눈앞의 권력자였다.
어떻게든 사회를 유지하려는 분위기, 그 사회가 정당하지 않더라도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경쟁하려는 분위기가 장내에 흐르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비인간적이든지 간에, 여기의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있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여기에서 충성 경쟁을 했으면 했지, 정의를 고발하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게 바로 과거의 반이다.
그는 맞는 말을 하는 충신들을 골라내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권력에 아부하는 자로 주위를 채웠다.
그 사람들은 주인을 보고 충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목의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을 보고 짖는 개나 다름없었다.
잭은 사색이 된 가운데, 나타난 인물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야 그의 얼굴을 그려서 글리터에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최근 세인이 글리터 지역 근처에 나타났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자신의 그림이 훗날 세인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세인으로서는 수중에 있는 반이, 지지 기반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으므로 복수를 할 수가 있었다.
잭은 지금 반을 대체할 존재의 등장이, 반의 죽음을 부르게 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없다.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지금의 잭이 모르는 게 당연하다.
단상에서 웃는 바이칼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뚫어져라 바라볼 때, 바이칼도 우연인지 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충류 같은 그의 눈빛이 잭의 눈을 본 것이다.
그러면서 바이칼이 히죽 웃었다.
공교롭게도 계속 잭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잭은 그 웃음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발각된 건가?’
그 짐작이 맞는 것 같다.
가미긴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부활 할 수 있었던 바이칼은, 잭을 보며 계속 웃었다.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광기에 찬 현장과 맞물려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 * *
그리고 미스틸 테인의 오늘.
미스틸 테인은 흥건한 핏물 위에 누워 있었다.
바닥을 적시는 피는 그가 흘린 피였다.
그 피가 놀라운 건 아니었다.
그는 기사다.
언젠가는 이런 죽음을 예감하기도 했다.
침대 위에서 죽을 확률보다 자기가 흘린 핏속에서 죽는 게 더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 피를 흘린 이유가 오늘의 그를 배신했다.
지금 미스틸 테인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한 대상은 바로 라온이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라온 말이다.
“윽.”
미스틸 테인은 짧은 신음을 냈다.
그의 배 위로 라온이 엉덩이를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소풍을 나온듯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틸 테인에게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이 보일 뿐이었는데, 오늘의 라온은 그에게 있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왜 이런 짓을?”
“그걸 안다고 바뀌는 게 있겠어? 너도 즐거웠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재미는 재미대로 다 봐놓고, 고통을 피해 가면 안 되지. 삶은 고통과 행복의 연속이거든.”
라온.
아니 반은 그제야 미스틸 테인을 바라보며 윙크를 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네 몸을 조각낼 거야. 그리고 감상하겠어. 얼음 조각처럼 잠시나마 예술품이 되는 거야.”
“라온. 나는 당신이….”
그때 반이 미스틸 테인의 몸을 찔렀다.
재미 때문이었다.
움찔거린 미스틸 테인은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행복이 코앞에 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더구나 큰 문제는 멜라니의 운명이다.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라온이 누구든 간에 이런 일을 저질렀을 땐 표적이 멜라니일 수밖에 없었다.
미스틸 테인이 암살자를 멜라니에게 인도한 것이다.
그걸 깨달으니 몇 배로 더 비참해졌다.
“무슨 생각을 해? 미스틸 테인?”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알아. 그래서인지 제대로 반항도 못 하더군. 넌 기사로서 실격이야.”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뜰을 거닐면서, 바람 속에서 당신의 웃음을 들으면서 너무나 좋았어요. 당신과 연극을 보면서, 리턴 라메아를 보면서 당신의 옆얼굴을 보고 나는 기뻤어요. 내가 마치 연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복에 선택받았다 느껴졌으니까요. 그래요. 마치 연극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미스틸 테인의 얼굴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반은 혀를 찼다.
끝으로 비웃음을 한껏 담아 몇 마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나중에 그대로 돌려받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한껏 비아냥거려 주었다.
“세상은 연극이 아니야.”
그리고 반은 미스틸 테인을 찔렀다.
찌르고, 다시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