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 리턴 라메아 (11)
전투가 끝난 마을에서 마차가 움직였다.
마차는 몬먼드 시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몬먼드 시로 마차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들이 날아올랐다.
새들은 대부분 글리터로 향하고 있었다.
멜라니의 위치를 알리는 한편, 세인의 귀환 소식을 알리는 새들이었다.
주변이 점점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인은 치안대에 들러 에스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멜라니가 잠들어 있는 건물로 향한다.
멜라니는 온종일 자다가 일어났다.
억지로 잠든 것이기 때문에 두통이 좀 있었다.
따듯한 침대 위에서 눈을 뜬 그녀의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아 정말 끔찍한 악몽을 꿨네.”
피범벅이 된 라온을 본 게, 멜라니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작은 꼬마 아가씨는 짧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천장의 무늬가 낯선 것을 보고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머리가 푹 파묻힌 하얀 베개가 흔들거리고, 멜라니가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그때 멜라니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등을 발견했다.
“야. 넌 누구야? 왜 이 방에 있는 거지?”
멜라니가 뾰족하게 소리를 치자 슈나이더가 몸을 돌렸다.
나이 지긋한 남자의 얼굴을 발견한 멜라니는 매우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낯선 남자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아직도 꿈속인가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런 멜라니를 보는 슈나이더는 그녀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난감함을 느꼈다.
잠시 멜라니와 슈나이더의 대치 상태가 만들어졌다.
멜라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슈나이더를 노려보고 있었고, 슈나이더는 그답지 않은 난감한 표정으로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렇게 대립하는 상황을 깬 게 바로 난데없는 노크 소리였다.
똑똑똑.
“들어와.”
똑똑.
“아씨! 들어오라고!”
처음에 자기가 낮게 대답한 건 생각 안 하고 성질부터 내는 멜라니였다.
그걸 본 슈나이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더러운 성질머리… 역시나 자신의 딸이 맞았다.
게다가 짓고 있는 표정이 그로 하여금 과거를 추억하게 했다.
기절하기 전에 무서운 모습을 보았고, 깨어나 보니 아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낯선 사람이 있으니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 불안함을 가리기 위해 일단 성질을 내는 멜라니의 패턴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멜라니의 고함에 방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문틈으로 빼꼼히 머리를 내민 소녀는 바로 에스였다.
세인이 밑에서 생각해 보기에, 멜라니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올려보낸 것이다.
같은 나이 또래인 에스는 양손으로 수프 그릇을 받쳐 들고 있었다.
발로 문을 밀고 들어오는데, 이래서 문 열리는 속도가 늦었나 보다.
“넌 누구야?”
“저는 에스라고 해요.”
멜라니는 이름을 물은 게 아니라 신분 같은 정체를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저렇게 맑게 웃으며 대답을 하니 차마 뭐라고 하질 못했다.
에스는 멜라니의 옆으로 다가와 수프 그릇을 매트리스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후후 불었다.
그리고 스푼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푼 앞의 멜라니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걸 그대로 내게 먹여주려고?”
“예? 예. 높은 분께는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집어치워.”
멜라니는 에스에게서 스푼을 빼앗아 수프를 떠먹었다.
생각해보면 온종일 굶었기 때문에 지금 위가 텅텅 비어 있었다.
일단 수프 맛을 혀로 느끼자 위장에서 어서 먹을 걸 달라고 요동을 쳤다.
“이거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요.”
슈나이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에스와 멜라니가 하는 짓을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이다.
멜라니는 지금 당장 라온이나 미스틸 테인에 관해 물어보기가 겁났다.
그래서 일단 수프로 속을 채우고 있었다.
자기가 마지막에 본 게 꿈이 아니라면,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생각대신 뜨거운 것이 속으로 돌아오자, 두통과 몽롱한 기운이 점점 가셨다.
그렇게 멜라니는 현실로 완전히 돌아올 수 있었다.
“천천히 드세요. 뜨거운데.”
“난 고양이 혀가 아니야. 그런데 넌 밥 먹었니?”
“저는 아까 먹었어요. 사과랑 빵이랑 우유요.”
“뭘 먹었는지 까진 안 물어봤는데, 너 좀 난감한 애구나.”
그래도 동년배랑 말을 섞으니 마음이 좀 진정되는 멜라니였다.
그런 멜라니는 창가에 서있는 슈나이더를 곁눈질하며 심호흡을 했다.
이제 배도 채웠겠다.
궁금한 걸 물어볼 마음이 생긴 것이다.
만약 자신이 납치된 거라면 왜 납치되었는지 라도 알고 싶었다.
* * *
두 소녀와 슈나이더.
그들이 한방에 몰려 있는 그 시각, 세인은 지하에 있었다.
어지간하면 세인도 정신을 차린 멜라니와 인사 정도는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코앞에 있었다.
지하실은 여러 개의 램프 때문에 매우 밝았다.
그래서 의자에 묶여 있는 반이 잘 보였다.
그는 세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재갈을 물린 반은, 정신을 차린 아까부터 계속 세인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신병이 구속되었는데도 반은 기세등등했다.
눈에서 보이는 자신감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인이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에게서 재갈을 풀어냈다.
그러자 반은 세인의 손가락을 물려고 했다.
짐승 같은 그 움직임엔 장난기마저 섞여 있었다.
여기서 여유를 부리며 대담하게 이럴 수 있다는 게 과연 드레퓨스의 주인다운 것인지, 그 반대인지 모호한 장면이었다.
딱.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반이 손가락을 빠르게 뒤로 빼낸 세인을 보며 웃었다.
“잡혔네. 그래서 날 어찌할 거지?”
“지금 생각 중이야.”
“날 고문할 건가? 아니면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연약한 여자를 고문하거나 죽일 거야?”
그렇게 말하며 반이 계속 웃었다.
그런 반을 세인은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왕이 사로잡히는 경우는 긴 인류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일수록 적진에 홀로 돌진하는 짓은 자제하기 마련이다.
세인이야 엄청나게 강하니 그렇다 쳐도, 반은 그것도 아니었다.
반의 엽기적인 짓이 이런 보기 힘든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세인은 반의 앞에서 팔짱을 끼었다.
지금 반을 고문한다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일단 왕을 고문한다는 생각이 엽기적이었다.
또 고문을 가한다 해도 한계가 있었고, 반이 비밀을 술술 이야기해줄 리가 없었다.
왕이 고통에 굴할 리가 없다.
괴롭다고 나라를 팔아먹는 왕이 어디 있겠는가?
기밀을 누설할 위치가 아닌 것이다.
애초에 얻어낼 게 없는 게임이다.
‘옛날의 캐시오 정도라면, 왕의 그릇 하고는 전혀 상관없으니 가능하겠지만.’
정석대로라면 상대의 신분에 따라 대우를 해주는 게 기본이다.
이렇게 포박해 놓은 것만 해도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물론 여기 있는 세인의 경우, 마플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미친 짓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걸 떠나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다.
그런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 반이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봐 세인. 뭘 어쩌려는 거야? 날 심문이라도 할 셈이야? 내가 없는 드레퓨스가 어떻게 날뛸지 상상이나 해봤어? 만약에 너희들이 나를 납치했다고 드레퓨스에서 떠들면? 너희의 자존심이 어떻게 될까? 백성들이 너를 어떻게 볼까?”
세인은 자신도 모르게 대꾸했다.
“그런 일을 누가 믿어주지? 왕을 납치한다는 말은 세 살짜리 어린애도 믿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여기에 있잖아. 그래서, 자. 이제 뭘 어쩔래? 너는 나를 죽일 수도 없어. 내 빈자리가 드레퓨스에게 어떤 의미겠어? 그들은 체제를 유지해야 해. 나는 후계자도 없어.”
그때 반이 붉은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오늘내일하거나 내가 다 죽여 버렸거든.”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없으면 드레퓨스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는 거야. 내 빈자리는 그런 거야. 차라리 협상해. 땅 정도는 조금 양보해 주지. 선심을 베풀겠어. 곧 만들어질 전선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겠지?”
그 후로 반은 자신을 무사히 송환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실컷 떠들어 댔다.
들어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반이 공주 정도가 되었다면 억지로 잡아놓을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어느 정도 인물이라면 구류가 가능했다.
외교관의 신병을 구속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몰상식으로 여겨지지만, 그런 케이스가 드문 것은 아니다.
왕족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상식 밖의 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
또 그게 권력이란 것이다.
그런데 반은 아예 드레퓨스라는 괴수의 머리였다.
제국의 머리가 없어지면 어떤 혼란이 일게 될까?
그 혼란은 어쩌면 전쟁보다 더 참혹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만약 지금이 전쟁 중이고 반이 드레퓨스 한가운데에서 암살당한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그게 가능하다 치면, 그 자체로 엄청나게 파장이 큰일이겠지만 어쨌든 수습은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드레퓨스는 아예 반의 행방불명을 알아차릴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경우에 진실을 아는 극소수는 어떤 행동을 할까?
‘그걸 어떻게 알겠어.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은데.’
세인의 머리가 아파왔다.
“세인. 너는 나를 두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나는 아직 북부 정벌을 선포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나를 납치해 놓고 있다고 떠들 건가? 나를 잡았다고 선전이라도 할 셈이야? 그건 선전 포고지. 그럼 네 쪽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거야. 아니면 저잣거리의 불량배처럼 나를 쓱싹 죽여 입막음을 할 건가? 하류 인생처럼 말이야.”
“간과하고 있는 게 있군. 난 네가 미쳤다는 걸 알아. 너는 나를 공격했고, 이쪽에서 상식에 맞게 대우해 줘도 귀국한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을지 알지. 난 네가 멜라니를 미끼로 나를 협박했을 때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 의심했다. 네가 왕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내가 부정할지라도 이미 세상 전체가 인정하니까. 하지만 나는 네가 왕으로서의 품위와 신용이 없다고 확신한다. 사기꾼 정도와 후일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이 정도면 지독한 독설이었다.
하지만 반은 기세등등한 표정을 유지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반이 턱을 들어 올렸다.
그 자세로 아랫사람 바라보듯이 바라보며 세인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해. 나를 고문하지도 못할 거야. 내가 조사한 바로는 넌 그런 사람이 아니야. 고문당한 상태로 내가 귀국 했을 때 후폭풍이라는 의미를 알거든. 또는 내 영구한 부재가 어떤 재해를 가져올지 알잖아? 생각해봐. 세인. 생각을 해보라고. 난 지금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니야. 네가 생각하길 원하는 거지. 그 생각이 내놓을 결론도 알고 있다. 배신자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졌을 뿐. 너는 조사한 그대로야.”
세인은 그런 반에게 억지로 재갈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반은 얼굴을 피하며 그를 비웃기 바빴다.
세인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이봐. 알겠으니까 기본적인 건 협조하지 그래.”
“협조 안 하면 어찌할 건데?”
세인은 반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은 듯 흩어질 때 그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후려갈겼다.
짝 소리가 나는 가운데, 그의 주먹이 반의 복부에 꽂혔다.
꺽꺽대는 반의 앞에서 세인이 말했다.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어. 너 같은 놈도 문제고 나 같은 녀석도 문제야. 우린 서로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건지도 몰라.”
그때 반이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러자 세인이 다시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반의 상체가 옆으로 휘청일 때, 세인은 의자 째로 옆으로 넘어갈까 봐 그녀의 무릎을 다른 손으로 눌렀다.
그 자세로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게 지극히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 나라 대 나라가 연결된 일에 고작 개인적인 원한을 내세우고 있는 거야. 그건 정말 심각한 문제지.”
세인은 반이 떠들 때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거야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지하로 끌려온 지금까지도, 그녀는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이렇게 처맞은 지금까지도 말이다.
세인은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려는 반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사실 머리가 터져 나갈까 봐 과도하게 힘을 빼서 이렇게 반이 생생한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배를 다시 주먹으로 쳤다.
그리고 새우처럼 몸을 숙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고 몇 차례 흔든 세인이 말을 걸었다.
“나도 머리를 싸매고 난제를 풀려고 고민해 볼게. 그러니 너도 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마플을 죽인 건 이해해. 싸움이 시작되면 진영을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는 거야. 이성적으로 이해는 하는데, 나는 옹졸한 그릇이라 감성적으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없어. 그러니 성질 건드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두고 보자 세인.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너는 기본적인 염치도 없는 놈이구나. 역시 더러운 몬스터답다.”
반은 피와 함께 침을 뱉으며 저주를 쏟아부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정말 상상 초월의 수준이었다.
적어도 일국의 왕에게서 나올 말은 아니다.
건달패가 거느린 여자들이나 할법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나를 풀어 준다면 네가 나를 능욕했다고 주장하겠다. 드레퓨스는 복수를 위해 이 땅을 짓밟고 다시 유린할 것이다. 모든 것을 불태운 후 소금을 뿌려 주겠어. 나를 계속 구속하면 그 뒤의 일은 안 봐도 알겠지? 내 부재를 인지한 드레퓨스가 맹수처럼 너희들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건 전쟁이 아니야. 최소한의 룰도 없는 광신도들의 행진이지. 상상해봐라. 왕의 통제 없는 집단이 네 국토와 주변국들에 무슨 짓을 할지 말이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네 앞은 파멸이다!”
으르렁거리는 반을 보며 세인은 좀 더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주먹에 실어 반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반의 목에서 났다.
그녀는 의자 째로 좌우로 출렁거렸다.
“너도, 나도 밑바닥의 짐승이구나. 서로 품위라고는 조금도 없군.”
세인은 기절한 반 앞에서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왕을 잡았으니 모든 게 끝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으련만, 이렇게 잡아놔도 문제였다.
드레퓨스는 소국이 아니다.
생각 같아서는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고민해야 할 게 산더미였다.
그 고민의 이유는, 오히려 지금 반의 신병을 구속했다는 패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는 반을 이용해 글리터의 이익을 얻어내야만 하는 입장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반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익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미친놈이라도 잘 구슬려서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드레퓨스와 물밑 협상을 해서 어떤 이점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할까?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사사로운 이익은 접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세인은 고개를 흔들며 그 자리를 떠났다.
* * *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올라간 세인은 침묵을 고수했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세인에게 다가와 말을 걸으려 했던 사람들도 그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세인은 그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외교적인 협상을 고려하고 싶다면, 현재 드레퓨스의 상황과 권력을 가진 인사들의 성향을 파악해야만 한다.
세리스가 어디까지 드레퓨스에 대해 조사했을까?
당장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의논해야 할까?
어느덧 그는 복수심을 접어두고 반을 이용할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 반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세인이었지만, 그의 위치가 지금과 같은 대응을 하게 만들었다.
시름이 깊어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옆에 앉았다.
얼굴을 바라보니 슈나이더였다.
지금의 슈나이더는 매우 무거운 표정이었다.
멜라니 때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한 세인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두 남자는 그렇게 1층의 정원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때 원수였던 두 남자가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각자의 무거운 사색이 계속 이어졌고, 어느 순간 슈나이더가 의미 모를 말을 했다.
“저 에스라는 소녀는 어디에서 발견했지?”
세인은 대답하는 대신 슈나이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드는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물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예의를 갖춰 주길 바란다. 반말을 던진다면 나로서도 너를 가만둘 수가 없으니까.”
“나도 많은 사람을 거느린 몸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하지만 사석에서는?”
“욕을 해도 좋다. 나는 너의 딸을 죽였으니까.”
“….”
이번에는 슈나이더가 세인을 바라보았다.
세인은 다시 정면만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생각에 잠겼는지 이해는 되었다.
‘반을 죽이거나 고문할 수는 없을걸. 그건 너무 상식 이하니까. 드레퓨스에서 반의 빈자리가 있는 한, 글리터에게 좋아질 게 없어. 너는 복수를 하고 싶겠지만 어려울 거야. 반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지만, 여기에서 그를 죽이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깨달은 백성들이 폭군을 몰아내는 것과, 그전에 미친 나라에서 폭군의 부재가 불러오는 결과는 전혀 다르거든. 그 양상을 염두에 둔다면 너는 그를 놓아주겠지. 협상으로서 실리를 얻고 말이야. 나도 복수를 이루지 못했듯이 너도 마찬가지군.’
세인의 얼굴을 보는 슈나이더는, 반도 세인도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 블랙 라이어드의 주인인 자신도 그랬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셋은 동시에 실패를 겪었다.
반은 세인을 죽이지 못했다.
슈나이더의 배신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인이 승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마플의 죽음은 세인을 복수심으로 몰아넣기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인은 일개 잡부가 아니었다.
영주만 되어도 개인의 원한보다 이익에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오늘의 세인은 가이더로 진격했던 것처럼 굴 수가 없었다.
그가 반을 괴롭혀봐야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도출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세인도 복수를 할 수가 없었다.
슈나이더처럼 말이다.
세 명 다 실패했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가 없었다.
승자는 아무도 없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세인의 물음에 슈나이더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 대답은 지금 세인의 심중과 똑같았다.
“모르겠어.”
슈나이더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을 부정해야 할 거 같군. 그런 전제 위에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나는 부자야. 힘도 있지. 그러나 세상을 지배하기엔 너나 반 같은 인물이 너무 강해. 더구나 내 복수심마저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거세된 상태지. 요즘 알게 된 세계의 법칙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는 척하고 싶지도 않아. 이미 많은 경험을 한 나는, 새삼 그런 포장으로 의욕을 잃은 나를 가리려는 노력조차 부질없다는 걸 알거든.”
슈나이더는 면도를 하지 못해 꺼칠꺼칠한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신을 믿지 않지만, 그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지독한 장난꾸러기 일 거야. 요정들만큼이나 짓궂은 녀석이야. 하지만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면 분명 승자도 있는 법이지. 복수심이 아닌 현명함과 희생이 가져다준 승리 안에 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
그렇게 두 남자가 앉아 있는 자리 위로, 열린 창문에서 여자아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좀 진정이 되세요?”
상냥한 에스의 목소리였다.
보통 높은 신분의 사람을 보게 되면 쭈뼛거리기 마련인데, 그런 게 지금의 에스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다.
멜라니는 창피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한바탕 운 후였다.
미스틸 테인과 다른 남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세인의 허락 아래 멜라니는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여염집의 어린아이라면 왜곡되었을 수도 있었을 사실이었다.
보통은 아이를 생각해준답시고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인은 멜라니의 위치를 생각해서 그녀가 진실을 여과 없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멜라니의 의무였다.
분명 멜라니는 미스틸 테인과 선을 그었다.
그래야 한다고 배우며 자라났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정을 주면, 대개는 좋은 꼴을 못 보거나 많이 곤란해지기 마련이다.
휘둘릴 경우 큰 문제를 생산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멜라니는 미스틸 테인을 타국의 기사 정도로만 대하려 애를 썼다.
그걸 감안해도 어릴 적부터 쭉 봐온 얼굴이었다.
추억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은근히 잔정도 들어찼던 모양이다.
에스는 방에 남아 멜라니가 우는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인데도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에스의 마음 씀씀이가 대단했다.
그녀는 멜라니를 끊임없이 위로해 주었고 등도 두드려 주었다.
시간이 지나 좀 진정된 멜라니는 에스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방금 본 걸 어디 가서 말하면 사자를 풀어 버리겠어.”
에스는 어떻게 대꾸해야 하는지 몰라 잠깐 망설였다.
멜라니는 그런 에스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분명 억지로 웃는 웃음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건 말 돌리기다.
“이름이 에스야?”
“예.”
“너무 짧은데. 그런데 우리 어디에서 본 적이 있었니?”
“예?”
“아니. 낯이 익은 거 같아서. 어디선가 마주쳤던 거 같아. 우리가 언제 만났었나?”
“그럴 리가요. 저는 시골에서 숙모랑 함께 살았어요.”
“그래?”
두 소녀는 이제 나란히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밑에서 두 남자가 사색을 공유하듯, 그들도 그런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침묵을 깬 것은 에스였다.
“어렸을 때 숙모가 불러준 이름은 있었어요. 태어날 때의 이름인데 너무 긴 이름이라 지금 이름이 된 거거든요.”
“그래? 그 이름이 뭔데?”
“에스메랄다요.”
그때 멜라니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에스메랄다의 작은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멜라니의 시선 안에서 에스메랄다가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