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38화 (238/307)

# 238

& 리턴 라메아 (10)

슈나이더는 유리 벽에 손을 짚고 뭔가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짧은 기도문 같은 것이었는데, 말이 끝나자 문이 생겨났다.

세인은 팔짱을 풀며 슈나이더가 밀실에서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때 마을 외곽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세인의 시선을 받은 슈나이더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반의 부하들과 싸우는 소리다. 반은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수행할 병력을 극소수만 데려왔지. 전투는 금방 끝날 거야. 물론 글리터에 뿌려놨던 내 부하들은 철수할 거다. 공식적으로는 너와의 다툼은 여기서 중지다.”

그런 말을 하면서 슈나이더는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검을 뽑아냈다.

스르릉 소리가 나며 번쩍거리는 검날이 자태를 드러냈다.

햇살에 반사된 빛이 세인의 눈가를 어지럽혔지만, 세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세인 앞에서 슈나이더는 손목을 풀듯이 검을 빙빙 돌려 보았다.

물론 블랙 라이어드 상단은 글리터를 노리는 길을 포기할 것이다.

하지만 세인이 그의 딸을 한번 죽인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에 와서 일이 더럽게 꼬여 버렸지만, 멜라니가 세인의 영지에 방문했다가 어이없게 죽은 것은 진실이다.

“검을 뽑아라.”

“나를 죽일 건가?”

세인이 묻자 슈나이더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 괴물 같은 놈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이건 그냥 발악이었다.

현실을 깨달아 버린 자가 마음 끝까지 승복할 수 없어서 하는 발악 같은 것 말이다.

슈나이더를 찾아온 까마귀는 그가 듣기에 이상한 소리를 했다.

까마귀의 설명을 들은 슈나이더는 멍한 얼굴로 이렇게 감상을 말했다.

“너는 새 주제에 개소리를 하는군.”

그가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까마귀는 이상한 종교에 귀의했는지 환생이 어떻고, 이름과 얼굴이 어떻다는 둥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슈나이더 입장에서는 심각한 상황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까마귀가 어이없어 보일만도 했다.

세인이 준비한 수작이 그 정도라는 것에 조소를 보내고 싶었고 말이다.

그런데 떠나기 전 까마귀는 이렇게 말했다.

“믿건 말건 그건 네 자유다. 하지만 네가 그녀를 몰라본다면 네 딸은 다시 한번 죽는 거야. 그것도 이번에는 네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봐라. 그리고 기억해봐.”

부하가 활을 들어 까마귀를 쏘려고 했을 때 슈나이더는 그를 말렸다. 그리고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날아오르는 새는 계속 미친 소리를 지껄여댔다.

“너는 심판대 위에 섰다. 네가 하려는 복수가 네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증오인지, 아니면 정말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를 평가받는 순간 말이다. 네놈이 생각하기에 어느 쪽일 거 같나? 네가 품고 있는 진실의 방향 말이야.”

까마귀의 말을 다 듣고 난 슈나이더는 부하를 제지했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부하가 활을 쏘았다.

그러나 까마귀는 아슬아슬하게 화살을 피해 날아가 버렸다.

그 후로 반과 합류할 때까지 슈나이더는 침묵을 지켰다.

그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한창 준비 중이었다.

세인이라는 괴물을 해치울 여건을 만드느라 다들 분주하게 움직였다.

슈나이더는 멜라니를 찾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반은 피에 젖은 몸을 닦느라 보이지 않았다.

멜라니에게 가는 도중에 그는 난자된 기사의 시신을 보았다.

그건 미스틸 테인의 시체였다.

반의 악취미가 제대로 반영된 시신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성한 부분이 없다.

아마 땅에 묻히지도 못할 것이다.

그 시체를 넘어 멜라니를 보게 된 슈나이더였다.

많은 병사가 지키고 서 있었지만, 슈나이더가 멜라니를 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멜라니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슈나이더는 깊은 침음성을 삼키게 되었다.

‘닮았어. 확실히.’

자신이 어릴 때 키웠던 멜라니와 똑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멜라니의 손을 매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손금도 확인해 보았다.

그의 얼굴이 더욱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의 딸인 멜라니는 특이한 손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소녀 또한 같은 손금을 가지고 있다.

이게 우연일까?

갑자기 까마귀의 말이 생각났다.

‘너희는 환생한다. 되도록 같은 이름. 같은 성별. 같은 육체를 가지고 말이다.’

그는 당연히 멜라니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반이야 정체를 숨기는 보물을 몸에 두르고 돌아다녔으니 엘프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국인들도 얼굴을 몰라보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교해 슈나이더는 과거 한센조차 알아볼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었다.

슈나이더의 초상화는 희귀하지 않다.

그가 글리터에 들어가지 않고 은신처에 있었던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슈나이더가 멜라니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물론 부하들의 입을 통해 멜라니의 인상착의를 전해 듣거나 서투른 스케치를 받아보기도 했겠지만, 아이들 얼굴이 다 거기에서 거기다.

이렇게 직접 보는 거랑 그림으로 보는 거랑은 천지 차이였다.

세인 딸의 이름이 멜라니인 것을 알았을 때, 슈나이더는 화가 났었다.

딸이 아레이즈를 방문했을 때 세인은 그녀를 죽였다.

그것도 모자라 훗날 세인은 그의 딸에게 멜라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슈나이더가 멜라니라는 이름에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정확한 실상은 슈나이더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적어도 그가 받아들이기에 그랬다.

그런데 이렇게 멜라니를 가까이에서 보고 나니 슈나이더의 마음이 심란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반이 세인에게 말을 걸 때까지만 해도 머리가 아주 복잡했다.

멜라니를 가까이에서 뚫어져라 보며 끊임없이 갈등했다.

다 떠나 멜라니는 그의 딸이었다.

잠든 모습을 보니 그의 딸이 맞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첩보로 들은 멜라니의 성격 말이다.

그러니 슈나이더의 딸이었을 때도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아레이즈에서 어이없게 죽은 것 아니겠는가.

물론 세인도 과거의 시대에서, 처음 멜라니를 봤을 때부터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아레이즈에 있을 때 그녀를 죽인 사람이 바로 그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멜라니가 레드와 같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세인이 얼마나 속으로 당황스러웠겠는가?

그는 멜라니와 같이 여행하며 깨달은 것도 있었다.

멜라니는 겉보기에 성격이 고약한 여자였다.

제멋대로에다가 변덕도 심했다.

멋대로이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런 성격이 아레이즈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래서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 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과거의 시대로 간 세인은 멜라니를 곁에서 지켜보았고 그녀를 잘 파악하게 되었다.

성격의 장단점을 보고 나니, 멜라니가 나쁜 점만 있는 여자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멜라니는 거북이는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뒤로는 빵 부스러기를 남겨놓고 떠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레드에게 멋대로 하면서도 목숨을 걸고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꿈이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인은 그렇기에 멜라니에게 자신의 느낀 점을 말했던 것이다.

우울한 얼굴로 멜라니를 몰랐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건 시대를 초월한 사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다시 그 순간이 도래해도 세인은 멜라니를 죽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많은 영지민 앞에서 귀족의 위신을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를 오해한 상태에서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

정말 혹독하게 당해야 했던 사람은 고든과 그 동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멜라니의 성격상 과연 돌아가는 것을 다 알았을까?

아마 신경 끄고 자기 일만 집중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서 재판 때는 고든과 같은 편이랍시고 역성을 들어준 것이다.

이렇듯 과거의 시대에서 모든 걸 추측해보는 세인이었다.

그러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 당시 세인은 자신이 다시 느낀 멜라니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용에 미안한 뉘앙스를 담았다.

그걸 들은 멜라니는 나에게 반했냐는 식으로 받아쳤지만 말이다.

“네놈을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검이라도 맞대어 보지 않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네가 지금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슈나이더의 그런 말 앞에서 세인도 천천히 검을 뽑았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다.

세인은 슈나이더의 딸을 죽였다.

그렇기에 슈나이더는 세인에게 복수를 결심하고 여기까지 몰아붙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과 함께 세인을 죽여 버리면, 딸이었던 멜라니의 아버지를 죽이는 결과가 된다.

멜라니는 아비 없이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이 멜라니를 가만히 내버려 둘까?

같이 동침했던 미스틸 테인마저 저렇게 만드는 미치광이가 반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멜라니가 아비 없이, 무사히 자라는 것을 기약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슈나이더는 반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세인에 대한 복수의 이유가, 오늘의 복수를 막은 것이다.

세인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에 같이 여행했던 멜라니가 이제 자신의 딸이었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그 딸의 전생을 끝내버린 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재판장에 있었던 둔한 기사들이야 전의 멜라니와 지금의 멜라니를 매치시킬 수가 없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진실을 알고 있다.

혀를 차게 만드는 이 운명 속에서 세인과 슈나이더의 검이 서로를 겨누었다.

세인이 보기에 검이 슈나이더의 몸을 완전히 가리는 것 같았다.

슈나이더의 기세는 놀랍게도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검이 세인에게 다가왔다.

슈나이더는 여전히 보이지 않은 채였다.

무수한 검영이 세인을 포위하고 움직였다.

그 속에서 실체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의 세인 같았으면 힘으로 슈나이더를 제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각성한 세인은 검술에서도 놀라운 경지에 올라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인이 순수하게 이룩한 경지는 아니다.

빈센트의 아버지였던 존재가 이룩한 경지였다.

세인은 힘들이지 않고 슈나이더의 검을 모조리 쳐냈다.

슈나이더의 얼굴에 잠시지만 놀라움이 스쳤다.

최근에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게 너무나도 쉽게 막혀버린 것이다.

슈나이더의 공격이 매우 강해졌다.

동시에 움직임이 두 배로 현란해졌다.

그의 공세에는 현란함만이 있지 않았다.

치명적인 일격이 동작마다 숨어 있었다.

그걸 세인은 일일이 피해냈다.

피하기 어려울 때면 검으로 단호하게 쳐냈다.

그렇게 하면서 제자리에서 세 걸음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슈나이더는 전력을 다해 덤벼들었다.

세인은 그런 슈나이더의 옆에 붙어 그림자처럼 그와 검을 교환했다.

불을 뿜듯 움직이는 검이 수없이 교차하며 딱딱한 소리를 주변에 흘려냈다.

그 소리는 점점 고조되다가 파경을 맞이한다.

“음.”

슈나이더는 자신의 검을 선으로 잡고 있는 세인을 보았다.

그리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상대는 검술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싸움은 무의미하다.

세인이 검에 찔려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의 그는 갑옷마저 꺼내지 않았다.

“너는 항상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서로 인정해야지.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우리가 한 사람을 똑같이 마음에 두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자 검을 거두는 슈나이더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를 죽이고 모른 척하면 되지 않나? 어차피 저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난 이미 멜라니를 한번 죽였어. 그것도 모자라 그의 아버지까지 죽여야 하나?”

슈나이더는 복잡한 심경으로 같이 검을 거두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세인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포함한 멜라니의 파멸일 뿐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증오스러운데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증오의 방향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여전히 세인을 증오해야 할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까?

문득 슈나이더는 헛웃음을 흘렸다.

과거 아내가 죽기 전, 자신의 신경을 긁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당신의 복수는 실패할 거예요.’

‘봤구나. 그녀는 여기까지 보았어. 이 광경까지 봤던 거야. 그러니 내가 당연히 복수 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았겠지.’

이제야 스포일러였던 아내가 멜라니를 죽게 만든 이유도 이해가 갔다.

멜라니의 성격상 슈나이더가 무제한으로 받아주며 힘을 실어주면, 그릇된 길로 빠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과도할 정도로 멜라니에게 집착하는 슈나이더가 그 증거였다.

그때 슈나이더의 아내는 무엇을 보았을까?

분명 그 미래는 딸의 죽음을 감수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선택했다.

멜라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말이다.

그게 비록 소름 끼치는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 해도, 딸에게 있어 분명 필요하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슈나이더에게 목 졸려 죽는 자기의 죽음도 보았겠지.

“딸의 죽음을 방관했으니 남편의 손을 빌려 죽는다는 건가.”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지는 것을 세인이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검사가 저렇게 손에서 검을 놓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세인의 눈초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메마른 웃음을 띠었다.

슈나이더는 패배자다.

오늘의 자신이야말로 최악의 패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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