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 리턴 라메아 (7)
큰 사고를 친 세인은 치안대로 갔다.
거기에서 에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조사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고, 당연히 상대는 그걸 믿지 않았다.
미친 소리라며 화를 내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긴 하다.
한 남자가 세인에게 말했다.
“증거를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세인은 마검을 넘겨주며 이것을 글리터로 보내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다시 마검을 돌려주는 치안대였다.
그들도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상대는 단신으로 용병대를 묵사발 내버린 존재였다.
게다가 마족이다.
정석대로라면 구금이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세인을 보니 그렇게 한다면 큰 실수를 하는 것만 같았다.
진짜 저 마족이 말하는 미친 소리가,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었다.
대체 눈앞의 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슈나이더가 매수한 남자들이 동료들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귓속말을 들은 책임자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셔도 좋습니다.”
세인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많은 사람을 말이다.
목격자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누가 봐도 이상한 전개였다.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치안대를 빠져나왔다.
물론 에스를 남겨둔 상태 그대로였다.
밖으로 나오는 그의 어깨에 까마귀가 내려앉았다가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날아가 버렸다.
* * *
오늘 밤은, 달은 물론이고 별빛마저도 자취를 감춘 밤이다.
하늘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아는지 빛을 감춰버린 것 같았다.
그 아래에서 슈나이더는 검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가 직접 움직일 생각을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슈나이더는 높은 실력을 갖춘 검사였고, 복수도 직접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낚시를 대신 시키는 사람은 없지.”
슈나이더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최소한 낚싯대라도 같이 잡는다면 모를까.
멀리에서 팔짱만 끼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의 뒤로는 부하들이 복면을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직속 부하들은 아니지만, 거금을 들여 얻은 전사들이다.
하나같이 대단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슈나이더는 그들이 세인 앞에서 불나방이 될 것을 안다.
자신이나 반은, 세인을 완력으로 어찌하려 들지는 않았다.
가망이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멜라니가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또 그 멜라니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인을 붙잡아놓아야 한다.
“이렇게 서니 그동안의 걱정이 기우처럼 느껴지는군.”
그동안 슈나이더는 진짜 조심했다.
그는 딱 한 번 글리터에 가본 이후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밖에서 맴돌며 계획을 짜고 거금을 쏟아부었다.
지금까지 공들인 세월을 생각해도 그가 실패할 리가 없었다.
따로 떨어져 나가는 한 패에게, 슈나이더는 냉혹한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의 가족은 내 돈으로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거다. 나머지 돈까지 전달된다면 말이다. 그러니 목숨으로 그를 막아라. 죽이거나 상처 입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아. 전투가 아니라도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라.”
그의 말에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르르 움직인다.
슈나이더는 다른 남자들과 함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멜라니가 있는 쪽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세인을 지연시키고 멜라니만 잡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은신처를 떠나 지붕 위에서 다른 지붕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신속히 멜라니를 구속하고, 적당한 때에 세인과 조우해야 한다.
그 중간에는 꼭 필요한 물건도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무대가 될 장소도 알아보았다.
글리터의 동태나, 주변에 문제가 될 만한 것들도 이미 사람을 보내 감시하도록 한 후였다.
슈나이더의 계산대로라면 오늘….
“세인은 죽는다.”
그런 그의 눈에는 세인에게서 날아오르는 까마귀가 보였다.
그렇게 연극 무대의 막이 올랐다.
* * *
세인은 구걸 통을 들고 다가오는 거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예?”
더러운 얼굴의 노인이 의아한 듯 말하자 세인이 다시 말해주었다.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네 정체를 알아. 응해주지. 그러니 원하는 곳으로 안내해.”
하지만 노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능청을 떨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나리. 제발 저를 가엾게 여기시고 한 푼만 적선해 주십시오.”
“마지막이야. 그냥 안내해주면 순순히 따라가겠어. 그러니 장난은 그만해.”
“나리. 대체 무슨 말이신지 모르겠….”
세인은 마검으로 노인을 찔렀다.
행인들이 소리를 지르고 세인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그 소란 통에서 노인이 뒤로 넘어간다.
세인은 무덤덤한 얼굴로 경련하며 피를 흘리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서 나타난 사람들을 주목했다.
쓰러진 동료를 바라본 남자는 세인에게 손을 까딱였다.
따라오라는 뜻이다.
슈나이더가 보낸 사람들이 그렇게 신호를 보내자 세인은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대로 움직인 것이다.
쓰러져 있는 노인만 불쌍하게 되었다.
독을 잘 쓰는 노인은 하독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다가 죽었다.
그런 노인을 넘어가면서 세인이 중얼거렸다.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말했잖아.”
싸늘한 시체는 세인에게 대꾸하지 못했다.
세인을 안내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그건 도시 외곽을 떠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세인은 남자들이 시간을 끄는 것을 알았지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착각하나 본데 세인도 시간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에서 남자들은 무기를 빼 들었다.
이미 충분히 뜸을 들인 다음이었다.
세인은 그때까지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왜냐면 곧 죽을 사람들이니까.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었다.
돌변한 남자들이 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무섭게 무기를 휘두른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분투에 비해 결과는 허망하게 끝났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절반이 죽어 나갔다.
그들의 죽음 이후, 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대단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어간 사람들의 분투에 세인이 인정해주는 줄 알았다.
비록 적이지만 멋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인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 도시라고는 하지만 권한도 없는 자가 마음껏 날뛰는군. 치안대를 매수하고, 백주에 살인을 저질러도 무마시키고, 복면을 쓴 채 돌아다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구나. 이게 다 블랙 라이어드가 뿌린 돈의 힘일 테지. 자유를 표방했지만 결국 돈의 힘이 법과 질서를 넘어서는구나. 이렇게 쉽게 개판이 될 줄이야.”
그때 한 남자가 기합을 터트리며 덤벼들었다.
세인은 파리를 쫓듯이 쉽게 그를 베어 넘겼다.
힘도 별로 안 들이는 것만 같았다.
지금 쓰러지는 사람도 나름대로 한 지역을 주름잡던 달인인데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귀족으로서 비애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구나.”
숨도 안 차는지 평온한 어조로 말하는 세인은 남에게 공포감을 주기 충분했다.
보라색의 눈이 그들을 차갑게 직시하자, 그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그 죄어오는 기분에서 탈출하기 위해 남자들은 발작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복면을 한 남자들이 세인의 뒤쪽에서 기습을 가해온 것이다.
벌판 위에는 계속 시체들이 쌓였다.
파놓은 함정이 작동하는 가운데 멀리에서 활을 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나름대로 전투의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그물을 던져 가면서 공격을 해왔다.
그러나 쇠줄로 만든 그물은 단숨에 찢어지고, 너무나도 쉽게 모두를 베어버리고 돌아서는 세인이었다.
그렇게 돌아서며 시체들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시선은 아래가 아닌 하늘과 닿아 있었다.
그렇게 그가 바라보는 하늘 속에 까마귀가 있었다.
까마귀는 날개를 움직이며 빠르게 날았다.
그러면서 허허벌판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계속 바쁘게 날아다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까마귀는 드디어 검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검은 점들이 목표였던 까마귀는 지금 있던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땅바닥에 추락할 듯이 내리꽂히다가 속도를 줄였다.
그렇게 까마귀가 땅바닥에 내려앉자 한 남자가 활을 들어 올렸다.
그 남자를 저지하는 건 바로 슈나이더다.
지금의 그는 멜라니를 향해 이동 중에 낯선 방문을 받은 것이다.
슈나이더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까마귀의 입이 열린 것은 그 직후였다.
“슈나이더.”
까마귀의 말에 슈나이더의 부하들이 약간 웅성거렸다.
그런 부하들을 뒤로 둔 슈나이더는 정작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까마귀를 계속 내려다보았다.
그게 마치 더 이야기 해 보라는 의미 같았다.
그래서 까마귀는 말을 계속했다.
“어딜 가는 거지? 슈나이더?”
“그걸 왜 묻는 거지? 넌 누구냐?”
“심부름꾼이라고 해두지.”
자조적인 어조와 함께 한숨을 내쉬는 까마귀 앞에서, 슈나이더가 살짝 웃었다.
‘이것인가? 세인이 준비한 것이?’
역시 세인은 뭔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심부름꾼을 보낸 거겠지?
까마귀는 세인의 새가 분명했다.
“영양가 없는 말을 한다면 1분 뒤에 죽은 너를 밟고 가겠다.”
“난 세인이 보내서 왔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을 네게 해줄 작정이다. 그러니 부하들을 뒤로 물려라.”
실토하는 까마귀를 보며 슈나이더는 갑자기 품 안을 뒤적였다.
그런 그가 꺼내 든 것은 카드 한 장이었다.
저번에 오버 더 카드로 점을 볼 때 마지막으로 나왔던 패이다.
그는 그걸 계속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군. 그런데 너는 나를 막을 수도, 설득할 수도 없어. 나는 바쁜 몸인데 왜 너와 말을 섞어야 할까? 오히려 지금의 널 죽이는 것이 내게 이득인데?”
“그럴까?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을까? 이렇게 보여도 굉장히 오래 살아왔거든. 나는 세계수라서 말이야.”
농담 같은 까마귀의 가벼운 말에 슈나이더가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이 까마귀가 세인의 대안이라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그는 혹시 몰라 손짓으로 부하를 불러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그 광경을 까마귀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멜라니의 주위는 확보했지?”
“확실합니다. 수백 명 이상을 탐색조와 감시조로 돌리고 있습니다.”
슈나이더는 부하의 대답에 까마귀가 지연책으로 쓰인다 해도 문제가 없음을 재다짐 받았다.
지금의 그는 세인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멜라니와 그만큼 가까운 것이다.
여기 있는 까마귀를 무시하고 지나치면 그만이다.
까마귀가 시간을 벌어도 멜라니 주변에는 글리터의 파견 부대가 없었다.
미스틸 테인과 고작 몇 명의 병사들뿐이다.
슈나이더는 이제야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거였어. 고작 이거였구나. 미심쩍은 기분은 겨우 이런 것이었어. 이제 됐다. 무시하면 그만이야.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인은 오늘 죽는다.’
“이봐. 네가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설령 날 막아도 소용없어. 세인을 노리는 게 나 혼자가 아니거든.”
슈나이더의 의미 모를 말에 까마귀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능청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마법 생물일 수도 있잖아. 나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생물이라고.”
슈나이더가 웃었다.
지금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까마귀를 향해서 말이다.
“어디 그 마법을 구경해 볼까?”
그러면서 슈나이더는 손에 든 카드를 버렸다.
지금 땅에 던지는 것은 분명 카드인데, 체스 용어를 쓰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가벼웠다.
이건 다 이긴 판이다.
“체크 메이트.”
팔랑거리면서 바닥에 내려앉는 카드에는.
까마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 * *
멜라니 일행은 몬먼드 시를 떠났다.
반나절 정도를 꼬박 걸어 도착한 곳은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이곳 또한 스톤헤드 용병단 같은 놈들이 쑥대밭을 만들어 놓은 것만 같았다.
어쨌든 멀쩡한 건물도 있었고, 엄폐물이 많이 있으니 이곳에서 쉬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왜 나는 항상 지하실에 들어가야 하는 거야?”
멜라니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항의했지만, 미스틸 테인은 그녀의 투정을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습격자들이 땅을 파고 공격하기 어려우니까요. 지하실에 있으면 통로만 지켜도 되니 편해서입니다.”
“그 습격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소란 한번 가지고 이러기야? 정말 날 엄마에게 보낼 거야? 난 지하 감옥에 갇힐지도 몰라! 아니면 탑 꼭대기가 될 수도 있어. 엄마 성질 몰라서 그래? 미쳤어! 우리 엄마는 무책임하고 미쳤다고! 항상 허구의 남편만 챙기고 실제 있는 딸은 나 몰라라 하는 여자잖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멜라니의 폭언은 아주 신랄했다.
남이 듣기 괴로울 정도였다.
그러자 라온이 뒤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거 반역적인 발언이에요.”
“작은 소란이 아니었습니다. 살인이 얽힌 대소동이었어요.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해요. 저도 돌아가서 벌을 받겠습니다. 사정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하에 갇히기 싫다고 뻗대는 멜라니였다.
미스틸 테인이 보기에 지하실을 거부하는 이유는 달아날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깥을 경계하는 동시에 멜라니도 경계해야 하니 말이다.
안팎으로 아주 생고생이었다.
“분명 엄마는 나를 지하 감옥에 가둘 거라고! 그러고도 남아!”
“잘됐네요. 지금 미리 익숙해지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으니 토끼 눈이 되어있는 라온이 보였다.
그녀에게 피식 웃어 보인 미스틸 테인은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방금 제가 한 말은 잊어 주세요.”
“저는 그럴 수 있지만 멜라니님은 잊지 않을 거예요.”
“하아.”
한숨을 쉰 미스틸 테인은 병사들을 밖에 배치했다.
통로에도 번을 세웠다.
여기에서 밤을 보내고 출발해야 할 듯싶었다.
그렇게 불침번까지 정해주고 나서 한시름 놓은 그는 방에 틀어박혔다.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던 미스틸 테인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썩어서 반쯤 부서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카드를 섞는 그에게 라온이 다가왔다.
쟁반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멜라니에게 식사를 주고 온 모양이다.
“뭘 하는 거예요? 도박하는 남자는 질색이라고요.”
“벌써 바가지를 긁는 겁니까? 오버 더 카드라고 하는 건데, 가벼운 유흥이에요.”
농담을 오가는 가운데 미스틸 테인이 패를 나누었다.
라온은 맞은 편에 앉아, 미스틸 테인이 카드를 늘어놓고 수거하는 걸 구경했다.
그러다가 미스틸 테인과 눈이 마주치니 웃어 보였다.
“뭐. 이런 식으로 하는 거죠. 그런데 의미 모를 패가 나올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이런 거.”
미스틸 테인이 첫 번째 패를 여니 코볼트가 나왔다.
붉은 배경 속에 눈을 감고 있는 코볼트였다.
붉은 배경은 휘몰아치는 듯, 여러 개의 선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죽음의 폭풍을 연상케 했다.
“패에 몬스터도 있어요?”
“별게 다 있죠. 의미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다음 패를 꺼내 드는데, 역시나 의미 모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부러진 창?”
“갑자기 웬 창일까요?”
“글쎄요. 저는 창을 별로 안 쓰는데.”
“그러고 보니 창을 쓰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왠지 잡고 있으면 금방 질리더라고요.”
미스틸 테인은 마지막 패를 열었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야 원. 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패뿐이군.”
거기에는 뱀이 그려져 있었다.
그 패를 들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그였다.
애인 앞에서이니 멋지게 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른듯싶었다.
그때 턱을 괴고 있던 라온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그거 아세요? 오버 더 카드는 원래 스포일러들이 치는 점이 기원이래요. 스포일러들은 참 이상한 족속들이죠. 같은 점괘라도 해석이 갈리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쓸 만한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찾기가 힘들지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오버 더 카드는 허무맹랑한 점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다만 스포일러들이 봐야 해석이 수월하죠. 그들은 전체를 보는데, 세상의 단면만 보는 일반인들은 해석하기 어려워요.”
“그렇군요.”
미스틸 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라온의 말은 계속되었다.
“일반인들이야 멋대로 해석을 가져다 붙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연결해서 맞았다고 자위해요. 하지만 지금처럼 가져다 붙이려고 해도 난감할 때가 있잖아요.”
“저기 그런데….”
미스틸 테인이 입을 열자 라온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 앞에서 미스틸 테인이 말했다.
“카드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자 라온이 갑자기 웃었다.
아주 하얗게 웃었다.
누추한 방이 환해질 정도로 활짝 웃는 바람에 미스틸 테인도 어색하게나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라온?”
* * *
멜라니는 밥을 먹고 졸았다.
그러다가 흠칫 잠에서 깨어났다.
원래대로라면 강력한 수면제를 탄 식사라서 지금 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평소 그런 약물에 내성이 생기는 조치를 받아온 멜라니라서, 의외로 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지?”
이상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낯선 산 위를 걷고 있었고, 꿈속에서 낯선 남자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거기엔 자신 외에 여자 한 명도 섞여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흔들어 보지만 잘 생각나기는커녕, 오히려 기억이 더 멀리 달아나 버렸다.
꿈을 더듬던 멜라니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피부를 쓸어 본다.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상하게 불안하다.
약간 불안한 것도 아니고 몹시 불안하다.
그녀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아주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이 말이다.
“미스틸 테인? 거기 있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밖에는 보초가 있을 텐데 말이다.
그때 갑자기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그 반응에 반색하던 멜라니는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라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멜라니는 라온을 보고 왜 몸이 굳어진 걸까?
그녀는 피투성이였다.
얼굴이며 옷이며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라온은 마치 유령에 씐 것만 같았다.
그만큼이나 낯설고 이상한 분위기였다.
무표정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라온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멜라니다.
멜라니는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을 뱉었다.
“라온?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어?”
라온은 반쯤 감긴 눈으로 가련하게 떨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녀를 보았다.
턱을 치켜 올린 상태로 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었다.
아주 낮고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 속에 광기가 박혀 있었다.
“으흐흐.”
기뻐서 견딜 수 없다는 식의 웃음 앞에서 멜라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피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잘못돼도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
사색이 다 된 멜라니 앞에서 라온은 피에 젖은 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나의 공주님.”
그리고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얼굴만 들어 올리는데, 피에 젖은 그 얼굴이 마치 괴물 같았다.
인간이 아닌 그런 느낌이 났다.
“정식으로 저를 소개하죠. 저는 반이라고 합니다.”
“….”
당황한 멜라니가 눈을 깜박이는 가운데.
반이 이렇게 속삭였다.
“체크 메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