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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왕 마검의 주인-229화 (229/307)

# 229

& 리턴 라메아 (1)

“꼭 들어줘야만 하는 부탁이면 그 시점에서 이미 강요지. 부탁이 아니잖아.”

까마귀는 세인의 부탁이란 말에 난처한 듯 머리를 움직였다.

그는 사실 오랫동안 떠나 있을 거라고 말하려 했던 참이다.

세인은 이제 검은 왕이 되었다.

각성한 그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었다.

까마귀의 역할은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생의 묘에 머무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지한 얼굴로 저렇게 말해오니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글리터로 날아가 줘. 그리고….”

세인은 까마귀에게 마플의 방 위치에 관해 이야기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그 방을 고집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방은 세인이 거주하는 곳에서 가까웠고 볕도 잘 드는 방이었다.

그곳으로 가서 마플의 상태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만약에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침대 밑을 살펴봐 달라고도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까마귀는 딱 잘라 말했다.

“난 전령도 아니고 배달부도 아니야.”

그러자 세인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네가 떠나야 한다고 해서 난 무리한 출발을 했어. 덕분에 다시 돌아와 보니 시간이 엄청나게 흘렀고, 내게 딸이 있다는 소식을 불과 어제 알게 되었어. 하지만 지금 그걸 가지고 너를 탓하려는 게 아냐. 딸에 대한 궁금증을 충족시키겠다는 이야기도 아니야. 나는 지금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네게 부탁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세인은 하다못해 글리터에 자신의 귀환 소식을 알리려 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이 순간 간절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을, 까마귀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설명까지 들으니 까마귀도 처지가 곤란해져 버렸다.

저렇게 정색하고 눈동자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말하는데 거절하기가 궁색했다.

결국 한숨을 쉰 까마귀는 이렇게 말했다.

“빌어먹을.”

그리고 날아올랐다.

“가능한 한 빨리 갔다 오마. 그러니 당장이라도 누굴 죽일 듯 분위기를 잡는 건 그만둬.”

고개를 끄덕인 세인에게서 떠나는 까마귀였다.

그렇게 까마귀는 본의 아니게 글리터를 향해 움직이게 되었다.

날아가는 까마귀를 배웅한 세인은 몸을 돌렸다.

여관 일 층으로 들어가니 에스가 내려와 있었다.

여관 주인은 세인을 보고,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오늘 아침은 달걀 요리입니다.”

세인은 에스에게 먼저 먹으라고 말해 두었다.

그리고서 목욕탕에 가서 몸을 깨끗이 하고 나왔는데 정작 밥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인은 결국 가벼운 차림으로 다시 여관을 나섰다.

아침을 먹지도 않고 말이다.

사람이 드문 길로 빠진 세인은 목 뒤의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뛰기 시작했다.

뭔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계속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까마귀는 분명 마플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 그 정도로 강렬한 꿈을 꿀 리가 없는 법이었다. 아직도 마플의 마지막 얼굴이 그의 뇌리에 생생했다.

그 슬픔 앞에 직면하면 어떻게 굴어야 할까?

세인이 빠른 속도로 마을의 입구를 스쳐 지나가자,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환호성 비슷한 소리였다.

“젊다는 건 역시 좋아! 뛰지 못해 안달이니 말이야! 난 걷는 것도 힘든데!”

마을을 빠져나온 세인은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는 진눈깨비 속을 뚫고 달렸다.

그런데 적당한 속도로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전보다 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내는 전력 질주 같은 속도를 내도 마찬가지였다.

수직으로 상승한 그의 힘은, 땅 위를 달릴 때마다 뒤로 채인 흙을 멀리 날아가게 했다.

그러나 세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차라리 이럴 때는 괴로움에 빠져 생각을 비우고 싶은데 말이다.

진눈깨비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옷도 젖어서 달라붙으니 날씬하고 조각 같은 몸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세인이 마을로 돌아왔다.

“차라리 글리터까지 뛰어갈 걸 그랬군.”

약간 기분이 풀렸는지, 농담을 중얼거리는 세인의 앞으로 노인이 보였다.

흔들의자에서 졸고 있는 노인은 그가 준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 그 옆에 앉으려고 했는데 노인은 눈가를 비비며 잠에서 깨었다.

크게 하품한 노인이 옆에 앉는 세인을 바라본다.

“뭐야? 그 우울한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다른데 무슨 일이 있나?”

눈앞에 있는 노인이 멀쩡했다면 속을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노인의 상태를 보니 말해줘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노인의 코는 딸기처럼 빨갰는데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무릎 위에 가로로 누워있는 술병 때문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는 사람이 죽은 것 같아.”

예상외의 답변에 노인은 자신의 코를 쓱 하고 문질렀다.

그리고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여기에 연고가 없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알지?”

“예감이 들어. 너무 확실해서 두려울 정도야.”

“그래. 예감. 그거 살다 보면 절대 무시할 수 없지. 오히려 그게 눈앞의 현실적인 기만보다 확실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야.”

술병의 마개를 뽑은 노인은 세인에게 술을 권했다.

하지만 세인은 그의 제안을 받지 않았다.

세인의 거절에 혀를 찬 노인은 술병을 기울여 입에 가져다 대었다.

“크아! 좋군, 좋아. 바로 이 맛이야. 이봐, 너무 낙심하지 말게. 어차피 누구나 죽기 마련이야. 물론 그 얼굴도 모르는 마족이 참 안 됐어.”

노인은 세인이 말하는 상대가 마족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자네는 내게 목도리를 주었어. 그런 상냥함이라면 상대도 평소에 충분히 만족했을 거야. 죽음 앞에서 어쩌겠나? 한번 울고, 한번 털고 보내 버려야지. 자네 얼굴을 보니 이미 실컷 운 것 같은데 이제 털어버리는 일만 남았군.”

세인이 바라보자 노인이 웃었다.

“왜? 내가 죽음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 같나?”

한숨을 쉰 세인이 일어나자 노인이 술병을 건배하듯 들어 올리며 다시 말했다.

“죽음은 이별이 아니라 배웅이야. 상대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 세상의 배웅을 받으며 그곳으로 가는 거야. 상대가 올 수 없으니까. 이 정도면 공평한 법칙이지 않나?”

아무 말 없이 일어난 세인이 자리를 떠나자 노인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 가사는 여전히 이상했고 말이다.

여관으로 돌아간 세인은 며칠 동안 기다렸다.

그 사이 에스는 많이 진정이 되었다.

세인은 이 정도면 까마귀가 돌아올 때이다 싶어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마을의 입구 쪽으로 가보니 웬일인지 흔들의자가 비어 있었다.

주인 없는 의자를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세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세인이 괴팍하지 않은 귀족이란 게 마을에 퍼진 상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죽었습니다.”

세인이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자 청년은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원래 불치병이었어요. 오늘내일하는 분이었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시끄러워도 참았던 거고요. 결국 제가 묻었습니다.”

그리고서 허리를 숙여 보이고 자리를 떠나는 청년이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니까 귀족으로 보이는 세인에게 막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족도 없는 노인이니까, 세인이 후일 가족을 해코지할 걱정도 없었던 노인이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세인은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흔들의자의 손잡이를 만져 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의 발치에는 목도리에 대한 노인의 답례품이 놓여 있었다.

마개를 따지 않은 새 술병이었다.

그것을 발로 툭툭 건드려 보면서 세인은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결국 결실을 보았다.

저녁이 되어 까마귀가 날아온 것이다.

까마귀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뭔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붉은 끈 같은 것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다가온 까마귀는 그것을 세인의 무릎 위로 떨구었다.

붉은 천을 들어보니 목도리였다.

마플이 직접 짠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세인의 귀로 까마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죽었어. 유감이다. 세인.”

붉은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는 가운데 까마귀의 말이 이어졌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살펴보니 의견이 분분하지만, 독살로 의심된다고 하더군.”

“누가? 왜 그런 거지?”

“글리터 쪽에서도 그걸 몰라 혼란에 빠진 것 같아. 물론 마플과 가까운 인물들만 말이지. 타인이 보기에 그녀의 위치는 중요한 자리가 아니니까. 너와 가까운 사람들만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세인은 그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발작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던 게 빛을 발하는 것일까?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그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까마귀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아야 할 까마귀는 이미 자리를 피한지 오래였다.

세인을 위해 말없이 사라져준 것이다.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세인은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시간을 더 보냈다.

가끔 의자가 앞뒤로 움직이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세인이 자신의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어보았다.

그리고 안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목도리 안쪽에 금빛 실로 수놓아진 부분이 있었다.

아주 급하게 수를 놓은 듯 삐뚤빼뚤 이었지만, 뜻을 전달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마플이 죽기 전에 그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 때문에 꿈속에서 그녀가 침대 밑을 살펴보라고 말 한 것이다.

목도리에는 여러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중 몇 개의 단어는 그도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미 모를 단어들도 존재했다.

이 단어들은 서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플이 이렇게 급하게 수를 놓았을 리가 없었다.

세인에게 있어 분명 중요한 단어들이다.

그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간을 좁힌 세인은 금빛 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로서는 마플이 보낸 메시지를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어들을 보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마플은 왜 이 단어들을 자신에게 보여준 거지?

이 단어들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거지?

그중 세 번째 궁금증은 의식 저편으로 밀어 놓았다.

다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세인은 그 목도리를 다시 목에 둘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했다.

그리고 뒤늦게 발치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이로 마개를 따서 뱉은 세인은 그 술병을 건배하듯이 위로 들어 올려 보였다.

여기에 없는 이에게 바치듯이 말이다.

그리고 술병을 거꾸로 뒤집어버렸다.

콸콸 쏟아진 술이 바닥을 적셨지만, 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흔들의자 위에 앉아 있는 세인은 가슴을 점령한 복수심에 불타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상대를 잡기 전까지는 밀어 놓아야 하는 감정이다.

이런 짓을 저지른 상대가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그건 나중 일이다.

지금 당장은 망자의 배웅에만 충실해야 한다.

*  *  *

세인과 에스가 있는 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

‘몬먼드’라는 소도시가 있다.

글리터와 주변국들이 합심해 만든 위성 도시 중 하나였다.

그렇게 만들었으되, 이곳은 중립적인 자유도시나 마찬가지라서 엄격한 질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화룡석과 온천을 이용해 만든 도시는 매우 따뜻했다.

옹기종기 모여 골목을 끼고 있는 건물 중에 드워프들이 만든 튼튼하고 높은 건물들도 간혹 보였다.

반쯤 만든 돔은 도시의 반을 뒤덮었고, 나머지 반은 돔과 연결된 형형색색의 천이 뒤덮고 있었다.

몬먼드 시는 글리터와도 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 들리고 싶은 도시다.

지금 야외 카페에 앉아 있는 소녀처럼 말이다.

하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소녀는 붉은 머리를 가진 깜찍한 아이였다.

키가 유난히 작은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도 꽤 고급스러웠다.

그녀가 가진 인상은 마족이라기보다 인간에 가까웠다.

소녀는 세인과 세리스의 딸이었다.

고귀한 신분인 소녀가 여기 있는 이유는 가출을 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엽기적인 짓을 잘하지만, 이 가출 사건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가출 전에 저지른 일부터 문제다.

그녀는 세인이 남긴 편지를 읽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러니 세리스가 얼마나 분노하고도 넘칠지 알 수 있음이다.

소녀는 당분간 글리터에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 일에만 관련되면 얼마나 이성을 잃고 몰입하는지 어릴 때부터 깨우쳤기 때문이다.

“솔직히 딸이 아니었으면 사형 당했을지도?”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은 그녀는 정말로 악동 같았다.

실없이 웃기도 잠시.

소녀는 곧 짜증을 냈다.

“아 진짜!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러면서 아이답지 않은 얼큰한 욕설을 내뱉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배웠는지 모를 드워프식 욕설이었다.

이로써 울프크릭은 글리터 왕가에 큰 죄를 지었음이 드러난다.

소녀가 테이블 다리를 차며 못된 성깔을 부리고 있을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멀리에서 잘생긴 기사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미스틸 테인! 늦었잖아! 무슨 닭고기 꼬치 하나 사 오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

사실 타국의 기사를 이딴 식으로 부른다는 건 큰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를 줘도 바뀌지 않는 것이 소녀의 성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잘 아는 미스틸 테인은 곤란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소녀를 달래듯 침착한 음성으로 지적한다.

“멜라니님. 사람들도 돌아다니는 이곳에서 그렇게 제 이름을 크게 부르면, 저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어? 그렇네?”

세인의 딸인 멜라니는 그건 곤란하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이럴 때 보면 그녀는 언제 성질을 부렸냐는 듯 귀여웠다.

미스틸 테인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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