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 예정된 새로운 만남 (5)
에스도 세인도 한참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게 잠든 둘은 깊게 자지도 못했다.
에스는 악몽을 꿀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그건 현재 그녀의 불안한 심리 상태와 맞물려 있었다.
세인의 경우에는 다행히 악몽을 꾸진 않았지만, 대신 의미심장한 꿈을 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인은 거대한 탑 안에 있었다.
원형으로 구부러진 계단 안에서 그는 꿈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로 올라가 안쪽으로 사라지는 계단을 보며 그가 중얼거린다.
“이런 상황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꿈에서 깨어나려 정신을 집중하기보다는 움직이는 게 좋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세인은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그는 움직이다가 횃불을 끼워 넣는 장식대를 쳐서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그에 따라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원형 고리가 바닥을 뒹군다.
동시에 여러 개의 사슬고리들이 쩔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때 갑자기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인은 고개를 들어 사라지는 옷자락을 보았다.
‘쫓아 가볼까?’
세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면서 여러 개의 방을 스쳐 지나갔는데, 그중에서는 한 남자가 앉아 있는 방도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남자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어두운 그늘에 가려 남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여전히 위쪽에서는 발소리가 들려왔고, 세인은 본능적으로 그 소리를 쫓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게 최우선이다.
얼마나 빙빙 돌며 위쪽으로 올라갔을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방을 발견했다.
그 안쪽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슴이 뛰는 것을 진정시킨 세인은 이제 발을 움직이는 속도를 줄인다.
탑 밖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여러 사람이 아우성을 치는 듯한 소리다.
누군가가 선창을 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보이는 방에만 관심이 갔다.
강렬하게 뛰는 맥박이 망치처럼 그의 관자놀이를 때리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과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의 압박 속에서 세인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인물을 보았다.
썰렁한 방 안에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고, 여자 한 명이 등을 보이며 뭔가를 보고 있었다. 비록 당장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세인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에 금방 상대를 알아본 것이다.
“마플.”
“감동적인 글이에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로 감사해요.”
마플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책을 제 자리에 꽂아 넣었다.
그녀가 방금 탑을 올라갔던 사람인 걸까?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여기서 계속 책 한 권을 읽은 것으로 보인다.
‘하긴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 여긴 꿈속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세인은 창문에서 쏟아지는 태양 빛을 후광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마플을 보았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지만, 세인은 매우 불안한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 앞에서 마치 불안해하지 말라는 듯 마플이 밝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밝았다.
그래서 세인은 더더욱 불안해졌다.
“왜 내 꿈 안에 나타난 거지?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나는 곧 성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 우린 곧 다시 볼 수 있어.”
마플은 침대 위에 천천히 앉았다.
그리고 꿈속에서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인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 창밖이었다.
“저 소리가 들려요?”
세인은 창밖의 요란스러운 소리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았다.
그 소리는 이제 벌떼가 웅웅 거리는 것처럼 들릴 뿐이었다.
마플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까이 다가가려는 세인을 마플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할 말이 있어요. 그래서 나타났어요.”
“내가 곧 글리터의 성으로 갈 거야. 할 이야기는 현실에서 해.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꿈속의 이런 분위기가 너무 싫거든.”
그러자 마플이 안타까움과 아픔을 숨기려는 듯 웃어 보였다.
억지로 짓는 웃음과 함께 그녀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주 중요한 대화였다.
그래서 마플은 여기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세인님. 제가 소중한 물건을 어디에 숨겨 놓는지 아시죠?”
“그래.”
“거기에 있어요.”
“뭐가?”
그러자 마플은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막았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원래라면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세인이 걱정된 마플은 어떻게든 그에게 물건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허락되는 선 안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밑에 있어요. 그러니 충격을 받지 말고 거기를 꼭 보세요. 그게 첫째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약속해 주세요. 최우선으로 거기를 확인한다고. 그 물건을 본다고 말이에요.”
“약속하지. 꼭 약속한다고. 그러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사정을 설명해줘.”
그윽한 눈빛으로 세인을 바라보던 마플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리고 딴소리를 했다.
“그거 아세요? 세인님은 아주 좋은 분이에요. 그러니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 자신에게 화내지 말아요. 자기 책임도 아닌데 자기에게 화내는 짓은 너무 가혹한 짓이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요. 부탁이에요. 이게 제가 두 번째로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마플.”
“세인님.”
그때 마플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빛은 그런 그녀를 당장이라도 지워버릴 듯이 찬란했다.
분명 빛의 세례인데 세인에게는 위태롭게만 보였다.
그는 지독한 상실감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마플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다시 세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저는 당신이라는 가족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세인님이 있어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아끼는 사람으로서 부탁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위해 웃으며 살아 주세요.”
세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불길한 예감은 모든 베일을 벗고 실체를 드러냈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위태롭게 웃는 마플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건 그가 몸을 떨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해야만 해.’
그렇게 생각한 그는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억지로 떨리는 음성을 한 자 한 자 뱉어냈다.
“그래. 그럴게. 마플. 난 그렇게 살겠다. 너에게 약속할게.”
그러자 마플이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었다.
마치 선물을 주듯이 환하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나의 왕. 나의 세인.”
그리고 끝이었다.
세인은 식은땀 범벅인 상태로 꿈에서 깨어났다.
한동안 그는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여긴 여관방 안이다.
글리터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의 여관방 말이다.
주위는 아주 어두웠고 열린 창문 밖으로 겨울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만져 보았다.
아주 축축했다.
세인은 꿈속에서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햇살 안에서 부서지듯 모습을 감추는 마플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 순간 그는 글리터로 돌아가는 것이 지독히도 싫어졌다.
예감을 확인하는 게 겁났기 때문이다.
두 눈으로 현실을 확인하게 되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던 그는 살짝 놀랐다.
이제야 옆에 작고 검은 그림자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세인은 뒤늦게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림자를 확인했다.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에스였다.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질문을 던져보았다.
“무슨 일 있니?”
그러자 에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가슴 밑바닥까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갈라지고 낮은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의 그녀가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창밖에 누가 있어요.”
그녀의 말에 세인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이 층이다.
그리고 창문 너머에는 발을 디딜 난간 같은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밖에는 아무도 없어.”
그러자 에스가 도리질을 쳤다.
“아니에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머리를 풀어헤친 하얀 얼굴이 보였어요. 제 생각에 그녀는….”
에스는 몸을 파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제 숙모예요.”
세인은 다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고요했다.
그렇다 해도 에스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비몽사몽일 때 영혼 상태로 벌판을 헤맸던 소녀다.
분명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세인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인은 에스를 찾기 전 보았던 시체를 기억했다.
에스의 숙모로 추정되는 시체였다.
그녀가 에스를 해코지하려고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세인은 여전히 떨고 있는 에스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긴 소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마을은 도적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두운 지하창고에서 홀로 견뎌내야만 했다.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과 싸우며 말이다.
그러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
마을이 불타는 것도 지켜보았다.
성인이라도 견디기 힘든 고난의 연속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세인은, 에스를 보면서 침대를 두드려 보였다.
세인의 뜻을 알아차린 에스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세인은 거칠게 떨리는 소녀의 몸을 느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위로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거 알아?”
한참이 지나서야 에스가 물어왔다.
“뭘요?”
“나도 가끔 겁이 나. 굉장히 겁이 나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을 때도 있어.”
에스의 눈이 창문과 세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면서 입을 놀렸다.
“귀족이시고 기사이신 거 같은데 그런 분도 공포를 느끼나요?”
그러자 세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사람이니까.”
“죄송해요.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몬스터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사과할 필요는 없어. 요점은 나도 겁이 난다는 거야. 성인도 그래. 어른이 된다고 운명을 좌지우지할 힘을 가지는 게 아냐. 실은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을 때가 많아. 어떨 때는 매일 무서울 때도 있지.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니?”
에스는 벼랑 끝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세인을 꽉 껴안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인형을 가지고 논 적이 없었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에스에게 있어서 세인이 인형 대신이었다.
“모르겠어요.”
“두려운 건 이상한 게 아냐. 살다 보면 피할 수가 없어.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도 해보지만, 시간이 흘러 지나가는 거지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극복이란 건 생각보다 어렵거든.”
에스는 지나가는 것이란 말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 했다.
“위안이 되는 건 어차피 지나갈 거라는 거야. 이 또한 지나갈 거야. 다시 위안이 되는 건,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야. 누구나 무서워해.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삶에서 마주치는 끔찍한 것들에게서 무서워해. 아프게 하는 것들에게서 소스라치곤 해. 너만 그런 게 아냐. 그러니 힘내라고.”
말을 마친 세인은 여관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내일 맞이할 아침이 두려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 해도 떠오르는 태양을 말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도 있니? 눈에 보여?”
“아니에요. 한참 전에 사라졌어요.”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걸 거야. 그녀는 떠났어.”
“마치 원망하는 듯 저를 노려보았어요.”
세인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건 정을 떼려고 그런 거야. 보통 가족들이 꿈이 나타나서 그런 행동을 많이 해. 나도 그랬어. 부모님이 나타나 나를 한참 노려보더군. 죽은 자를 산자가 너무 오래 가슴에 품고 있으면 안 되니까 말이야.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해. 그래서 독하게 쏘아보고 가버리는 거야. 마지막 미련마저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살라고 말이야. 그들은 보통 그래. 네 처지에서 당장은 서운하고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그들 나름의 배려지.”
에스는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세인은 그런 그녀의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동이 완전히 터오자 그는 에스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하품을 연신 하는 여관 주인이 보였다.
등을 보이고 있는 그는 열심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말을 거는 건 방해가 될 거 같아 일층 문을 열고 나가니, 닭 우리에서 닭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인은 닭들을 구경하는 대신 뒤뜰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돌을 쌓아 올린 우물과 넓은 공터가 있었다.
거기에서 검을 뽑은 세인은 무작정 그것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붕붕거리는 소리만 났다.
그런데 몸이 풀리고 속도가 더 붙자 검날이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검속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점점 빨라져서 날카로운 소리를 주변에 뱉어냈다.
검을 휘두르는 세인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정면은 응시한 채로 그는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한 손으로 잡고 휘두르다가, 양손으로 좌우를 베기도 했다.
급기야 장검은 공기와 마찰하면서 새된 소리까지 만들어 냈다.
허공을 가르며 지나가는 선이 희미해지자 뭔가를 태우는 냄새마저 난다.
그걸 코로 감지한 세인은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우물에 늘어뜨려 놓은 두레박을 이용해 지하수를 퍼 올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그의 상반신을 적셨다.
물을 뚝뚝 흘리는 그는 그 상태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무아지경이 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지만 무거워진 머리는 쉽게 비워지지 않았다.
결국 검을 멈춘 그는 검 끝을 땅에 꽂았다.
푹 소리가 나며 땅속으로 들어간 검날을 보는 세인이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
그는 제자리에서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이 부탁을 꼭 들어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그의 앞에는 언제 날아왔는지 검은 까마귀가 처마 위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