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27화 (227/307)

# 227

& 예정된 새로운 만남 (5)

에스를 살린 세인은 그녀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그러면서 도적들의 물건을 챙겼다.

놈들이 약탈한 것 중에서 두꺼운 솜옷을 꺼내 에스를 입혔고, 장갑과 목도리 그리고 튼튼한 장화 같은 것을 챙겼다.

식량도 가장 좋은 것만 빼내었다.

작은 궤짝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은화가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혈안이 돼서 이것을 긁어모았을까 생각하니, 피로 만든 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은화를 몇 움큼 쥐어 주머니에 넣은 세인은 나머지를 마을 곳곳에 뿌렸다.

그 외에도 도적들이 모았던 다른 재물들도 발로 차서 다 엎어 버렸다.

그렇게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노잣돈을 만들어준 세인이 마을에 불을 질러 버렸다.

에스와 세인은 멀리에서 마을이 불타는 것을 구경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보다가 고개를 골린 세인은 옆에 서 있는 에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댕이가 묻은 얼굴로 꿋꿋이 서 있는 에스는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마치 지금의 광경을 영영 잊지 않겠다는 듯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세인은 지금의 광경을 에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그녀 안에서 매듭 하나가 풀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꽤 충격적인 장면일 수도 있어서 걱정도 되었다.

“괜찮니?”

“예. 괜찮아요.”

세인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 털어내라는 듯 일부러 거칠게 말이다.

에스의 앙상한 몸이 그런 세인의 손에 따라 앞뒤로 흔들렸다.

“그럼 갈까?”

“조금만… 정말 죄송한데 조금만 더 보면 안 될까요?”

“오래 봐도 괜찮아.”

결국 한참이 지나 둘은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에스는 자신이 영혼 상태로 세인을 찾아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현상이 쉽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에스는 특별한 아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에스의 외투를 잘 여며준 세인은 그녀와 함께 가장 가까운 마을을 향해 걸었다.

동행하는 에스의 체력을 고려해 보폭은 넓지 않았다.

꾸준히 걷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세인은 눈밭에서 자도 될 만큼 튼튼했다.

더욱이 에스를 고려해서 많은 물건을 챙긴 덕분에 식량도 충분했고 옷도 두꺼웠다.

세인은 일부러 에스에게 말을 많이 걸었다.

그러나 그도 말주변이 있는 성격이 아니라 친근하게 다가서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래도 그런 그의 의도는 에스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시간이 지나자, 에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질문을 해왔다.

“제게 뭘 원하세요?”

철이 너무나도 일찍 든 소녀의 질문에 세인은 짧게 대답했다.

“지금 해주고 있잖아.”

세인이 손을 내밀자 에스는 그 손을 잡아 왔다.

아주 굳게 말이다.

그녀는 기침을 몇 번 해서 목을 가다듬더니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

“감사해요. 은혜를 꼭 갚을게요.”

세인은 구태여 거기에다 대고 뭐라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녀의 손을 잡고 계속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며칠을 걸어 도착한 곳이 뒤샹 마을이었다.

이 작지 않은 마을에는 목조 건물과 사람이 많았다.

마을 주변에 세워둔 낮은 목책을 지나 초입구로 들어서는데,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이 세인과 에스를 보고 대뜸 말을 걸어왔다.

“그 목도리를 벗고 가게.”

“뭐?”

세인의 하대에도 노인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주름지고 썰렁한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계속 말하는 노인이다.

“리어라는 소설에도 있는 말인데, 넝마를 걸친 부모는 무시당해도 주머니를 찬 아비에게는 모두가 친절한 법일세.”

세인이 잠시 침묵하고 있는데 노인이 혀를 찼다.

“자네 귀족이겠지? 마족이잖아. 하지만 행색이 별로야. 다른 건 그렇다 쳐도 그 허름한 목도리는 도저히 안 되겠어. 이대로 들어가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거라고. 얼굴과 분위기를 보면 글리터의 코어 지역에 사는 귀족 같은데 옷이 너무 허름하잖아. 딸린 애도 누추해 보이거든. 괜히 마을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 말고, 목도리를 벗고 가라고. 그게 자네에게도 좋은 일이야. 대접을 받고 싶잖아?”

세인은 노인보고, 자신이 귀족인 걸 알면서도 반말을 한다고 뭐라 하지 않았다.

대신 피식 웃더니 에스에게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주었다.

그러자 잠시 눈치를 본 에스는 노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목도리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노인이 껄껄 웃으며 그 목도리를 받아 자신의 목에 둘렀다.

이로써 노인은 약간 더 따뜻해졌다.

세인이 노인의 옆을 지나가는데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힐끔 보니 흔들의자 옆에 술병만 여러 개였다.

늘그막에 할 것 없는 노인이 시간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많이 취했다면 귀족으로 보이는 세인을 보고 반말을 한 것도 이해될 수 있을까?

“선물을 줬으니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안될 것도 없겠지.”

“마족이 귀족이란 소리는 뭐지?”

“글리터 안에 절대 귀족들이 살고 있잖나. 처음에는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지.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니까 말이야. 북부의 왕들도 글리터에게 설설 기니. 아랫사람인 백성들이 별수 있겠나? 어휴. 말세야 말세.”

그러면서 노인은 술병을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에스는 세인과 노인 사이에서 눈치만 봤고 말이다.

세인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인을 지나쳐 갔다.

그런 그의 등 뒤로 흔들의자가 삐걱거리며 내는 소리와 노인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두 가지 소리를 한 번에 내고 있는 그는 오늘만 사는 노인처럼 보였다.

행동에 대책이 없다는 소리다.

세인이 해코지를 하려 했다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평민이니까.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여관 두 개가 보였다.

세인은 에스에게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에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허름한 여관을 골랐다.

“어서 오세요. 아, 귀족이시군요. 여기는 설비가 좋지 못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은화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주인은 흠칫 놀랐다.

은화에 엉겨 붙어 있는 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매로 피를 닦아내는 주인이었다.

그는 세인의 허리춤에 찬 검을 일별하고는 더욱 상냥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당장 준비해줄 수 있나?”

“예. 가능합니다.”

에스와 세인은 준비된 목욕탕에서 몸을 씻었다.

먼저 목욕을 끝내고 개운해진 기분으로 내려온 세인은 여관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먼 곳에 연락을 하려고 하는데, 마을에 그런 수단이 있을까?”

그러면서 팁으로 은화 한 개를 밀어주는데 이건 수단이 없어도 만들어내야 할 판이었다.

그 은화에는 질문에 대한 답 말고도 머무는 동안 편의를 봐달라는 포괄적인 의미도 깃들어 있었다.

그걸 모를 주인도 아니다.

주인은 아주 싹싹해진 자세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서신 수단으로 동물은 없고요. 사람을 보내야 할 겁니다. 돈은 비싸게 들지만, 손님은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러면서 주문하지도 않은 따뜻한 우유를 내온다.

그것을 마신 세인은 소매로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아냈다.

여관 주인의 말을 들은 그는 글리터에 소식 전하기를 포기했다.

여기에서 글리터까진 거리가 꽤 있었다.

물론 말을 탄 사람을 전령으로 보내 자신의 귀환을 알리면, 에스와 함께 걸어가 직접 알리는 것보다는 빠르게 전달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장거리인데 그 차이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효율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니, 도착했다고 미리 알리는 것은 포기하고 직접 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한편 목욕탕에 있는 에스는 에스대로 생각이 많았다.

목욕탕이라고 해봐야 방수천 처리가 된 좁은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물이 잘 빠질 수 있도록 틈이 벌어진 나무 조각들이 장치되어 있었고, 큰 물통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거기에서 물을 떠서 머리 위로 조심스레 붓는 그녀다.

몇 번 그렇게 하다가 피곤함을 느낀 에스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는 다리를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세인은 분명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귀족이기도 하다.

지금 앉아 있는 에스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생각해보면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어려웠다.

그녀가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운명과 주변을 통제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이다.

에스는 세인에게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기도 겁났다.

그는 구박하던 숙모보다는 친절했지만, 자신의 피붙이가 아니다.

생판 남인 것이다.

문득 욕탕에 붙어 있는 작은 창문을 바라보던 에스는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배은망덕한 생각일까?”

어린 그녀는 세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숙모에게 구박을 당하며 생긴 눈치가 있지만, 그 눈치가 만능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본능이 세인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막말로 세인이 어느 날 돌변해서 에스에게 이상한 짓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녀를 팔아버린다면 어쩔 것인가?

그녀는 저항할 힘도 없었다.

그에게 빚을 졌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게 조용하던 목욕탕에 다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한참 후였다.

에스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인은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주방에 있는 여관 주인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당연히 여관 주인은 최선을 다해 세인의 궁금한 점을 풀어 주었다.

시키지도 않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는 바람에 세인은 지금 글리터의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관 주인이 가져다준 음식은 맛이 꽤 괜찮았다.

소시지를 곁들인 목살 고기볶음과 시원한 맥주 한잔이었다.

술을 마실 생각이 없던 세인은 맥주를 물리치고 다시 우유를 주문한다.

주인은 우유를 가져다주며 찐 감자도 두 알이나 주고 갔다.

그중 하나를 들어 껍데기를 벗긴 세인은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하지만 곧 그게 만용이었음을 깨닫는다.

감자는 너무나 뜨거웠다.

혀가 데일까 봐 다시 아래로 내려놓은 그는 고기에 집중했다.

마침 그때 들려오는 여관 주인의 목소리가 세인의 뒤통수를 때린다.

“글리터의 여왕님 말입니다. 세리스님. 그분의 따님이 아주 말괄량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세리스님은 아주 훌륭한 분이신데, 불행히도 따님은 너무 활달하시다는 소문이 수도에 쫙 퍼졌죠.”

일급 기밀을 이야기하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한 손을 입에 대며 이야기한 주인이었다.

그런 그의 분위기가 통했음인가, 세인이 갑자기 고기를 먹다 말고 컥컥거렸다.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 모습에 흡족함을 느낀 주인은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끼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군.

“하도 사고를 치셔서 다들 쉬쉬하지만, 이미 새는 바가지인 거죠. 한번은 대로에서 경주마를 타고 질주를 하시는데….”

그 후로 세리스의 딸.

그러니까 세인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대개는 충격적인 증언들이었다.

아주 자유분방한 영혼에 대한 고발이랄까.

세인은 우유를 마시며 막힌 목을 뚫었다.

그리고 어지럽다 못해 두통을 느끼면서도 여관 주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대단하신 거죠. 나이도 어리신데 말을 그렇게나 능숙하게 타다니 말이죠. 한번은 지붕에서 줄로 몸을 묶고 뛰어내렸는데….”

소문이니까 과장되었을 것이다.

분명 허풍이 들어갔을 텐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세인은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주무르며 생각에 빠졌다.

‘딸이라고? 딸이 있다고?’

그리고 때를 맞추어 목욕을 마친 에스가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고 말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세인은 괜찮다는 손짓을 하며 여관 주인에게도 신호를 보냈다.

에스의 음식을 가져다 달라는 의미다.

여관 주인은 물론 이번에도 잽싸게 움직였다.

세 번째 은화에 대한 욕심을 품은 것 같았다.

*  *  *

그러니까 그날은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이 층에 올라가 침대 위에 누운 것이었다.

그렇게 누웠는데, 방금의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도 잠이 오면 그건 사람도 아니었다.

잠을 청하는 내내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세인이었다.

침대 옆의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워 있던 에스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잠시 세인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걸으려고 했든지 간에, 세인은 마치 마차에 치인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전혀 말을 걸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에스가 다시 눕는데, 세인이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피곤하니 자야 할 텐데, 주변이 너무 밝지? 램프를 끌까?”

그의 말에 에스는 벌떡 일어나 자신이 램프를 껐다.

이제 방안은 아주 어두워졌다.

그런데 두 사람 주변 빛의 밝기가 어떻든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세인과 에스가 각자의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였다.

반쯤 열린 창문 밖으로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아주 잘생긴 바퀴벌레 한 마리가.

옷도 쫙 빼입고, 면도도 하고 비싼 구두도 신고 밖으로 나섰네.」

걸걸한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까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생각났다.

그 노인이 노래 부르는 게 틀림없었다.

「쫙 빠진 신사.

모든 여자가 그를 쳐다보네.

멋진 바퀴벌레~ 오 멋진 바퀴벌레~ 오오~.」

그러자 어디선가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워요! 집어치우라고! 매일 저녁만 되면 이게 무슨 짓거리야! 집어치워 이 영감아!”

하지만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노래를 계속했다.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이다.

「아름다운 아가씨를 발견한 바퀴벌레.

한눈에 반한 그는 아가씨에게 다가가 수작을 걸었네.

이봐 아가씨.

나는 집도 있고 멋진 말도 있어.

부자야.

엄청난 부자라고, 그러니 나랑 사귀지 않을래?」

노인은 꿋꿋이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아가씨가 허리를 흔들며 다가왔네.

오 바퀴벌레는 꿈에 부풀었네.

그리고.

딱!

아가씨가 신발로 바퀴벌레를 때려죽이고 하는 소리.

저는 이미 따님과 사귀고 있습니다.

상속 고마워요.」

아줌마가 망측한 내용이라고 비명을 지르는데, 노인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여기서 나만 저 노인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

세인이 무심코 중얼거렸지만, 에스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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