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26화 (226/307)

# 226

& 예정된 새로운 만남 (4)

세인은 손을 뻗어 엎어져 있는 소녀의 얼굴에 대어보았다.

“차갑지 않아.”

그의 공허한 말이 어두운 지하실에 울렸다.

세인이 보기에 에스의 사인은 질식사다.

굶주림에 탈진 상태가 된 그녀는 땅 위에 엎어져 있었다.

아무리 기력이 없었다 해도 고개를 옆으로 돌릴 힘마저 없었을까?

최후의 순간 그녀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것은 자포자기였을 것이다.

이 또한 세인의 추측이었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죽어 있는 에스를 내려다보았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자신이 조금만 빨리 이곳에 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금만 빨리 이 소녀에게 빛을 보여주었다면?

그리고 소녀의 숙모로 추정되는 시체도 머릿속에 떠올렸다.

도적들이 어떻게 희롱을 하며 죽였건 그녀는 에스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다.

하늘이 그런 희생의 대가라고 준 것이 고작 에스의 싸늘한 주검인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세인은 곧 머리를 빠르게 치켜들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세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그런 그의 음성에는 오래된 고목같이 단단한 집념 같은 것이 스며들어 있었다.

세인의 서늘한 눈빛이 악취 나는 지하 창고를 훑었다.

너무 좁았다. 그리고 형편없었다.

이 곰팡이 냄새나는 곳이 한 소녀의 종착지라고 하니 억울했다.

그 마음을 담아 마검을 가슴 어림에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이번에는 시간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 시도가 먹힐지 안 먹힐지는 그도 몰랐다.

완전한 오버 더 데스의 힘을 얻자, 세인의 힘은 폭발적으로 증가해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갑옷도 없이 도적들을 몰살시켜 버린 그이다.

하지만 전투가 아니라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최상급 난이도나 다름없었다.

힘이 아니라 정신력과 집중의 기술이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눈을 감은 세인의 얼굴이 흔들렸다.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지하실 전체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닥의 먼지가 흔들리며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공간이 저항하는 듯 수축하였다가 이완되길 반복한다.

검날이 윙윙 소리를 내며 세인을 거세게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지하실은 이제 다시 어둠 속에 파묻혔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가냘픈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에스는 자포자기 상태에 가까웠다.

조금만 있으면 혼수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 상태로 에스의 숨이 점점 옅어질 때였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소녀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세인이 성큼성큼 걸어와 에스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물 마실 수 있겠어?”

물이라는 소리에 반 이상 감긴 에스의 눈꺼풀 아래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그 미약한 움직임은 믿을 수 없게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소녀의 동공이 생기를 찾는 것을 내려다보는 세인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세인은 그 상태로 희미하게 웃었다.

*  *  *

드레퓨스는 중앙에 완전히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반의 신성화 작업에 들어갔다.

주변 국가를 종속시킨 드레퓨스는 매일 엄청난 양의 조공을 받았다.

그 안에는 살아있는 인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레퓨스의 신도시로 끌려가는 그들은 노예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 과정에서 비리도 많이 일어났다.

기강 문제라기보다는 어수선한 주변 정국 속에서 일어나는 균열이었다.

그 안에서 드레퓨스의 상인들이 재미를 많이 보았다.

평소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과실을 탐한 것이다.

곳곳에서 투기장이 열렸고 음성적으로 열리는 야시장에서는 사람들을 사고팔았다.

여기에서 눈 뜨고 보지 못할 일들도 속출했다.

가족을 되찾기 위해 천 리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가격을 부르고 흥정하는 목소리와 뒤섞여 난장판을 만들면, 몇몇 사람은 그 분위기가 흥겹고 좋다며 껄껄 웃는 것이었다.

수많은 비극을 원동력 삼아 드레퓨스의 수레바퀴가 구르고 있었다.

그 바퀴가 지나간 자국에는 사람들의 비명과 원한이 깔려 있었지만, 드레퓨스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전보다 더한 번영과 쾌락에 취해 반을 찬양할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반은 신의 위치에 자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국책사업이랍시고 이상한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 킹스 로드가 그중 하나였다.

왕에게로 이어지는 길을 닦는 건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 경우 문제라면 그 규모와 추진과정에 있었다.

거대 도시를 만든 반은 그곳을 세상의 배꼽이라 부르며 제2의 수도로 정했다.

그리고 상하좌우로 이어지는 직선의 길을 만들라고 명령을 내렸다.

폭은 육두 마차 수십 대가 지나갈 정도여야만 했고, 길이는 지평선 너머까지였다.

이 명령 하나 때문에 식민지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일꾼들이 몰려들었다.

그 모두가 정당한 보수는커녕, 끼니 걱정을 하며 대공사에 매달려야 할 판이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야외나 다름없는 곳에서 잠자리를 만들고 좁게 끼어 잠을 청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실한 아침 식사와 함께 고된 일과의 시작이었다.

이 미친 짓에 반기를 든 소국이 하나 있었었는데 드레퓨스가 본보기로 박살을 내 버렸다.

전쟁에서 진 그 소국은 이마에 낙인이 찍히고 죄인 취급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 후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여러 명산이 민둥산이 되고 목재와 대리석이 중앙 도시로 쏟아졌다.

그 자재를 가지고 넓은 직선의 길이 동서남북으로 달렸다.

경로에 산이 있으면 우회하는 게 아니라 터널을 만들어야만 했다.

늪지대가 있으면 돌로 거기를 메워야만 했고 말이다.

엽기적인 일은 커다란 강과 극동에서 일어났다.

상식적으로 길은 강이나 바다를 만나면, 끝맺음을 하거나 돌아가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드레퓨스는 직선을 유지한답시고 강과 바다 위에 배를 띄워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길을 형성한 것이다.

강까지는 참을 수 있었던 사람들도 바다에서는 진짜 분통이 터졌던 모양이다.

토목 대장과 치수 전문가들이 항의를 해왔다.

“풍랑을 만나면 어떤 배도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상시 배를 띄워놓고 사람들을 머무르게 한다면 해양 몬스터에게 표적이 됩니다. 항상 먹이가 거기 머물러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배를 사슬로 묶으면 될 거 아닌가? 그리고 경비 인원은 타국에서 보내온 병력으로 유지하는 거야. 모두가 황제의 위엄을 위해서네. 그런데 자네들은 고작 이 정도로 볼멘소리를 하는 거야?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 위대한 황제의 홀을 조각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노동도 한다고.”

결국 킹스 로드는 바다를 지나 여러 개의 섬을 관통하고 나서야 질주를 멈췄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인력이 들어가고 목숨이 희생되었는지는 드레퓨스만이 알 일이다.

왜냐면 자세한 자료는 그쪽에서 공개하고 있지 않으니까.

감히 반의 모습을 직접 표현한 조각상은 세울 수 없어도, 그를 상징하는 조각상들이 도처에 깔렸다.

돌과 철로 빚어지는 그 조각상은 반을 날개가 달린 존재, 혹은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신적인 영역으로 묘사하기 일쑤였다.

드레퓨스의 도시들은 점점 늘어나고, 주변국의 울음을 먹이 삼아 지역을 마음껏 살찌웠다.

반을 추앙하는 사제들은 드레퓨스를 벗어나 각지를 떠돌았다.

그러면서 반에 대한 신앙을 전도하고 마음껏 강권했다.

이런 정책에는 성국에 대한 도발적인 의미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성국은 남부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래 자신들의 종교만 강요하는 국가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무서운 기세로 일어난 드레퓨스의 신흥 종교는 전염병처럼 중부를 휩쓸었고 끊임없이 충성을 시험했다.

그 등쌀에 죽어나는 것은 백성들뿐이었다.

대도시가 점점 늘어나고 그 도시들은 태양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태양이란 당연히 반이었다.

태양의 도시는 각각 하나씩 호화스러운 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태양의 도시 중 한 곳에 반이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어디에 머무는 지는 범인이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반의 신변 보호를 위한 비밀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 마차 안에 있는 잭조차 반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창문을 닫으십시오.”

폴리오의 말에 잭은 순순히 따랐다.

그의 거친 손이 작은 창문을 닫자 폴리오는 주변을 점검했다.

여기저기를 두드려 보며 이상이 있나 확인한 것이다.

심지어 바닥을 두들겨 보기도 했다.

마차 안에는 여전히 그와 잭뿐이었다.

이런 폴리오의 행동이 과하다 볼 수도 없는 게, 여기는 적지 한가운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폴리오의 편집증다운 행동은 언제나 확실한 도움이 된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예절에 익숙하지 않은 부분은 오랜 용병 생활 때문이라고 둘러대면 됩니다.”

장발의 노인인 폴리오는 그동안 수십 번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잭도 처음 듣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잭이 진지하게 구는 이유는 그의 위장 신분 때문이다.

그는 지금 질리언의 형이자 글리터의 기사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동안 글리터에서도 드레퓨스의 동태를 살필 간첩들을 보냈다.

잭은 그중에서도 심장부에 접근할 수 있는 스파이였다.

그런 스파이가 되기 위해 잭이 들인 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글리터는 드레퓨스에 대해 정보가 너무 없었다.

특히 반에 관련된 것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반은 자국민에게도 지나칠 정도로 비밀인 것이 많았다.

어쩌면 신성화에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비밀로 인해 환상을 증폭시키는 것 말이다.

그동안 잭은 드레퓨스 출신인 폴리오의 도움을 받아, 드레퓨스의 왕실에서 인정받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폴리오는 반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노인이었다.

평소 그는 진심으로 잭을 위해 노력했다.

폴리오는 드레퓨스의 멸망을 원하고 있었고, 지금의 이야기도 그 연장선이었다.

폴리오는 집게손가락을 굽혀 마차의 벽을 두드려 보았다.

딱딱딱.

“문밖에서 이렇게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면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절대 세 번을 넘지 않습니다. 저는 보통 두 번만 두드릴 겁니다. 세 번째는 실수로 한 번 더 노크할 때를 대비한 겁니다.”

“예. 압니다.”

딱딱딱. 딱.

“이렇게 세 번을 넘어가면 문제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십중팔구 저나 잭님의 의도가 발각된 상황 일 겁니다. 문밖의 제 주변에는 근위병들이 득실거리겠죠. 그들의 의도는 단순합니다. 잭님을 잡아서 고문하는 것이죠. 그렇게 역으로 글리터의 정보를 뽑아내는 거예요. 제가 밖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도 간단합니다. 제 목소리를 이용해 안을 찔러보는 거니까요.”

“예.”

그 외에도 폴리오가 이것저것 말해 주었다.

잭은 다 들은 후, 노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언제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폴리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은 목적을 완수한 후에 하십시오. 기억하세요. 세 번 이상의 노크가 있다면 무조건 도망치십시오.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안타깝지만, 자결뿐입니다. 놈들에게 정보를 줘서는 안 됩니다.”

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때 마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몇 분을 기다리니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부의 시중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잭은 뒤따라 내리는 폴리오와 함께 으리으리한 궁전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피땀이 들어간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원형의 지붕이 황금빛을 띄고 햇살에 반짝인다.

하얀 벽은 쉽게 범접하지 못할 순수로 안쪽을 보호하고 있었다.

오늘로써 드레퓨스의 권력자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잭은 그동안 노력했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매우 단순하다.

정확히 말해 크고 단순했다.

‘반의 정체를 밝혀서 글리터에 보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그는 드레퓨스의 중추에 접근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고, 마족이 아닌 상태였다.

과거 아비게일과 함께 정찰을 나갔던지라 마족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임무다.

등 뒤에서 마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잭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리고 옆에서 폴리오가 말을 걸어오자 그 비장함을 물에 씻은 듯이 지웠다.

이제 잭은 얼굴로 연기를 했다.

반에게 충성하는 가면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럼 가실까요?”

“그럽시다.”

둘은 마주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태양의 궁전으로 향했다.

그렇게 잭과 폴리오는 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교두보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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