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25화 (225/307)

# 225

& 예정된 새로운 만남 (3)

세인의 검이 공기와 마찰을 일으키며 공간을 찢었다.

그렇게 움직인 검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공격의 틈을 헤집고 공격자의 품까지 찢었다.

그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군더더기는 더욱 없었다.

그렇게 아주 수월히, 주위 사람들의 목숨을 갈취했다.

마치 생명이란 것을 남의 품에 맡겨둔 자기 물건 되찾듯이 말이다.

어딘가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방관하는 검사가 있었다면 크게 감탄을 터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도적 떼밖에 없었다.

폐허가 돼버려 돌쩌귀마저 검게 그을린 마을에서, 습격자들은 이제 차가운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세인의 검이 그들의 목숨을 추수한 것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도적들의 수는 아직도 많았다. 어림잡아도 수십 명이었다.

털북숭이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놈이 두목이라고 생각한 세인은 바로 그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성큼성큼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잘 무장한 패거리를 보니 우두머리가 죽었다고 금방 등을 돌려 달아날 놈들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단숨에 털북숭이를 죽여 버려서 사기가 꺾인 놈들이 흩어져 버리면 골치가 아파질 수밖에 없었다.

흩어진 놈들이 세상에 끼칠 피해도 문제지만, 복수심에 몇 놈이 따라붙어 장거리 공격을 해온다면?

세인은 에스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녀를 찾아낸 후에 그런 기습이 벌어진다면 세인은 몰라도 에스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음이다.

“잡아! 저 빌어먹을 놈을 어서 잡으라고!”

털북숭이는 빨개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 검지로 세인을 가리키며 욕설도 몇 마디 덧붙였다.

그로서는 세인의 무서움도 무서움이지만, 이대로 물러났다간 크게 체면이 깎인 셈이 된다.

이런 피해를 보고도 꼬랑지를 말면 부하들이 그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러니 오히려 발작적으로 부하들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털북숭이의 명령을 받은 남자들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세인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중 몇몇 사람에게서는 술 냄새도 심하게 풍겼다.

흥분한 우두머리의 명령에 대열이 흩어지자 더욱 유리하게 된 세인이었다.

일부러 갑옷으로 몸을 감싸지 않은 그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요리하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던 남자는 세인의 발길질에 무릎이 채여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한 세인은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러자 남자의 몸이 무릎을 꿇은 상태로 주르륵 뒤로 밀려났고, 달려오던 동료들의 몸과 뒤엉켰다.

다시 앞으로 나간 세인은 빠르지 않게 검을 휘둘렀다.

큰 반원과 원을 그려대는 그의 검술은 빈틈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착실히 남자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죽음에도 관성이 있는 걸까?

검빛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사내들의 눈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세인은 얼굴을 땅에 처박는 남자의 등을 밟고 올라서며 전진했다.

약간 높아진 그의 위치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검격은 그 자체로 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두꺼운 갑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돌진해 왔다.

그의 맹렬한 돌진은 땅을 쿵쿵 울릴 정도였다.

그런 상대를 흘깃 본 세인은 검을 지르는 게 아니라 몸을 회전시키며 발차기를 먹였다.

도적들은 거구의 동료가 거짓말처럼 뒤로 날아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담벼락을 무너뜨리며 처박힌 거구 위로 돌조각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날카롭고 무거운 돌들이 상반신을 덮치자, 아래쪽으로 드러난 두 발만 거칠게 꿈틀거렸다.

사후 경련이었다.

그 후에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남자들을 죽이는 세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 놈 정도 남겨 좋을까? 그렇다면 녀석이 의심 가는 장소 정도는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에스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에스는 이미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수를 부탁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접근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감이 틀렸다 해도, 시체라도 찾고 싶다.’

처음에 든 생각대로 최후에 한 놈을 남겨 놓아 소녀의 행방을 묻는 건 어떨까?

하지만 에스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녀의 말대로 지하창고 안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 있는 이유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도적들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을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린 놈들이 에스만 남겨 놓을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녀의 생존이 성립되려면 이놈들이 그녀를 몰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한 놈을 살려놓아야 하는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봐도 도적들은 다 죽은 목숨이다.

도적들의 수가 반으로 줄어들자 세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지금의 그는 광풍이나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죽여 나가는 세인의 모습에, 그제야 털북숭이 두목은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을 받았다.

정신이 번쩍 난 것이다.

거기에 확신을 준 게 부관의 죽음이었다.

등을 돌려 전력 질주 중인 부관을 발견하자 세인이 본능적으로 힘을 쓴 것이다.

“죽어라.”

검 끝으로 가리키며 명령을 내리자.

젊은 부관이 몇 걸음 더 뛰다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리고 끝이었다.

꽥, 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털북숭이는 자신이 지금 뭔가 잘못 본 건가 싶어 자신의 눈을 비볐다.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

그래. 이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생각해 볼 때, 그의 부관이 평소에 심각한 지병이 있었다 치자.

그래도 더 망설이다간 자기까지 목숨이 간당간당할 판이었다.

어떻게 관리한 집단인데, 한 놈에게 이렇듯 망가진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달아나자!’

다시 날아든 화살을 왼손으로 잡아채는 세인을 보고, 두목은 결정을 내렸다.

도망가기로 말이다.

열불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화살이 무슨 막대기도 아니고, 왜 저렇게 잘 잡는 건데?’

세인에게 화살을 쏘았던 부하는 목에 단검이 박힌 채로 지붕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 부하의 시체 위를 훌쩍 넘어간 두목은 황급히 자신의 말을 찾았다.

근육이 잘 발달한 붉은 색의 말은 금방 눈에 띄었다.

문제는 그가 과연 거기까지 갈 수 있느냐였다.

몇 발자국 지나지 않아 털북숭이 두목은, 등에 발길질을 받고 앞으로 엎어져 버렸다.

“으윽!”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런 그의 굵은 팔뚝에 세인의 발길질이 다시 날아들었다.

결국 두목은 다시 얼굴을 땅에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세인은 그의 등판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힘이 장사였던 두목조차 등을 바위로 찍어 누르는 기분을 느꼈다.

처음부터 도망갔어야만 했다.

그걸 너무 뒤늦게 깨달은 두목이었다.

그가 일어서려고 버둥거릴 때, 세인은 장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내리 찌르려 했다.

“잠깐! 잠깐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세인은 여기에서 자기 합리화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검을 멈추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두목도 곧 그걸 깨달았는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악! 죽기 싫어! 당신! 기사지? 기사니까 이런 실력을 보유한 거겠지?”

어떤 기사라도 무장한 도적들을 혼자서 몰살시킨다는 게 쉬울 리는 없겠지만, 지금 여긴 그걸 따지자는 자리가 아니었다.

두목은 이제 숫제 발광을 하며 악을 써댔다.

“나는 용병단 소속이라고! 그게 아니더라도 신분 패가 있는 사람이다! 도시에 들어가면 세금도 꼬박꼬박 냈어! 나는! 정식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어! 그러니 재판!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법대로 처리해야 해! 그러니까 기사인 네가….”

두목의 다음 말은 공기가 빠지는 듯한 숨소리로 대체되었다.

세인의 검이 그의 등과 배를 뚫고 땅바닥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끄러미 털북숭이가 발광하고 있던 것을 보던 세인이 한숨과 함께 검을 찌른 것이었다.

퉁방울눈이 된 두목은 꺽꺽거리며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흘러내린 침이 땅바닥을 적셨다.

그래도 바닥을 적시는 그의 피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양이었다.

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장검을 빼내었다.

그러자 두목이 트림 같은 소리를 냈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쇠붙이의 감촉에 말이다.

“꺼윽!”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인은 다 잡은 짐승을 가지고 놀듯이 그의 척추 위에 검 끝을 올려놓았다.

그 딱딱하고 날카로운 감촉을 두목이 느낄 수 있을까?

배가 뚫린 마당에 말이다.

더듬더듬 위로 올라가는 검 끝은 두목의 목 뒤에서 멈췄다.

그러자 의도를 알아챈 두목이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무정한 검날은 그의 목을 뚫어버리고야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이리저리 헤집은 검날이 다시 공기 속으로 노출된 것은 약간 시간이 지난 후였다.

검을 세차게 휘둘러 피를 털어낸 세인은 몸을 돌렸다.

그렇게 시체를 등진 상태에서 짧게 말했고 말이다.

“유죄.”

돌아선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굽힌 후 땅바닥에 귀를 대어 보았다.

그러자 세인의 시선으로, 그를 따라 옆으로 엎드린 세상이 보였다.

두목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귀로 말발굽이 움직이는 소리를 감지한 세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몇 명의 도적들은 그들의 동료와 두목이 세인에게 도륙될 때 말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한 것은 물론이다.

“바빠 죽겠는데 뭐 하는 거야?”

“쉿. 이래야 놈이 못 따라오지. 아까 언덕에서 내려올 때 말은 보이지 않았어.”

한 녀석이 동료가 말들을 죽이자 낮게 호통을 쳤지만, 동료는 계속 말들을 죽일 뿐이었다.

세인이 타고 따라붙을 말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서너 명이 탄 말들이 마을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간 것이다.

마을의 경계선이 코앞에 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도주가 성공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으악!”

말머리가 눈앞에서 터져나가자 선두에 있던 도적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멀리에서 돌들이 날아오며 말의 머리를 맞췄다.

그러자 농담처럼 말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머리를 잃은 말에게 남은 것은 그 자리에서 달리기를 멈추고 주저앉는 일뿐이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뛰다가 주저앉는 말은 무난한 축에 속했다.

달리는 속도 그래도 앞으로 거꾸러지다가 반 바퀴를 도는 말도 보였다.

물론 사람과 함께였다.

곡소리가 나는 가운데 세인이 멀리에서 다가왔다.

도적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방금 땅에 처박혔는데 바로 일어나서 뛸 수 있으면 그것도 비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가오는 세인을 바라봐야만 했다.

사신처럼 다가온 세인은 그들에게 검을 선사했다.

참으로 무기력한 죽음이 벌어졌다.

그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죽음을 선사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살해였다.

일방적인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도적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우리도 사정이란 게 있어! 그런데 이렇게 도살당하듯이 죽어야 한다고? 네가 무슨 권리로? 말해봐! 말해 보라고 이 도살자 놈아!”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세인은 그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상대의 몸이 뒤로 나자빠졌다.

그런 그의 목을 밟은 세인은 검으로 상대의 가슴을 찔렀다.

밟은 발 위로 답답한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연거푸 찔렀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자비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배와 가슴을 연거푸 찌른 세인은, 발을 떼고 피거품을 내뱉으며 죽어가는 도적을 보았다.

그리고 돌아서기 전에, 그에게도 짧은 말을 내뱉었다.

“유죄.”

이제 자신이 남긴 시체들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세인은 그 후로 마을을 돌아다녔다.

집마다 찾아다니며 지하 창고가 있는 곳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이 창고는커녕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한참을 돌아다닌 세인은 한 구의 시체 앞에서 멈춰 섰다.

중년 여인의 시체, 도적들이 가지고 논듯 새까맣게 그을려 있는 시체가 유난히 그의 눈길을 끈 것이다.

‘숙모가 있어요.’

에스의 말을 떠올리던 세인은 반쯤 무너져 내린 집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로 된 바닥에 귀를 대어 보았다.

세인이 그 위를 주먹으로 탕탕 두들겨 보니 금세 감이 왔다.

‘아래쪽이 비어 있다.’

세인은 거침없이 바닥을 부수고 지하 창고를 찾아냈다.

그리고 드디어 에스를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숨을 거둔 후였다.

어두운 지하창고 안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외로운 죽음이었다.

아까의 그놈들이 부정할 수 없는 유죄라면, 지금 죽어 있는 이 소녀야말로 억울한 무죄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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