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 예정된 새로운 만남 (2)
글리터는 주변 나라들과 연계해 북부 연방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더욱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치안도 공고해지게 되었다.
동시에 대외적으로 세리스의 위치도 확고하게 자리 잡고 빛나게 되었다.
이제 그녀를 공공연하게 여왕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제 나라들이 군사 훈련을 같이하는 것은 전혀 색다른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부 연방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견고해졌다.
비록 각 나라의 왕좌를 차지한 것이 못난 위인들이었지만, 그들이라고 나라 발전에 대한 열망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못난 위인들이라 이렇게 북부 연방이 탄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왕의 혈통을 가진 자라면, 글리터의 마족을 근거로 들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외교를 단절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불어 마족의 위치도 격상하게 되었다.
물론 글리터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해서 마족들이 편견에서 자유로워 질 수는 없었다.
몬스터라는 오해와 편견이 쉽게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글리터 안에서 마족들은 코어 지역에서 사는 귀족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영위하며 살았다.
그리고 글리터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다.
세계수 지역에서도 이 마족에 한해서는 너그럽게 맞이하는 편이었다.
연방에서는 마족에 대해 충분히 대우해줬다.
심지어 글리터에게 한번 침략을 받았던 가이더에서도 마족을 무시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게 다 세리스의 공이었다.
그녀가 마족에 대한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른 나라들은 엘프의 협조도 원했다.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리스는 그것까진 허락해 줄 수 없었다.
세인이 떠나기 전에 결정한 일을 보면 엘프들에 대해서는 보호하고 아끼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듯 북부 연방은 주위를 안정시키며 발달하였지만, 음지에서 자라나는 독버섯까지 다 없앨 수는 없었다.
양지가 있으면 당연히 음지가 있다.
어떤 곳이든 모두가 행복하고 평등하게 살 수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그 음지를 가능한 줄이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마을을 폐허로 만든 것은 도적 떼였다.
그런데 이 도적들의 숫자도 그렇고 무장 상태가 장난이 아니었다.
당장 전투에 나서도 될 용병대로 봐도 무방할 듯싶었다.
어쩌면 이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건 헌터 타워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독이 관리하는 헌터 타워는 너무 빡빡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용병들이 보기에 헌터라는 부류는 나라에 충성하는 사냥개들일 뿐이었다.
그에 비해 자유로운 들개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배고프다.
그게 용병들이 말하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행패를 부리고 이렇게 말한다.
배고파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이다.
세상이 문제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들의 인성을 고발하듯 엉망이 된 마을 내부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체들이 굴러다녔고 식량 창고들의 문이 다 활짝 열려 있었다.
몹쓸 짓을 당한 여자들의 시체도 보인다.
마을에 들어와서 마음껏 약탈하고 분탕질을 친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들의 모임도 아닌 것이, 욕구를 발산하는 상황에서도 파수병들을 세워 놓았다는 것이 또 다른 증거였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던 세인은 옆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목조 건물 위에서 뭔가 반짝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뭔지 아는 데는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며 화살이 날아왔다.
지금 세인의 눈에는 그게 아주 똑똑히 보였다.
과거의 그라면 옆으로 굴러 피했을 것이고, 건틀렛을 끼고 있었다면 손을 들어 쳐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확신이 따라왔다.
그리고 그 확신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화살이 이미 그의 면전에 이르고 있었다.
콰직!
화살대가 그의 왼손 안에서 부르르 떨렸다.
마치 물고기를 낚은 듯 심하게 떨리는 그 손맛을 느끼며 눈을 깜박이는 세인이었다.
“정말 잡아 버렸잖아.”
그의 말과 함께 손안에서 화살대가 부러졌다.
그것이 곧 발등에 닿은 까닭은 앞으로 걸어 나가며 밑으로 버렸기 때문이다.
망루 역할을 하는 곳에서 화살을 날린 사수는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인이 몇 미터나 다가올 때까지도 어떤 조처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세인이 그것을 다시 잡아챘을 때, 짧은 간격으로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활을 쏜 쪽에서는 회심의 한 수였겠지만, 그것도 잡아버리는 세인이었다.
세인 본인도 놀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힘과 속도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화살을 잡는다는 건 좀 다른 이야기다.
빠르게 날아오는 물체를 타이밍에 맞추어 낚아챈다는 건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동체 시력이 필요한 것도 물론이다.
그 기술은 기사의 기술이 아니라 서커스단의 기술에 가까웠다.
맨정신이 박힌 기사라면 화살을 잡을 능력이 돼도 일부러 그걸 피할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고, 그 실수 한 번이면 안면에 화살촉이 박히니까 말이다.
기가 질렸는지 목조 건물 위에서는 더는 화살을 쏘지 않았다.
대신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입자가 있다고 패거리에게 경고하는 것이리라.
세인은 마을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울어진 목조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남루한 옷차림인 남녀가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되어 있었다.
마을을 습격한 도적들은 얼마 안 되는 재물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광기를 여기다가 배설한 것이었다.
시체를 본 세인은 기울어진 층계를 천천히 밟아 올라갔다.
꼭대기에 이르니 옆에서 기습이 있었다.
활을 포기한 사내가 단검으로 공격을 가해 온 것이다.
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우읍!”
단검을 휘두르려다가 상상하지 못할 압력에 시달리게 된 남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세인의 손을 떼어내려고 한 것이다.
그래 보았자 변하는 건 없었다.
섬뜩한 파육음이 남자의 머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인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었다.
그 핏방울이 속눈썹에 매달렸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인이었다.
그는 쓰레기를 치우듯 남자의 시체를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벽에 부딪혔다가 주르륵하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삑삑!
삐익!
이제는 피리 소리뿐만이 아니라 호각 소리가 마을 속을 분주히 날아다녔다.
그 경고에 어슬렁어슬렁 모이는 도적들이다.
도적의 두령이라고 해야 할까?
합금으로 만든 육중한 갑옷을 입은 털북숭이 남자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변에서는 그의 부하들이 무기를 주워들고 열을 맞추며 서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나 훈련이 잘된 집단임이 틀림없다.
털북숭이 남자는 처음으로 경고 신호를 보낸 목조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건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은 목조 건물 위에서 추락하는 사람을 보았다.
이미 머리가 터져나간 시체는 땅에 닿자마자 듣기 거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목조 건물 위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무릎 관절을 생각해 시체를 깔개로 이용한 모양인데, 저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녀석이 굳이 깔개가 필요했을까 싶다.
“몬스터인가?”
털북숭이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활을 든 사람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긴다.
세인은 상당히 높은 위치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관절에 미미한 경직조차 없었다.
그가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펴는 그 순간, 화살들이 파공성을 내며 날아왔다.
화살 세례 앞에서 검을 쥔 손이 여유롭게 움직였다.
세인 앞에서 마검이 번뜩였다.
그리고 번뜩이는 빛조차 추월한 검날이 화살을 맞이했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오는 화살의 옆을 검날이 스쳤다.
그러자 세인의 눈에 옆으로 휘어지는 화살대가 보였다.
심하게 굴절된 화살대는 결국 굽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꺾어지며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화살 깃들이 분분히 흩어지는 가운데 다시 검날이 섬광보다 빨리 움직였다.
다음은 방금 있었던 일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손쉽게 모든 화살을 다 쳐내버린 세인이다.
궁수들은 기가 질린 듯 털북숭이를 바라보았고, 털북숭이는 입맛을 다셨다.
“지금 내가 본 게 현실이 맞는 거야?”
그러자 부관이 다가와 속삭였다.
젊은 나이에 말쑥한 차림의 부관은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그는 털북숭이의 비위 맞추는 일을 잘했다.
“그래 봤자 한 놈입니다.”
털북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뭔가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 세인이 먼저 움직였다.
적들이 뭉쳐있는 거리와 자신이 서 있는 지형을 살핀 세인이 냅다 검을 집어던진 것이다.
장검이 무슨 창도 아니고, 그걸 집어던진다는 게 평범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도 화살까지 잡아내는 놈이었기 때문에, 도적들은 그걸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몰려나온 사람들이 급하게 뒤엉키니, 첫째로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고 두 번째로 꽤 볼썽사나웠다.
그걸 혀를 차며 바라보던 한 남자가, 두꺼운 방패로 날아오는 검을 막아내려 했다.
주위에서 너무 요란을 떤다 싶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도 굉장히 과한 대응을 한 것이었다.
검은 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날아오고 있었다.
검날이 원을 만들면서 말이다.
저런 식이라면 누가 봐도 방패에 부딪혀 옆으로 튕겨 나가는 게 정상이었다.
콰직!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날아온 검이 방패에 박혔다.
그것도 아주 깊숙이 박혀버린 것이다.
방패를 뚫고 나온 검날에 몸이 뚫린 남자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가 옆으로 쓰러졌을 때 달려온 세인이 도적들의 지척에 있었다.
그 바람에 지금 얼마나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곱씹을 틈이 없었다.
“넌 어디에서 온 놈이냐?”
어지간하면 정체를 알기도 전에 죽이는 게 그들의 규칙이었지만, 세인의 범상치 않은 모습에 털북숭이가 소리를 질렀다.
물론 거기에 답할 세인이 아니었고 말이다.
번쩍이는 창들이 그를 찔러왔는데, 세인의 몸은 검은 궤적을 그리며 그것들을 피해냈다.
그러면서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놈을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제대로 찬 것도 아니고, 비스듬히 약하게 찼는데 새우처럼 몸이 꺾어지는 상대방이었다.
발에 차인 녀석이 뒤로 날아가는 것을 본 세인이 다시 창을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창대를 당기며 펀치를 먹인다.
얼굴을 얻어맞은 남자는 안면이 함몰되어 즉사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이가 섞인 피를 게워내며 털썩하고 쓰러지는 남자의 뒤에서, 세인이 아까 검을 막았던 도적에게 다가갔다.
그가 방패에 박힌 장검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뽑아 들자, 주위의 살기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넌 어디에서 온 놈이냐?’라는 질문이 지금의 전투상황에서 의미가 없듯.
세인은 그들에게 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도 뻔한 질문이었다.
세인은 그냥 이들을 빨리 죽이고 에스를 찾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였으니 이들의 죽음이 불공평한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세인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간발의 차이로 창대가 그의 눈앞을 지나갔다.
그는 창날이 다시 뒤로 회수되기 전에 그 창대를 잡았다.
힘겨루기가 벌어진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어? 어?’하는 사이에 끌려온 남자의 면상으로 검의 손잡이가 날아갔다.
폼멜 부분에 코가 찍힌 남자가 비틀거리며 몸을 웅크렸고, 그런 그의 등을 세인의 검날이 쑤셨다.
그런 그를 세인이 걷어차자 개구리처럼 사지를 뻗는 남자였다.
기합과 함께 주위에서 날아오는 공격 속에서, 세인은 시간이 정지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쉽게 느껴볼 수 없었던 생소한 감각이었다.
정말로 시간을 멈춘 것도 아닌데 모든 게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진 것이다.
그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 공격 너머에서 살기를 흘리는 눈빛들도 자신의 눈에 담았다.
공격자들의 등 뒤를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도 보았다.
그들의 가장 뒤에서 털북숭이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