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22화 (222/307)

# 222

& 신의 강림과 두 개의 죽음 (2)

소녀의 직설적인 말에 마플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붉은 망토의 소녀는 다시 말을 덧붙였다.

“이르면 오늘 밤. 아니면 내일 죽게 될 거야.”

그리고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시간이 끝나자 마플이 입을 연다.

그녀는 자신을 신이라고 소개한 소녀를 사신이라고 받아들였다.

‘사신은 보통 저런 모습으로 찾아오는구나.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긴 징그러운 해골 모습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을 가져보는 마플이다.

그녀는 이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고 침착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마플은 달랐다.

“요즘 들어 내 몸 상태를 점검하니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 하지만 정말 내가 알 수 없었던 건 누가 왜 나를 죽이려는 거지? 나를 죽인다고 득이 될 게 뭐가 있을까? 입에 담기도 끔찍한 말이지만, 암살대상이 세리스님이나 기사들이라면 이해해. 하지만 나 같은 여자를 죽여서 얻는 이득이 뭐지? 철통 경비가 된 이곳에서 독살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말이야.”

마플의 앞에 앉은 소녀는 죽기 전인 마플을 배려해 모든 것을 말해 주려 했다.

“일단 너를 죽이는 사람은 바로 반이야.”

“….”

마플은 눈을 깜박였다.

반?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유명인이 맞는 거야?

토끼 눈이 된 마플이 소녀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자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현재 드레퓨스의 일인자인 반 말이야. 그가 너를 죽이는 거야.”

“대체 왜?”

“반은 세인의 위치를 추적하려 호시탐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어. 그런데 그의 공백이 길어지고 시간이 계속 흐르자 초조해진 거야. 대체 어디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참다못해 너에게 손을 쓴 거지. 마플. 넌 세인에게 있어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너도 세인도 그걸 부정하지는 못할 거야.”

마플은 미약한 두통을 느끼는지 미간을 주물렀다.

그리고 계속해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굉장히 비싼 독을 썼어. 무려 성 하나 정도의 값이야.”

“성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어.”

마플의 반박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말은 그 정도로 엄청난 출혈을 감수했다는 뜻이야.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지. 그런데 그는 그걸 밀어붙인 거야. 진행이 느린 독을 쓴 이유는 뭘까? 세인이 네 상태를 안다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암수를 쓴 대상에게 적의를 보일 것이란 확신 때문이야. 하지만 결국 그는 세인을 감지하지 못했어.”

“왜냐면 세인님은 여기에 없으니까.”

“그렇지. 지금 어딘가에 있는 반도 그걸 알아차렸을 거야. 세인이 아직 부재 상태라는 걸 말이야. 그러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지. 들인 정성에 비하면 크게 만족하지 못했겠지만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신이 말을 덧붙였다.

세리스에게 행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시도였다는 것이다.

세리스는 지금 삼엄한 경비 아래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다.

마플은 그에 비해 공략 난이도가 현저히 낮다.

게다가 반이 아는지 모르지만, 세리스는 독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그리고 세리스를 공격할 수 있다 해도 그건 최후의 패가 되어야만 했다.

“반은 너와 세인의 관계를 아주 정확히는 몰라. 가족 같아 보인다는 느낌이나 생각은 있지만, 확실한 판단으로 굳어진 것은 아니야. 당사자들이 아닌 이상 얼마나 깊은 유대가 있는지 모르는 거지. 그래서 애매한 너를 찔러보기 식으로 이용한 거야. 그래도 물론 너 정도의 인물이라면 어느 정도 세인을 흔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있었어. 그러니 이런 짓을 한 거고.”

마플은 소녀의 말을 들으며 몸을 떨었다.

소녀의 말에 따르면 반은 정말로 악독한 사람이었다.

반은 마플을 하나의 미끼이자 실험용 생쥐로 쓴 것이다.

고작 세인의 거처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말이다.

사람 하나의 죽음이 반에게는 고작 그 정도 의미였다.

“그는 자신이 공격해야 할 대상을 정확히 알고 있어. 그게 바로 반의 무서운 점이야. 그는 세리스라는 빛나는 존재에 대해서도 현혹당하지 않았어. 오로지 세인에게만 집중하고 있지. 그리고 그런 반의 수하로 슈나이더라는 사람이 활동 중이야. 이 슈나이더라는 사람도 보통내기는 아니지. 절대 남 밑에 들어가지 않을 인물인데 반에게 복종하고 있어. 왜인지 알아?”

그리고서 신은 길고 긴 이야기를 풀어냈다.

결국 세인이 영주가 된 후 슈나이더의 딸을 죽이게 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슈나이더는 생각보다 자신이 딸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외에도 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쉽게 끝날 줄을 몰랐다.

“….”

“반은 오랜 시간 자신이 공격해야 할 곳을 연구하고, 천문학적인 돈을 물 쓰듯이 써버리는 거야. 검은 개도 감지 못할 정도의 독약은 그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구하는 것에 보통 정성이 필요한 게 아니지. 그야말로 악에 받쳐있다고 봐야지. 그리고 현명해. 원래 뒤에서 찌르는 칼이 뼈까지 닿는 법이거든.”

소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플의 기색을 살폈다.

그런데 마플은 자기 죽음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플의 눈 속에는 그런 반과 맞서야 하는 세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세계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주도했던 소녀로서는, 지금의 마플이 정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거대하고 강한 존재도 겁내던 죽음을, 눈앞의 마플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듯이 보였다.

왜 그런 걸까?

죽음에 둔감해서?

아니면,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의 준비를 해 와서?

“세인님이 걱정이구나. 어떻게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마플을 보며 소녀는 깨달았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죽음마저도 도외시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충격에 빠진 소녀 앞에서 마플은 계속 세인이 걱정된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미 그녀는 자기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건 지금의 소녀에게 있어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죽음은 눈물 나게 괴롭다.

무섭다.

너무 잔인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

그 무게감마저도 무시하는 마플의 손을, 소녀의 손이 잡았다.

그리고 소녀는 마플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고백했다.

어차피 지금 다 이야기해줘도 상관없을 것이다.

왜냐면 마플은 곧 죽을 테니까 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괜찮다.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마플. 너는 세인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어.”

그리고 소녀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알려 주었다.

라이트닝 블러드의 의미.

검은 왕의 의미.

홀리 크라운.

데스 크라운.

그리고 그들에게서 분리된 신성.

그 증표와 세리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말이다.

마플이 얼마나 알아듣는지는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환생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세계의 운명에 대해서도 모조리 말해 주었다.

그걸 다 듣는 마플은 상대의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마플이 보통 하녀들보다 나은 점이 있느니 무려 하녀 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말이든 다 재깍 알아듣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의 소녀는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마플은 태반을 알아듣지 못한 채, 적당히 이해하는 것에 그쳤다.

생각해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것도 비정상적인 일이다.

상대는 자기 생각대로 저승사자인 걸까?

아니, 어쩌면 정말로 신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구나.”

마플은 창문 밖으로 동이 터오는 것을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마플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는 거야?”

“이제 돌아가야지. 마플. 나는 실은 너에게 편안한 죽음을 주려고 왔어. 어쩌면 독으로 죽는 건 괴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런데….”

“그런데?”

마플의 질문 앞에서 소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빛을 얼굴 전체로 받았다.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그렇게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날 때.

소녀의 반쯤 감은 눈이 빛을 음미하며 찬란할 때.

마플도 그런 소녀의 얼굴을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젊은 소녀의 모습은 마플에게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내 착각인 걸 알았어. 죽음은 남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이 아니야. 편안한 죽음이라는 것도 결국 죽음이잖아. 미안해. 네 죽음에 간섭하려 해서.”

세계수의 죽음은 신이 완결을 내려야만 했다.

신이 아니면 재앙이 될 그녀를 막을 자가 존재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마플은 그렇지 않았다.

마플의 죽음은 본인에게는 실례되는 말이지만, 일반인의 흔한 죽음이다.

최소한 신으로 자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녀의 몫이 아니었다.

소녀의 말에 마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네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내게 편안한 죽음을 내려주려고 해서. 하지만 나는 내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잘 보내고 싶어. 정말 고통스러울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소녀가 마플을 바라보자 마플이 웃었다.

“난 세인님이 걱정돼. 나를 잃고 그가 얼마나 슬퍼할지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아. 하지만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과정이잖아. 그래서 난 아주 안심했어. 세인님이 행복해질 수 있고, 또 다른 만남이 그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괜찮아.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마플이 입을 오물거리자 소녀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해피엔딩이지.”

그러면서 소녀가 아프게 웃는데, 마플도 바보처럼 그 웃음을 따라 했다.

소녀는 그걸 보면서 괴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마플은 전혀 괴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의 넌 멋져. 아름다워. 신으로서 멋지게 살아봐.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 그리고 그 안에 세인님이 있으면 좋겠어. 그분이 정말 네가 만든 세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넌 신이잖아. 아름답고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줘.”

그제야 신이 된 소녀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신이 된 자신을 느끼며 일말의 우쭐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만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규정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 룰이 예전보다 더 가치 있거나 진실할 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의 진심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수단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결국 이건 앞으로 소녀가 깨우쳐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다.

그걸 지금의 소녀는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그녀의 마음에서 일어난 하나의 각성이자 성장통이었다.

동시에 통렬한 자기반성이기도 했다.

자신은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얕보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소녀는 붉은 두건을 푹 눌러썼다.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려는 듯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거야? 마플?”

그러자 마플이 뜨개질하던 목도리를 들어 올려 보였다.

“남은 숙제를 마저 해야지. 이걸 끝마칠 거야. 그리고 평온하게 하루를 보낼 거야. 세인님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워.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난 네가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다면 나는 굉장히 괴롭고 아쉬워했을 거야. 그리고 세인님을 많이 걱정했을 거야. 하지만 이젠 이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멈추는 비라는 것을 알아. 그리고 그 장마가 지나면 맑게 갠 하늘이 세인님을 기다리고 있겠지?”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플에게 말을 건넸다.

“왜 그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그러자 마플이 밝게 웃었다.

“나는 세인님을 알아. 분명 그 결말은 그분에게 있어 해피엔딩이야. 믿어 의심치 않아.”

그 말을 들으며 소녀는 몸을 돌렸다.

마플은 애써 일어나 멀어져 가는 소녀를 배웅하지 않았다.

그저 뜨개질을 재개했을 뿐이다.

마플의 문밖을 나선 소녀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플은 자신의 침대 위에서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에게 다가올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었다.

재회를 위한 잠시나마의 이별일 뿐이었다.

설령 자신이 세인을 다시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세인은 자신을 분명 알아봐 줄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진짜 마플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녀는 오전 내내 매달려 뜨개질을 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뜨개질을 완성한 마플은 목도리를 들고 만족한 얼굴을 했다.

이리저리 돌려본 마플은 그걸 선물함에 소중하게 넣어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나섰다.

하녀들은 오랜만에 보는 마플의 힘찬 모습에 다들 반가워했다.

마플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하녀들의 말에 일일이 반응해 주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플의 시간은 저녁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은 저녁 식사 자리가 되어 결실을 보았다.

“으음….”

맥과 행크를 비롯한 기사들은 떫은 감을 씹은 얼굴로 식탁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플의 청을 받아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너머로 역시나 어색한 얼굴을 하는 세리스가 자리 잡았다.

마플 때문에 억지로 모인 이들 사이에서는 긴장감마저 맴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리스가 왕좌에 앉은 이후로 세인을 모시던 기사들은 계속 겉도는 위치였다.

세리스로서는 자식까지 가진 판에 무기를 들고 세인의 행방을 묻는 기사들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기사들의 어색한 입장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세리스를 끝까지 믿을 수 있느냐가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묵혀왔던 앙금은 이제 서로에게 벽이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다들 이 자리를 주선한 마플을 바라보았다.

마플은 한데 모인 사람들의 원망스러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마플을 보며 더이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못 당하겠군.’

세인에게 마플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그로서는 마플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음이다.

상대가 하녀장임을 떠나서 마플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여기 모인 모두의 한결같은 심정일 것이다.

“마플. 이 자리를 왜 만들었는지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는 세리스가 그렇게 물어왔다.

오늘날의 그녀는 북부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된 상태였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젊음을 유지하는 그녀는, 몇몇 국가에서 신성시되는 실정이다.

그런 세리스도 지금은 어색해서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난처해하는 세리스에게 마플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냄비에서 뜨거운 국을 한가득 떠서 세리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냥 한 번 정도 이런 자리가 필요할 것만 같았어요. 이제는 좀 다들 사이좋게 지내시라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거예요?”

“그게 지금 고작 하녀장 따위가 할 말이에요? 여기 누구도 그런 충고를 들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쏘아붙이는 세리스였지만, 정작 마플이 건네주는 그릇은 두 손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뜨거워요. 조심하세요. 그리고 음….”

마플은 반사적으로 국자를 볼에 가져다 대려다가 말았다.

기사들이 다들 손을 들어 말렸기 때문이다.

뜨거운 국물이 묻어 있는 국자가 다시 냄비에 담기자 안도의 숨들이 쏟아졌다.

“힘내세요. 가출한 딸은 돌아올 거예요. 보통 그 나이 또래에는 가출을 꿈꾸기 마련이잖아요.”

세리스는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말을 받았다.

“그래요? 그 나이 또래는 원래 그런가요? 하지만 걔가 돌아와도 소용없을 거예요.”

“왜요?”

“제가 안 받아 줄 거니까요”

그러자 마플이 소리 내 웃었다.

오늘의 마플은 좀 이상했다.

그게 이제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느껴진 모양이다.

전혀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지 못하던 아비게일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자리를 다 마련하시고. 마플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러자 마플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는 행크가 난감하다는 듯 눈을 감더니, 아비게일의 손을 천천히 내려주었다.

왜 바보같이 손을 들고 질문하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그냥 한 번쯤 이런 자리를 갖고 싶었어요. 다들 앙금을 풀고 좀 즐겨봐요. 한때는 고난을 같이 했던 사이잖아요.”

마플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다들 어색한 얼굴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포크와 스푼들이 움직였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 접시에 담겨 돌려졌고 말이다.

음식을 입에 가져다 댄 사람들은 감탄을 토해냈다.

음식은 굉장히 맛있었다.

세리스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프를 떠먹을 정도였다.

어느새 분위기는 풀어지고 디저트가 테이블 위를 돌았다.

그리고 볼록한 술잔에는 붉은 와인들이 담겨 찰랑거린다.

기사들은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굳이 자신들에게 딸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출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 세리스의 속을 긁지 않았다.

세리스는 평온한 표정으로, 포도주잔을 손안에 들고 빙빙 돌렸다.

그런 그의 표정은 누군가를 그리는 얼굴이었다.

그걸 눈치챈 마플이 살며시 손을 잡아 온다.

그런 마플을 약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세리스였다.

물론 내적으로는 마플을 절대 무시할 수 없긴 하다.

하지만 마플은 한 번도 그런 점을 이용해 그녀에게 섣부른 충고나 간섭을 해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평소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그런 마플이 언제나 은근히 고마웠던 세리스로서는 오늘의 마플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위로하는 듯한 마플의 눈빛을 받으며 세리스가 붉은 입술을 잔에서 떼었다.

그리고 정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마플?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세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음식에 집중하고 있던 기사들도 마플에게 시선을 주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마플이 머쓱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별일 아니에요. 단지 여행을 좀 떠나보려고 해요.”

“아. 그런 의미였던 겁니까?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하신 거군요.”

더이스가 안심했다는 듯이 말하자 행크가 입을 열었다.

수행원을 붙여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마플이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가야 하는 곳이에요.”

그때 세리스가 불안한 얼굴로 마플의 손을 콱 쥐었다.

세리스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듯했다.

그런 그녀의 손등을 자신의 다른 손으로 덮는 마플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안심하라는 듯 세리스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금방 돌아올 거예요. 제가 다시 돌아오면 그때 웃으며 저를 환영해 주세요. 그것 정도는 바라도 되겠죠?”

“마플.”

세리스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마플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마플은 그런 세리스의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고마워요. 세리스. 나를 걱정해 줘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죠? 오늘은 정말 당신답지 않아요.”

“아니에요.”

사실 마플은 그날 모두에게 아주 많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알아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세리스에게도 그동안 정말 잘해왔다고 말해봤자, 세리스의 불안감만 부채질할 뿐이었다.

대신 마플은 그날 많이 웃고 농담을 많이 하기 위해 노력했다.

따뜻한 분위기를 선물하고 같이 즐긴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마플은 주변을 잘 정리했다.

그리고 자정이 지나 자신의 침대 위에 들어갔다.

잠자리에 든 그녀는 손을 뻗어 램프의 불을 껐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깜박이는데,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미래를 알면서도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마플의 경우에는 달랐다.

마플은 눈을 감은 상태로, 깊고 푹신한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마플을 죽음에 이르게 한 독은 걱정만큼이나 고약하게 굴지 않았다.

그 독은 그래도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한 것이다.

그게 그나마 남겨진 사람들의 위안거리라면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글리터의 왕성이 발칵 뒤집히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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