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21화 (221/307)

# 221

& 신의 강림과 두 개의 죽음 (1)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기를 즐겨한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세계수가 있는 곳을 방문한 존재가 있었다.

붉은 망토를 입은 소녀였는데, 금발 머리인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인형같이 보일 정도였다.

소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험지를 무리 없이 이동했다.

그녀는 초월자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주변의 위험한 풍경도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세계수가 뿜어내는 위압적인 기운마저도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긴 신이니까, 주변 분위기에 움츠러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녀의 방문은 예고 없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세계수 입장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녀가 방문할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붉은 망토의 소녀가 자신의 영역에 강림하자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신.

그 절대적인 존재가 세계수를 찾아온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세계수를 죽이기 위해서다.

*  *  *

신 앞에서 세계수는 처음으로 사슴이 아닌 소녀의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잎사귀로 몸을 가리고 있는 그녀는, 원래는 굉장히 아름다웠을 소녀였다.

악에 침식되어 목 아래가 검은 것을 제외하면 그녀의 얼굴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신록처럼 빛났다.

세계수는 아름답고 큰 눈으로 강림한 신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러다가 등 뒤에 멘 두 개의 검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 무기로 저의 목을 베실 건가요?”

꾀꼬리 같은 목소리 앞에서 신이 흠칫했다.

빨간 망토를 걸친 소녀는 자신이 죽여야 하는 대상이 무서운 괴물이라는 것만 알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맞닥뜨린 것은, 약간 슬퍼 보이고 불쌍해 보이는 소녀일 따름이었다.

자신의 나이 또래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 말이다.

“미안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신의 의지는 확고했다.

신과 타락 중인 세계수.

두 존재는 소녀의 모습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 대치는 짧게 끝나지 않았다.

노을이 지고 밤이 성큼 다가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계수 쪽이었다.

“제 말을 들어 보시겠어요?”

그러자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몸을 감추고, 소녀의 모습을 고집한 세계수는 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자신의 정원을 소개해 주었다.

세계수가 머무르는 곳은 매우 위험해 보였고, 원시적인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기형적으로 생긴 괴조들이 날아다녔고 아름답고 낯선 꽃이 가득한 지역도 보였다.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녀는 이 모든 것을 반짝이는 눈길로 구경했다.

탄성을 숨기지 못하며 걷는 소녀의 곁에서 세계수는 주위를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들이 머물게 된 곳은 매우 아름다운 폭포였다.

102개의 폭포 중 가장 작지만 아름다운 폭포 말이다.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오라버니를 기억하며 만들었어요.”

까마득한 시간의 깊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세계수 옆에서, 빨간 망토를 걸친 신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그녀는 단숨에 세계수를 해치우고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다.

만나보고 싶은 존재들도 많았다.

그녀는 세계수 앞에 설 때까지, 세계수를 단숨에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힘으로야 물론 그랬다.

하지만 이건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연민의 문제였다.

많은 폭포 중 가장 작은 소리를 내는 폭포 앞에서 둘은 사이좋은 자매처럼 함께 앉았다.

그 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그들의 주위에서 꽃들이 빛을 뿜었고, 투명한 나비들이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꿀을 탐했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흐르자 둘은 매우 친숙해졌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이제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수가 자신의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 거라면, 나는 신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신이에요.”

고요한 눈길 속에서 세계수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신이라는 개념이 틀린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던 개념이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그게 틀린 거죠. 왜냐면 당신이야말로 신이고, 당신이라는 실체로 정립이 돼야 하는 게 처음부터 맞는 거니까.”

신은 아름다운 세계수의 얼굴을 보다가 상당히 실례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죽는 게 두렵지 않아?”

그러자 세계수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두려워요. 나는 그게 세상에서 최고로 두려워요. 그래서 전 발버둥 쳤어요.”

“나는 네가 나를 설득하려는 건 줄 알았어. 그래서 이 많은 시간에 정성을 들이는 건 줄 알았어.”

“단지 그것뿐이었나요? 느낀 게?”

세계수의 직설적인 질문에 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니. 우리는 우정을 나눈 것 같아.”

살해당할 자와 살해할 자의 대화치곤 이상한 대화였다.

그리고 끝에 터져 나온 가벼운 웃음도 그랬다.

눈가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을 검지로 닦아내는 세계수가 말했다.

“죽는다는 건 소름 끼치게 싫어요. 나는 내 죽음이 두렵고 슬퍼요. 죽음을 피하는 것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결과를 불러온다 할지라도 말이에요. 세상의 파멸과 저 하나의 파멸 중 저울의 기울기는 당연히 세상 쪽으로 기울겠지만, 저에게는 같은 의미에요.”

그 후로도 세계수의 말을 유심히 듣는 신이었다.

신은 소녀인 데다가 신이 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으므로, 지금처럼 죽음에 대해 깊이 사색해본 적이 없었다.

세계수의 말을 들을수록 가슴에 바위를 얹어 놓은 듯 압박이 느껴졌다.

신은 그동안 너무 쉽게 죽음을 생각했었던 것 같다.

새삼스럽게 세계수를 바라보는 소녀였다.

‘그렇구나. 그녀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파멸하는구나. 그게 하나의 죽음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

그 끝이 가져다주는 실감에 신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본 세계수는 도망치고픈 격렬한 충동을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 제가 잠들었을 때 해주세요.”

신은 손을 뻗어 세계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그날 밤 세계수가 죽음을 맞이했다.

거대한 본신은 지하 깊숙이 잠들었고, 세계수가 구현했던 또 다른 작은 실체는 지상에 파묻혔다.

작은 무덤 앞에서 신이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데 어디선가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소녀 모습의 세계수가 묻힌 무덤가로 날아온 것은 검은 까마귀였다.

세계수의 오라버니인 그는 멀리에서 날아와, 자신 대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과 까마귀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왜 울고 있지?”

까마귀의 물음에 신이 대답했다.

“그녀가 가여워서. 그녀를 죽인 내가 미워서.”

그러자 까마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네가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까마귀조차도 날개가 축 늘어진 게 기운이 없어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의 까마귀는 극도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런 까마귀를 보던 신이 입을 열기까지는 말이다.

“그래도 이야기해 주었어.”

슬픔에 빠진 까마귀는 처음에 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을?”

“그녀가 죽는 날 밤에, 나는 그녀를 깨웠어. 그리고 죽은 네가 다시 눈을 뜨면 네 오라버니와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어.”

그 말을 듣는 까마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까마귀가 울 차례였나 보다.

신은 가만히 서서 까마귀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까마귀는 쉽게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부서지는 가슴을 안고 까마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녀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던가?”

“최소한 극도로 불안해하지는 않았어.”

그러자 까마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에게 말했다.

“혼자 있고 싶어.”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홀로 슬픔을 삭히려는 까마귀를 등졌다.

그리고 한발 한발 움직여 그에게서 멀어지려는데, 무덤 앞에 앉아 있는 까마귀가 말했다.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고맙다.”

신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앞을 보며 대답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동안 네가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말이야.”

까마귀는 이제야 모든 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동안 희미한 신기루처럼 느껴졌던 모든 것들이, 비로소 실체가 되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맙다. 네 자비에 감사한다.”

신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무덤과 까마귀에서 멀어졌다.

그런 그녀가 나무들 사이로 몸을 감출 때까지도 까마귀는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까마귀는 무덤을 떠나지 못했다.

*  *  *

신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세계수와 붙어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이제 세상을 구경하기에는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무거운 교훈을 배운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절대 가벼운 의미가 될 수 없었다.

그걸 깨달은 빨간 망토의 소녀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글리터였다.

신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거침없이 글리터 왕성에 침입했고, 복잡한 내부를 마치 제집이라도 되는 양 돌아다녔다.

세리스가 관리하는 성 내부의 경비는 굉장히 삼엄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눈에 띄는 빨간 망토의 소녀는 한 번도 발각되지 않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난간을 넘어 다니는 소녀가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

세리스의 방이었을까?

붉은 소매를 빠져나온 하얀 손이 문을 잡고 밀었다.

기름칠을 해놨는지 소리도 없이 밀려나는 문이었다.

벽난로가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넓은 방이 드러났다.

푹신한 양탄자를 밟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검은 개였다.

검은 개는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소녀의 발치에 머물렀다.

그러나 눌러쓴 두건 속의 얼굴과 눈빛이 개의 눈에 보이자, 검은 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마플에게로 인도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누구세요?”

마플은 침대 위에 누워 뜨개질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었는데 누가 다가오자 깜짝 놀랐다.

소녀를 발견한 마플은 뜨개질하던 것을 내려놓고 놀란 얼굴을 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복도의 경비를 피해 여기까지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쉿.”

소리를 지르려는 마플 앞에서 검지로 자신의 입술에 대어 보인 신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의 두건을 뒤로 넘겼다.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마플은 눈가를 좁혔다.

그러면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때까지도 검은 개는 신의 발치를 맴돌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신이 발끝으로 검은 개를 툭, 하고 찼다.

그러자 검은 개는 마법처럼 사라지더니 검은 연기가 되어 소녀의 몸에 머물렀다.

소녀는 그 검은 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를 들어 까닥였다.

그러자 열려 있던 마플의 방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당신은… 그러니까 당신은….”

소녀는 천천히 걸어가 마플의 발치에 앉았다.

그때 마플은 침착한 소녀의 행동에 이상한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소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싱그러운 풀 냄새에 가슴이 진정 되는 것을 느낀다.

“안녕. 뭘 뜨고 있었어?”

신의 말에 마플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지금의 마플은 굉장히 얼떨떨한 상태였다.

속으로 ‘이건 꿈일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목도리.”

“누구에게 주려고?”

“세인님이 돌아오시면 선물 하려고.”

그러자 소녀가 한쪽 발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소녀의 발끝을 본 마플이 말했다.

“신발이 낡아 있는 게 긴 여행을 한 것 같아. 그리고 매우 피곤해 보여.”

“그래. 좀 쉬고 싶었어. 그래도 난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 여기로 와야만 했지. 이곳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이게 꿈이 아니라면 오늘의 마플은 분명 경이로운 순간 속에 있었다.

마플은 손짓해서 빨간 망토의 소녀를 앞으로 불렀다.

그러자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마플의 앞쪽으로 당겨 앉았다.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숨결을 유심히 관찰한 마플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니?”

“난 신이야.”

마플의 고개가 옆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마플은 지금 소녀의 말을 무슨 비유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 마플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소녀가 다시 말해 주었다.

“생각할 필요 없어. 나도 안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말이야. 내가 바로 이 세상의 신이야.”

“그래. 넌 신이구나.”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운 마플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신은 꽤나 직설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마플. 지금이라면 너도 어느 정도 깨닫고 있겠지? 그런 네 생각이 맞아.”

마플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곧 얼굴을 무겁게 굳혔다.

소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그녀는 혹시 몰라 소녀에게 물었다.

“이건 꿈인 거야?”

그러자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꿈이 아니야. 현실이 맞아. 마플. 너는 독에 중독되었어. 아주 은밀하고 강력한 독이야. 넌 이제 곧 죽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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