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 달라진 하늘 아래 (9)
다 죽어가는 유미리를 거둔 것은 바로 칼스였다.
자식보다도 제자를 더 사랑했던 그는 유미리를 안고 세계수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칼스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엘프들의 운명을 진창으로 떨어뜨린 건 바로 유미리였다.
유미리가 닉스를 물리치지만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엘프들이 진창에 처박힌 건 나 때문이지.”
칼스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수정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칼스의 손에서 일렁이는 붉은 빛과 수정관의 빛이 서로 호응을 했다.
그 수정관 안에는 부서진 유미리와 엘라이저의 시체가 같이 들어 있다.
그가 라이프 베슬 연구에 눈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을 구한 유미리가 받아야 할 대가가 지옥이라는 것에, 어쨌든 지금의 칼스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의 종착지가 지옥이라도 해도, 최소한 전과 달라진 하늘을 그녀가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칼스는 엘라이저의 시체에 유미리를 안착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의 행동은 객관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타락한 마당이다.
그런데 그 외에도 문제가 하나 더 있었으니.
칼스는 수정관 속에서 부서진 유미리를 보다가 장탄식을 흘렸다.
“이미 너무 많이 손상되었어. 제대로 너를 수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유미리는 몸도 그렇지만 머리의 반이 날아간 상태였다.
게다가 혼을 이식받는 엘라이저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피가 응고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법 액체를 주입하긴 했지만, 부작용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칼스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유미리는 엘라이저의 육체에서 다시 깨어나게 되었다.
기억 부분이 상당히 상실된 상태로 말이다.
그렇게 깨어난 유미리는 황당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이었으니까 말이다.
칼스는 케이드의 곁에서 데드 페이스로 봤던 세인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래서 훗날 그가 나이를 먹어 트렌트가 되었을 때, 세인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끝까지 긴가민가했었을 것이다.
어쨌든 흥미는 생겼다.
그 후로 트렌트 왕은 세인에게 다가가 세심히 관찰했다.
세인은 마정석을 그에게 주며 필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종일관 공손하게 대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알몸 상태로 찾아오기까지 하는 등, 정성을 다한 모습을 보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의 트렌트 왕은 더는 칼스가 아니었다.
과거보다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후회도 진짜 많이 했다.
그는 어쨌든 엘프들을 망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무가 되면서까지 생을 고집한 것이다.
엘프가 나무가 될 때까지 사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는 처음부터 세인에게 우호적으로 대해주었다.
코볼트 스톰을 세인에게 소개해 준 것만 해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트렌트가 코볼트 스톰을 알게 된 계기는 라이프 베슬의 연구 때문이었고 말이다.
트렌트왕은 세인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그 여유는 오랜 시간 긴장과 집중으로 유지해 왔던 그의 삶에 치명타였다.
죽기 직전까지도 트렌트 왕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정말로 과거를 일일이 다 기억해 냈을까?
그러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긴 했다.
남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엘프들에게 있어 트렌트는, 엘프 사회에서 아주 책임감 있는 구성원이었다.
과거에 그를 기억했던 엘프들은 공동체를 위해 그가 무엇을 희생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부인과 자식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을 한계까지 연명하며 엘프들을 위해 어려운 결정 내렸다.
모든 책임을 떠안으려 한 것이다.
그건 트렌트가 고집하는 일종의 회개였는지도 모른다.
트렌트는 자신을 좋은 엘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평가할 때 그는 아주 나쁜 리더였다.
한때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공동체를 위험하게 만들었고, 그 족쇄는 오랜 시간 동안 엘프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동안 반성도 하고 후회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마주친 세인이 누구냐 보다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만 남겨놓기 마련이다.
칼스에게는 자신의 죄가 그런 것이었다.
그가 세인을 확실하게 알아봤고, 트렌트 상태가 아니라 좀 더 젊었다면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봤을 것이다.
예를 들어 괴물들이 계획을 짰듯이.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 젊은 칼스에게 충고를 한다면?
괴물들과 손을 잡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그는 너무 늙었다.
어린 엘프만이 삶의 의미였다.
그리고 이제 순리라는 것도 믿게 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엘라이저에게 충고랍시고 뭔가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엘프 사회 안에서 잘하길 바란다고 격려해 주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마음 깊이 후회했고, 그걸 감추었다.
후회를 드러낸다면 엘프들 전체가 흔들리거나 불안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깊고 긴 후회 속에서 칼스는 트렌트 왕으로 죽었다.
긴 세월을 살다간 마법사치고 꽤 허망한 죽음이었다.
유미리는 다시 깨어나고 나서도 세인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세인은커녕 칼스가 자신의 스승인 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의식을 차린 후에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을 유리관 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수면 상태로 말이다.
한참이 지나 비로소 다시 말을 배우고 엘프들의 생활 습관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인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인지하게 되지만, 그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부분은 세인과 똑같았다.
둘 다 서로가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지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건 너무나 비논리적이었다.
다크 엘프와 인간 정도가 되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에는 특별한 계기가 필요하다.
종족의 벽을 넘어서야 하는 뭔가가 필요한데 그게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둘은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을 살펴보려 하지 않았고, 솔직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엔 각자 너무 바쁜 것도 있었다.
더 시간이 흘러 세계수를 찾아간 엘라이저, 아니 유미리는 그제야 세인과 자신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세계수는 그동안 유미리와 세인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했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게 있었다.
바로 그걸 유미리에게 들려준 것이다.
세계수를 통해 세인과의 관계를 알게 된 유미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가 들어와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기억도 되찾았다.
세계수의 언질이 촉매가 되어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지금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다면?’
세인이 과거로 가서 유미리를 도왔다.
그 덕분에 유미리가 유고를 빼앗은 닉스와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긴 감정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유미리의 가슴속에 세인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면 과거가 어그러지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상태를 보라.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세인이 쉽게 믿어줄 수 있을까?
아득히 먼 옛날 세인이 미래에서 왔다고 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했었지?
“모순이잖아.”
그녀가 사실을 고백해 버리면, 세인은 과연 과거로 돌아가 감정이 쌓이는 유대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나 컸다.
감정이란 자연스럽게 쌓이는 것이고, 유미리가 언질을 준다면 오히려 과거가 훼손될 것이었다.
결국 유미리는 세인이 과거로 떠날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세리스는 정말 중요한 순간에 꿈속에서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언질을 받았고 말이다.
세리스가 꿈속의 일을 기억 못 한다 하더라도, 충분한 압력으로 인해 그녀가 자신의 감정에 고집을 실을 수 있던 것이다.
물론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충분히 그런 재촉을 할 이유가 있었다.
* * *
유미리는 세인이 떠나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의 기다림은 그녀를 알아봐 주는 세인의 귀환으로 인해 보답을 받았다.
“손잡아 줄래?”
다크 엘프가 된 유미리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세인이 잡았다.
그리고 둘은 다시 한번 그 장소를 거닐기 시작했다.
차갑고 높은 밤하늘 아래에서,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는 세인과 유미리가 갖는 산책이었다.
뽀드득뽀드득 밟히는 눈 위로, 남녀의 발자국이 긴 선을 잇는다.
이렇듯 길을 걷다 황금이나 보석을 발견하면 그것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세인의 인생에서 유미리가 그런 존재였다.
그 황금을 안 시간, 그 보석을 마주하게 된 시간이 찰나에 불과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냥 물건을 본 순간 안다.
저게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있으며, 꼭 가져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그때 일어나는 욕심과 의식의 집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한 것이다.
세인은 그의 인생에서 비로소 그런 순간 안에 섰다.
하지만 원하면서도 차마 그것을 품에 넣을 수는 없었다.
그 보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미리가 좋다.’
처음에는 동질감에서 시작했지만, 이윽고 그녀의 모든 면이 그의 가슴 속 깊이 들어왔다.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모습, 가끔 장난도 치고 당돌해 보이는 모습, 우울한 얼굴.
슬픔이 녹아 있는 목소리.
오해를 받아도 이겨내려는 행동 등이 모두 다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웃음.
세상에 대한 헌신.
피부.
눈빛.
이야기와 숨결과 속삭임, 그 이상의 것까지.
전부 가지고 싶었다.
그녀가 지금 엘라이저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제야 세인은 자신이 누구를 미치도록 원하고 있는지 깊게, 아주 깊게 깨달았다.
그는 유미리가 어떤 모습이라 해도 좋았다.
왜냐면 그녀야말로 세인이 개인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그리하여 마침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였기 때문이다.
세인이 그런 생각을 할 때에도, 곁에 있는 유미리는 아직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앞만 보며 천천히 걷는 그녀다.
지금의 유미리는 세인과 이렇게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두고두고 이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집중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옆에 있는 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렸을 적부터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 가끔 내 삶이 부당하다고 느꼈어. 사형장에서 억지로 잔인한 장면을 볼 때마다 겁도 났어. 반발감에 화도 났었고, 남들과 다른 내가 너무 싫기도 했어. 몬스터들이 날뛰는 이 세상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생각도 했어.”
“….”
“몬스터가 없어진다면, 이종족들도 그렇지만 우리 인간들도 끼리끼리 모여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때 유미리는 세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생각으론 몬스터들이 완전히 사라져도 인간들이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인간들은 서로 욕하고 싸울 것이다.
그렇게 상잔하는 도중에 서로에게 몬스터가 되어 주겠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그녀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세인에게 반론을 제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유미리는 잠자코 세인의 이야기를 듣는 데 집중했다.
“그런 내게 있어 행운이 있었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거야. 아델도, 레드도 정말 좋은 친구였지.”
하지만 둘은 다 떠나갔다.
세인은 아델과 레드를 잃었다.
세인은 자신에게서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유미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까이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문득 좁은 얼음 굴 안에 죽어있던 그녀가 생각났다.
믿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파왔다.
‘한 번도 원하는 것을 가져보지 못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손에 쥐어 보지 못했다. 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없지? 왜 나는….’
달 아래에서 입을 벌린 유미리가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에서 초록색의 빛이 반짝인다.
마치 당장 잡아주길 원하는 보석처럼 말이다.
세인이 그것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유미리가 세인의 손끝에서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선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유미리는 무서웠다.
지금 세인의 손가락을 얼굴에 허용해 주면, 거기에 사로잡혀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건 세인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유미리는 세인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둘이 함께한다면 파경만이 있을 뿐이다.
“세인. 나는 타인의 몸속에 들어 있어. 그리고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지. 내 끝은 외로운 지옥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줘도 너는 믿지 못할 거야. 하지만 설명했듯이 나는 이런 상태고, 그리고 너는 네 삶이 있잖아. 그 삶 안에는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 있지.”
“….”
“과거의 나는 네가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을 때 속으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 확신했지. 왜인지 알아? 나는 네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야.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그래서 네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알아. 네 곁에 누가 있는지를 말이야. 그 사람은 글리터에서 아주 유명하지.”
유미리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
“내가 아는 너는 그녀를 버릴 사람이 아니야.”
백번 양보해도, 유미리는 세인이 자신의 자식을 버리고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지금의 세인은 그에게 자식이 있는 것조차 모를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구해야지. 안 그래?”
유미리의 말이 끝난 그때, 세인이 거짓말처럼 답했다.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듯 어떤 말을 했다.
마치 지금 유미리의 가슴 속을 뒤져서 그녀가 생각하는 것을 꺼낸 것처럼 말이다.
“그럼 나는?”
“….”
“너를 원하고 사랑하는 나는?”
세인의 음성 속에 들어있는 간절함 앞에서, 유미리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세인은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는 동시에, 유미리가 품은 생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었다.
세인은 지금 이 순간이 세리스에게 죽을 만큼 미안했지만, 이 말만은 꼭 해보고 싶었다.
자기 인생에서 이런 말이라도 하지 못한다면 속이 불타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도 한 번쯤은 자기 인생에서 진실되고 싶었다.
“내가 평생 욕심 부린 것도 아니야. 비록 모자란 나지만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런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뭔가 대단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내 인생에서 딱 하나 간절히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고.”
“….”
유미리가 세인에게 사랑을 원하는 게 무리한 요구인 걸까?
어쨌든 그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가?
그걸 아는 유미리가 세인에게 사랑을 원하는 게 죄악인 걸까?
지금 세인이 말하는 게 곧 그녀의 상황이기도 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지고 싶은 게 있다고. 나는 그런 것을 바라면 안 되나?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데? 나라고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나라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야. 거짓된 나를 연기하는 게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야. 나도 도망가고 싶어. 나도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가 있다고. 나도 가끔 미칠 거 같다고.”
그는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정시키려고, 그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 되진 않는다.
그래서 말을 다시 시작했다.
“왜 내가 절실히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하는 것조차도 죄악인가? 나는 왜 너를 가질 수 없는 거야. 왜? 대체 왜? 몰랐어, 난 아무것도 몰랐다고. 너를 왜 사랑하는지 몰랐다고. 그 당시 내가 역겨울 정도로 무지했던 게 나의 죄인가?”
힘줄이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쥔 세인이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불덩어리를 내뱉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미리가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슬픈 눈빛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녀는 세인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놓인 시간은 아주 무거웠지만 흘러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시간은 멈출 줄을 모르니까 말이다.
침묵하는 유미리를 불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세인은 덤덤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차피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가 설령 원하지 않더라도 그는 그 해답 위에 서 있었다.
그 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녕.”
세인은 유미리에게 그렇게 말한 후 등을 돌렸다.
사람은 누구나 속 안의 감정이 폭발할 때가 있었다.
때로는 격노에 몸이 떨리면서 세상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허락되지 않은 것에 질투를 느끼거나 좌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침몰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도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세인의 이성이 경고했다.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그가 밟고 있는 눈밭보다 더욱 차가운 현실이었다.
* * *
세인은 바보가 아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미리의 눈빛을 읽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뭘 어쩌겠는가?
돌아서는 것밖에 답이 없다.
점점 멀어지는 세인의 등 뒤로 유미리의 작은 목소리가 날아와 부딪혔다.
“안녕.”
하지만 세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팔짱을 낀 그는 무너지려는 자신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자꾸 부서지려는 이성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진심대로 움직인다면 그건 그 자체로 억지일 뿐이었다.
유미리를 끌어안고 같이 있어 달라고 속삭인다면 그녀는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정말 너를 원한다고 하면 유미리는 기꺼이 그에게 올 것이다.
세인이 유미리를 품에 안으려 한다면 그녀는 거부할 수 없었다.
누구나 태어나서 간절히 원하는 것 하나쯤은 있었다.
그걸 가지고 싶다는 갈망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갈망이 또 다른 남에게 상처를 주고, 주인을 해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걸 알면서도 그 소망을 품고 꿈을 좇아야 할까?
그 해답을 모를 세인이 아니었다.
무책임이야말로 그가 가장 싫어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지금 유미리를 잃는다면 죽을 것같이 아플 것을 알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미리는 세인의 등이 점점 작아져서 아예 사라질 때까지, 그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는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움츠린 그녀의 등이 미미하게 떨린다.
괴로운 속을 삭이는 그녀의 지금 이 시간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이곳에서 또 한 번의 이별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