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19화 (219/307)

# 219

& 달라진 하늘 아래 (8)

빈센트와 헤어진 오버 더 데스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세인을 만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그는 과거로 돌아온 세인을 찾아냈고, 그의 뒤를 미행하며 세인을 관찰한다.

그리고 세인이 제대로 된 사람인지 확인했다.

물론 세인에 대한 일종의 확신이 있었지만 직접 점검을 해보고 싶었다.

이런 것을 보면 데스 크라운이 왜 그를 선택했는지 이해가 된다.

홀리 크라운으로서는 자신에게 신성을 분리하여 대리자로 삼고 성검을 지키도록 했다.

홀리 크라운의 분리된 본성은 그것을 아주 잘 할 수 있을 것이나, 데스 크라운은 동생인 홀리 크라운과 좀 다른 상황이었다.

데스 크라운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난폭하며 광기 어린 모습을 보여줄 때도 많았다.

평소에도 매우 즉흥적이었고 폭력적이었다.

그런 자신에게서 필요한 부분을 추출해봤자 좋은 꼴 보지 못하리란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빈센트의 아버지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힘을 주었다.

그렇게 선택한 빈센트의 아버지는 자신의 한계를 잘 파악하고 수단을 궁리했다.

그가 가진 힘은 엄청났다.

하지만 세상의 난제라는 게 힘으로만 다 해결될 수 없음을, 빈센트의 아버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처럼 조심성 있게 단계별로 계획을 밟아 나가고 있었다.

넓은 폭포 위에 흑기사가 서 있었다.

미끌미끌한 바위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비를 맞고 있던 그였다.

바위와 하나가 된 듯 그는 영원히 그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양손을 움직여 천천히 팔짱을 푼 그는 아래쪽으로 뛰어내린다.

망토가 펄럭이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점점 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속도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그의 모습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차가운 수면 위였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세인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를 안은 상태로 물속에 처박힌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세인을 잡아, 충격을 완화 시키는 것도 쉬운 기술이 아니었다.

그런데 흑기사는 한술 더 떠서 그를 안고 물 밖으로 안전히 빼내었다.

창백하게 변한 세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흑기사는, 건틀렛을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세인의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밀어주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흑기사의 아들인 빈센트의 분신이었다.

그가 세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흑기사는 손을 내밀어 그의 검상도 치료해 주었다.

상처가 아무는 데에는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절했지만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흑기사가 물러섰고, 그 후 엘라이저가 도착했다.

세인과 엘라이저와의 전투를 지켜보던 흑기사는 세인이 위험해지면 언제라도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인은 생각보다 수월히 엘라이저를 물리쳐 버렸다.

어쩌면 오버 더 데스가 근처에 숨어 있으니, 그 존재로 인해 라이트닝 블러드의 힘이 자극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후에도 그는 세인을 따라다녔다.

그 도중에 아주 멀리에 있는 그를 유미리가 감지한 것은 정말 의외였다.

토레스의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흑기사는 서둘러 모습을 감췄다.

그는 케이드와 세인이 싸울 때 도와줄까 말까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세인이 기지를 발휘해 케이드를 멀리 보내는 것을 보고 끼어들려는 계획을 중지한다.

그건 거의 간발의 차이였다.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어도 그가 끼어들어 직접 케이드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우쿨레 산에서 일어난 일이 엉망이 되었을 터였다.

그동안 오버 데스는 세인을 관찰하며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서 신전의 노인으로 화해 그를 도와주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데스라고 밝히며 충고도 해주었고 말이다.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그는 세인이 결국 무엇을 선택할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떤 운명을 만들지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한 번 정도 이런 말을 해주고도 싶었다.

고통을 피해 시간이 걸리는 순리를 따라가라는 말을 말이다.

세인이 다시 잠들었을 때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등을 돌린 것은 한참 후였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그 날이 왔다.

오버 더 데스는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을 분리했다.

오버 더 데스의 힘이 깃든 정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이 순간 그는 둘이었다.

진정한 알맹이와 껍데기.

몸을 일으킨 그가 공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멍하니 앉아 있는 또 다른 자신을 힐끗 바라보았다.

남겨진 껍데기는 허무한 상실감에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

덤덤한 마음으로 공간 안으로 걸어 들어간 그는 세인을 초대하게 된다.

*  *  *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은 매우 어두웠다.

땅은 싱그러운 기운을 내뿜는 풀들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그사이 드문드문 보이는 은방울꽃들이 램프처럼 빛났다.

그리고 아주 멀리에서 폭포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멀리 흰 줄기가 시야에 잡히는 것도 같다.

세인의 옷은 풀들이 머금은 이슬에 닿아 축축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검은 하늘 아래 검은 형체가 우뚝 서 있었다.

세인에겐 매우 익숙한 갑옷이었다.

흑기사가 움직이자, 그의 등 뒤에 달린 망토 끝이 흔들거리며 풀 위를 스쳐 지나간다.

세인의 앞에 다다른 흑기사는, 한때 그가 마주쳤던 치료사 노인의 목소리를 냈다.

“섬에 사람이 갇혔어. 무인도에 혼자 있는 자가 회개하는 방법을 아나? 거기에는 신도 신전도 없는데 말이야. 물론 신부도 거기에 없지.”

그러자 세인이 대답했다.

“하루라도 더 산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용서하는 것이지. 당신은 누구지?”

“전에 데스라고 대답했잖아.”

“그 모습. 오버 더 데스인가?”

“세인. 너는 황야를 헤매고 있다.”

흑기사는 천천히 세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갈망을 안은 고행자처럼 사막 위를 방황하고 있는 거야. 세인. 물론 살아가면서 가슴이 아픈 일도 있겠지만,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외면할 것은 외면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그게 바로 인생이잖아. 사람의 인생. 너의 인생.”

그때 흑기사가 손을 내밀었다.

그 건틀렛 끝이 다가와 이마에 닿을 때까지도, 세인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아찔한 두통이 느껴지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물렸다.

갑자기 지식이 머릿속을 파고 들어온 것에 대한 고통이었다.

그런 고통을 무시하려는 듯 흑기사의 손이 다시 다가와 세인의 머리에 닿는다.

“또 다른 라이트닝 블러드인 스포일러들. 그들의 대부분은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단지 고통 없이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 왜 그들이 그렇게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지 알아? 테러로드 때문이다. 테러로드가 호수 어딘가에 있는 한, 멸망은 바뀌지 않아. 어딘가에 상어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 상어는 먹이를 찾아온다. 그리고 파탄을 일으키지. 세상의 멸망 말이야. 대부분 그걸 본 거야.”

“….”

“하지만 몇몇 현명한 스포일러들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은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을 알아. 세인. 너도 그걸 알겠지? 느낄 수 있지 않나?”

세인은 스톰의 퀘스트를 통해 미래를 엿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느낀 감정을 계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시는 그런 세상이 도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길이다.

그래서 가끔 미치도록 자유인이 되고 싶어도 이를 악물었다.

영지민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도 어차피 그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세인이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분투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지금 너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흑기사의 음성이 진지해졌다.

“내가 권하는 것은 생존이다. 너와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반려자와 멀리 도망가는 거야. 아주 안전한 곳에 숨어서 라이트닝 블러드의 운명을 기다려라. 데스 크라운님과 홀리 크라운님이 수태하고 싶어 했던 그 운명말이야. 라이트닝 블러드는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난 이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너와 그녀만 살아남으면 된다. 생각해봐라. 네가 죽으면 네가 엿봤던 그 미래가 열리는 거야.”

치료사 노인으로 변해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일을 순리대로 푸는 것이다.

이전이라면 세인은 흑기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의 손과 접촉한 이후로 천천히 깨달아 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흑기사의 말 속에서 세인의 머릿속은 점점 뚜렷해져 갔다.

“노인으로 변한 내가 권한 순리가 바로 이것이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눈을 감으면 된다. 도망쳐. 그리고 미래의 네가 과거의 너를 용서해주면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용서는 황홀하고 찬란한 미래를 낳을 것이다. 이젠 너도 그것을 알겠지? 오늘의 너는 말이야.”

그것은 바로 두 천사가 안배해 놓은 순리였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순리.

하지만 거기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럼 그동안 박살 나는 세상은? 테러로드가 세상을 파괴하는 것에서 등을 돌리라는 이야기인가?”

세인의 앞에 있는 흑기사가 일부러 과장되게 혀를 찼다.

“테러로드가 없었어도 어차피 전쟁은 있었어. 전쟁의 또 다른 이름은 학살이지. 내가 생존한다면 어차피 순리의 끝은 정해져 있어. 단지 아주 많은 시간이 요구될 뿐이야. 그 정도는 그들에게 허락할 수 있잖아?”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입을 굳게 다문 세인 앞에서 흑기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기다려. 기다리면 모든 게 순리대로 해결될 거야. 세인. 때로는 눈을 감아야 하는 죽음도 있어. 가슴 아픈 순리라도 순리는 순리야.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거든.”

하지만 세인에게는 다른 길도 있었다.

세리스와 함께 도망쳐서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일 말고 다른 길 말이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세인이 다시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흑기사의 보라색 눈빛과 만나 허공에서 뒤엉킨다.

“나는 타락했지만 분명 사람이야. 사람인 나는 사람을 위해서 산다. 그게 나의 기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영주다. 그게 바로 사회에서의 내 역할이고 책임이다.”

자신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세인의 음성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바늘 하나라도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낯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왔다. 그게 바로 어제의 나였다. 오늘의 내가 사람으로 설 수 없다면,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포용해주기는커녕, 어제의 나에게 비난받겠지. 나는 그걸 바라지 않는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용서한다 해도 죽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지?”

“그게 네 대답이냐. 나는 루시드와 네가 붙었을 때 그를 이길 수 있는 안배를 마련해 놓았다. 네가 설령 도망간다 해도 루시드가 너를 추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테러로드는 루시드 뿐만이 아니야.”

흑기사가 재다짐을 받아내려는 듯 묻는 말 앞에서도 세인의 의지는 확고했다.

“과거에 나는 수많은 죽음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다시 그때가 도래한다면 나는 다시 그럴 것이다. 그 상황이 즐겁고 반가워서가 아니야. 그 순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야.”

“….”

“전쟁에서 승리라는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고 피할 수 없는 희생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죽고 없어지고, 그 후에 내가 웃는다면 그건 어떤 승리지? 아이가 죽는다. 노인이 죽는다. 젊은 남자가 죽는다. 젊은 여자가 죽는다. 엄청난 고통이 그들을 휩쓴다. 그걸 등지고 도피하라고?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겠나? 그건 불가능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인간이다.”

그리고 말을 멈춘 세인이 어떤 감정을 삼키려는 듯이 잠시 뜸을 들였다.

자신의 상태가 생각 난 것이다.

마족으로서 손가락질받으며 무릎을 꿇었던 자신을 말이다.

머무를 곳이 없어 영지민을 이끌고 걸었던 시간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세인은 다시 말했다.

“나는 인간이다.”

마음대로 사람을 조작하고, 마음대로 라이트닝 블러드를 만드는 천사들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

도망가야 한다고 말이다.

눈을 돌리고, 외면하고 그런 짓을 용서받으라고 말이다.

대의랍시고 생명을 개조하고 가혹한 운명 안에 끌어다 놓는 존재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바로 세인이 아는 인간의 정의였다.

그러자 흑기사, 오버 더 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수한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세인의 길이었다.

그건 흑기사도 원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엘릭서는 이제 필연이군. 홀리 크라운님과 데스 크라운님은 라이트닝 블러드라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게 바로 동족을 배려한 최선이었어. 끝은 정해져 있지만, 천사들도 한을 푸는 거지. 그 정도면 납득할 수 있는 죽음이 되지 않을까 싶었을 거야.”

흑기사가 보기에, 그게 바로 홀리 크라운과 데스 크라운이 가졌던 생각이었다.

동포들이 날뛰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대전쟁이 그분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죽어가는 대지. 흘러넘치는 비탄.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울음소리. 고아가 된 생명의 눈빛이 그분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네 앞에 있는 거다.”

오버 더 데스.

그 진정한 힘이 세인의 앞에 있었다.

과거 마검이 가져다주었던 껍데기뿐인 힘이 아닌 완전한 엘릭서가 말이다.

흑기사의 투구가 천천히 다가왔다.

세인의 얼굴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고 말이다.

세인에게 모든 것을 주기 전, 오버 더 데스가 중얼거렸다.

“누구나 원하는 결말을 가지고 있지. 하나 정도는 모두가 품에 안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를 갈구해. 그리하여 마침내 원하는 지점에 서 있기를 바라지. 그래. 정녕 원한다면 전력으로 매달려라. 네가 원하는 결말을 위해 최선 이상을 다해봐. 그리하여 마침내….”

그다음은 생각으로 전해져 왔다.

‘네가 거기에 서 있기를 바라겠다.’

오버 더 데스의 이마가 가볍게, 아주 가볍게 세인의 이마에 맞닿았다.

그러자 작지만 깊은 충격이 세인의 머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크고 넓은 파문을 연이어 만들며 세인의 가슴까지 번져 나간다.

아찔한 각성이 그를 휩쓸었고 보라색의 광채가 그의 몸에서 빛났다.

솟구친 그 빛이 검은 하늘을 꿰뚫어 놓는다.

오버 더 데스의 몸이 흩어지며 세인을 감쌌다.

그러면서 연이은 각성이 일어나 세인의 몸을 휩쓸었다.

드디어 오늘, 오버 더 데스가 세인과 하나가 되었다.

완전한 결합이었다.

보라색의 전광이 번쩍이며 터져나갔고, 부서진 은방울꽃들이 휘날리며 빛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그 순간 세인은 과정을 형용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완전히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마검의 힘을 완전히 쓸 수 있는 것을 떠나서 말이다.

마음속에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각오가 들어선다.

이 모든 것이 일치되었을 때, 그는 드디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검은 왕이었다.

지금의 그는 오버 더 데스가 평소 품었던 생각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지금 그를 완벽히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직면한 상황을 떠나 직접 이노센트들에게 관여할 수 없어. 동족이니까. 가족이니까 그럴 수가 없지”

하지만 그 생각을 떠올린 세인의 마음은 전혀 달랐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 충만한 힘을 느끼며 말이다.

그렇게 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버 더 데스가 만들었던 세상이 깨지기 전에 세인이 중얼거렸다.

방금 떠올린 생각에 대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난 아니지.”

그리고 데스가 태어난 세상이 부서졌다.

*  *  *

그 후 세인에게 모든 것을 건네주고, 껍데기만 남은 현실의 흑기사는 세상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긴 세월은 그를 미치게 했다.

나중에는 자신이 누군지도 잊어버렸다.

환생은 그 생명체의 본질을 유지하기 위한 연이은 탈피 같은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세계수나 천사 그리고 까마귀 같은 존재조차도 결국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다만 그들은 남들보다 더욱 오래 잘 견딜 뿐이다.

높은 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세인은 전에 엘프처럼 길게 사는 게 환생보다도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엘프도 남들보다 좀 더 잘 견딜 뿐이다.

어쩌면 나무라는 탈바꿈은 환생을 여러 번 할 수 없는 그들에게 있어 또 다른 환생인지도 모른다.

보통은 한계 없이 환생을 거듭해 계속 온전함을 유지할 수도 없다.

솔로몬 같은 현자의 경우 고문받고 개조된 탓도 있었지만, 내면이 완전한 괴물이 되고 바닥까지 타락해 버렸다.

한때 마주친 세인에게 기회를 얻었지만, 결국 캐시오의 밑에서 한 짓이 그 증거였다.

현자는 결국 악행에 대한 대가로 세리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세월은 본질을 훼손시킨다.

그렇게 보면 애초에 환생은 영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 흑기사는 군단장의 역할로 세인과 만났다.

그는 아레이즈를 짓밟고 세인을 농락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마지막 남은 작은 힘까지 빼앗겼다.

그렇지만 그렇게 마검의 힘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인은 마검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힘을 쓰면 부작용에 눈이 멀기도 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오버 더 데스의 진정한 힘은, 예정된 과거 속에서 세인이 완전한 오버 더 데스에게 넘겨받아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결정되어 있었다.

완전한 각성을 마친 세인은 자신이 본래 살았던 시대로 건너왔다.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닌 모습으로.

*  *  *

자신의 시대로 돌아온 세인이 지금 서 있는 곳은 하얀 나무들이 서 있는 지역이었다.

침엽수 특유의 날카로운 잎을 가진 나무들이 그를 에워싼 채로 서 있었고, 그 위로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이 빛났다.

과거 누군가와 헤어졌던 이곳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온다.

사박사박 눈을 밟는 소리가 등 뒤로 점점 가까워졌을 때, 세인은 자신의 가슴 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손을 가슴 쪽으로 넣어 그 물건을 빼내자, 이제 손아귀에서 초록색으로 발광하는 보석이었다.

이제 보석은 영악하게도 빛을 뿜으며 자기가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등 뒤의 발소리가 멈추었을 때 눈을 감았다가 뜬 세인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하얀 눈과 나무들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서 있는 엘라이저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인은 그런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는다.

엘라이저는 그 손길을 피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세인은 손에 든 다크스타를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엘라이저는 그것을 받아들고 꿈꾸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마왕의 유산.

마왕의 한 부분.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초록색의 보석을 자신의 안대 속으로 집어넣었다.

세인은 그녀의 그런 행동을 끝까지 잠자코 바라보았고 말이다.

그녀가 안대를 끌어 내리자, 엘라이저의 초록색 눈이 보였다.

다크 스타가 오랜만에 제 주인을 만난 기쁨을 표현하려는 듯 밝게 빛났다.

완전히 풀려진 안대는 엘라이저의 발치에 낙엽처럼 떨어진다.

초록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세인이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는 아주 긴 시간을 뛰어넘은 인식 아래 이루어지는 인사였다.

서로 아득하게 긴 시간을 뛰어넘어서 말이다.

“안녕. 유미리.”

그러자 엘라이저, 아니 유미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세인의 말을 받았다.

“안녕. 나의 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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