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 달라진 하늘 아래 (7)
-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우리가 망설여야 하는 이유가 뭘까?
* * *
빈센트는 세리스의 성에서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가 바로 단잠에 빠졌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바람에 침대 근처로 왔을 때에는 아예 쓰러져 버릴 지경이었다.
누가 와서 몸을 흔들어도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쿨쿨 잤다.
그렇게 깊은 잠 속에서 그가 있는 공간이 반전되었다.
세리스의 성안에서 운명의 장소로 말이다.
꿈속에서 그는 아주 넓고 고급스러운 방에 누워 있었다.
사지를 벌리고 활개를 친 상태로 말이다.
움직이려 해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 제약이 답답하게 여겨지진 않는다.
왜냐하면 기분 좋은 나른함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나른함 위로 수많은 실이 나태의 머리카락처럼 그를 뒤덮고 있었다.
빈센트는 실 더미 밑에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많은 실은 어디에서 난 걸까?’
그러자 그런 그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검고 큰 그림자가 대답했다.
그림자는 보라색의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네 몸에서 나온 거야.”
“그렇군요.”
느릿하게 대답하던 빈센트는 커다란 그림자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오버 더 데스.
흑기사의 등에 달린 망토가 빈센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마취된 듯 멍한 기분으로 그걸 바라보던 빈센트는, 문득 그 망토를 잡아 이불로 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좀 이상한 생각이구나.”
“여기에서 뭘 하시는 건가요?”
“실을 잣고 있어.”
잠시 눈을 깜박인 빈센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몸에서 나온 실로요?”
“그래.”
“그건 좀 이상하군요. 실을 만지고 놀 분으로는 안 보이는데.”
“따라 하지 말아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흑기사의 말을 듣던 빈센트가 뒤늦은 질문을 던졌다.
사실 가장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을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이 공간은 이미 너에게 해답을 전달하고 있어. 말로 주고받는 감응에 익숙한 네가 그걸 듣고 있지 않을 뿐이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설명도 사실 이 공간이 내놓은 해답의 확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다.”
아찔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흑기사는 계속 낮고 탁한 음성을 흘려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말을 길게 하면 더욱 그랬다.
그래서 빈센트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귀를 기울이려 애썼다.
흑기사가 해준 조언을 무시하고 말이다.
“난 멀리에서나마, 네가 은장미 기사단을 이끌며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지켜보았어. 팔을 잃었을 때는 내 가슴이 아프더구나. 내가 무엇이냐를 떠나 지금의 나는 너를 존중한다. 빈센트. 그리고 그런 존중을 넘어 인정했기에 지금 이 일도 하는 거지. 나는 너를 중히 쓰고 싶어. 너라는 존재를 이등분 하는 거지.”
그때 빈센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잠깐만요. 저를 이등분 하신다고요?”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계약하고 있을 세리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운명마저 부수고 바꾸어 놓을 수 있지만 넌 아니거든.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그녀의 곧은 의지와 힘에 끌렸겠지. 그리고 세리스는 성검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어.”
“….”
“하지만 넌 아니다. 너는 평범한 사람이야. 마검을 수용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네 선함에 이끌렸다. 나는 너를 믿는다. 그래서 너를 선택한 거야. 마지막에 가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보다도 낫다고 생각하거든.”
빈센트는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뭐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흑기사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몸에서 너라는 실을 뽑아내어 너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지. 그의 이름은 세인이라고 해. 익숙한 이름이지? 네 세례명이니까 말이야.”
“당신은 그를 왜 만드나요?”
“너뿐만 아니라 모두를 돕기 위해서.”
그의 설명은 너무 불성실했다.
순간 빈센트는 몽롱한 정신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를 세게 쥐어 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흑기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감상을 말했다.
“그것참 재미있는 생각이구나.”
생각을 읽힌 빈센트가 살짝 움찔했지만, 이내 평온을 유지했다.
흑기사가 빈센트를 둘로 나누는 이유는 테러로드인 루시드에 대한 안배 때문이기도 했다.
루시드의 권능은 상대와 무조건 1대 1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상대보다 무조건 반 배 정도가 강해진다.
이건 루시드가 원하면 철저히 적용되는 법칙이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흑기사는 데스 크라운이 선택한 자였다.
놀랍게도 그는 해결책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루시드의 권능은 매우 놀랍지. 하지만 애초에 빈센트가 두 명이라면?’
그의 계획대로 세인이 태어난다면?
세인은 빈센트였다.
그리고 빈센트도 곧 세인이었다.
세상에 있어서 둘은 하나나 마찬가지였다.
루시드는 지정한 상대와 무조건 일대일을 만든다.
하지만 애초에 지정한 상대가 한 명 말고 또 하나가 더 있다면?
쌍둥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쌍둥이는 겉모습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인격체다.
영혼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가 쌍둥이라면 루시드의 권능은 분명 이를 분별해 낼 것이다.
영혼이 다른 걸 알아보겠지.
그런데 빈센트와 세인의 경우에는 루시드의 권능 안에서도 하나이자 둘이 되는 게 가능했다.
둘은 원래 하나였으니까.
두 영혼은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니까.
‘루시드의 권능 지정이 빈센트를 향하는 거야. 그러면 루시드는 빈센트보다 무조건 반 정도 더 강해져. 그 상태에서 그의 영역으로 세인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세인이 접근한다고 해서 1대1의 권능이 그를 거부할 리는 없었다.
조건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권능의 판단에 있어 하나의 영혼이 있을 뿐이었다.
한사람의 몸이 두 조각나도 둘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세인과 빈센트를 하나로 인정할 것이다.
그렇게 맹점을 정확히 찌른다.
흑기사의 생각대로라면 루시드는 분명 세인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처음에 권능 지정이 빈센트에게만 적용되면 만사가 해결된다.
나머지는 세인이 잘 상황을 만들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
“나를 둘로 나누지 말아요.”
“왜?”
“낯선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 빈센트의 말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긴장이 완전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털어놓는 본능적인 마음 같은 것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복제물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정체성을 공격받는 듯한 느낌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지금의 빈센트는 그것을 토로하고 있었다.
흑기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건 안 돼 빈센트.”
“왜죠?”
“너뿐만 아니라 많은 존재가 기댈 존재를 가져야 하거든. 내 주인의 생각이 그래. 그리고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그녀의 계획은 이미 한번 실패했지만, 계속 여러 방법으로 시도해 보는 거지. 세상이라는 호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말이야. 너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시도하는 거야. 그런 길이 있다면 희생도 가치가 있다.”
“….”
“너의 좋은 부분이 좋은 결과를 끌어내길 바란다. 빈센트. 너는 약자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쳤어. 그리고 너는 지금도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어. 빈센트. 하나만 물어보자.”
그리고 흑기사는 미래에 세인이 할 말을 여기에서 했다.
아니 어쩌면 흑기사인 그가 여기에서 한 말을 지금의 빈센트가 듣고, 그에게서 분리된 또 다른 자신인 세인이 되풀이했는지도 모른다.
분리된 세인이 아주 먼 미래에서 말이다.
“머리는 빗지 못해 산발인 소녀가. 이가 빠져서 크게 웃을 때마다 빈틈이 많이 보이는 그녀가. 앞으로 돼지들과 함께 살며 산속에서 외로울 소녀가. 불한당이 그녀를 괴롭히면 아무것에도 보호받을 수 없어 두려워할 그녀가.”
그리고 흑기사의 깊은 시선이 빈센트를 주시했다.
“어느 날 너의 남은 한쪽 팔을 원한다면, 그래서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넌 그 팔을 바칠 수 있겠지?”
일고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빈센트는 바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흑기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난 그런 너를 믿는다. 나는 어느 날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말이다. 데스 크라운님은 날 믿을만 해서 선택하셨겠지만, 내 정신은 완벽하지 않아. 그렇다면 정신이 붕괴하기 전에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빈센트. 바로 네가 그 해답이다. 난 너를 믿는다. 너의 선함을 믿는다. 방금 넌 진심으로 선함을 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너를 믿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너만은 믿을 수 있다.
그러니 일을 맡긴다.
“그거야 당연하죠. 전 성기사니까요.”
그러자 흑기사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도 테러 나이트가 되기 이전에는 성기사였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언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그가 있는 공간이, 꿈이라는 가면을 쓴 공간이 그에게 많은 것을 설명해 주었다.
흑기사의 말이 맞았다.
헤아릴 수 없는 설명들이 바쁘게 그의 의식 속을 누볐다.
시간이 흐르자 빈센트에게서 뽑혀 나온 실이 빛을 발하며 한 명의 인간을 완성했다.
눈꺼풀을 두드리는 빛에 눈을 뜬 빈센트가 중얼거렸다.
“세인. 나의 라이트닝 블러드. 나의 선한 분신.”
“그래. 바로 그가 라이트닝 블러드다. 운명에서 벗어나 스스로 걷는 자.”
빈센트의 빛으로 태어난 자, 세인.
그는 수많은 환생 속에서 자신의 정신을 지키며 살아가겠지.
그리고 어느 날 운명을 느끼고, 그 운명 안에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운명을 부술 것인지 아니면 주어진 혜택을 선택할 것인지를 말이다.
빈센트와 세인의 경우는 수많은 생명체처럼 환생을 통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오버 더 데스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환생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시간의 문제였다.
각기 차이가 있겠지만 흑기사도, 까마귀도, 까마귀의 누이인 세계수도, 심지어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마저도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천사들이 타락하여 이노센트가 되는 것도 시간이라는 괴물 때문이었다.
노화라는 것은 정신에도 적용되니까.
이제 흑기사는 세인의 외모를 변형시키려 했다.
하지만 빈센트의 말이 그런 행동을 저지했다.
“저를 변하게 해주세요.”
의외의 말에 흑기사는 조용히 빈센트를 주시했다.
그리고 빈센트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읽어 들였다.
이때 빈센트가 생각해 낸 것은 몬스터에게 오염되어 가족을 떠났던 아버지였다.
빈센트는 이유를 입 밖으로 꺼냈다.
“가끔 아버지인 그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그러니 그의 겉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허락한다. 네 아버지는 타락한 괴물로서 큰 죄를 지어, 다시는 환생하지 못하니까. 네가 그의 모습을 채워도 문제는 없을 거야. 하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너는 아버지인 그를 증오했잖아. 더구나 왜 소중한 너의 모습을 세인에게 주려고 하는 거지? 너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말이다.”
빈센트는 이제 눈앞의 세인이 장차 어떤 일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환생을 거듭해 세상 어딘가에서 세인과 빈센트가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예 똑같은 둘이 존재한다면 누구라도 기괴하게 여길 것이다.
그 부자연스러움은 주변의 이목을 끌기 때문에 가능한 피하는 게 좋다.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꼭 변해야 하는 대상이 세인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제 형상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기쁩니다.”
흑기사는 가슴이 먹먹해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무겁게 떼었다.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굳이 네가 증오했던 이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을까? 잘 생각해라. 지금 네 겉모습을 정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너는 수많은 환생 동안 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야. 너와 네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던 그 얼굴로 말이다.”
그러자 빈센트가 흑기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확신을 담아 이야기했다.
“전 이미 저의 사랑으로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때 흑기사의 눈이 흔들린 것은 착각이었을까.
흑기사의 무거운 손이 빈센트의 이마를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리고 흑기사는 선언했다.
“알겠다. 빛의 신도야.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너는 네가 가장 싫어했던 바로 그 모습일 것이다. 은총이 너와 함께 하기를.”
그러자 빈센트는 성직자답게 대답했다.
“기꺼이.”
이제 깨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세인이 완성되고, 그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며 사라졌을 때 빈센트는 그걸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무서운 존재를 보았다.
오버 더 데스.
죽음의 그림자.
자신의 한계를 알고 안배를 준비하는 자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빈센트에게 있어, 몸을 일으킨 상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이제 부서질 공간 안에서 검은 기사를 올려다보던 빈센트는,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아주 가볍게 지나가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안녕. 아버지.”
그러자 흑기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빈센트. 나의 소중한 아들.’
* * *
램프가 꺼진 방안은 어두웠다.
살짝 열린 창문에서 불어온 바람이 침대 머리맡을 적신다.
그 바람에 이마가 차가워진 빈센트는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행에 옮기기로 한 그가 손가를 비비며 잠을 완전히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층계를 밟고 성곽으로 가는데 몇 십 분 정도가 소모되었다.
중간에 주방에 들러 물도 마셨기 때문이다.
푸르스름한 달이 검은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가, 빈센트를 발견하자 다시 숨어 버렸다.
성곽 위에 서 있는 빈센트는 바람을 옆으로 맞으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아래쪽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숲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의 잎들이 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나비 떼처럼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내가 무슨 꿈을 꾸었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는 밤하늘을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수줍게 얼굴을 내민 달과 마주쳤다.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지만, 속이 후련했다.
어렸을 때 전 재산을 불우이웃을 위해 모금함에 넣은 뒤로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숱한 선행을 하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 현실에 답답한 마음뿐이었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이상하게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이.
달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의 두 눈동자는 더욱 반짝였다.
빈센트.
그는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한 소녀와 관계되어 있었다.
머리가 산발인 소녀.
이가 빠져서 크게 웃을 때마다 빈틈이 많이 보이는 소녀.
돼지들과 함께 사는 산속의 소녀.
그녀의 이름은 에스였다.
에스는 불한당에게 시달리다가 빈센트의 도움을 받게 된다.
평소라면 불한당들쯤은 거뜬히 물리칠 수 있는 그였지만 시기가 좋지 못했다.
몬스터와 싸운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의 부하들은 너무 멀리 있었고, 남자들은 독을 썼다.
물론 이 남자들은 나중에 모조리 잡혀 참수된다.
세리스의 지시로 말이다.
하지만 빈센트는 이미 그들에게 목숨을 잃은 후였다.
에스는 그 덕분에 살아났지만, 빈센트의 팔꿈치 아래쪽은 남자들에게 잘렸다.
잘 빠지지 않는 고급스러운 팔찌와 반지 때문이란 게 그 이유다.
후일 에스는 처형장에 참석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채 그들의 팔꿈치가 잘리는 것을 구경했다.
물론 목이 잘리는 순간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았다.
세리스는 그녀를 거두었고 성기사로 길렀다.
에스는 자신 때문에 죽은 빈센트를 기리며 수많은 선행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에게 큰 도움을 받은 대귀족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에스는 빈센트의 석상을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대귀족은 기꺼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말이다.
그래서 대도시의 중앙에는 양팔이 없는 거대한 석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세상을 위해 양팔을 바친 빈센트. 성자 빈센트.”
그 석상을 보며 에스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빈센트를 석상 앞에 이장하고, 화환을 바쳤다.
그 후로도 빈센트의 석상 앞은, 많은 순례객으로 붐비며 아주 오랫동안 외롭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