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 달라진 하늘 아래 (6)
레드를 배웅하고 영주가 머무는 곳으로 간 빈센트는 담판을 지었다.
그 담판이란 협상이나 비위 맞추기도 아니고, 영주의 추잡함을 위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추적대를 보낼 수 없을 만큼 혼을 쏙 빼놓은 것이다.
빈센트는 자신의 다음 목적지를 공개하고 앞으로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지를 밝혔다.
영주는 속으로 빈센트를 죽여 입막음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간 정말 그의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빈센트에게 매달렸지만, 빈센트는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세리스가 있는 성으로 향하던 그는 마차 안에서 깜빡 졸았다.
요즘 따라 꿈을 자주 꾸는 그이다.
주로 꾸는 꿈의 내용은 인정받는 성기사가 될 때까지 노력했던 꿈이었다.
그의 진심을 인정받고, 희생정신을 인정받은 후에도 피나는 노력이 있어서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미간을 문지르던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과거 꿈을 꾸지?”
혹시 죽을 때가 된 건가?
그런 속마음은 불길함을 불러들일까 봐 차마 내뱉지 못했다.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다.
“아직 인생을 회고하기엔 젊은 나이인데, 한참 자서전을 쓰기엔 이르다고.”
그는 그 길로 거대한 성에 가서 세리스를 만나보았다.
생각보다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보통 같은 성기사라고 하면 성별보다는, 우선적으로 동료의식이나 형제애가 느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세리스는 존재감도 존재감이지만, 아름다움이 그런 일반적인 정서를 넘어설 만큼 강렬했다.
빛의 천사라고 불러도 믿어줄 만한 외모였다.
물론 지금 성기사들 사이에서 천사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이지는 않는 편이다.
그리고 세리스는 좀 특이한 성격을 가진 것도 같았다.
빈센트를 보자마자 대뜸 이런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어디서인가 마주쳤던 적이 있나요?”
“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세리스 같은 여성과 마주쳤다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만난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빈센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상하게 낯이 익은데?’
하지만 그녀가 하루에 만나는 인물의 수는 절대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는 중요인물들도 수두룩했다.
각 나라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사신들로 오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분야의 거장들이 그녀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길 염원하는 실정이다.
사실 빈센트처럼 독대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고 볼 수 있었다.
세리스는 과거에 딱 한 번 세인과 마주쳤다.
세인의 능력을 살짝 인정해 함부로 그를 죽이지 않을 만큼 자비를 베풀었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에게 있어 세인은 유미리에 가려진 약간 쓸만한 녀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의 잣대로는 세인은 한 번 보고 신경도 안 쓸 놈이었다.
크루세이더인 레드라면 모를까.
세인 따위는 돌아서고 바로 잊어버렸는데 기억 날리가 있나.
결국 세리스는 빈센트를 보며 세인을 떠올리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뭔가 착각했거니 생각한 것이다.
“어쨌든 환영합니다. 제 성에서 편하게 쉬십시오.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빈센트를 내보낸 세리스는 밀린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며 램프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유미리는 어디에 있을까?”
그 음성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꼭 원망뿐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일이 풀리니 세리스도 유미리에 대해 분노한 감정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책상의 서랍을 열고 한 장의 작은 그림을 꺼내 보았다.
거기에는 유고, 유미리 그리고 세리스 등이 큰 나무 주위에 모여 웃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 자리에서 유고가 말했었다.
세상의 하늘을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말이다.
모두에게 파란 하늘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맹세에 유미리도 동참했었다.
그리고 자신도….
세리스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눈을 감았다.
마치 그때를 다시 떠올려 보듯이 말이다.
회상을 마친 그녀는 그림을 서랍 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밀쳐 두었던 서류들을 다시 끌어당겨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제 펜촉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그녀의 집무실을 가득 채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그녀는 야심한 시각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홀리 디스트로이어를 만났다.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세리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의 세리스. 엘릭서를 소유할 자를 생각했을 때, 저는 가장 먼저 당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홀리 크라운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승낙한다면 저는 두 번째 후보를 찾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꼭 그게 아니더라도, 당신이 부디 승낙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저는 가슴 깊이 당신보다 더 나은 자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정을 고백한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이어서 자신의 반려자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물론 꿈속에서의 세리스는 그것을 승낙했고 말이다.
빛의 천사가 꿈속에서 나타나, 세상을 위한 열쇠가 되어 달라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맞서 싸웠던 이노센트와 달리, 모습을 드러낸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자애와 빛으로 가득 찬 존재였다.
그런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아주 정중히 부탁을 해왔다.
세상을 위한 구원자가 되어 달라고 말이다.
그녀는 성기사였다.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데 거절할 리가 없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 세상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그런 세리스의 맹세 앞에서, 두 손을 꼭 쥔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전쟁이 종결되고 난 후 일식과 월식이 일어났다.
땅 위의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건 데스 크라운과 홀리 크라운이 마음을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자매는 어쩌면 전에 시도했던 계획이 수포가 되었기에 더더욱 참견하고 싶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과거 홀리 크라운과 데스 크라운은 하나의 계획을 세웠고 진행하려 했다.
스포일러들은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초창기의 라이트닝 블러드로서 미래를 더듬는 자들이었다.
어떻게 해야 궁극적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에 대한 첫 번째 계획은 실패.
하지만 대전쟁 속에서 많은 이가 증명했던 의지와 마음이, 두 번째 결심과 계획을 태어나게 했다.
「더욱 강력한 라이트닝 블러드를 만들자.」
「그들의 손에 심판의 힘을 쥐여주자. 그리고 우리의 동포조차 그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실패 속에서 세상과 동족에게 시선을 돌렸던 두 천사가 다시 움직였다.
그래서 땅 위의 생명체들은 태양이 두 개로 나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식과 월식 이후에 벌어진 징조다.
홀리 크라운이 자신에게서 홀리 디스트로이어를 분리해낸 것이다.
그 독립된 신성은 아주 찬란하게 빛났다.
다음날 다시 땅 위의 존재들은 달이 두 개로 나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데스 크라운이 자신에게서 오버 더 데스를 분리하는 광경이었다.
그 독립된 죽음은 아주 불길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이 신비한 현상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그 광경을, 아직도 남은 악의가 불러일으킨 착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때야말로 세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 * *
시체들이 가득 쌓인 평야.
악취와 부패가 가득한 곳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검은 갑옷을 입고, 역시나 검은 망토를 걸친 그는 엄청난 기운을 뿜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 무거운 투구에 가려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보라색의 안광만이 뒤로 선을 그었을 뿐이다.
그는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서 말이다.
야공에 외롭게 떠 있는 달을 한참 바라보던 그.
결국 마음을 정리하고 실행에 옮긴다.
빈틈없이 온몸을 검은 갑옷으로 감싼 흑기사는 미증유의 힘을 완벽히 갈무리했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올려 투구의 앞쪽을 덮었다.
그 상태로 그의 몸이 흐려진다.
그리고 평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과거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아주 깔끔하고 어떤 부작용도 없이 해치워 버리는 흑기사였다.
세인은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정확히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지점에 모습을 드러낸 흑기사는 앞에 있는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상대는 바로 까마귀였다.
이제 막 세계수에서 까마귀로 탈바꿈한 존재는 눈앞에 나타난 흑기사를 보고 신음을 흘렸다.
“넌… 테러 나이트? 케이드만 남아 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흑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의 투구 속에서 보라색의 빛이 일렁였고, 그것에 정신을 빼앗기던 까마귀는 자기 생각을 수정했다.
“아니야. 너는 테러 나이트가 아니구나. 테러 나이트의 기운도 느껴지지만, 그보다 더 범접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대체 너는 누구지?”
그러자 흑기사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탁하고 묵직한 음성으로 말이다.
“나의 이름은 오버 더 데스. 결정을 굳힌 데스 크라운님이 만든 엘릭서이다. 엘릭서이기 이전에는 테러 나이트였고, 테러 나이트이기 이전에는 인간이었지. 그래서 복합적인 기운이 느껴질 거다. 세계수. 네가 지금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당연히 지금의 그는 까마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간대의 까마귀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세계수가 까마귀로 탈바꿈한 이 순간을 노렸다.
나락으로 떨어져 가장 약해져 있을 때 권유를 할 생각이었다.
약점을 찌르는 것.
그게 바로 오버 더 데스의 노림수다.
“그래서? 나에게 위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긴 무슨 일이지? 비련에 잠길 시간을 방해하면서까지 날 찾아온 이유는? 데스 크라운의 의지인가?”
그러자 까마귀의 예상과는 달리 흑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너의 앞에서 나를 노출 시킨 것은, 나의 의지다. 나는 네게 권유를 하러 왔다.”
“어떤 권유?”
“마검의 대리인이 되지 않겠나?”
세계수 처지에서는, 까마귀로 변하자마자 이런 제의를 받으니 황당했다.
“무슨 소리냐? 네가 오버 더 데스잖아. 왜 내가 네 자리를 대신해야 하지?”
“데스 크라운님은 홀리 크라운님처럼 선한 면만 있으신 게 아니지. 난폭한 부분도 있고 모든 걸 귀찮아하는 면도 있어. 책임감이 없다는 게 그분의 장점이지. 그분은 테러 나이트인 나를 엘릭서로 만드는 영광을 내려 주셨다. 하지만 나는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없다. 홀리 디스트로이어처럼 처음부터 빛으로서 빚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미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아니, 단언하건대 나는 그 오랜 세월을 견뎌내지 못해.”
“책임감이 없다는 게 장점이라고? 네 주인을 그렇게 욕해도 되나?”
까마귀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 척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오버 더 데스였다.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천사에 가깝다. 그녀는 분명 성검을 잘 관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데스 크라운님의 총애에 보답하지 못한다. 그건 내가 더 잘 알아.”
이게 바로 까마귀가 필요한 이유다.
북쪽의 세계수가 미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무려 세인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악에 침식되고도 그 정도나 버틴 것이다.
보통 생명체와 급이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세계수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잘 버틸 수가 있었다.
실제로 눈앞의 까마귀도 괴로워할지언정, 세인을 만날 때에도 뚜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비교해 지금의 오버 더 데스는 그 정도로 버틴다는 게 불가능하다.
그는 원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까마귀는 오버 더 데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의아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보고 네 자리를 대신해 달라는 거냐? 그럼 넌?”
그러자 흑기사가 낮게 웃었다.
“나는 나대로 안배를 만들어야지.”
그때 까마귀는 엘릭서인 상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힘도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 최강자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 낮게 웃으며 보여주고 있는 위압감도 어마어마했다.
‘왜 데스 크라운이 눈앞의 인물을 선택했는지 알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오버 더 데스가 물었다.
“어떠냐? 내 제의를 수락하겠나?”
“나로서는 한곳에 깊게 매이는 일이니 섣불리 결정할 수 없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흑기사는 팔짱을 끼었다.
“네 여동생은 악에 오염되었다. 그리고 네가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녀는 점점 타락할 거고, 언젠가는 끔찍한 악이 될 거야. 어쩌면 그녀야말로 최악의 테러로드가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 존귀함을 떠나 네가 남자라면 말이다.”
“….”
“냉정히 말해서 미안하지만 지금 그 모습으로 대체 뭘 할 거냐? 그러니 차라리 거대한 섭리 안에 있다면, 그녀를 그녀의 운명 안에서 구출은 못하더라도 깊게 위안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말이다. 최소한 지금 그 상태보다는 낫겠지. 안 그렇겠나? 자문해 보아라.”
“….”
“내겐 너처럼 높은 격에 올랐었던 존재가 필요하다. 세계수였던 너는 오랜 세월에도 쉽게 마모되진 않을 것이다. 최소한 인간이었고 테러 나이트였던 나보다는, 멀쩡히 오래 버틸 거야. 세상의 깊고 강력한 흐름 곁에 있고 싶지 않은가?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지? 어디로 가야 네 존귀함을 최소한이나마 보장받을 수 있겠나?”
그러자 까마귀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음성은 자포자기보다는 어떤 결심이 들어 있었다.
“존귀함 따윈 의식하지 않아. 조금 전에 그 존귀함에 걷어차였거든.”
까마귀의 승낙에 오버 더 데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검고 큰 손이 머리를 덮을 때까지 까마귀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깊은 숲속, 달빛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다.
곤충이 우는소리 하나 없어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서, 그렇게 까마귀는 원래의 주인 대신 마검 옆에 자리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후로 까마귀는 아주 긴 시간을 마검 옆에서 보냈다.
그러면서 자기의 임무에 대해서도 더욱 잘 깨닫게 되었다.
물론 원래의 정당한 주인인 오버 더 데스 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검의 사명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크고 작은 깨달음도 얻었다.
다만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홍수처럼 비가 쏟아지고 강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런 앎의 순간도 잠깐일 따름이었다.
까마귀도 너무 힘들었다.
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상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벌을 받았다.
그의 여동생은 계속 불행한 상태였다.
까마귀가 얻은 것을 생각해 보자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너무 괴로웠다.
마치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까마귀는 세인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세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랜만’이라고.
꿈에서 한차례 접촉을 한 후, 정식으로 만난 곳은 검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까마귀는 세인과 재회했고, 세인은 처음으로 까마귀를 대면했다.
이제 까마귀가 말한다.
“오래간만이다, 라이트닝 블러드. 너는 마검 오버 더 데스를 휘둘러야만 한다. 그것이 이 시대가 너에게 부여한 사명이다.”
“넌 누구냐.”
차가운 세인의 목소리에 까마귀가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지금 세인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여기에서 그 많은 이야기를 한들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방금 자살한 세인이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까마귀도 많이 변했다.
과거 품었던 확신은 점점 흐려지고, 시간의 형벌 속에서 박제된 시체로 존재하는 느낌이다.
앞으로 뭘 해야 하는 걸까?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어차피 자신은 지옥행이다.
세인을 순리대로 과거로 보내야 하나?
그러면 자신의 동생은?
그를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차라리 유미리가 실패하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좋은 것일까?
세상이 멸망한다면?
사명과 자의식 속에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까마귀가 비로소 대답한다.
“마검의 초자아다.”
그리고 세인이 더 캐묻기 전에 말을 이었다.
“소원을 말해라.”
“소원?”
까마귀는 오래전에 오버 더 데스에게 설명을 들었던 대로 답해주었다.
물론 적임자가 아니니 상대가 만족을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힘 써볼 생각이었다.
“너의 정당한 권리이다. 라이트닝 블러드. 계약에 따라 힘을 휘둘러야 하는 네가 받아야 할 선물이다. 소원을 말해라.”
“….”
그리고 세인은 소원을 빈다.
그 소원을 들은 까마귀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충고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다.
그가 바라본 세인은 너무나도 불안정해 보였다.
자살한 직후인 그는 충분히 맹목적이었고, 마음의 문을 열고 뭔가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까마귀도 그렇게 맹목적일 때가 있었다.
자신의 여동생이 관계되었을 때의 일이다.
결국 까마귀는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다.
까마귀는 세인을 언젠가 과거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오랜 세월 동안 시달려온 까마귀의 정체성은 원형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었다.
피폐함에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어쩌면 그도 여동생처럼 악의에 침식당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혼자 고민도 많이 해보았다.
그래도 결국, 까마귀는 세인과 함께 예정된 과거로 돌아오고야 만다.
‘테러로드가 세상이라는 호수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그들의 실존이 파괴된다면…. 그리하여 모두가 행복해진다면 나와 내 동생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그의 동생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지옥행이었다.
이러니 그가 악의를 품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테러로드가 사라진다면 누군가는 드디어 바라던 행복한 결말.
그리하여 ‘마침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까마귀는 아니었다.
그게 바로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은 까마귀가, 무겁게 고개를 숙이는 이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했던 존재.
오버 더 데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의 무거운 발은, 꿈을 꾸는 빈센트에게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