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 달라진 하늘 아래 (4)
빈센트는 시골에서 태어난 남자였다.
검은 머리인 그는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했고, 검에 대한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에 대한 꿈을 가졌다.
꿈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비웃음을 요구했다.
“포기해라. 넌 기사의 재목이 아니야. 실력이 형편없어.”
하지만 빈센트는 매일 노력했다.
기사에 한 걸음씩 다가가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거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보통의 방법으로 기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홀리 레이크로 향하게 된다.
‘성기사라면 가능성이 열릴지도 몰라.’
위험한 시대에 대륙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험난한 일이었다.
그걸 혼자의 몸으로, 그것도 형편없는 검술 실력을 갖춘 그가 해내려고 하니 매 순간이 위기였다.
하지만 빈센트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이 과정조차 수련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걸로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인정받는 일을 비롯해 수많은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 *
“잠시 옛날 꿈을 꾸었군.”
여관의 작고 허름한 방에서 빈센트의 중얼거림이 울려 퍼졌다.
생고생하던 과정을 꿈에서 되새겼던 빈센트가 상체를 일으키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성기사가 되었지만, 결과는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이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
“뭐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한 빈센트는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그러면서 얼굴에 묻어 있는 피곤함을 떨쳐내려는 듯이 말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커튼을 젖히고 이 층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만끽한다.
그리고 출출함을 느껴서 1층의 홀로 이동했다.
그런데 지금 막 점심시간인지라 일 층은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식기를 들고 선 채로 식사하는 용병을 힐끔 본 빈센트가 다시 이 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서서 먹고 싶은 생각까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가까운 곳에서 한자리가 났다.
빈센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테이블로 다가간 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며 합석을 부탁했다.
“실례지만 잠시 자리를 같이해도 될까요?”
작게 소곤거리고 있던 멜라니와 레드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빈센트를 잠시 바라보았다.
빈센트는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둘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연인의 시간을 방해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멜라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합석을 허락한다.
“무… 물론이죠. 승전의 소식 아래 모두가 친구잖아요. 더구나 저희도 여기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감사하다는 말을 건넨 빈센트가 착석하자 멜라니는 그런 그를 이리저리 뜯어 보았다.
그리고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착각인가? 대단한 우연도 다 있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린 그녀는 레드에게 다그쳤다.
지금 갑자기 나타난 빈센트가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할 거야? 할 거냐고?”
뭘 한다는 이야기일까?
빈센트는 음식을 주문한 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난 마음을 굳혔어.”
레드의 대답에 멜라니가 가슴을 쳤다.
“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네가 나설 일이 아냐. 뭘 어쩌려고 그래? 네 앞길이나 잘 챙겨야지! 끼어들 때 안 끼어들 때를 못 가리고 마구 나설 때야? 엉? 진짜 왜 그래? 언제나 곱게 못 죽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여기 관리들이 성질 더럽다고 소문이 자자해!”
짜증을 내던 멜라니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그건 레드도 마찬가지다.
너무 빤히 보면서 엿들었기 때문일까?
무안해진 빈센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점원이 가져다준 접시를 받아든다.
접시에 담긴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였다.
그때 멜라니가 뾰족하게 소리쳤다.
“이봐요! 우리가 먼저 주문했잖아요!”
그러자 점원이 연신 굽신대며 사과를 했다.
‘성질 더러운 아가씨군.’
거기에서 더 나아가려는 생각을 애써 자제하는 빈센트다.
어쨌든 그 성질 더러운 아가씨가 양보한 덕분에 자신이 앉아서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식사를 시작한 빈센트에게 레드가 술을 권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빈센트는 그 술잔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그리고 다시 건네주었다.
셋은 그렇게 같이 술도 마시고 식사도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잠깐 대화도 나누었다.
어디로 가냐는 레드의 질문에 빈센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목적지가 있긴 하지만 당분간 저의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그래서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레드는 애꿎은 술잔을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실례지만 형제가 있으십니까? 제가 아는 분을 닮은 것 같아서요.”
“아뇨.”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빈센트입니다.”
그런 그의 대답에 멜라니와 레드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둘 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이 되었다.
하긴 세상에 닮은 사람이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지나치게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빈센트 쪽에서 물어왔다.
“실례지만 저도 질문 하나를 해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혹시 크루세이더이십니까?”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레드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어쩐지… 성기사로서 당신 같은 분을 만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빈센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오자, 레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런 노출이 반갑지 않았지만, 그도 방법이 없었다.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빈센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세례명은 세인입니다.”
“푸흡! 컥! 컥!”
그때 멜라니가 마시던 물컵에 대고 물을 도로 뱉었다.
그리고 컥컥 소리를 냈다.
순간 멍해져 있던 레드는 멜라니의 급한 손짓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멜라니가 인상을 쓰며 그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는 레드였다.
물론 시선을 빈센트에게 고정한 채 말이다.
빈센트는 영문도 모르고 멜라니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멜라니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우연일까?’
그렇다면 지독히도 이상한 우연 같았다.
레드가 보기에 세례명을 세인이라고 밝힌 남자는 그가 알던 세인을 엄청나게 닮아 있었다.
그건 같이 앉아 있는 멜라니도 느낄 것이다.
세인의 음성, 얼굴, 몸집… 등 이상하리만치 비슷했다.
다른 것은 한쪽 팔이 사라진 상태와 분위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제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설사 형제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판에 찍어낸 듯 똑같을 수가 있나? 햇볕에 살이 탄 정도와 목이나 이마에 난 작은 상처 같은 것을 제외하면 너무 똑같은데.’
하지만 지금 더 살펴보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좋은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말한 레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기서 시간을 소모한다면 다른 이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 될 수도 있음이었다.
그래서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일어서는 그를 멜라니의 손이 잡았다.
“정말 갈 거야?”
“가야지. 그들에게는 죄가 없어.”
“휴, 나도 모르겠다. 넌 정말 고집불통이야.”
멜라니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며 레드를 말리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빈센트에게 눈인사를 건넨 레드는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리를 걷는데, 길은 여관의 1층 홀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다들 처형식을 구경하러 몰려나온 판이니까 말이다.
중앙대로가 이어지는 넓은 광장에는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높은 단상에는 처형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처형인과 도시 관리가 일을 진행했다.
“이 여자는 마녀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직접 나서서 처형을 주재하는 바입니다. 깨끗한 도시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저는! 앞으로도 이런 몬스터들의 찌꺼기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리란, 영주님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다!”
붉은 모자를 쓴 뚱뚱한 관리는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인파들 속에서 파묻힌 레드는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는 이 사형을 반대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기시감이 들었다.
‘뭐지? 이 기분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익숙한 장소, 익숙한 광경 안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은 순간 레드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가 그러는 와중에도 도시 관리의 외침은 주변을 흔들었다.
“감히 영주님의 뜻에 반하는 자! 이의를 제기할 자에게는 변호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재갈을 물린 이 더러운 마녀의 발언권을 대신할 이가 있다면 어서 나서시고, 아니라면 영원히 입을 다무십시오.”
그때 관리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드가 손을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고, 레드 주변의 사람들은 그에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으음… 앞으로 나오십시오!”
관리의 말에 따라 레드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수군대는 말소리가 그런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정녕 이들을 위해 변호하시려는 것입니까?”
처형대 앞으로 다가간 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관리가 손가락질하는 젬과 젠을 바라보며 자기 생각을 말했다.
“우리와 겉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몬스터라고 말한다면, 간신히 이룩한 이 평화의 값어치가 바닥을 뒹굴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마녀라는 주장의 근거는 뭐죠? 저는 아까 여기에서 저 자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들이 무슨 죄를 지었나요?”
레드의 말 앞에서 관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 대체 무슨 수작이야? 저 여자들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영주님의 뜻에 거역할 셈인가? 당신 여기 사는 사람 맞아?”
관리가 윽박지르듯이 하는 말에 레드가 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었다.
지금까지 영지민이 다 알면서도 함구했던 그 말.
감히 아무도 입에 담을 수 없었던 말이었다.
“저들이 정말로 마녀나 몬스터와 붙어먹는 사람이라면, 왜 여기의 영주님은 저 여자들과 밤을 보내려고 했던 거요? 여기 영주님은 몬스터와 동침하는 버릇이 있나? 또 그걸 거절한 게 죄인가? 이렇게 처형을 시킬 만큼?”
“감히!”
관리가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도 큰 동요가 일었다.
병사들이 창대를 들어 바닥을 찍는 가운데, 멀리에서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던 멜라니가 투덜거렸다.
“야! 이 미친… 레드! 너무 나갔잖아. 뒷감당을 어쩌려고 저래? 진짜 죽지 못해서 안달이야. 쟤는 진짜 미쳤어. 어차피 막가는 인생이라 이거야? 너무 험하게 몸을 굴린다고.”
안 그래도 관리는 레드를 귀족 모독죄로 당장 처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시체가 한 구 더 늘어날 판이다.
관리의 턱짓을 받은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레드의 손이 검에 얹어졌을 때였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하는 인물이 있었다.
“잠깐!”
그는 바로 빈센트였다.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음성에 실린 힘만으로도 관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평생 윗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관찰을 일상화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빈센트의 표정이나 분위기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버렸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손을 들어 올려 레드를 에워싸는 병사들을 저지한다.
“귀하는 또 누구시오?”
관리의 말에 빈센트는 자신의 품을 뒤적여 작은 사각형의 철판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관리의 앞에 적선하듯이 던져 주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한 관리가 입술을 씹었지만, 먼저 물어본 쪽은 바로 그 자신이다.
결국 처형인을 시켜 그걸 주워 오도록 하는 관리였다.
“대체 무슨 신분이길래….”
그렇게 중얼거리던 관리는 신분 패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알을 요란하게 굴렸다.
척 봐도 상황이 난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관리가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이 처형은 영주의 뜻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 영주의 체면이 정통으로 구겨진 셈이다.
여기에서 관리가 물러선다면 어떤 후폭풍이 그를 휩쓸지 몰랐다.
“저기… 귀하의 신분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이곳은 귀하와 상관없는 곳 아닙니까? 군부의 중요인물이란 건 충분히 알겠고, 대단한 분이시지만 여긴 다른 귀족의 통치를 받는 지역입니다. 무슨 권리로 끼어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법적으로도 귀하가 이 처형을 막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한풀 꺾인 관리의 볼멘소리 앞에서 빈센트가 대꾸했다.
“물론 내게는 권리가 없다. 정당한 명분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나를 무시한다면 뒷감당을 해야 할 거다. 여기서 분명히 말하건대. 내 체면을 구겨버린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
관리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치졸하게 굴겠다는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다들 이런 얼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