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 달라진 하늘 아래 (3)
그 후로 스톰은 여러 가지 연구를 했다.
시간이 오래 흐르는 도중에 그의 정신이 멀쩡히 유지되었다면 거짓말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육체에 한가지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스톰도 육체라는 허물을 벗고 환생해야 하는데 계속 코볼트 상태였으니 정신이 성할 리가 없다.
그러나 최소한 가미긴의 예상대로 스톰이 미치광이가 되는 일은 없었다.
비록 긴 시간 도중에 많은 기억을 잃고 성격이 더 난폭해졌어도 말이다.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도 있었지만, 몬스터와 완전히 동화되진 않았다.
그건 가미긴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연구 전체를 몬스터와 공유하지 않았다.
스톰은 숨길 것은 숨겨 가면서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때론, 몰래 이노센트들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영혼을 마정석에서 해방해 환생의 순환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스톰은 코볼트의 몸인 데다가 몬스터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몬스터의 왕이라고 부르는 권력자들과 스톰이 거래하기도 하니, 괴물들은 그를 당연히 아군으로 여겼다.
또 그런 스톰이기에 아레이즈의 세인을 공격했던 군단장처럼 의심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스톰은 실속을 차린 것이다.
결국 그는 세인에게 퀘스트를 주는 기행을 벌이다가 먼 곳으로 훌쩍 떠나게 된다.
자기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중에 세리스도 만나고, 할 일을 마친 스톰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 전에 트렌트 왕과도 이야기를 마친 후였다.
트렌트 왕은 스톰과 헤어지기 직전에, 자신도 곧 뒤따라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스톰은 죽어서도 그를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환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코볼트의 몸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거야 맥그리거가 환생에 대한 것을 몰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맥그리거 입장에서는 죽어가는 친구를 살린 것이다.
훗날 스톰은 환생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맥그리거가 한 일이 결국은 자신을 망쳐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맥그리거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건 당연하다.
맥그리거는 그저 스톰에게 선의를 베푼 것이었다.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스톰은 환생을 거부한 죄인에다가 살아오며 난리를 친 괘씸한 놈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의 운명을 비틀기도 했다.
세인에게 미래를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세리스에게는 성검을 전달하는 오지랖을 부리기도 했다.
너무 멋대로 살아온 스톰이 지옥에 갈 확률은 반반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반 이상인 것 같았다.
“좋은 일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난리도 많이 쳤으니까 좁은 별에 갇히게 될까?”
스톰은 자신이 벌을 받아 별에 갇히게 되더라도 아쉬운 건 없다고 생각했다.
계곡 안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충분히 멋대로 살았노라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했다.
시원한 계류 속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
저 생명도 환생을 할까?
그렇다면 어떤 구조일까?
아니면 환생을 하지 않는 허구적인 존재인가?
투명하고 차가운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던 스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순간에도 나는 호기심을 못 버리는군. 한번 마법사는 죽을 때까지 마법사라니까. 그런 면에서는 맥그리거가 이상한 놈이긴 하지. 어떡하면 저런 식으로 평범하게 살 수 있지? 참 괴상한 놈이야. 마법사는 다시 태어나도 마법사일 것 같은데 말이야.”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는 많은 영혼을 해방했다.
마지, 그의 자식들, 필립스, 바르보사, 바이테스의 황제 외에도 그가 해방해 본 궤도에 올려놓은 영혼들은 수없이 많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마정석은 환생의 여과기 역할도 했던 것 같았다.
물론 그 안에 갇혔던 영혼들에게는 끔찍한 소리일 테지만 말이다.
반대로 미친 짓도 많이 했다.
그는 드래곤이 유고의 유물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코볼트 상태로 너무 오래 살았다.
세상의 법칙에 상관하지 않고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
부서져 가는 기억들이 때로는 그를 발광하게도 만들었다.
코볼트 스톰은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계곡 사이로 떨어지는 해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실컷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나는 좋은 놈도 아니야. 나쁜 놈이지. 그러니 후회되지도 않고 무섭지 않아. 악행에 대한 당연한 벌을 받는 거다. 다만 별에 갇히면 그 친구는 이제 못 보겠군.”
맥그리거를 입에 올린 스톰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미스틸 테인도.”
맥그리거와 그의 가족에게 잔인한 형벌을 내렸던 영주는 스톰에게 죽임을 당했다.
맥그리거의 인생이기 때문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영주가 영지를 탈출한 맥그리거에게 별도로 추격대를 보낸 것이었다.
영주도 참 깐깐하다고나 할까?
적당히 좀 하지.
너무 꽉 막히고 지독한 놈이었다.
맥그리거를 생각해 준답시고, 그가 살아가면서 떠안아야 할 고뇌를 터치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그게 스톰의 평소 지론이었다.
그건 맥그리거의 인생이고 책임이다.
또 그걸 견뎌내야 그가 성숙해지고 또 다른 자신을 세공할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어지간하면 도와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추격대가 출발하고 나니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결국 스톰이 나섰다.
아주 가뿐하게 추격대를 몰살시킨 스톰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영주의 성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벌벌 떠는 영주 앞에서 그의 가족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영주의 아들을 죽지도 살지도 못한 꼴로 만든 채 영주에게 던져 놨다.
그리고 쌀쌀하게 말했다.
“죽일 거냐? 살릴 거냐? 선택해봐라.”
맥그리거의 가족을 죽인 영주의 가치관대로라면 그의 아들을 죽여서는 안 되었다.
어떤 경우라도 살인은 용납이 안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영주의 아들은 죽는 게 오히려 나은 상태였다.
스톰은 고뇌에 몸부림치는 영주의 모습을 즐겼다.
결국, 영주가 직접 단검을 사용해 아들의 고통을 해방시켰다.
스톰이 한 다음 행동은 영주의 한쪽 팔을 자른 일이다.
팔이 잘리고 울부짖는 영주 앞에서 스톰이 히죽 웃었다.
“아프냐?”
결국 영주는 비처럼 쏟아지는 조롱 속에서 죽어갔다.
그런 그를 끝까지 잔인하게 짓밟는 스톰이었다.
스톰은 그 후에 마법의 거울을 이용했는데, 세인이 미스틸 테인을 트리엔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맥그리거가 정착하는 것까지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흡족한 듯이 말이다.
그는 정말로 안심했다.
“세인. 역시 내가 인정한 남자야.”
* * *
가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스톰에게 있어서 딱 두 친구가 그런 의미였다.
이노센트든 뭐든 시간이 지나자 아무래도 좋게 되어 버렸다.
망각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두 친구만큼은 언제나 기억하고 싶었다.
그들을 잊는다면 곧 친구를 잃는 것이니까 말이다.
설령 그 친구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기억할 수 없다 해도 좋았다.
“만족한다. 실컷 놀았다.”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말한 이름은 두 개였다.
“안녕. 맥그리거, 미스틸 테인. 행복하게 살아라.”
태양이 계곡 위로 완전히 떠올랐을 때 스톰은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싸늘한 한 구의 시체만이 외롭게 계곡에 남겨졌다.
* * *
“뭐야 이건? 갑자기 웬 창이야?”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던 어느 날 스톰은, 세로로 꽂혀 있는 창을 발견했다.
그 창은 미스틸 테인이었다.
미스틸 테인은 평소 그의 소원대로 숲속의 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리스는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범인의 기준에서 매우 강력한 창을 포기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다못해 부하들에게 내려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미스틸 테인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미스틸 테인.
아마 그는 여기에서 그의 운명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운명은 스톰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창에게 손을 가져다 댄 스톰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뭐? 인간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미스틸 테인을 뽑아 든 스톰은 숲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어가는 스톰에게 미스틸 테인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수다 속에는 언제나 빠지지 않는 줄거리도 포함되어 있었고 말이다.
“검은 눈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몸은 호리호리하며 피부는 희고, 옷차림은 산뜻하며 허리에는 붉은 천을 둘렀다고? 게다가 그녀는 사뿐사뿐 걸으며 잘 웃어준다고?”
미스틸 테인의 말을 되풀이한 코볼트 스톰은 멍한 표정으로 뒷이야기를 덧붙였다.
“창치고 이상형이 상당히 구체적인 거 아니냐? 심각하게 재수 없어.”
더럽게 구체적인 이상형을 가지고 있는 것만 빼면 미스틸 테인은 스톰과 잘 통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스톰은 많이 외로운 상태였다.
긴 시간 동안 미스틸 테인은 스톰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스톰은 그와 수다를 떨며 자신의 정신을 꽤 오랫동안 정상적으로 보존할 수가 있었다.
만약 미스틸 테인이 없었다면 그는 훨씬 빨리 정신의 한 부분이 망가졌을 것이다.
더 시간이 흐르자 스톰은 미스틸 테인을 위해 큰 결심을 했다.
그건 바로 그를 인간으로 되돌려 주는 일이다.
외롭지 않겠냐고 묻는 미스틸 테인 앞에서 스톰은 이렇게 말했다.
“친구. 나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어. 고아인 나에게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냉대와 무관심뿐이었지. 가끔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지 않기를 잘한 것 같아. 그건 맥그리거에게도, 미스틸 테인 너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니까.”
미스틸 테인을 인간으로 돌리기 전, 마지막으로 창을 쓰다듬는 스톰이었다.
“나를 잊어도 좋아. 친구로서 맥그리거처럼 나를 잊고 살아도 좋아. 단지 행복하게 살아줘. 인생은 힘들더군. 때론 폭풍이 찾아오고 오열을 낳기도 해. 하지만 나 코볼트 스톰의 친구로서 충실하게 살아줘. 네 이름에 맞게, 너로서 열심히 살아줘. 그렇다면 나는 너무 기쁠 것 같다.”
그게 바로 코볼트 스톰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스톰은 선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친구를 아낄 줄은 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미스틸 테인 앞에서 윙크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참 네 이상형도 꼭 만나기를 바란다.”
미스틸 테인은 그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앞으로, 홀로 길고 긴 외로움을 버텨야 하는 스톰이 불쌍해서였다.
그렇게 미스틸 테인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간 후 자신의 삶을 살았다.
환생을 거듭하며 여러 인생을 경험한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친구를 잊었다.
가끔 아주 멀리에서 스톰이 미스틸 테인을 지켜보는 일도 있었지만, 당연히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이상하게 위기를 피해가고, 일이 잘 풀릴 때면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배반도 당하고 좌절도 당했다.
하지만 언제나 꿋꿋이 일어나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운명 안에서 다시 세리스를 만나고,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사방에 불을 질러 놓고, 질식하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는 게 말이 되나요? 귀족 이전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인간답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 소리가 왠지 모르게 미스틸 테인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묘한 울림과 함께 말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기회를 잡았다면.
* * *
미스틸 테인은 그날을 계기로 변하게 된다.
세리스의 말에서 충격을 받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고집하던 편견을 버리고 조국과 자신을 위해 노력했다.
미스틸 테인이라는 이름에 책임을 지려 안간힘을 썼다는 말이다.
그런 분투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그는 어느 날 마법처럼 자신의 이상형과 마주친다.
글리터에서도 인정받아 점차 중요인물로 주목받던 미스틸 테인은, 주점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어떤 여자를 보게 되었다.
상대는 검은 눈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이다.
몸은 호리호리하며 피부는 희고, 옷차림은 산뜻하며 허리에는 붉은 천을 두른 그녀가 미스틸 테인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상대의 웃음을 보자마자 망치를 맞은 듯한 충격으로 인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바보처럼 매혹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여자 쪽에서 먼저 다가오기 전까지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성이 사뿐사뿐 걸어와 미스틸 테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활짝 웃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라온이라고 합니다.”
“예… 저의 이름은….”
얼굴을 붉힌 미스틸 테인 앞에서 라온이 입을 손으로 가리고 다시 웃었다.
듣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소리였다.
“알고 있어요. 미스틸 테인 님이시죠? 유명인이시잖아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같이 차나 한잔할래요? 미스틸 테인님?”
밝고 티 없는 라온의 웃음 앞에서 미스틸 테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날, 미스틸 테인조차 알지 못하던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