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 달라진 하늘 아래 (2)
세계수 지역 중 아주 깊은 곳, 꽤 으스스한 장소가 있었다.
넓은 분지 형태의 지역이었는데 안을 채운 것들은 끔찍한 형태의 조각상들이었다.
인간을 닮은 광석들이 벽과 바닥에 엉겨 붙어 있었다.
절규하는 듯한 모습의 돌은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걸 보고 있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두꺼운 갈색의 로브를 걸친 코볼트는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이, 지나치게 영혼이 결집한 마정석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이렇게 크고 흉악하다니.”
코볼스 스톰은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리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본디 인간이었으나 친구인 맥그리거의 연구로 인해 코볼트의 몸 안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만든 맥그리거를 저주하진 않았다.
왜냐면 코볼트 몸으로 들어가기 전, 인간의 몸이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코볼트의 몸 안에서 깨어난 이후 스톰은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라이프 베슬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코볼트의 몸에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다.
인간이었을 때 상처를 많이 받아서였을까?
그걸 고려해도 그는 괴짜임이 분명했다.
“불쌍한 놈들.”
코볼스 스톰은 눈앞의 마정석에서 손을 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마정석 투성이였다.
환생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군상들이 스톰의 눈에 보였다.
스톰은 분지 내부를 돌아다녔다.
한참을 걷고,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마정석은 계속 나타났다.
끝이 없었다.
그는 비극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늘 위에 달과 별이 빛나고 있을 때 스톰이 멈춰 섰다.
그는 천천히 후드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나오시지.”
그런데 반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스톰은 큰 한숨을 쉬며 소리를 쳤다.
“나오라고!”
그러자 크게 솟아나 있는 마정석 쪽에서 반응이 있었다.
그 마정석은 인간들의 혼과 다른 영혼의 찌꺼기가 엉겨 붙어 나무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뒤에서 커다란 뭔가가 나타난 것이다.
뱀의 머리를 하고 있는 그는 바로 가미긴이라는 존재였다.
상체는 인간과 비슷했는데, 네 개의 팔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하체는 여지없이 뱀이었다.
“어떻게 알아차렸지?”
“내가 보통 마법사처럼 보여?”
가미긴은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흥겹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마음에 들어. 대단하구나. 너를 발견했을 때부터 난 네가 탐이 난다. 어떠냐?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나?”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놓은 가미긴 앞에서 코볼트 스톰은 입맛을 다셨다.
“내가 왜 너 같은 놈들이랑 함께 할 거로 생각해?”
스톰이 까칠하게 나왔지만, 그것마저도 마음에 드는 가미긴이었다.
그는 능력 있는 존재가 건방지게 구는 것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세리스와 함께 있는 솔로몬의 경우에는, 능력도 안 되는 게 거만을 떨다가 훗날 가미긴에게 된통 당하는 케이스였다.
“이봐 스톰.”
“이것 봐라? 내 이름까지 알고 있네?”
“너는 분명 대단한 마법사다. 앞으로도 엄청나게 발전하겠지. 낯선 몸 안에 들어갔는데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네 정신력을 높이 산다. 그런데 말이야. 네 겉모습은 몬스터잖아. 여기를 떠나면 어디 가서 살려고?”
“….”
잠시 말문이 막힌 스톰 앞에서 가미긴이 빙그레 웃었다.
“굳이 인간 사회에 돌아갈 필요가 있나? 네 유일한 친구인 맥그리거는 죽었지? 넌 외톨이야, 스톰. 오, 마법사 스톰. 난 네가 여기 왜 있는지도 안다. 말해 볼까?”
스톰은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미긴은 그런 그의 앞에서 연극배우처럼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이것들을 구원해 주고 싶겠지? 넌 사실 속정이 깊은 녀석이니까 말이다. 맥그리거가 남긴 일기를 읽어 보았다. 난 그 안의 너를 파악했지. 너는 이노센트가 한 짓에 치를 떨면서도 그들에 의해 망가진 영혼들을 복구해주고 싶어 해. 마정석에 남은 잔재들을, 다시 환생할 수 있는 혼으로 정화하고 싶지?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노센트의 품으로 들어가야만 할걸?”
스톰은 신경전을 벌이는 대신 본론을 꺼냈다.
“너희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뭔데?”
가미긴의 웃음이 짙어졌다.
거의 다 넘어온 것이다.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지원도 해주겠다. 대신 너의 마법적 능력을 우리를 위해 써다오.”
가령 예를 들면 마왕 유고의 유물에 대한 연구 같은 것이었다.
그걸 연구하려면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가 필요한데, 지금 몬스터들에게 있어 그런 존재를 찾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몸을 숨기고 있는 이노센트들은 본디 천사다.
그러니 마법에 소양이 있을 리도 없었다.
가미긴은 훗날 드래곤에게도 찾아 가볼 생각이었지만, 눈앞의 스톰만큼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가미긴이 찾아가는 드래곤은 세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운명이다.
“내가 하는 걸 너희가 방해할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가미긴이 마정석을 손으로 쳐보였다.
“뭐? 농담해? 이런 것들에게 우리가 신경이나 쓰는 줄 알아? 우리에게 이건 좀 쓸만한 물건, 이하도 이상도 아니야. 너는 열심히 영혼들을 구제하겠지만 거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안다. 네가 평생을 바친다 해도 과연 세상의 마정석들을 다 구원할 수 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지. 스톰 너의 마법적 능력을 우리를 위해 써다오. 어차피 너도 인간들에게 상처받은 영혼이지 않나? 정녕 그들의 사회가 그립나? 아니지? 그렇지?”
갈등하는 스톰 앞에서 가미긴은 쐐기를 박았다.
그 쐐기란 마법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일이었다.
“네가 수락한다면 이노센트들에 대한 궁금증도 해소해 주겠다. 어떠냐? 태초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으냐? 네가 네 거처를 정하기만 하면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을 텐데?”
가미긴의 말을 들은 스톰은 한 시간 동안 고민했다.
그 후에는 옆으로 누워있는 마정석 위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가미긴은 반색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이미 스톰이 반 정도 승낙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태초에 이노센트들이 있었다. 우리는 신을 본 적이 없으니 시작의 의미로서는 그들이 바로 신이지.”
“신은 없고 천사들만 있었다고?”
스톰 입장에서는 천사들이 신을 모셨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이었다.
스톰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며 가미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미긴은 스톰을 안다.
이런 선물을 받으면 분명 갚아주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판단하기로, 스톰이 몬스터들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 이런 폭로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까마득한 시간은 망각이란 대가를 요구하니까.
그래서 마음 놓고 떠들어 댔다.
“왜 꼭 천사들이 신을 모실 거라고 생각해? 그건 고정 관념이야. 태초에는 그냥 천사들만 있었어. 그들도 자신의 첫 시작이 뭐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해. 어쩌면 외로움을 느낀 천사가 동료들을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가미긴은 그러면서 데스 크라운과 홀리 크라운을 떠올렸지만, 그것까지 말해주진 않았다.
“천사들은 한곳에 모여 살았어. 하지만 너무 싱거운 상태였지. 지금에 비하면 자극적인 것도 없었고, 할 것도 없었거든. 그런데 누군가가 그런 부족함을 느꼈는지 시간을 만들어 버린 거야.”
“시간.”
“그래. 시간을 만드는 바람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 그때부터야. 처음과 끝이 생겨난 것은 말이야. 천사들은 기뻐했어.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보는 쪽과 찾았다고 보는 부류 등으로 갈렸지.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어. 중요한 건 다시 발견되는 수많은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끝이 생겼다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어. 즐거움이 증폭되면 그만큼 괴로움도 크게 느껴지지.”
하지만 천사들은 루시드를 원망하진 않았다.
루시드는 높은 자리에 있었고 천사들에게 선물을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시드가 천사들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시간을 인지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사랑 때문에 루시드가 시간을 인지했지만, 천사들은 그게 천사 모두를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어느 날 인간이 나타났어. 이종족들도 말이지. 분명 누군가가 생각한 거야. 혹은 대놓고 남몰래 만들었을까? 그건 그 당시에도 살아있던 천사들이나 알겠지.”
가미긴만 해도 루시드에 비하면 까마득하게 아랫세대다.
루시드가 존재하던 세대의 천사들은 다 영면에 들었다.
그 자손의 자손, 다시 그 자손의 자손들이 낳은 게 가미긴 세대였다.
스톰에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가미긴은 이즈음에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어쩌면 위 세대 중에 정체를 숨긴 신이 있었을지도 몰라.’
진짜 그렇게 의심도 해봤다.
하지만 가미긴으로서는 누군가에게 그걸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가 물어보려 한다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루시드나 닉스뿐이었다.
이노센트들의 기준으로 가미긴의 위치도 낮지 않지만, 그들에 비하면 땅과 하늘 차이였다.
가미긴 입장에서는 루시드의 얼굴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질문을 던질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인간들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냥 하등 생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오래 지켜보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인간들은 환생을 했다.
그게 충격적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천사들은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시간이 생겨난 것은 긍정적인 의미만 포함하지 않았다.
종말과 불행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즐거움도 많으니 그럭저럭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시스템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들은 영원히 사는 거야. 자신들을 세탁하면서 말이지. 언제 더러워졌냐는 듯이 깨끗하고 하얀 옷감이 되어 바람에 불안을 말리지. 빨랫줄 아래에서 신이 주신 햇살을 만끽하면서 말이야. 이거야말로 불평등이 아니고 뭐지? 누굴까? 대체 누가 인간들을 만든 걸까? 당연히 화가 나지 않겠어? 그래서 가끔 고약한 녀석들이 떠들어 댔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어도 우리의 인자하신 분은 화를 내지 않았어.”
“….”
“별의 자리에 앉은 그분은 천사들이 배은망덕한 말을 해도 용서했던 거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들도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용서를 빌었지.”
루시드는 인간을 몰래 만들고 천사들을 모른 체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루시드를 힐난했던 자들은 죄를 뉘우치며 죽음으로 무례를 갚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루시드는 그런 자들조차 말리며 용서를 다시 베풀어 주었다.
천사들 모두가 루시드의 인자함에 감격했던 것은 물론이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대체 누가 인간들을 만들었을까?
신은 정말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우연의 산물인가?
천사들도 인간들 같은 시스템을 가질 수 있을까?
“그래서 몬스터가 만들어졌다. 천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피조물을 만들어 본 거지. 하지만 몬스터들은 인간처럼 환생하는 게 쉽지 않았어. 직접 만들어 보니 어림도 없었거든. 그렇다면 어쩌지? 이미 있는 걸 개조해보는 수밖에.”
“….”
“거기에서 더 나아가 마족이 만들어졌지. 라이프 베슬을 통해 인간에게 천사가 올라탈 수 있는지 시험해 본 거야. 영혼을 추출해서 옮길 수 있다면 영혼이 떠난 인간은 빈 좌석이나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거기에 천사가 올라타는 거지. 그렇다면 인간에 편승해 천사도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돼.”
가미긴의 말을 듣는 스톰은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저런 말을 듣고 용서할 수 없다는 정의감에 치를 떠는 것보다,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솟아나는 호기심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쩝.”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천생 마법사였다.
때론 상식이나 도덕보다 탐구를 우선시하는 학자 말이다.
땅이 둥글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게 어떤 혼란을 주는지 알면서도 주장하고야 마는 학자.
“하지만 쉽지 않았어. 아니 불가능했어. 이건 승마가 아니야. 말에 올라타는 일 정도가 아니라고. 삶과 죽음이 연결된 문제지. 어쩌면 인간들은 우연의 산물인지도 몰라. 시간이 생겨나니, 그 시간을 받아들인 세상이 자연스럽게 그에 맞춘 자식을 내놓은 거지. 뭐 그것에 대해서는 천사들도 의견이 분분해. 인간들에게 무한한 증오와 질투를 느끼는 천사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문제도 있어.”
“뭐지?”
“천사들은 마음만 먹으면 오래 육체를 유지할 수 있어. 하지만 이게 문제란 거지.”
가미긴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겨 보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새가 갑자기 물고기 신세가 된 거야. 호수 속에 있는 우리들은 새였을 때의 능력이 있어서 오래 육체를 지탱할 수는 있어. 문제는 물에 익숙해진 다음이지. 이미 호수의 시간을 받아들였어. 능력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사. 새인데, 물고기처럼 살게 된 거야. 뇌와 마음에 새로운 호흡기관이 생기고, 살기 위해 마음에 아가미를 달았어. 이상한 생명체지? 오래 살려면 살 수 있지만 결국 미치광이가 되는 거야. 죽지 않는다면 말이야.”
가미긴은 스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을 끝마쳤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이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 같아. 그게 가능했다면 방관만 했을 리가 없겠지.”
닉스는 질투를 느끼는 부류였는데, 있는지도 모를 신을 증오하고 인간을 혐오했다.
루시드의 위치에서 닉스를 말리려 했다면 얼마든지 말릴 수 있었다.
닉스보다 높은 자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루시드는 닉스의 분노와 원한을 존중해 주었다.
어쩌면 시간을 인지해버린 루시드의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천사들은 이렇듯, 그들의 사정을 최우선으로 헤아려 주는 루시드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루시드는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노센트들을 자기 멋대로 휘두르지 않았다.
그들의 자율성과 분노를 헤아려 주었다.
그러니 이노센트들이 날뛰면서도 루시드를 마음 깊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종족들도 환생을 하잖아? 그런데 왜 분노가 인간들에게 집중된 거지?”
스톰의 질문에 가미긴은 딱 잘라 말했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놈들은 한계가 있어. 보통 인간들보다 오래 사는 대신 영원히 환생하진 못해. 능동성이 몬스터를 만들었고, 범용성이 인간 개조를 희망했다면 이종족은 실패작 취급인 거지. 연구 가치가 없잖아.”
가미긴은 그 이후로도 스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치니 아침이 밝아 왔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스톰은 몬스터와 합류하기로 한다.
그런 스톰의 결심에, 가미긴은 웃으면서 환영한다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