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 달라진 하늘 아래 (1)
피의 저주는 왕가에서 탄생하였다.
따돌림을 당하던 왕족이 그 원한으로 흑마법사가 되고, 그가 발명해낸 저주가 사촌을 암살하는 데 쓰였던 것이다.
물론 왕가는 발칵 뒤집어졌고 범인을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는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피의 저주는 자신의 피를 기반으로 같은 핏줄에게 해를 입히는 방식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 흑마법사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피의 저주에 대한 대가였다.
그 흑마법사는 따돌림당할 때 어지간히도 당했었나 보다.
목숨을 바쳐 저주할 정도면.
그런 현상이 지금의 유미리에게도 벌어지고 있었다.
“우웩!”
유미리는 피를 한 모금 뱉었다.
핏줄기가 입가를 타고 흘렀지만, 그녀는 소매로 자신의 입을 닦지 않았다.
이미 내부는 엉망이었고 눈은 점점 시력을 잃기 시작한다.
닉스가 죽어버린 곳에서 같이 죽기 싫었던 그녀는 등을 돌리고 걸었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뒤에서 닉스가 악취를 풍기며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유고의 몸을 빼앗은 천사가 그 육신으로 말미암아 파멸한 모습이었다.
유미리의 몸에서는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걷던 그녀는 거대한 구덩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끝인가?’
이 정도면 만족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는 유미리다.
그런 상태에서 옆으로 픽하고 쓰러지는 그녀였다.
유미리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점점 거세어졌다.
머리 부분에 있던 뿔이 빠져서 구덩이 밑으로 떨어지고, 얼굴 반쪽이 날아가며 초록색의 눈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목 밑도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세상을 구했지만 그런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지옥뿐이었다.
거대한 별 안에서 홀로 영원히 살아가는 일.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일지는 앞으로 충분히 느끼게 될 것이다.
유미리의 한쪽 눈이 스르륵 하고 감길 때, 그런 그녀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그때 그녀의 한쪽 눈에 상이 하나 맺힌다.
그림자는 한동안 그녀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 그림자를 향해 유미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하늘은? 바뀌었나요?”
그림자의 주인공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이다.
하늘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려면 한참 남았다.
그렇게 쉽게 변할 하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유미리를 위해 거짓말을 했다.
“그래.”
그러자 유미리의 입술이 작은 웃음을 만들었다.
그녀는 아주 잠시지만 전과 다른 하늘 아래에 있을 세인을 생각했다.
그러니 비로소 자신의 희생이 가치 있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런 그녀의 한쪽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굴러떨어진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는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 * *
격전의 장소는 후일 숲으로 뒤덮이게 된다.
세계수는 결국 유미리 덕분에 해방되었다.
하지만 이미 악에 오염된 상태였다.
루시드가 그녀에게 벌인 일도 남아 있었다.
그 일은 최후까지 남아 세계수를 재정립할 것이다.
루시드가 세계수에게 원한 것은 아마 종결자였을 것이다.
이노센트의 악순환을 끝낼 종결자 말이다.
이노센트들에게 학대를 당했으니 세계수의 원한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그도 먼 미래에 세계수의 증오가 세상 전체를 파괴할 줄 몰랐을 것이다.
까마귀는 타락한 자신을 차마 그녀에게 공개할 수 없었다.
세상은 구원받았지만, 오누이의 불행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 * *
세리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분명 그녀 자신은 흘러가는 전체 상황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최후의 테러로드인 닉스가 왜 자취를 감췄는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소환 물질에 섣불리 손대다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도 세워 보았다.
그래 봤자 의미 없는 게, 증명할 길이 없는 가설이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들의 도시로 돌아가며, 전 세계에 이노센트의 정체가 폭로되지 않았음 안도하고 만족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이노센트의 실체를 고발하는 문서를 없애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다시 일어서려는 자들에게 믿음마저 빼앗는다는 것은 가혹한 일입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수많은 전우가 동의했다.
그런 그들은 후세에게 있어 진실을 왜곡한 역사의 죄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수많은 생명이 그들의 희생 때문에 살아남았다.
과연 그들을 신랄하게 욕할 수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이런 생각을 역사학자들도 한 것 같다.
진통도 수반했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이노센트의 정체는 완벽히 은폐되었다.
세리스는 교황에게 돌아가 승전에 대한 보고를 마쳤다.
그리고 크루세이더가 되고 싶다고 간청한다.
모든 몬스터의 정체가 천사인 것도 아니었고, 아직 세상의 모든 몬스터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어둠 속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싶어 했다.
남은 악을 소탕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나의 딸 세리스. 난 너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
그러나 교황은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지금의 인간들에게는 믿음과 희망이 필요하다. 너는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 그러니 이제 희망을 주어야 할 때다. 빛의 성녀 세리스. 네가 양지에 드러나 있음으로써 넌 그것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제발 간청 드립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교황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세리스. 인류를 위해 다시 네 이름과 시간을 빌려다오.”
세리스는 교황의 무거운 음성 앞에서 계속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교황의 뜻대로, 그녀는 상처 입은 인간들의 희망이 되어 주었다.
그런 희망은 시간이 흘러 인간 역사 속의 자존심이 되었다.
그리고 종이 다른 존재들에게도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인간 진영에서는 세계수 쪽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뿌리째 뽑아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다시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 모두에게 있어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미 죽기 살기로 싸웠고, 땅 위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누구도 다시 희생을 강요할 수 없었다.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사실 비밀을 알고 있는 각국의 왕들은, 공개적으로 세계수 속까지 뒤지고 싶진 않았다.
분명 남아 있는 천사들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토벌 중에 애써 묻었던 진실이 다시 드러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백성들이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게 되면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걱정해야만 했다.
몇몇 현명한 왕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천사들을 추적하고 말살하는 계획을 세울 뿐이었다.
모두가 함구하는 가운데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세계수 근처로 모여든 몬스터들은 세계수의 밑에서 철저히 눈치를 보며 살았다.
불완전한 그녀의 힘은 그들에게 있어 고통이자 안식처였다.
왕들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들.
이노센트들은 긴 세월 동안 자신들이 누군지 잊었다.
그리고 몬스터와 섞였다.
테러로드가 없는 이상 천사들은 자신들을 온전히 유지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천사들의 피는 결국 혼탁해지고 옅어져 변질되었다.
세인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뿌리를 잊어버리게 된다.
* * *
햇볕이 따스한 어느 날.
세리스는 상아 장식이 된 의자에 앉아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땋아서 뒤로 넘긴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러 사람을 거느리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인 위엄이었다.
“은장미 기사단 단장만이 참석하지 못했다라….”
성기사들이 그녀가 있는 도시로 모여들고 있는 가운데, 단장이 빠진 기사단 목록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연회와 더불어 군사 체계 개편을 노리는 세리스로서는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 보통 기사단이었으면 눈 밖에 나도 벌써 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기사단이니까, 지금의 그녀도 무슨 사정이 있는가 보다 했다.
결국 팔은 안쪽으로 굽게 되어 있으니까.
세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 같은 경우는 너무 과하게 굽어서 문제였다.
현재 그녀는 폐허가 된 지역에 머무르며 자신의 성을 세우고 있는 상태다.
교황은 그런 그녀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고, 그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만 해도 홀리 레이크인 성국에서도 세리스에게 대놓고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하게 커지자, 성국은 세리스에게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를 소중하게 여겼기에 종교적인 선으로 세리스를 가두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세리스는 훗날, 성국의 성녀가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존경받는 여황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솔로몬. 은장미 기사 단장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나요?”
세리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솔로몬이라고 불린 늙은이가 대답했다.
이 솔로몬이라는 고문은 훗날 뱀을 닮은 괴물, 가미긴과 내기에서 져서 철저히 개조된 이.
바로, 몬스터들의 편이 되는 현자였다.
그렇게 보면 끔찍할 정도로 오래 사는 늙은이다.
물론 그 수명연장을 위해서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어마어마하긴 했다.
끊임없는 고통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가 내기에서 지게 되는 과정은 훗날 책으로도 만들어진다.
또 그걸 아주 먼 미래 속의 세인이 읽게 되는 것이다.
“물론이죠. 전방에 있던 세리스님은 모르시겠지만, 중앙에서 분투한 오베론의 신임을 받던 젊은이입니다.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을 성공시켰죠. 그래서 중앙에서도 홀리 레이크에 대한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역시나 성기사들이라고 말이죠. 그런 그가 혼자서 참석하지 못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설명을 듣는 세리스는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약삭빠른 솔로몬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솔로몬은 지식이 많지만 교활하고 남의 비위 맞추기를 즐겨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세리스를 흡족하게 해주기 위해 말을 털어놨다.
세리스로서는 같은 성기사의 무용담을 듣는 게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그는 외팔이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 몸을 돌보지 않고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죠. 어린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몬스터 소굴에 쳐들어간 이야기는 저잣거리에서도 아주 유명합니다. 오죽하면 그를 기리는 의미로 노래까지 만들어서 불렀겠습니까?”
딱 거기까지만 했다면 좋았을 걸, 시키지도 않았는데 노래까지 부르는 솔로몬이다.
벙어리에다가 귀머거리인 데모나.
연약한 소녀인 데모나를 구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데모나는 세인의 시대에서도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위기에 빠지는 게 그녀의 운명인가 보다.
세리스는 속으로는 짜증 났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지적하지도 않았다.
사실 이런 건 그녀의 창이었던 미스틸 테인 때문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냥 한 귀로 흘려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이 보였을까?
노래를 마친 솔로몬이 물어왔다.
“그런데 에고 랜스가 계속 안 보이는데 대장간에 맡기셨습니까?”
지나친 호기심이었지만 세리스는 별거 아니란 듯이 설명해 주었다.
은장미 기사 단장에 대해 호기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더 물어보려면 이런 질문에도 답변해주는 게 좋았다.
그녀는 솔로몬이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막대하고 싶진 않았다.
“별거 아닙니다. 양지바른 곳에 버리고 왔어요.”
“….”
솔로몬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그렇게 쉽게 버릴 물건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