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 나는 다시 일어선다 (8)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는 세리스는 평온을 유지했다.
그녀 앞에서 벌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녀는 매우 침착해 보인다.
그 침착함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라, 오히려 지나친 괴리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세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일으키는 빛의 천사를 보았다.
접힌 날개들이 활짝 펼쳐질 때, 그 위세와 함께 성스러움도 폭발했다.
그 파동의 중심에서 모습을 드러낸 고고한 천사.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남성이 세리스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나의 형제. 나를 받드는 존재. 나에게 경의를 표시하라.”
그리고 이 말도 덧붙였다.
“네 믿음이 거짓이 아니라면.”
동시에 몬스터들의 진영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가 정체를 드러내니 남은 개체들도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노센트와 보통 몬스터의 차이가 무엇일까?
이노센트란 정체를 숨기고 있는 천사들이었다.
허울을 벗어던진 천사들이 외쳤다.
“무릎을 꿇어라!”
“빛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서 무기를 버릴지어다!”
“세리스여!”
몬스터 사령관에서 천사로 화한 남자가 세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세리스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에게 향하자, 남자는 맑은 목소리로 재차 자기 뜻을 전했다.
“내게 경배를 표시하라. 무릎을 꿇어라.”
세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세리스의 무릎은 땅바닥에 닿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를 치기 위해 바람처럼 앞으로 나갔다.
그때 처음으로 세리스의 검이 전력을 다해 움직였던 것 같다.
그건 아마 상대가 버거워서라기보다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분노를 금치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수직으로 세운 그녀의 검이 아래로 떨어질 때, 번개처럼 움직인 천사의 두 팔이 그것을 막아냈다.
물론 막아낸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정체를 드러내면서 전보다 강해졌다고 하지만 세리스는 그 단계를 무시할 정도의 강자였다. 결국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마음 앞에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령관일 때도 그렇고, 천사는 여전히 약자였다.
천사의 대리석처럼 하얀 두 팔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천사의 어깨가 삐걱거리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 소리가 당사자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잠깐! 잠깐!”
여유롭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것을 본 세리스의 눈이 이글거렸다.
깊은 분노로 말이다.
“기다려!”
결국 그녀의 검은 그대로 천사를 갈라버렸다.
애원하는 천사를 죽여 버린 것이다.
상대의 머리는 물론이고 갈비뼈와 골반까지 두 조각을 내버린 세리스의 몸이, 시원하게 잘린 천사를 지나쳐 간다.
그러면서 그녀는 천사의 갈라진 단면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두 조각이 나고도 잠시 허우적거리는 천사가 완전히 쓰러졌고 힘을 잃은 날개가 파닥였다.
그 날개가 사방으로 피를 튀겼다,
그렇게 잔뜩 튀겨진 핏방울이 세리스의 몸을 붉게 수놓았다.
그제야 세리스는 소매로 피에 젖은 얼굴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경배를 바칠 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비아냥이 끝난 후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전군!”
전장을 뒤흔드는 외침 속에서 인간들이 무기를 고쳐 잡았다.
모습을 드러낸 천사들 앞에서 다시 전의를 다진 것이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세리스의 흔들림 없는 의지였다.
평소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사는 마법사 나부랭이들처럼 정신이 유약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정의를 관철하는 게 바로 기사의 덕목이니까 말이다.
군대의 선두에 있는 세리스가 검으로 천사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다시 전장 전체를 달구어 놓는 효과를 발휘했다.
투지로 꺼져가는 의지를 뒤흔들어 놓았다.
“진실을 말살하라.”
세리스의 차가운 명령에 모두가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전진했다.
날개를 펄럭이는 천사들의 앞으로 말이다.
그런 인간들 앞에서 당황한 것은 천사들이었다.
칼스도 기절했고 케이드도 없는 마당에 정말 곤란하게 된 것이다.
이노센트.
선순환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신의 피조물.
그들이 천사라는 증거는 세계를 뿌리째 뒤흔들 수 있음이었다.
여기 있는 인간 중 그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폭로를 원치 않는다.
인간들이 가진 믿음의 근간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파괴가 신에까지 직결되는 것은 더더욱 사양이다.
이런 게 인간들의 속마음이었다.
그리고 이노센트들도 평소에는 최후까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려 했다.
필사적으로 말이다.
왜냐면 천사의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신에게 인도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기 싫었다.
천사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몬스터들을 돌보았다.
만약 몬스터와 인간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이미 입증이 되었다.
몬스터는 불사의 생명체를 증오하는 천사들이 만들어낸 그들의 이면이었다.
이종족도 그렇고 인간들도 천사들에게 있어 질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노센트 중에서는 루시드가 시간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아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루시드를 증오하지 않았다.
일부는 시간의 발견과 탄생이 자연스러운 섭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섭리를 만든 신은 정말로 있을까?
그건 이노센트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리는 주제였다.
다만 의견이 갈리는 이노센트 중에서도 공통된 의견이 있었다.
천사의 존재가 주목받는다면 신도 믿음의 자리에서 내려와 실체를 획득하게 된다.
그건 인간들에게 있어 신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질 수 있는 계기인 것이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인간들에게 빛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니까.
진짜 그 아버지가 있든지 없든지 그렇게 믿어버릴 거란 이야기다.
그게 절대 달갑지 않았던 천사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기에 몰리게 되면 싫어도 본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사령관은 케이드가 돌아올 때까지 세리스를 막아보려 했다.
그래서 천사라는 정체까지 드러냈지만, 이미 두 조각나 바닥에 널브러진 마당이다.
기겁하며 날아오른 천사들이 어지럽게 하늘을 수놓았다.
그 밑에서 외치는 세리스.
그녀는 너희들의 심판이 필요 없다는 뜻을 피력했다.
“너희들은 인간을 납치해 실험하고 마족을 만들었다. 물건에 인간을 넣는 짓마저 저질렀다. 그렇게 인간의 혼을 도구로 쓰는 짓을 부추겼다.”
세리스가 그렇게 말할 때, 저 멀리 미스틸 테인이 동의하듯 창대가 떨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땅과 하늘을 불태웠고. 증오로 우리를 침범하고 정복했다. 온갖 사악한 짓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나무의 주인을 납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제는 가난한 자의 믿음마저 강탈해 가려고 하고 있다.”
천사들 앞에서 심판을 내리듯이 세리스가 외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종교의 뒤에 숨겠다고? 기필코 너희들을 죽여 인간들의 좌절과 절망을 막겠다. 그 길의 끝에서 내가 쓰러져 재가 될지라도, 내 모든 것을 바쳐 너희들을 죽여 버리겠다.”
세리스가 거침없이 빛의 검을 휘두르자, 검날에 닿지도 않았는데 하늘에 떠 있는 천사들의 육체가 갈려 나갔다.
무서운 힘이었다.
검의 기운에 추락하는 천사들에게 인간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창이 상대의 반격을 각오하고 마구 찔러댔다.
그러자 천사들이 금세 고슴도치가 된다.
폭발이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한 천사가 소리쳤다.
“이 배덕자야! 내가 바로 네 종교란 말이다! 우리가 네 믿음의 근간이며 답이란 말이다! 이건 심판이다! 복종해라! 복종하라고!”
그 외침이 신호였을까.
멀리에서 천사들이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눈과 입으로 파괴 광선을 뿜어냈다.
그 광선은 세리스의 몸에서 굴절되었고 애꿎은 주변을 터트렸다.
쏟아지는 흙더미 가운데에서 세리스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숫제 손아귀에서 검을 놓아 버린다.
떨어지려던 검은 마법처럼 그녀의 손아래에서 잠시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쉬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날아다니는 천사들이 차례차례 터져나가는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막아낼 수 없는 공격이 그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동시에 비명이 터지며 천사들이 잘려나갔다.
하체와 상체가 분리된 천사가 아래로 떨어진다.
마치 우박처럼 말이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세리스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힘이 눈부시게 가시화되며 파장을 일으켰다.
그 빛은 그녀 주변에서 다가오는 모든 물리력을 밀어내며 솟구쳤다.
그녀의 금발과 망토가 쏟아내는 기파에 폭풍을 맞이한 듯 휘날렸다.
그 힘에 정통으로 맞은 지상의 천사들이 뒤로 밀려났다.
앞쪽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말이다.
아예 얼굴의 앞쪽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뒤로 넘어가는 천사도 보일 정도였다.
엄청난 힘과 위압감을 뽐내며 다시 움직이는 그녀는 지금 여기에서 가히 전쟁의 여신이라 불러줄 만했다.
세리스는 앞만 바라보며 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처음으로 소리쳤던 천사의 머리를 박살내고 돌아온 검이 그녀의 손에 잡힌다.
그런 그녀의 주위에는 검이 날아다닌 궤적이 하얀 선으로 남았다.
그녀가 천사들의 성혈에 젖은 검으로 다시 앞을 가리키자, 인간의 함성이 전장을 뒤흔들며 폭발했다.
“진실에 굴하지 말라.”
위력적인 모습을 드러낸 천사들이었지만, 오히려 전세는 인간들 쪽으로 기울었다.
칼스는 배제된 상태고 케이드도 이 세상에 없었다.
테러로드인 닉스는 유미리가 상대 중이다.
그리고 세리스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세리스의 주변에서 쉴 새 없이 빛이 폭발하며 천사들을 쓸어 버렸다.
천사들의 몸에 머무는 성광보다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바로 세리스였다.
그녀의 몸에서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서광은 아군의 가슴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다시 눈부신 서광이 그녀를 하나의 빛으로 물들이는 그 순간.
이미 그녀는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천사였다.
* * *
“내가 너를 이길 수 없다고?”
유미리의 물음에 닉스가 웃었다.
그는 웃는 상태로 유미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닉스의 살 냄새에 뒤섞인 꽃향기가 유미리의 후각을 자극했다.
이제 닉스는 티 없는 순수를 가장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한다.
“악의 힘은 성스러운 힘을 이길 수가 없어. 누나의 힘은 매우 강력해. 그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난 거기에 상극이야. 나는 누나의 동생이자 테러로드잖아?”
그리고 유미리의 코앞에서 자신의 코를 들이댄 유고가 히죽였다.
그의 눈이 반달을 그렸을 때 그녀가 대답했다.
“넌 왜 아직도 내 동생의 몸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건 나의 몸이야.”
“그렇지. 넌 내 동생의 몸을 하고 있지. 그건 네 심술일 수도 있고, 변덕 같은 기분일 수도 있어. 나는 한때 거기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지만 말이야. 너에게는 가벼운 장난 같은 게 내게는 전부인 것처럼, 과거에는 분명 치명타로 적용했어.”
그때 유고의 하얀 손이 유미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동안 그녀가 숨겨놓았던 힘을 아무도 몰랐다.
그걸 대놓고 드러내니 가히 하늘이 놀랄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시체학자라는 것이고, 마법사일 뿐이란 것이었다.
유미리가 아무리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녀를 분류하자면 흑마법사에 지나지 않는다.
암흑의 힘인 것이다.
테러로드이자, 천사인 닉스에게 그 힘이 통할 리 없었다.
닉스에게 숨겨진 힘 중 하나는 어둠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원래 천사들이 가진 내성은 닉스 급으로 특화되면 아예 철통과도 같아진다.
닉스가 생각하기에 유미리는 자신을 해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 어둠의 껍데기를 벗어던졌으니까 말이다.
“닉스.”
뭔가 말하려는 유미리의 코앞에서 닉스가 속삭였다.
“유고라고 불러줘. 난 누나의 동생이라니까? 영혼도 육체도 그래. 그러니까 그 동생의 몸으로 누나가 어떤 일을 당할지 상상해봐. 상상만 해도 짜릿하겠지? 여기까지 나를 몰아댄 대가를 받아야 할 거야. 괴물의 껍데기는 쉽게 구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닉스의 손이 유미리의 턱을 잡고 올렸다.
“동생 몸으로 네가 어떤 일을 당할지 생각해 보라고.”
천사인 닉스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활활 타올랐다.
아주 위험한 온도가 그의 눈을 데우고 있는 중이다.
어지간하면 그 불길 앞에서 움츠러들 만도 한데, 유미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자기 생각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닉스. 물론 너는 대단한 천사야. 그러니 오히려 하급 천사들보다 어둠의 마법을 모르겠지. 강력한 네가 그런 것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을 거야. 다른 천사와 비교할 수도 없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지. 한 번도 중병에 앓아본 적이 없으니 감기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을 거야. 그렇지?”
유미리는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손을 닉스의 어깨 위에 걸쳐 놓았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닉스의 본능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한 것은.
“시체학자에게는 위력적이고 순수한 어둠의 마법만 있는 게 아냐. 정통이라 부르는 한 가지 길 말고도 여러 가지 길을 추구하기 때문에 흑마법인거야. 그래서 나는 온갖 저주와 촉매 연결기술에 통달해 있어. 그런 것들은 꼭 속성이 어둠이라기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 어둠이라고 분류되는 거지.”
말의 내용보다도 유미리의 담담한 분위기가 닉스의 가슴을 헤집는다.
지금의 그녀는 패배감에 젖어 있지도 않았고 겁에 질려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만감에 취해 있던 닉스는 뒤늦게 놀라서 그녀에게 떨어지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시 말해 어둠의 힘이 아니라 피를 매개로 작동하는 증오도 있다는 거야. 물론 조건이 아주 까다로워. 보통 때라면 충족시키기 어려운 조건이지. 일단 혈족이어야 하니까 말이야.”
“잠깐….”
“그런데 네가 아까 네 입으로 말했지? 넌 내 동생과 같은 몸이고 같은 영혼이라고. 그렇다면 내 피와 영혼을 격발해서 네게 동질 폭발을 일으킨다면? 그게 안 될 건 뭐지?”
황급히 유미리의 몸에서 손을 떼어내려는 닉스의 몸에서 ‘퍽!’ 소리가 났다.
닉스는 고개를 돌려 충격 받은 표정 그대로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그의 눈동자로 곤죽이 된 부위가 보였다.
분명 폭발한 것이다.
지금 명검으로 베어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그의 몸이 터져나갔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장난처럼 다시 폭발하는 닉스의 육체다.
그러면서 튀긴 피가 유미리의 눈가에 묻는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한쪽 눈을 깜박인 유미리가 웃었다.
그녀는 계속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 순간이 너무나 유쾌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의 입술이 이제는 휘파람을 부른다.
그걸 시작으로 닉스의 몸에서 더욱 거칠고 본격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닉스는 몸을 가누고 그녀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닉스는 유미리에게서 떨어지려고 해보았다.
역시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닉스가 천사들의 정점에 있는 존재라면 유미리는 전무후무한 대마법사였다.
쉽게 반격을 허용할 리가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닉스. 내가 너를 정확히 몰랐을 때 너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내 약점인 유고를 이용해 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지. 그렇다면 그 후로 내가 뭘 생각했겠어? 당연히 너를 연구했겠지. 그런데 너는 그동안 한 게 대체 뭐지? 고작 비꼬는 방법이나 숙련한 거야? 나는 네게 배웠어. 함정을 파놓고 허를 찌르라고 말이야.”
“으윽!”
연속적인 피의 폭발이 일어나자 닉스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는 최후의 시도로 기력을 짜내 날개를 움직이려 했다.
그렇게 이곳을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리에 힘을 주기도 전에 입에서 분수와도 같은 피가 쏟아졌다.
그 피가 그의 가슴을 적신다.
눈에서도 주르륵하고 피가 흘러나왔다.
겉모습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 몸속을 누비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거대화한 너는 나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비웃었겠지? 네 정체를 드러내면 상황은 반전되리라고 말이야. 모든 게 너의 유희였던 거야. 하지만 그런 너의 유희가 내게도 유희였다. 난 너의 방심을 즐겼어. 이 순간에도, 난 네가 나를 철저히 가지고 놀 생각에 유고를 고집한 걸 감사해. 네 악의가 네 발목을 자른 거야. 닉스.”
유미리의 혈족 살해로 인해 부서지는 유고가 곧 닉스였다.
완벽에 가깝게 동화된 부분이 찢길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의 영육을 유린했다.
유미리의 말에 욕을 내뱉고 싶은 그였지만, 고통에 입만 뻐금거릴 뿐이다.
“넌 내 동생의 영혼을 포로로 삼고 그의 육체를 가졌어. 하지만 변치 않는 게 있어. 내 동생은 내 거야. 내 가족이라고. 그래서 유고의 이름으로 내가 여기에 섰다. 나를 죽이고 내 동생을 강탈해간 놈아. 너를 벌주기 위해, 내가 내 동생의 이름을 빌려 여기에 있다. 내 동생은 너에게 영혼과 육체를 빼앗겼지만, 유일하게 남은 그의 이름이 나와 함께 한다.”
휘파람을 멈춘 유미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상대는 유미리를 희롱하기 위해 유고의 혼을 불러들였고 그의 육체를 재구성했다.
그리고 하나가 되었다.
닉스의 심술, 비틀린 본성이 이제는 거꾸로 그를 철저히 파괴하는 수단이 되고 있었다.
외부에서라면 몰라도 내부에서 가해 오는 공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피투성이가 된 닉스는 허무하게도 무너져 내렸다.
천사로서 공격다운 공격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말이다.
“자. 이제 네가 훔친 유고 앞에 무릎을 꿇어라. 이 개 같은 놈아. 개답게 유고 앞에서 네 무릎을 꿇으라고.”
닉스는 뭔가 대답하려 하다가 결국 충격을 못 이기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부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귀에서도 피가 흘러내리는 판이었다.
날개를 축 늘어뜨린 상태에서 작게 웅크리는 닉스의 등 위에 유미리의 발이 올려졌다.
고통과 분노에 눈을 홉뜬 닉스가 유미리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목이 기형적으로 뒤틀리자 이제 시선을 맞추지도 못한다.
그런 닉스의 머리 위로 유미리는 조롱을 아끼지 않았다.
죽음을 선사하고 동생을 강탈한 천사에 대한 혐오가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멍청한 놈. 너야말로 최고로 덜 떨어진 테러로드다. 네 꼴을 봐라. 나를 파멸시켰던 네 수작이 결국 네 목에 올가미를 걸어버린 거야. 네 형제는 이런 너를 창피해할 거야. 이렇게 모자란 병신이 테러로드라니. 오, 맙소사.”
극도의 수치감과 고통 앞에서 꿈틀대던 닉스.
그는 분노와 수치심에 피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닉스의 몸이 완전히 폭발해 버린 것이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파편들 속에서….
유미리의 발이, 닉스의 등 위에 올려놓았었던 그 발이 자연스레 땅에 가서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