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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왕 마검의 주인-210화 (210/307)

# 210

& 나는 다시 일어선다 (7)

유미리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자, 그녀의 검지 손톱이 검게 물들었다.

그 손톱은 아주 날카로운 침처럼 길어졌다.

그녀의 왼손은 상의를 풀어 젖혔다.

그러자 뽀얀 가슴이 나타난다.

검은 손톱이 그 가슴 위를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핏물이 그녀의 가슴을 적시고 아주 깊게 베인 상처가 화끈거림으로 가득 찼을 때, 그 뜨거움을 빌미로 유미리가 요구했다.

“너희들은 나의 것이다.”

그 명령과 함께 그녀의 머리에 초록색의 뿔 같은 것이 길게 돋아났다.

에테르가 모여 만들어진 권위였다.

유미리는 유고를 대신해 닉스를 물리치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지금의 유미리가 마왕 유고였고, 지금 그녀가 보인 에테르의 왕관은 곧 마왕 유고의 왕관이다.

길게 자라난 초록빛의 뿔들은 끊임없이 진동했다.

그리고 공기 속에 있는 에테르를 뒤흔들었다.

그 움직임은 망자들에게 보내는 유미리의 뜻을 증폭시켰다.

“복종해라.”

유미리의 재선언이 벌레떼가 우는 듯한 소리로 전달되었다.

그 선언에 시체와 괴물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에서 흘리는 피가 그들의 목덜미까지 내려왔을 때, 그들은 기꺼이 유미리의 종이 되었다. 그렇게 공격 대상을 바꾼 것이다.

붉게 빛나는 눈과 타액을 흘리는 입안의 이빨들이 닉스에게로 돌아선다.

시체학자들은 후려치는 교섭에 능하다.

죽어 있는 존재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 교섭을 폭력적인 억압으로 만드는 건 바로 그녀의 타오르는 영혼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맺힌 마력이었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다시 에테르에 간섭하자 몸이 없는 망령들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허공에서 맴돌고 있던 악령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러더니 검은 안개를 만들어 낸다.

그 모습은 하늘 한쪽을 검게 물들이는 듯했다.

비명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유미리가 사악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그치기도 전에 육신이 없는 망령들조차 닉스를 배신했다.

이제 닉스는 고립된 것이다.

유미리는 괴물들의 파도가 거꾸로 닉스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가 있던 자리에 닉스가 입으로 발사한 광선이 스쳐 지나간다.

그 영역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닉스는 유미리를 해치웠나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앞에서 괴로워할 뿐이었다.

그의 종들이 거꾸로 그를 억압하는 사슬이 되었고, 그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육체가 있는 몬스터들은 닉스가 몸부림칠 때마다 곤죽이 되었다.

그러면 닉스의 권능이 다시 그들을 일으켰다.

그것도 더욱 강하게 말이다.

그건 결국 유미리를 도와주는 꼴이었다.

주위를 뒤흔드는 귀곡성 속에서 닉스의 몸짓이 눈에 띄게 둔해진다.

망령들 때문이었다.

오한이 든 듯 덜덜 몸을 떠는 닉스 위로 시체들이 기어올랐다.

그리고 썩어 문드러지는 이빨을 들어 닉스의 몸에 박아 넣었다.

분노한 닉스가 그들을 죽여버리면 또다시 몸을 일으킨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악순환이었다.

결국 분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닉스는 유미리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그가 쏘아내는 광선이 주변을 불태운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멀리 커다랗게 보이는 닉스를 아지랑이로 흔들었다.

그 아지랑이 너머.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공간에서 유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의 몸은 완전히 투명한 상태다.

점차 뚜렷해지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의 영향을 받아 흔들렸다.

“넌 결국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어.”

유미리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부서진 땅 위로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를 밟았다.

그녀는 그것을 박차고 높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때 닉스가 쏘아낸 광선이 그녀를 적중시켰다.

드디어 그녀를 해치웠나 싶었을 때, 광선은 허무하게 허공만 불태우고 말았다.

이번에도 헛방을 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유미리가 모습을 실체화했을 때, 그녀의 차가운 음성이 닉스에게 날아갔다.

“이봐.”

그녀의 부름에 닉스가 커다랗고 붉은 눈동자를 굴리자, 유미리의 다음 말이 이어진다.

“공격수단은 이쪽에도 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닉스 아래쪽에서 비명이 치솟았다.

몬스터들이 끔찍한 고통에 부글거리며 녹아내린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잠시 자유로워진 닉스가 비틀거렸을 때 아래에서 거대한 손이 솟구쳐 올랐다.

그 손이 닉스의 상체와 부딪히자, 상반신이 부서져 버렸다.

폭죽처럼 터져나가는 닉스의 상반신을 보며 유미리는 공중에서 도움닫기를 했다.

그러면서 닉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닉스를 해치운 게 아니다.

제대로 공격을 먹이려면 아직도 멀었다.

가까이 다가가야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계산 아래 벌인 공격이었다.

고통의 용광로라는 마법으로 시체들을 녹여 강타를 날린 것이다.

유미리의 머리가 닉스와 점점 가까워질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수복되는 닉스의 상체가 보인다.

하얀 결정들이 부서져 나간 상체와 머리를 만들어 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유고의 머리가 성난 함성을 쏟아낸다.

그 서슬에 구름이 놀라 흩어질 정도다.

분노한 닉스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입을 벌리고 광선을 아래쪽에 쏜 것이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시체들을 처리하려는 방편이었다.

대신 그의 몸까지 불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불타는 닉스의 거체가 하늘을 불길로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불의 신이 강림한 듯 이글거리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는 가운데, 닉스의 분노한 눈빛이 유미리를 찾아 움직였다.

하지만 쉽게 찾아내지 못하자 닉스가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유미리의 머리 위로 낙인과 같은 표식이 만들어졌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흠칫 놀라는 닉스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가까울수록 닉스의 파괴 광선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표식을 제대로 노린 파괴 광선이 쏟아졌다.

그 광선은 대지를 불태우고 나무들을 폭발시켰다.

펑 소리를 내며 터져나간 나무 조각들이 바위 파편처럼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파괴 광선이 직격한 자리는 완전히 융해되어 용암지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지대에서 홀로 서 있는 투명한 물체가 있었으니, 바로 유미리였다.

이글거리는 불바다 속에서 그녀의 눈이 유난히 초록색의 빛을 내며 불타올랐다.

유미리의 몸 위를 다시 파괴 광선이 휩쓸었지만, 이번에도 유미리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녀가 다시 그들의 종에게 주문했다.

“고통의 용광로여. 다시 한번 임무를 다해라.”

닉스의 수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구덩이가 융해되기 시작하자 파란 층들이 지며 가장자리가 무너져 내렸다.

유황 냄새가 뒤섞인 연기 속에서 닉스는 자세를 안정적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그의 하반신이 사라져 버렸다.

불타는 늪지대가 뻘처럼 그의 하반신을 삼켜버린 것이다.

유미리가 전보다 낮아진 닉스의 머리를 표적으로 삼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불길한 손 뒤에서 그녀의 눈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눈에서 흘러나온 초록색의 빛이 그녀의 손에 서렸다.

그리고 앞쪽으로 폭사 되어 나갔다.

그 빠르기는 눈이 잡을 수조차 없다.

처음부터 직선의 빛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았다.

닉스의 머리를 관통한 초록빛이 하늘로 날아간다.

그리고 구름을 증발시켰다.

일순간 닉스의 뒤로 초록색의 하늘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빛이 닉스의 정면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말이다.

아까 닉스가 보여줬던 파괴 광선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다.

거기에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닉스의 고통이 어떻겠는가?

부서진 닉스의 얼굴에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코 위가 날아가고 입만 남은 머리가 내지르는 비명이다.

“으아아아! 으아아악!”

그 비명은 지진을 일으켰다.

서 있는 유미리의 가슴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어느덧 유미리의 입술에 만족의 미소가 걸렸다.

그 입술 위로 불타는 초록의 빛.

다크 스타가 다시 주문을 발휘했다.

그 주문은 다시 손으로 옮겨 간다.

그렇게 그녀가 다시 죽음의 창을 던졌다.

그 창이 이번에는 닉스의 목을 꿰뚫어 버린다.

그다음은 가슴이었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닉스의 몸이 부서져 나갔다.

다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결정이 만들어질 때, 유미리의 다크 스타가 그 결정을 꿰뚫었다.

굉음이 나고 결정들이 부서져 나간다.

그리고 다시 유미리가 쏘아낸 광선이 닉스의 상체를 통과했다.

갈비뼈들이 녹아내리며 주위의 팔들이 힘을 잃고 아래로 내려앉았다.

이대로 닉스의 패배인 걸까?

그러나 유미리는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계속해서 초록색의 눈을 섬뜩하게 빛낼 뿐이다.

결국 닉스는 아래로 가라앉았다.

마치 태산이 무너지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닉스를 고통의 용광로가 집어삼킨다.

유황 냄새가 자욱이 깔리는 가운데 뛰쳐나온 망령들이 더욱 닉스를 옭아맸다.

그리고 갉아대기 시작했다.

피를 머금은 영혼들이 울부짖었고 이 지역의 하늘이 다시 불탔다.

하지만 여기에서 무너질 것 같았다면 테러로드가 아니었을 것이다.

“과연. 대단해, 누나.”

전혀 낭패를 보지 않은 닉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미리는 재빨리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런 그녀가 있던 자리에 간발의 차로 빛의 창이 통과했다.

빗나간 창이 하얀 폭발을 일으키는 가운데, 다시 현세에 몸을 구현한 유미리가 발을 땅에 디뎠다.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뒤로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한 후였다.

닉스의 거체가 무너진 자리에서 뭔가가 쏘아진 것도 그때였고 말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그림자는 순식간에 유미리를 따라붙으며, 그녀가 일으켜 세운 암석 인형들을 박살 냈다.

그리곤 계속해서 그녀를 뒤쫓았다.

닉스가 지나간 자리에서 뒤늦게 충격파가 터졌다.

화살처럼 날아온 닉스는 위력적인 발차기를 유미리에게 날렸다.

흐릿한 형체의 유미리는 그 발차기에 충격을 입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새우처럼 꺾어진 유미리의 몸이 땅 위로 쓰러졌을 때였다.

땅에 착지한 닉스가 미친 듯이 연타를 날렸다.

그러자 유미리를 보호하고 있던 실드들이 유리처럼 부서져 나갔다.

수십 겹의 실드가 박살 나고 한 겹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난타하던 닉스는 유미리의 얼굴이 자신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은 초록색 불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위험신호가 닉스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그 짜릿함 속에서 닉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크게 입을 벌리며 소리쳤다.

“하압!”

유미리의 손에서 발사된 광선이 닉스의 앞에서 굴절되었다.

휘어진 그 힘은 애꿎은 주변만 때렸다.

땅이 들썩이며 흙먼지를 크게 피워올렸다.

공중으로 떠오른 돌조각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닉스가 웃었다.

아주 차갑고 거만한 웃음이었다.

지금의 닉스는 성스러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광휘가 파도쳤다.

물결처럼 번져나가는 성광이 유미리를 눈부시게 만들었다.

“누나.”

하얀 피부를 빛내는 닉스는 보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 같았다.

그는 이제 유미리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대신 시위하듯이 등 뒤에 있는 것을 활짝 펼쳐 보인다.

눈처럼 하얀 날개들이 여러 장의 망토를 만들었다.

유미리의 앞에서 하얀 날개가 위풍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움직였다.

하늘거리는 그 빛의 징표 앞에서 유미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고의 몸을 빌려 현신한 닉스, 빛의 천사 닉스가 말했다.

“누나의 수단은 결국 악의 힘이야. 그러므로 나를 이길 수 없어. 본신 상태인 나는 암흑의 힘 앞에서 타격을 받지 않거든.”

천사 닉스의 당당한 선언 앞에서 유미리는 이를 악물었다.

닉스는 그런 유미리를 비웃듯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아주 거만하게 말이다.

“악은 선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야.”

그게 바로 천사인 닉스가 생각하는 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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