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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왕 마검의 주인-209화 (209/307)

# 209

& 나는 다시 일어선다 (6)

닉스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안개가 가득 찬 분지였다.

거대한 별이 떨어진 듯,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곳에 넘실대는 안개가 그의 실체를 가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부질없는 수작이었다.

구멍 밖으로 불거져 나온 검은 기둥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거미처럼 여덟 개의 팔을 드러내놓고 있는 닉스의 손은 인간을 닮았다.

주름이 가득한 팔은 그대로 대지 위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옆으로 누웠다.

손끝에 달린 흉측한 검은 손톱은 땅 위에 흉악한 자국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 주위로 나무들이 한가득 쓰러져 있었다.

파헤쳐진 자리 위로 말이다.

넓은 곳에 퍼진 안개는 닉스의 숨결에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유황 섞인 불쾌한 냄새와 함께, 악마의 거친 숨소리가 분지 내부를 긁어내린다.

안개로 가득 찬 분지 안에는 닉스만이 있는게 아니었다.

상상도 못 할 물건이 들어 있다.

분지 안에는 회색빛 도시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약간 옆으로 기울어진 도시 안에는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 숫자가 몇만 명을 가뿐히 넘어섰다.

그 거대한 도시의 중심부에는, 유난히 뾰족하고 높은 시계탑이 하나 서 있었다.

그 앞에 있는 야외 카페에는 한 소년이 앉아 있다.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소년은 알몸 상태다.

그러고 보니 거리를 메운 사람들도 전부 알몸이었다.

소년은 여유롭게 뜨거운 차를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오래지 않아 열매를 맺는다.

안개를 헤치고 하얀 머리카락의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온몸을 검은 가죽으로 감싸고, 후드 달린 망토를 걸치고 있는 여자의 이름은 유미리였다.

이질적인 그녀의 존재에도 도시의 주민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유미리가 보이지 않는 듯 자신들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집을 잃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저 길 위를 헤매며, 도시를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냐고 묻는다면 기약이 없다는 대답만이 있을 뿐이다.

닉스의 포로가 된 영혼들을 지나치며 걸어온 유미리는, 망설이지 않고 소년의 맞은편에 가서 섰다.

“누나. 다시 올 줄 알았어. 앉아.”

소년이 자리를 권했지만 유미리는 듣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그런 유미리를 살피며 찻잔을 내려놓는 소년이다.

“감회가 새롭지? 오래전에 누나가 신기했다고 말한 그 시계탑이야. 마력으로 움직이는 저걸 뜯어보고 싶다고 말했었지. 내부를 살피고 싶다고 말이야. 그때 세리스 누나는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거냐고 말했고. 동료들은 모두 크게 웃었어. 그 웃음소리가 아직도 여기에 가득한 것 같아.”

그리고서 알몸의 소년, 유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소라를 귀에 가져다 대면 거기 실렸던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이 머리통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나 봐. 진짜 그때 그들의 말소리가 맴돈다니까?”

유고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에 유미리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유미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런 같잖은 수작에 넘어가 치명상을 입었던 그녀였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전과 달리 차가운 표정으로 유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진정하고 냉정히 현실을 보라고. 과거에도 나는 누나를 해치웠어. 지금도 그래. 누나가 나를 이길리는 없어. 전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 뿐이야. 그러니 우리가 꼭 싸워야 할 이유는 없는 거야. 결과는 정해져 있거든.”

유미리가 원정대의 배신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지금 보이는 닉스의 함정 때문이었다.

그는 유고의 몸을 차지한 채로 유미리를 곤경에 빠트렸다.

마법사로서 언제나 집중을 유지해야만 하는 유미리였다.

그런데 과거 닉스의 엽기적인 짓에 그만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죽음의 일격을 허용한 것도 모자라, 배신자라는 누명을 쓰고 얼음 굴에서 죽어갔던 것이다.

수많은 괴물을 만들어 내는 닉스는 그들의 정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먼 미래에 드래곤이 세인 앞에서 보였던 행동.

사람의 육신 안에 들어가 앉거나, 영혼을 소환해서 노는 모습이 지금의 닉스에게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드래곤이나 몬스터들이 할 줄 아는 기술은 닉스도 당연히 다 할 줄 안다.

먼 미래에 한 드래곤이 브레멘의 동생 몸을 차지했듯이, 지금의 닉스도 마찬가지였다.

유고를 죽이고 그와 동화되었다.

유고의 영혼까지 추출해 삼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누나인 유미리 앞에서 알몸으로 앉아 있었다.

“이 도시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유미리의 질문에 닉스와 하나가 된 유고가 웃었다.

유미리가 기억하는 동생의 그 웃음이었다.

여전히 상냥해 보이는 그 웃음에 유미리의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곧 유고의 이어지는 말이 그 아픔을 마비시켰다.

“누나의 시체를 못 찾았잖아. 언젠가는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이상하게도 그런 예감이 자꾸 들더라고. 그래서 준비했어. 도시 하나를 통째로 여기에 처넣는 게 어렵긴 했지만, 지금 보니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여긴 우리의 추억이 얽힌 장소잖아?”

유미리는 안개 속에서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노인과 아이들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다정한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 걷는 남녀도 보이는 가운데 유고의 말이 이어졌다.

“누나. 누나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누나의 동생 그대로야. 왜 아니겠어? 내 영혼은 그대로야. 내 육체도 과거 그대로야. 다만 생각이 전과 약간 달라졌고 누군가와 연결되었을 뿐이야.”

“….”

“심지어 이 도시를 봐. 누나를 생각하는 내 정성도 똑같아. 그러니 나와 손을 잡자. 내겐 누나의 영혼이 필요해. 누나는 강하잖아. 내겐 동료가 필요해. 누나라면 저 지긋지긋한 세계수의 마음도 흔들 수 있을 거야. 요즘의 그녀는 폭력배에 가깝다고. 나는 그녀의 폭력에 시달리는 가엾은 어린 양일 뿐이지. 그녀가 나를 얼마나 속박했는지 알아? 섬뜩할 정도야.”

바보도 안 넘어갈 수작이었다.

사실 이건 진심 어린 회유라기보다는 희롱에 가깝다.

그걸 여기에 서 있는 유미리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유미리는 지금 유고가 짓는 풍부한 표정을 보았다.

이럴 때의 그는 정말로 자신의 동생 같았다.

그리고 동생이 맞다.

그래서 전에도 그의 수작에 걸려 넘어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유고 입장에서는 자신 때문에 이미 목숨을 잃은 유미리였다.

그런데 또 수작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것도 도시 하나를 통째로 제물로 만들어 가면서.

눈앞에 보이는 괴물의 심리는 무엇일까?

그저 이 순간이 상대에게는 쾌락의 유희인가?

혹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인가?

이게 정말 즐거운 걸까?

이런 짓이 진심으로 즐거우니까 괴물인 거겠지?

“난 너희들의 사고방식을 모르겠어.”

그렇게 말한 유미리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검붉은 빛이 감돌자,

유미리가 서 있는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동은 옆의 시계탑까지 옮겨갔다.

유고 앞의 테이블은 덜덜 떨리면서 찻잔을 이동시켰다.

옆으로, 다시 옆으로 말이다.

점점 격해지는 진동 속에서 유고가 그녀에게 부탁했다.

“누나. 그만둬.”

유미리의 눈동자가 유고를 담는다.

유고는 옆으로 이동한 찻잔이 테이블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찻잔이 산산이 부서질 때 유고가 다시 말했다.

“그만둬. 내 선물이 무너지려고 하니 화가 나려고 해. 누나는 왜 이렇게 예의가 없는 거야? 재회의 순간에 굳이 과민반응 해야겠어?”

유미리가 냉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나를 누나라고 부르지 마. 그 애는 죽었어. 그리고 이제 내가 유고야. 그 애의 이름으로 널 죽여 버리겠어. 지금도 네가 모욕을 주고 있는 내 동생의 이름으로 말이야.”

이윽고 무표정한 유고의 얼굴이 검은 그림자로 뒤덮였다.

그건 지진을 못 이겨 옆으로 기울어지는 시계탑의 그림자였다.

결국 굉음과 함께 시계탑이 쓰러진다.

유미리와 유고가 있던 자리로 말이다.

지진 속에서 비틀거리며 인형처럼 춤추던 사람들은, 이제야 때늦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붙잡고 지르는 새된 비명 속에서 도시 전체가 몸살을 앓았다.

어떤 남자는 몸을 웅크리고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언제 저기까지 이동한 걸까?

무너진 시계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미리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러기가 무섭게 벽돌을 쏟으며 주저앉는 집들이 그녀를 가렸다.

끌려왔던 영혼들은 닉스의 의지로 인해 한데 뭉쳤다.

그리고 가슴에 소용돌이를 품은 것 같은 괴물이 되었다.

그 소용돌이가 먹이인 유미리 쪽으로 움직이자, 괴물의 몸이 딸려가듯 움직였다.

즉 소용돌이는 목표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회색빛 몸체에 하얀 눈을 가진 괴물이 유미리를 공격해 들어갔다.

유미리는 손으로 자신의 코 아래를 가렸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영체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아스트랄 페이크라는 기술로 최상위 마법 중 하나이다.

이것은 시체학자의 기술이 아니고 정통 정령 마법이었다.

과연 칼스의 제자다운 기술이다.

정작 칼스조차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구사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도 위기의 순간에 적절히 말이다.

회색 괴물이 휘두르는 팔이 허무하게도 유미리를 통과해 버렸다.

결국 놈은 그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이다.

괴물을 통과해 배후를 잡은 유미리가 붉은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신음과 함께 흩어지는 괴물이었다.

거미줄처럼 뻗어있던 거리가 비틀렸다.

그 주변에서 통째로 무너지는 건물들이었다.

건물에서 토하듯 쥐어 짜낸 파편들이 유미리의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붕괴하는 탑, 무너지는 돌다리 그리고 나무들이 한 몸이 되며 토네이도처럼 긴 줄기를 이루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모조리 갈아버릴 기세다.

반투명해진 유미리의 얼굴에서 입술이 쉴새 없이 움직였다.

그러자 유미리의 몸이 부서지는 도시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아스트랄 페이크 상태에서 주문을 영창 하는 것은 보통 때보다 수십 배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수월히 해냈다.

그녀가 분지 바깥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이유였다.

유미리의 탈출을 알아차린 것일까?

분지가 머금었던 안개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괴되는 도시 속에서 닉스가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지진과 함께 말이다.

이 모든 게 세계수 지역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일이다.

거인이 몸을 일으키며 팔을 휘저어 댄다.

그 팔이 대지 위를 휩쓸자 산천초목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주 멀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든 유미리는, 닉스의 무력시위보다도 그의 얼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거인의 얼굴은 유고의 얼굴 그대로였다.

보라색이 되어 부풀어 오른 유고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유고의 하얀 눈알은 개미를 탐색하듯 유미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녀를 발견했는지 소리를 질렀다.

마치 천둥소리처럼 내리꽂히는 소리가 공기를 파열시켰다.

귀청을 찢어발길 듯한 소리, 그리고 뜨거운 바람이 유미리의 하얀 머리카락을 뒤로 날리게 했다.

소리를 질러 위협을 가한 닉스는 다시 크게 뭐라고 외쳤다.

그러자 분지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닉스는 자신의 몸을 일으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죽어있던 괴물들과 인간의 시체들을 일으켰다.

이들은 구멍을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종들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닉스를 보좌하며 그의 방패가 될 것이다.

동시에 유미리를 압박할 군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유미리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놈들을 다루는데 이골이 난 시체 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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