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08화 (208/307)

# 208

& 나는 다시 일어선다 (5)

인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군이나 마찬가지인 몬스터들도 제대로 몰랐던 사실이지만 닉스는 세계수에 의해 반쯤 봉인된 상태였다.

학대를 받은 세계수가 인질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까지 고집하던 일.

그것은 닉스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봉인이 풀린 것이다.

이제는 기필코 결착을 봐야만 했다.

닉스는 지금 세계수의 사슬에서 해방된 것이니까 말이다.

내버려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악은 세계수를 오염시켰지만, 동시에 힘도 주었다.

그 현상에 세계수 주변의 이노센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고통 속에서 악의 힘을 넘겨받은 세계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한계도 없이 말이다.

이걸 지켜보던 이노센트들이 그녀를 공격하자니 이번에는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수를 타락시키면서 고통과 수치를 주고, 연합군의 희망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무시 못 할 파괴 병기를 만들어 버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이노센트들은 도중에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그거야 당연하다.

루시드가 벌인 일이니까 말이다.

루시드는 타락한 상황에서도 힘든 결정을 했다.

그는 어느 날 고통 받는 세계수를 찾아가 깊은 관찰을 했다.

그 관찰은 곧 바위처럼 굳은 결심으로 이어진다.

루시드는 자신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짐승이 되기 전에 세계수에 조작을 가했다.

그렇게 세계수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지 못 한 상태에서 루시드의 안배를 받아들이게 된다.

세계수의 변화를 보는 루시드는 비밀이 새어나갈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자신마저 잊을 비밀이니까 말이다.

이노센트들은 이 모든 일이 지독한 우연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 판단과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힘마저 빨아들이는데, 이러다가 그들마저 구속될까 봐 두려웠다.

장차 파괴 신의 탄생에 일조할 판이었으니까 말이다.

분명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결국 많은 이노센트가 대머리 괴물의 소환에 응하게 된다.

당장 구속을 피하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거기에는 루시드의 선동도 한몫했다.

위대한 자리에 앉은 루시드는 닉스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소환물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세계수에 붙잡힌 닉스와는 다른 노선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인이 발견했듯이, 루시드는 당장 미래로 가지 않았다.

그는 종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긴 시간을 소환 물질 안에서 버텨 냈다.

테러로드가 될 때까지 종말에 대해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루시드로서는 그가 앉은 자리도 자리지만, 시간을 인지한 자이니 책임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염된 세계수는 시대를 불문하고 계속 존재했다.

그리고 미래에서 타락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 도중에 세계수는 유미리가 잊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계수에게는 고마운 존재지만, 유미리는 벌을 받아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그래서 세계수는 세상의 강권으로 인해 잊힌 자들을 추억하며 노래를 만들었다.

그 노래는 주로 요정들이 불렀다.

세상을 구한 진정한 왕.

유미리.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유고에 대해서 요정들이 폭로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건 인간에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처럼 다가올 뿐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존재들도 유미리가 잊혀지는 벌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어 받아들여 졌다.

그로 인해 유미리를 기억하는 소수조차 그녀를 보잘것없는 악인으로 기억하거나,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

세계수의 폭로는 오히려 굴절된 유미리의 상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세인의 시대까지, 또 그 이후로도 정녕 많은 이들이 대전쟁에서 누가 세상을 구해줬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몬스터들이 세계수를 피해 미래로 도망갔고, 다시 돌아와 골디온과 함께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그 김에 세계수도 죽이려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연의 힘을 가지고 태어나 엄청난 물리력을 가진 세계수는 빛을 가슴에 담은 채 자라, 신성함이 충만해 있었다.

거기에 악이 섞이며 공존하니 불가사의 그 자체가 되었다.

반 이상 각성한 그녀가 갖춘 권능중 하나는 포식이었다.

상대의 힘을 흡수해서 자신의 힘으로 만들었다.

상대의 권능조차 흡수하는 그녀의 권능은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골디온이고, 뭐고 그녀의 희롱 앞에 장난감 신세였다.

세계수를 벗어났던 몬스터들은 그녀를 공격하다가, 결국 다시 잡혀 노예가 되었다.

상대를 비웃는 새로운 테러로드는 덤벼드는 것들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고문했다.

그건 과거에 대한 복수로 보이겠지만, 사실 정신이 붕괴된 그녀는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고문의 강도와 잔인함이 어찌나 끔찍한지, 몬스터들도 공포에 벌벌 떨 뿐이었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행위가 연속으로 일어났다.

과거 세계수에게 힘을 주었던 루시드는 이 모든 사실을 예견한 것일까?

그가 바란 마침표가 세계수인 것은 분명하나, 정말 이렇게 비참한 심판까지 원했을까?

“나의 종이여 일어서라.”

세계수의 명령에 골디온은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드래곤과 함께 세상을 휩쓸었다.

그걸 본 세상 사람들은 괴물만 보았다 그 뒤의 세계수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끝없는 전쟁이 펼쳐졌다.

드디어 세계수가 세기말에 이르러 완전무결한 테러로드가 되어 일어섰다.

굉장히 오래 살아남아 결국 정신이 붕괴한 세계수는 그것 자체로 종말이나 다름없었다.

진정한 악의 각성이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자연의 불씨가 소멸했을 때, 최소한의 자제력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파괴 신이 된 것이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마지막 세상을 먹어치웠다.

무서운 그녀의 얼굴이 구름처럼 일어나 하늘을 뒤덮었고 모두에게 선언했다.

- 절대의 악. 진정한 테러로드의 앞에서 심판받아라.

홀리 크라운과 데스 크라운이 준비했던 라이트닝 블러드라는 안배는 세인의 자살로 어그러지고, 그 세리스는 세인 때문에 폐인 상태였다.

그러니 두 번째 안배인 홀리 디스트로이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세계수가 지배하는 한 갈래의 미래.

세인이 스톰 퀘스트를 통해 목격했던 그 미래에서, 시간이 내린 결론은 바로 멸망이었다.

그리하여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과거 세계수였던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며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여러 갈래의 미래 중 하나의 미래이다.

세상이라는 호수는 죽음의 호수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세인이 그런 미래를 알게 되고, 자신의 운명을 비틀면서 또 다른 길이 열렸다.

그는 자신의 백성을 인간으로 되돌리지 않았다.

자살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세리스는 건재하다.

그 후로도 세인은 여러 가지 선택을 했다.

언젠가 까마귀가 말했던 대로 한곳을 위해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드래곤을 처치하느라 수많은 인간을 학살하고 나서도 자괴감에 파멸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자신을 생각했을 때,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죄인이더라도 인간으로 남고 싶었다.

세인은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운명과 미래는 여러 갈래고, 세상이라는 호수 안에서 하나의 본질을 가지기도 한다.

한계가 분명한 가운데 시간이 내놓은 답은 언제나 파멸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인이 행복했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그 안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자신의 길 위를 걸었다.

그 다른 길 안에서의 세계수는 여전히 정한 타락을 하기 전이었다.

그저, 가까스로 붕괴 직전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본 다른 미래를 두려워했다.

그녀 안의 끔찍한 악은 세인과 세리스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선한 부분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녀는 훗날 자신이 파괴의 신이 될 것을 안다.

그렇다고 자살하자니 죽음이 두려웠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해서 정신마저 초월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정신이 붕괴할 일도 없는 것이다.

삶에 취해 그 분위기에 마비되어, 안락함에 취해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리지 않는 이상 죽음은 누구에게나 절망이고 공포였다.

세계수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그녀의 반은 증오에 미쳐 있었고 타락을 갈구했다.

동시에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다른 반은 세인과 세리스를 아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선한 반 조각조차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각자의 바람과 운명이 좁은 굴 안에 얽혀 있었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뱀들이 모인 장소처럼 말이다.

여러 줄기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뒤얽힌 가운데 뱀들은 나비처럼 변덕을 부리기도 하고, 때론 어려운 결심을 하기도 한다.

까마귀만 해도 그는 세인을 과거로 인도할 것인가에 대해 고뇌했다.

시간으로 가득 채워진 호수 속에서 각자 판단하고 내리는 결정들이, 어떤 운명을 잉태할지 완전히 알 수도 없었다.

스포일러들조차도 각자 다른 미래를 보는 마당이니 말이다.

*  *  *

「그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 속에서, 오욕으로 뒤틀려지고 은폐될 시간 안의 남녀는 각자 결심과 소원을 품었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있고 싶다는 소원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사랑하는 그녀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  *  *

거기는 어디일까?

죽은 사람 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몬스터 중 한 마리라도 알았다면 큰일 났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몬스터들은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좁은 굴이 만들어진 장소는 아주 방대한 곳이었다.

비슷한 굴만해도 수천 개가 가뿐히 넘어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굴들 너머로 복잡한 지형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좁은 굴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이제 한명 더 늘어났다.

싸늘하고 좁은 얼음 굴, 그 안에 얼어붙은 시신이 있었다.

웅크린 시체는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 없었다.

내리깐 눈과 꼭 다문 입을 성에가 뒤덮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 그렇게 아무도 찾지 못하던 시체 앞에서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세인과 유미리가 나타난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둘은 굳어 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한참 동안 웅크린 채 얼어붙어 있는 시체 앞에 서 있었다.

정지된 그 순간을 깬 것은 유미리의 설명이었다.

“마법사는 평정심이 흔들리면 안 돼. 언제나 흔들림은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에게 있어 치명적이야. 닉스는 그 틈을 파고들었고, 세계수가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도망쳐오지도 못했을 거야.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세계수의 도움 덕분이야. 물론 그녀의 도움은 큰 효과를 보진 못했지. 왜냐면 내가 여기에서 죽어 버렸거든.”

“….”

과거 그녀는 칼엘 앞에서 ‘유령과 같이 밤을 보낼 수 없으니까.’라는 말에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닉스와 승부를 겨룰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수동적으로 여행에 이끌려 왔었다.

세계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마법사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모습만을 보여줬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녀는 영혼 상태였으니까.

그녀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세계수가 그녀에게 임시로 사용할 육신을 주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물질계에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등 여러 편리를 제공했지만, 잘 가공된 거짓말일 뿐이다.

지금의 그녀는 영혼 상태로 이승에 머무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닉스와 마주친 유미리는 그와 맞서 싸웠다.

둘의 결정적인 차이라면 유미리는 준비가 안 되었고, 닉스는 유미리에 대해 준비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세계수에게서 자유로웠던 닉스에게는, 세간에 알려진 세리스도 문제였지만 잘 드러나지 않은 유미리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기습을 가해온 것이다.

유미리는 닉스의 수작에 평정심이 흔들렸고, 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다.

그리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중요한 시기에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유미리를 두고, 동료들은 그녀를 원망했다.

그리고 큰 피해를 입었다.

오욕으로 얼룩진 그녀가 이렇듯 쫓겨 와 좁은 굴속에서 비참한 끝을 맞이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무엇보다 굉장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하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유미리.”

“닉스는 함정을 계속 팠어. 몇 겹이나 말이지. 나는 그 거미줄에 보기 좋게 걸려든 거야. 바보같이 말이야. 감정에 흔들려서 이성의 경고를 따르지 않았으니 죽어도 싸지.”

유미리가 약속 장소에 도달하지 못했던 까닭이 있었다.

닉스가 그녀의 동생인 유고를 납치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미리를 보호하고 있던 기사들이 죽은 것도 물론이다.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세리스 쪽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유미리. 굳이 여기서 아픈 과거를 설명하지 않아도 돼.”

세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난 거기에 감쪽같이 넘어갔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세인. 넌 네가 있을 곳으로 되돌아가겠지?”

세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래.”

그로서는 유미리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이미 여기까지 왔다.

기어코 도착하고야 말았다.

이제 그녀는 자기 운명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녀가 운명대로 닉스를 물리쳐야 세상은 부서지지 않을 수가 있었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어.”

그리고 유미리는 다음 말을 잇지 않았지만, 세인은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그녀의 소원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을 알잖아, 세인. 나는 네 마음도 나와 같다고 믿어.”

그러나 세인은 눈을 질끈 감음으로서 그녀의 소원을 애써 무시했다.

만약 세리스가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춘다면 그의 기분은 어떨까?

이건 그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는 세리스와 맺어졌다.

그러니 세리스의 감정을 소중히 다루어야만 한다.

그걸 속으로 되뇌었다.

이성과는 반대로 세인은 이 순간 유미리를 끌어안고,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왜 아니겠는가?

더구나 하고 싶은 말도 무척 많았다.

그녀의 고통과 희생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다.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입 맞추고 싶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리스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알 수 없는 지금이라고 해서 유미리를 안고 입 맞춘다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세리스를 가진 책임 말이다.

“나는 너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어.”

그러자 유미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세인에게는 미래를 같이하는 반려자가 있다고 했으니까.

그녀의 소원은 무리한 것이었다.

세인의 눈빛을 보면, 유미리는 그가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세인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맺어지지 못할 사랑이다.

입맞춤조차 욕심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조차 미련 없이 접어야 할 때였다.

갑자기 세인은 유미리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놀란 유미리가 뒤로 물러날 때 그가 말했다.

“유미리, 잊힌 왕. 너에게 부탁할게. 이 시대를 구원해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이 시대가 맺는 다음 시대라는 열매를 위해서. 유미리. 여기서 이렇게 너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우리를 구원해줘. 오로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제발 우리 모두를 위해 너의 몫을 다해줘.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는 그런 너를….”

세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유미리가 밝게 웃었다.

애를 쓰며 억지로 만든 웃음이었다.

그녀는 그리고 손을 내밀어 세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련이 가득한 차가운 손길을 받으며, 세인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유미리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미리는 웃음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 대답은 아까 친구였던 세계수에게 보냈단 대답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말에 담긴 감정이 달랐다.

세계수에게 해준 대답이 의무와 우정이었다면, 지금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짙은 감정이다.

“기꺼이.”

‘세상과 너를 위해 기꺼이.’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얀 연기 같은 것이 잠시나마 좁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세계수가 그녀에게 입힌 가짜 육신이, 영혼이 떠나감에 따라 기화된 것이다.

연기가 동굴을 빠져나가는 동시에 얼어붙어 있던 시신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 닉스에게 허를 찔려 패배한 유미리.

세리스와 스승 칼스조차 정확한 힘을 몰랐던 마법사.

세리스 앞에서조차 본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았던 존재. 이 시대의 진정한 대마법사가 지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유미리는 또렷한 시선으로 세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는 안녕이란 말 대신 밝게, 다시 억지로 아주 밝게 웃었다.

그 소리 없는 웃음이 바로 유미리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미련을 고집하는 대신 세인에게 웃음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웃음이 그에게 가능한 한 오래 기억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끝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동굴 안에서 씻겨 내려간 듯이 사라진 것이다.

세인은 그녀가 떠난 후에도 계속 무릎 꿇은 자세를 유지하며 앉아 있었다.

뒤늦게 상실감이 그의 가슴을 치고 올라올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수리까지 타고 올라온 그 느낌이 그의 전부를 점령하자, 견딜 수 없었던 그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바닥을 내리치며 감정을 삭이는 세인이었다.

오로지 그만이 남겨진 좁은 굴.

그 안에서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 입술은 미처 끝맺지 못했던 아까의 말을 이제야 꺼내 놓는다.

“영원히 기억하겠다.”

그 쓸쓸한 다짐이, 좁디좁은 얼음 굴을 채우는 유일한 의미였다.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던 남자는 그렇게 괴로운 시간을 견뎌냈다.

인내하고 다시 인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