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 나는 다시 일어선다 (3)
세리스를 더 이상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사령관이 커다란 의자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높게 치솟아 있는 인간의 뼈로 만든 탑이 좌우로 흔들렸다.
전망이 좋은 구조물에 달린 하얀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사령관의 몸집은 끔찍하게 컸다.
코끼리 코와 같은 부위를 수염처럼 늘어뜨린 그는 눈도 여러 개였다.
그리고 목에서 이어지는 뿔이 척추를 따라 꼬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둔기를 잡은 그가 휘파람을 불자, 검은 하마가 달려 나왔다.
그 하마 위에 올라탄 사령관이 명령했다.
“특수 부대! 죽을 각오로 나를 따라라! 본진의 핵을 지켜야 한다! 그 눈이 감기면 닉스님의 시선이 차단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수뇌부가 몰려 있는 곳에는 닉스의 눈이 있었다.
그게 차단되면 닉스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발리스타를 이용해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 수도 없었다.
볼 수 없는데 어디에다가 폭격을 쏟아붓겠냐는 말이다.
닉스의 눈이야말로 여기 있는 몬스터들에게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사기진작 수단이기도 하다.
물론 닉스의 눈이 부서져도 몬스터들은 계속 싸울 것이다.
하지만 전과 같은 분위기일 수는 없었다.
함성을 지르는 괴물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강력한 힘의 파도, 피의 전차가 수레바퀴를 맹렬히 굴렸다.
그 앞의 모든 것들이 갈려 나갔다.
시체 더미가 갈라지며 양옆으로 밀려난 것은 물론이다.
사령관이 이끄는 부대의 뒤로 피구름이 일어났다.
그들의 흉악한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는 세리스가 있었다.
괴물들의 함성이 주변을 진동시킬 때 세리스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아직 적의 본진까지는 한참이었다.
그 중간을 거대하마 위에서 창을 곧추세운 악마가 가로막고 있었다.
사령관이었다.
“몬스터. 악마. 이노센트.”
그렇게 중얼거린 세리스가 손을 휘둘러 미스틸 테인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창이 옆으로 푹하고 꽂혔다.
앞을 향해 던진 게 아니라 오히려 멀리 치워 버린 것이다.
그녀의 하얀 손이 허리춤으로 움직였고, 이윽고 세리스의 호화로운 검집 안에서 낡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검날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찔한 빛과 함께였다.
그 압도적인 힘은 수많은 고련을 거친 자만이 다스릴 수 있는 힘의 결정체였다.
“너희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 선언 아래에서 세리스가 낡은 검으로 적들을 겨누었다.
그러자 빛의 광선이 공기를 달구며 직선으로 달렸다.
그녀 앞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괴물들이 차례차례 박살 났다.
두꺼운 철판을 몇 겹이나 덧대어 만든 사각형의 방패도 무용지물이었다.
마치 엿가락처럼 쭉 하고 늘어나더니 끈 형태로 흐느적거리다가 녹아 없어졌다.
완전한 소멸이었다.
그 소멸이 기세 좋게 달려오던 무리를 먹어 치웠다.
이 과정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주위의 모두가 똑똑히 목격했다.
허공에서 직선을 이루는 빛에 직격을 당하니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땅도 신음하며 아래로 녹아내린다.
그러면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나다가, 빛의 선 아래에 납작 몸을 엎드리며 눈치를 살폈다.
어떤 몬스터는 허겁지겁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하면 살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발끝부터 녹아들기 시작하자, 서서히 육신을 갉아먹는 파동에 큰 입을 뻐끔거리며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그런 몬스터의 머리 자체가 진동하며 원래의 색에서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결국 밝아지는 빛더미에 의해 겉에서부터 분해되었다.
단단한 외피가 사라지고 뼈와 신경 조직이 드러나고야 만다.
점점 실 같은 선들이 남으며 밑바닥까지 드러났다.
자제를 모르고 번쩍이는 빛이 마지막으로 상대를 붙잡고 속삭였다.
‘죽어라.’
그리고 그게 몬스터의 끝이었다.
그도 평상시에는 엄청나게 강한 힘을 가진 괴물이었지만, 세리스가 내뿜은 힘에 비하면 철저한 약자에 불과했다.
빛이 내린 말살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하마 위에 올라탄 사령관은 눈앞에서 모든 것이 증발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근육도, 뼈와 강철도, 산성 독같이 뜨거운 피도 의미가 없었다.
세리스가 검을 뽑으며 드러낸 힘은 모든 것을 죽여 없앴다.
그 소멸의 힘은 진정으로 신을 닮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적아를 떠나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게 바로 한 존재가 순수하게 도달할 수 있는 무력의 극치다.
진정한 완성인 것이다.
사령관은 공포마저 잊고 그 찬란한 빛에, 떨리는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가 보았다.
이미 그가 타고 있던 하마는 머리가 날아간 직후였다.
부들거리는 손끝이 빛에 닿자, 엄청난 고통이 그를 집어삼켰다.
“으아아아악!”
대장군의 갑옷은 물론 근육과 피가 위로 솟구쳤다.
처음에는 뼈와 피가 섞인 띠였다.
그 띠는 점점 가늘어지더니 티끌이 되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그게 사령관의 끝은 아니었다.
광선은 앞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도 모자라 계속 공기를 증발시키며 달렸다.
그리고 몬스터 진영의 장애물들을 뚫고 나갔다.
세리스가 검을 거두고 나서야 힘을 잃은 빛이, 몬스터들이 내세운 거대 방패에 굴절되어 하늘로 치솟는다.
그 빛이 구름 하나를 맞추자 구름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흩어졌다.
간신히 빛을 굴절시킨 지상 위의 방패는 부르르 떨다가 결국 와닿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땅 위에는 방금 일어난 자욱한 피의 수증기가 좌우로 퍼져 나가며 사방을 뒤덮었다.
그리고 세리스에게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세리스는 오연히 서서 그 수증기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몬스터. 악마. 이노센트가 네 상대가 안 된다면 이건 어떠냐?”
뜨거운 수증기가 세리스의 갑옷에 핏방울을 이룰 때, 뿌연 중심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점잖았고 묵직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수증기가 놀라듯 뒤로 물러났다.
새로이 탈바꿈한 사령관의 기세에 의해서였다.
사령관의 말을 들은 세리스가 입가를 거칠게 비틀었다.
그 역력한 불쾌감 앞에서 사령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말이다.
“형제.”
* * *
유미리와 함께 초록색의 바닷속으로 떨어진 세인은, 계속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가 느낀 초록색 물질의 정체는 물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래로 떨어질수록 구분이 모호해져 갔다.
점성을 가진 물질에서 점점 밀도가 낮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아래쪽의 유미리가 떨어지는 속도를 보며 확신했다.
‘여기를 채운 물질이 하나로 통일된 게 아니구나.’
죽은 몬스터의 잔해들이 주변에 가득한 가운데, 유미리는 그보다 훨씬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세인은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펴보았다.
주변에 뚜렷한 광원은 없었다.
하지만 어둠은 아니다.
초록색의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입을 열자 거품 같은 것이 얼굴 위로 지나갔다가 흩어졌다.
그리고 십여 분이 지나 다시 입을 열자 거품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그는 점점 더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허공에서 아래로 추락하듯이 말이다.
시간은 계속 지나갔다.
괴물들의 사체는 점점 수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깊이 아래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헤엄칠 수 있다 쳐도 위로 올라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세인은 손을 움직여 초록색의 물질을 잡으려고 해봤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도 전달받지 못했다.
그는 이상한 공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초록색의 물질은 끝도 없어 펼쳐져 있었고 바닥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떨어진 지 한참이나 되었는데도 주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초록색의 농도가 빚어내는 마블링만이 위치감각을 일깨워주고 있을 뿐이다.
세인은 환한 초록색에 눈이 피로해짐을 느끼며 눈꺼풀을 닫았다.
그런 그의 머리카락에 초록색의 실 같은 것들이 묻어났다.
유미리는 이제 세인의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각자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입을 열어 소리친다면 그녀에게 들릴 수 있을까?
세인은 자신이 있는 공간이 정의되지 않았다.
숨은 쉴 수 있었지만, 가슴이 갑갑하다.
그러다가 서늘한 느낌이 들어 눈을 다시 떴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커다란 검은 기둥들이 초록색의 공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초록색의 물질 속에서 형체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마어마하게 큰 검은 기둥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검은 물질과 만난 초록색의 세계는 차가워졌다.
세인의 살갗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는 생각했다.
‘잡을 수 있을까?’
거대한 검은 절벽 같은 것이 그의 근처에 있었다.
절벽 위쪽은 뾰족한 형태였는데, 간신히 거기에 찔리지 않고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천운이었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은 세인은 손을 뻗어 보았다.
하지만 검은 벽 같은 것은 닿을 듯 말 듯 하면서도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
세인은 조바심에 몸을 계속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벽이 성큼 다가왔다.
계속 떨어지는 가운데 그 벽을 잡는다 해도 몸에 무리가 올 수 있었다.
떨어지는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무기력하게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느러미도, 날개도 없는 세인이 몸을 뒤집어 검은 벽 앞으로 갔을 때였다.
뭔가가 그를 낚아챘다.
순간 위아래가 반전되며 피가 한쪽으로 확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메스꺼움에 세인은 구토감이 올라왔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를 낚아챈 대상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세인은 몸을 전율했다.
‘괴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괴물은 사자와 같은 앞발로 그를 움켜쥐고 있었다.
얼굴은 인간을 닮았는데, 붉은색 얼룩무늬가 도드라지는 긴 목을 세인 쪽으로 쭉 뻗어왔다.
덕분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괴물은 세인을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눈으로 호선을 그리는데, 기분 나쁜 음흉함이 깃들어 있었다.
여기에 있는 놈들은 죽거나 다 이동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 있는 녀석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세인에게 괴물이 말을 걸어왔다.
“얼마 만에 보는 먹잇감인지 모르겠어. 기쁘구나. 넌 어디에서 왔지?”
세인은 입을 다무는 것보다는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을 꺼내놓았다.
“위에서.”
그러자 괴물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위? 위쪽 어디?”
“가장 높은 곳에서 여기로 추락했다.”
“….”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괴물은 세인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그의 냄새를 킁킁 맡아댔다.
그러다가 히죽 웃었다.
“뭐 어쨌든 좋아. 넌 내 말 상대가 되어 줘야겠어. 난 가미긴의 아들인 기미아야. 난 아버지가 내는 수수께끼 따위에는 관심 없어. 대신 이야기를 좋아해. 그러니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 그리고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질 즈음엔 너를 먹을 거야.”
기미아는 세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음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도 오래가진 못했다.
황금색의 빛이 그의 몸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으윽!”
세인이 한 짓은 아니었다.
그는 여기에 대해서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색의 빛은 아래쪽에서 솟구쳐 왔다.
세인은 눈앞에서 괴물의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았다.
황금색의 빛은 괴물의 얼굴, 반을 날려버리며 결정화시켰다.
“크아악!”
결국 불타는 고통에 기미아는 세인을 놓쳐버리고야 만다.
그리고 죽음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기미아는 이곳 세상에서 자신을 유지하던 힘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래로 떨어지는 세인은 위쪽에서 괴물의 몸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초록색의 불길이 일어나며 자취를 감추자 어리둥절해졌다.
“소환된 건가? 왜 이제야? 강제가 아니었나?”
추측이 담긴 혼잣말대로, 기미아는 미래로 가버렸다.
* * *
기미아 주변에 있는 강력한 존재가 기미아의 소환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런 의지에 따라 주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기마아가 강력한 타격을 받자, 강력한 존재의 영향력으로부터 기미아가 이탈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이동이 되었다.
결국, 기미아는 잭이 있던 감시탑에서 몸을 드러냈다.
질리언에게 일부러 가위바위보를 져주고 잭이 남은 경계초소였다.
기미아의 남은 한쪽 눈이 세인을 담았다.
그는 얼떨떨한 상태에서도 세인을 알아보았다.
‘너는?’
기미아는 세인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때 아마 세인이 기미아를 고문했다면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테러로드나 테러 나이트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가미긴 아들인 기미아는 유용한 정보도 알고 있었다.
그런 정보를 세인이 얻었다면, 그의 미래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인은 그를 단숨에 처치해 버리고 말았다.
미래에 있던 세인의 입장에서는 몬스터를 보자마자 해치워 버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기미아가 그렇게 미래로 가서 살해되었을 때, 그에게서 벗어난 세인은 밑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기미아를 해치웠던 황금색의 빛이 어디에서 날아왔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목적을 까맣게 잊게 해주는 광경이 그의 밑에서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