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 나는 다시 일어선다 (2)
모습을 드러낸 칼스가 말없이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안에서 구슬이 만들어졌다.
곧이어 떨쳐진 폭염의 구가 세리스를 향해 날아간다.
회전하며 빠르게 이동하는 화염의 구슬이었다.
일단 터지기만 하면 사람 따위는 금방 익은 고깃덩어리로 만들 수 있는 위력이다.
하지만 귀찮다는 듯 세리스가 창을 휘두르자, 지근거리에서 화염 구가 터졌다.
흩어진 불덩이가 땅에 여러 개의 촛불을 만들었을 때 칼스의 모습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세리스는 턱을 치켜 올렸다.
공중에서 마법을 준비하는 칼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의 몸은 붉은 보호막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마법을 전개하기 위한 방패다.
그걸 바라본 세리스는 상대가 제대로 마법을 전개한다 해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대일 상황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그녀가 해야만 하는 일은 명확했다.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곧바로 창을 집어던졌다.
그 창은 지체없이 날아가 칼스의 실드에 꽂힌다.
칼스는 주문을 외우면서 다시 실드를 중첩으로 펼쳤다.
그러자 실드에 층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층진 실드가 뒤로 밀려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인다.
원래 미스틸 테인이 스스로 가진 힘도 만만치 않았다.
괜히 그가 마법의 창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다가 세리스의 힘까지 실렸으니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뒤로 밀려나며 버티던 실드들이 비명을 질렀다.
압력의 임계점에 다다른 것이다.
이윽고 종잇장처럼 찢기는 방패다.
칼스를 보호하지 못하고 실타래가 풀리듯 나선형으로 흩어졌다.
결국 거대한 폭발이 공중을 휩쓸었다.
칼스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세리스가 거침없이 진격해 오는 게 그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해도, 멀리에서 충분히 주문을 외운 후 공격을 가해야만 했다.
물론 그랬어도 소용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칼스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한편으로는 칼스도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으니, 자신감이 팽배한 것이 이해는 간다.
그는 대마법사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대마법사가 지금 보기 좋게 연기를 피우며 추락하는 중이다.
그런 칼스의 밑에서는 세리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스는 위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펀치를 아래에서 위로 날렸다.
그러자 흙더미와 함께 일어난 충격파가 칼스를 휩쓸었다.
충격파가 칼스를 쳐올리며 흔드는 것을 바라보지도 않은 세리스가 기합을 내질렀다.
다크 엘프들과 함께 몬스터들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차적인 파괴 에너지가 원형을 그리며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자 두꺼운 갑옷을 앞세우고 달려오던 코뿔소들이 터져나간다.
그다음 일어난 에너지 파동이 원을 그리며 두 겹 세 겹의 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땅이 출렁이고 사방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 위의 몬스터들이 피곤죽이 된 것은 물론이다.
다크 엘프들은 민첩함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올랐으나 기파에 내부가 진탕되는 것을 느끼며 피를 토해냈다.
낙엽처럼 땅에 떨어져 신음할 때 세리스의 차가운 눈빛이 그들을 한차례 쓸었다.
대마법사와의 싸움에 끼어들면 누구라도 죽여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녀는 다시 칼스에게 집중했다.
칼스는 어느덧 땅을 밟으며 양손을 앞으로 내민 상태였다.
무수한 붉은 빛이 그의 손에서 일어났고, 응축된 화염 에너지가 수십 개의 구를 만들어 냈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듯한 세리스의 앞에서 구가 부딪혔다.
콩을 볶는 듯 따닥이는 소리와 함께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이제 땅은 몸살을 앓는 듯이 신음을 지르며 수십 개의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칼스의 공격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왼손이 좌에서 우로 움직이며 바람을 불렀다.
그 바람을 타고 들어선 것은 검붉은 화염이다.
폭염의 장벽이 세리스의 옆으로 들이닥쳤다.
철이라도 녹일 것 같은 검붉은 불길은 드래곤의 숨을 연상케 했다.
몬스터들도, 인간과 다크 엘프들도 잠시 숨을 멈추고 불타는 장벽을 보았다.
차원이 다른 강자들의 전투가 이 전투의 향방을 가를지도 몰랐다.
모두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오를 만큼 엄청난 불길이었다.
저렇듯 들이닥친 고온의 불길 속에서라면 누구라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바로 평범한 인간의 운명이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세리스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고작 이겁니까?”
불길 속에서 동상처럼 서 있던 그녀가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빛의 파동이 일어나며 불길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순수하게 정제된 극한의 힘이 모공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푸르스름한 파장이 잠시 화염과 일치되었다.
그런데 둘은 너무 이질적인 힘이었다.
빛의 파장이 가진 것은 물리력에 국한되지 않았다.
결국 푸르스름한 빛이 포식자처럼 불을 먹어치운다.
좀 더 시간을 주면 불이 패배를 인정하고 사라질 것이 뻔해 보였다.
칼스는 약간 질린 얼굴로 푸른 불길에 휩싸인 세리스를 지켜보았다.
숨 막히는 불길 속에서 세리스가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자 빛의 폭발과 함께 불길이 밀려났다.
그 기파에 멀리 있던 사람들도 뒤로 몇 걸음 물러날 정도였다.
칼스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그가 뒤로 밀려나는 가운데….
세리스의 안광이 칼스에게로 쇄도했다.
일직선을 그은 안광 끝에는 세리스의 펀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칼스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간 세리스의 주먹은 그의 실드를 박살 냈다.
그리고 기어코 얼굴을 허용한 칼스가 땅에 처박혔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칼스를 다시 세리스의 주먹이 두드렸다.
그러자 칼스의 얼굴이 쉴새 없이 흔들리며 피를 뿜었다.
“으윽!”
케이드에게 약점을 잡힌 칼스는 그의 의지대로 놀아났다.
하지만 그 이유가 철저하게 약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몬스터쪽을 택했고, 동시에 볼모인 엘프들을 위해 수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체면을 구기는 것이지, 원래는 그도 강자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정말 안 좋았다.
지금 몬스터들 앞에서 보란 듯이 실컷 주먹질하고,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세리스였다.
방금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몬스터들의 사기가 꺾인 것은 물론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멋지게 공격했다면 칼스가 패배한 개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리스는 개 패듯이 칼스를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마법사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는 마당이다.
“다크 엘프 부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뭔가 착오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북쪽 세계수가 인질로 잡혔다지만, 엘프들이 몬스터의 편에 설 분들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군요.”
말은 공손하게 하지만 칼스의 목을 쥔 세리스는 그를 바닥에 처박았다.
땅이 흔들리며 돌조각들이 튀어 오를 만큼 강력한 힘으로 말이다.
다시 칼스를 위로 끌어당긴 세리스는 그를 한 번 더 땅에 처박았다.
“크헉!”
칼스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세리스의 얼굴에 닿았다.
그 순간, 칼스의 손안에서 붉은 화염이 줄줄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세리스는 불꽃 속에서도 멀쩡했다.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흔들어 불을 털어버리는 그녀였다.
마치 애들 장난하냐는 식으로 말이다.
“당신이 설령 대마법을 펼쳐도 저를 어쩔 수는 없습니다. 학자라면 학자답게 그 지식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십시오. 앎에 힘쓰지 않는 삶이라니, 누가 당신을 학자로 보겠습니까? 지식으로 펼친다는 게 고작 몬스터를 위한 폭력뿐이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지식을 알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세리스는 평소 엘프들의 수준을 알겠다며 비아냥거렸다.
아예 엘프들까지 싸잡아 모욕하는 것이다.
세리스는 칼스를 놔준 상태에서 그를 걷어찼다.
허벅지 아래를 차인 칼스의 몸이 장난감처럼 반원을 그릴 때 세리스의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마법으로 강화된 칼스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힌다.
그런 그에게로 다가오는 세리스가 멈추지 않고 조롱을 퍼부었다.
생각할수록 몬스터들의 편에 선 엘프들이 괘씸했기 때문이다.
“인간 마법사들은 자존심이 상하지만, 동료를 위해 그 지식을 폭력적 수단으로 씁니다. 그러면서도 그 행위에 수치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적 양심을 저버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희생하고 있습니다.”
“잠깐! 나도 사정이….”
“그런데 당신은 높은 수준에 이른 학자로서 고작 한다는 게 몬스터들의 앞잡이입니까? 자존심을 꺾고 전투에 나서는 인간 마법사들의 분루와 당신의 오늘이 너무 비교되는군요.”
세리스는 입을 열려는 칼스의 얼굴을 다시 걷어찼다.
그러자 피와 함께 칼스의 이 몇 개가 공중으로 치솟는다.
세리스는 칼스를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두들겨 팼다.
얼굴을 발로 걷어차고 멀리 날아가는 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칼스의 몸이 공중에서 덜컥 굳더니 세리스 쪽으로 날아왔다.
세리스의 힘이 끌어당긴 것이다.
이 모습을 보자니 대체 누가 마법사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 상태로 끌려온 칼스가 회심의 마법을 썼다.
하지만 세리스의 몸 주위에서 빛나는 성광 같은 것이 그것을 파괴해 버렸다.
흩날리는 불티 속에서 세리스의 주먹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 기세에 검붉은 불티가 황급히 사방으로 달아날 정도였다.
칼스는 고스란히 그것들을 맞았다.
그리고 세리스의 무릎에 턱을 맞아 쓰러졌다.
그게 바로 칼스의 의식이 견뎌낼 수 있던 마지막이었다.
“우아아아!”
“이겼다!”
인간의 본진 쪽에서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뒤늦게 터졌다.
깃발들이 춤을 추듯이 좌우로 흔들렸다.
피투성이 상태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던 병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를 터트렸다.
세리스가 아무리 강해도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다 챙겨줄 수는 없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렇듯 병사들의 가슴속에 있는 뭔가를 북돋아 줄 수는 있었다.
강력한 자를 처치해 버렸다는 소식이 인간들에게 힘이 되었다.
동시에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다.
총대장이나 마찬가지인 세리스가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는 무적이었다.
방금만 해도 강한 적을 물리쳤다.
그녀가 있는 한 지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믿음이 물결을 만들었다.
그 물결이 독려처럼 아군을 휩쓴다.
세리스는 칼스가 기절한 것을 알면서도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그의 얼굴을 발로 공 차듯이 몇 번 걷어찼다.
그리고 칼스의 얼굴 위로 발을 올리며 땅에 짓이겼다.
대마법사 하나를 걸레로 만들어 버린 세리스가 칼스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는데, 그 차가운 눈빛에 적들 모두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세리스의 폭력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잘생긴 칼스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쥔 그녀는 상대를 질질 끌며 수십 미터를 전진했다.
그런 세리스에게는 학자를 대하는 최소한의 존중도 없어 보였다.
무슨 쓰레기 대하듯이 가지고 논 것이다.
그건 칼스 개인에게도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의 세리스가 보여주는 그 모습은, 마치 몬스터들에게 있어 고작 준비한 게 이거냐는 시위 같았다.
대마법사를 무슨 곡식 자루처럼 끌고 가는 건, 희극 속에서라면 굉장히 웃긴 대목이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몬스터들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어지간하면 몬스터들이 공포를 느끼기 어려운데, 이런 압도적인 세리스의 무위 앞에서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이제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강한 세리스의 모습에 치가 떨리는 것이다.
세리스는 칼스를 멋지게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몬스터들의 기세를 꺾는 장치로 이용했을 뿐이다.
동시에 아군의 사기가 불타올랐다.
이게 오늘날 적이 내던진 비장의 카드를 대하는 세리스의 자세였다.
결국 칼스를 무슨 쓰레기처럼 멀리 던져 버린 그녀의 행동을 보며, 몬스터 사령관이 호통을 쳤다.
애꿎은 부하를 향해서였다.
“케이드 님은? 소식이 없나?”
“아직입니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