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04화 (204/307)

# 204

& 나는 다시 일어선다 (1)

얼어붙은 평야 한쪽을, 달려가는 인간의 군세가 가득 메웠다.

말들은 내일이 없는 생물처럼 질주하고 있었고 그 위에 올라탄 인간들도 같은 눈빛이었다.

말발굽이 대지를 두드리며 북소리를 냈다.

반대쪽에서 경보의 의미로 괴물의 북이 울리고 있었다.

말들이 내는 소리는 괴물의 북소리에 응수하는 또 다른 북소리였다.

용감히 나선 선두의 흔들리는 시야 속에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이 잡혔다.

병사들은 등에 멘 활을 풀어 쏘았다.

성게의 가시처럼 솟구치는 화살이 반대쪽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덕분에 가장 먼저 달려 나오던 몬스터들은, 대부분 고슴도치가 되어 사망했다.

커다란 몇몇 늑대들은 몸에 화살을 주렁주렁 매달고 일어났다.

그리고 포효를 터트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 포효가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악에 받친 인간들은 늑대를 창으로 꿰뚫을 뿐이었다.

복부를 관통당하고도 늑대들은 상체를 숙인 채로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앞발을 휘저으며 창병을 공중으로 채어 올렸다.

떠오른 병사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다른 늑대가 몸을 물어 버렸다.

그리고 씹으려는 찰나 기사의 랜스가 늑대의 몸에 이격을 먹였다.

그러자 늑대가 쓰러지며 구슬픈 울음을 흘린다.

하지만 병사들은 사정 봐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늑대를 향해 서너 명이 죽을 때까지 찔러대었다.

작게 만든 구릉을 넘어가려니 말의 속도가 늦어졌다.

그러자 상반신을 폭발적으로 불린 괴물들이 달려와 인간들에게 맞섰다.

이들은 커다란 덩치로 탱커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강한 힘도 가지고 있었다.

가슴과 어깨에는 딱딱한 껍질이 붙어 있어서 햇살에 빛나고 있다.

괴물들은 자신의 몸을 때리는 창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숭이처럼 긴 팔을 휘둘러 주변의 인간 머리를 후려갈겨 버렸다.

그러자 피 분수가 터지며 그들의 상반신을 물들인다.

그 피가 입가에도 튀었는데, 괴물은 침처럼 뾰족한 혀로 입가를 핥으며 ‘켈켈’ 거렸다.

땅에서는 지네들이 일어나며 물결처럼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몸에 붙은 가시 위로 달려가던 인간이 박혔다.

몇 마리 말들은 지네에 얻어맞고 뒤로 자빠지기도 했다.

인간들과 몬스터가 뒤섞이자, 숨 가쁜 목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더러운 죄인들을 죽여라.”

군단장들의 명령 아래 다시 목책 밖으로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2의 물결이다.

그들은 제각기 가슴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압도하려 들었다.

양손에 도끼를 들고 인간 사이를 휘젓는 놈도 있었다.

그 몬스터는 양손에 쥔 장대 도끼를 휘둘러 인간들을 추수했다.

닥치는 대로 베고 찔러 피의 길을 열었다.

그 뒤로 황소 머리를 한 괴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진군에 인간들이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려는 가운데 발에 짓밟혔다.

인간들은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진흙의 일부가 되어갔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

그 숨 막히는 지옥이 점점 영역을 확대해 갔다.

점점 뜨거워지는 살육의 현장 속에서 광기가 한계도 모르고 치솟았다.

심지어 괴물 중에서는 이제 아군 지대를 가리지 않고 활을 쏘아대는 녀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군단장들이 그걸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활쏘기를 독려하는 군단장도 보일 정도였다.

활시위를 떠난 수많은 장침이 하늘 위로 떠 올랐고, 포물선의 끝에서 빽빽한 소나기로 내려왔다.

인간들은 방패를 높이 쳐들고 그 폭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하늘에 신경 쓰느라 전방을 살피지 못하면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건너편에서 등에 화살이 꽂힌 채 달려오는 괴물과 치받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뒤로 날아간 인간과 괴물이 뒤엉킨 상태로 데굴데굴 굴렀다.

하필, 굴러가다가 도착한 곳이 하반신을 땅에 파묻고 있는 괴물 앞이다.

망치처럼 좌우로 돌기가 솟아 나온 괴물이 고개를 뒤로 크게 젖혔다가, 앞으로 맹렬히 내리치자 이런 소리가 났다.

퍽!

마치 호두를 부수고 난 만족감을 느끼는지 괴물이 흐흐흐 하고 웃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옆에서 돌진해 온 인간의 창에 옆구리를 내어줬다.

땅이 부서지며 잠복해 있던 몬스터가 뛰쳐나오는 일도 잦았다.

흙덩이가 구르는 가운데 성난 황소처럼 투레질한 몬스터의 소리가 크게 들렸다.

몬스터들은 흥분과 파괴 욕구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그래서 가지는 장점은 커다란 파괴력이었다.

약점은 집단행동을 보이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건 당연했다.

테러 나이트 정도가 와야 전체적인 통제가 가능한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지휘부로서는 세밀한 명령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해봐야.

진격해라, 저기를 쳐라, 화살을 쏴라 정도일 뿐이다.

누군가를 요격하거나 미끼가 되라는 주문은 무리다.

목이 나무통처럼 두꺼운 몬스터의 입이 벌어지자 입안이 붉게 빛났다.

뒤늦게 그걸 발견한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피하려고 할 때, 뜨거운 불길이 쏟아져 나온다.

붉은 도마뱀의 혓바닥 같은 불길은 사람들을 갑옷째로 녹여 버렸다.

달구어진 공기가 화르륵거리면서 쉿쉿 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면에 들러붙은 채로 꿈틀거리는 인간을 괴물들의 두꺼운 발이 짓밟았다.

육편들이 굴러다닐 때 다시 불길이 쏟아지고 인간들을 짓밟는 몬스터의 몸마저 데웠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검은색 동체로 거듭난 괴물들의 입이 벌려진다.

그리고 광소를 터트렸다.

낮고 메스꺼운 웃음이었다.

그 속에는 음흉함마저 섞여 있었다.

지금 전체적인 전황을 보면, 인간들이 집단을 이뤄도 몬스터들을 당해내는 것이 힘들었다.

몬스터들은 힘과 속도 모두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은 아직 참전도 하지 않았다.

땅속에서는 몬스터들이 만들어 놓았던 함장이 작동되며 인간들을 끌어당겼다.

휘릭휘릭 소리를 내며 촉수와 낫들이 움직이고 나면 구덩이 속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포식을 마친 함정 위로 괴물들의 웃음소리가 섞인 뜨거운 바람이 분다.

물론 그 바람에 맞서는 사람도 있었다.

“3군은 남쪽으로. 4보병을 받쳐라.”

기사단을 이끌고 달려가는 세리스가 검을 들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명령은 말소리로, 나팔 소리로 북과 깃발을 타고 번져 나갔다.

명령을 내린 세리스는 타고 있는 말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박차를 가하며 미스틸 테인을 뽑아 들었다.

번쩍이는 그 창이 전장 속에서 아찔한 빛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때.

몬스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감지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날개가 달렸다고 한들, 세리스가 창을 떨치는 속도보다 빠를 수가 없었다.

순간 거센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세리스가 창을 앞으로 뻗었을 때, 그녀의 망토와 금빛 머리카락은 거꾸로 치솟았다.

저항 불가의 힘이 번갯불처럼 쏘아지며 길을 열었다.

거기에 속절없이 휘말린 몬스터들이 터져나가면서 가루가 되었다.

힘은 빛으로 가시화되었고,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는 최소한의 자제도 없었다.

그냥 그 빛에 닿는 것은 모조리 폭발해 사라졌다.

땅이 울리고 피들이 솟구치다가 기화되어 사라지는 가운데, 멀리에서 피 안개를 보던 군단장들이 몸을 떨었다.

“저것이 세리스의 힘인가….”

전에도 느꼈지만 지금도 이렇게 보니 무시무시했다.

세리스가 방금 보여준 힘에 적의 수뇌부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무의 극에 다다른 세리스를 해치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발목을 잡으려 할 뿐이다.

*  *  *

“2개 대대를 출발시켜라. 에워싸. 최대한 지연시켜!”

보라색 손톱을 가진 사령관이 손가락을 뻗으며 명령하자 수많은 몬스터가 달려나갔다.

쿵쿵 지축을 울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세리스 앞에서 폭발해 사라졌다.

그걸 보는 몬스터들은 너무 어이가 없다 못해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몬스터들이 아닌데 세리스가 단숨에 그들을 녹여버린 것이다.

“이야기책에 써도 믿지 않겠군. 빌어먹을 년.”

보다 못한 군단장 여러 명이 세리스의 앞을 막아섰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눈이 여러 개 달린 군단장들이 제각기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그 앞에서, 세리스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창을 던졌다.

그녀를 중심으로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뛰쳐나간 빛의 창이 선두에 위치한 군단장의 몸을 박살 내 버렸다.

창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뒤쪽의 군단장을 관통했다.

엄청난 빠르기였고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는 군단장의 뒤에서 다른 군단장이 두 손으로 미스틸 테인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멈추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마법의 창은 군단장을 끌고 계속 날아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거대한 폭발이었다.

치솟는 불기둥이 대지를 잡고 흔들었다.

그 폭발에 비산한 돌조각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자.

세리스의 주변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쪽은 아직도 치열한 싸움 중이었다.

“왜, 케이드 님이 그토록 조심하라고 했는지 알겠구나.”

피어오르는 연기가 자욱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몬스터들이 치를 떨었다.

세리스 또한 멀리에서 피어오르는 피구름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앞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빛살처럼 날아온 미스틸 테인이 그녀의 손에 잡혔다.

이게 바로 자신의 힘으로 궁극의 경지에 오른 최강자가 무기를 수거하는 방식이었다.

방금 보여준 그녀의 힘 하나만으로, 남과 북이 전율에 휩싸였다.

마창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낸 세리스가 주위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양쪽으로 나뉘어 본진을 치세요.”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우로 흩어졌다.

세리스가 이곳을 전장으로 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이노센트들의 발리스타인 붉은 화산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폭격은 인간들에게 있어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래서 레드 블레이크를 떠나 무리하게 전선을 앞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그 덕분에 아직은 발리스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어.’

세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몬스터들의 생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최후의 궁지에 몰린 녀석들이라면, 이곳을 폭격지대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랐다.

악에 받쳐 모두가 파멸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재정비를 마치고 이런 필사의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포격 위치를 수정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안에 결착을 본다. 최소한의 시간으로 빠르게 전투를 종식 시키겠다. 포격 위치가 닿지 않는 곳까지.’

위풍당당하게 선 세리스가 가볍게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고함을 치며 달려오던 거대한 괴물이 박살 났다.

괴물이 좌우로 쪼개지며 뜨거운 핏물이 그녀를 덮쳤다.

세리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맞았다.

붉은 피가 그녀를 혈인으로 만들었을 때 세리스가 기합을 토해냈다.

“하앗!”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방금 죽은 괴수의 뒤로 달려오던 몬스터의 기병 부대는 지금 불더미 속으로 뛰어드는 셈이 되었다.

비명과 함께 으스러져 가는 몬스터들 속에서 세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전진했다.

그녀를 뒤덮었던 피는 붉은 연기를 만들며 증발해 버렸다.

여기 있는 생명체들이 느끼기에 이 전투는 세상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얼어붙은 평원이지만 생사의 몸부림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 죽음의 면적 위에서 세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강했고, 강하다 못해 압도적이었다.

그 압도는 다시 절대에 가까웠고 말이다.

그녀의 앞을 막는 것은 수초도 지나지 않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어떤 강력한 무기나 갑옷도 소용이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 왔던 비밀 병기도 채 몇 분을 버티지 못했다.

세리스가 오만한 자세로 빛의 창을 떨치면 지진과 벼락이 일어났다.

뜨겁게 달구어진 공기가 그녀를 피해 소스라치듯이 물러났고 몬스터들도 차마 본능을 앞세우지 못했다.

너무나도 커다란 힘에 기가 질려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움직임은 곧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몬스터들 입장에서는 본진을 향해 돌진해 오는 그녀가 부담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천천히 걸어가는 세리스는 주변을 초토화하며 스스로 미끼가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시선을 잡는 바람에 양옆으로 갈라진 기사들은 병사들을 다독이며 큰 흐름을 만들 수가 있었다.

“누가 나서서 제발 저년을 막아! 좀 막아보라고!”

연이은 굉음 속에서 군단장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 명령에 두꺼운 앞니를 드리운 타이거가 달려들다가 세리스의 주먹질 한방에 무릎을 꿇었다.

주먹이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충격파에 휩쓸린 타이거의 머리는 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걸 보면 전에 세리스가 세인을 엄청나게 봐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세인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이런 주먹을 수십 대나 맞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세리스의 자비심 때문이었다.

이렇듯 몬스터가 다가서는 족족 박살 나서 흩어질 때, 순간 세리스의 앞으로 이질적인 기류가 흘렀다.

군단장의 막아달라는 비명에 화답하듯이 말이다.

콰앙!

세리스는 한 손으로 쥔 창을 비스듬히 틀어 날아오는 붉은 빛을 쳐냈다.

튕겨 난 붉은 빛이 땅에 닿자 폭염이 일어난다.

그 열기가 세리스의 파란 망토를 몇 차례 들었다가 놓았다.

눈을 가늘게 뜬 세리스는 창을 비스듬히 든 상태로 중얼거렸다.

“엘프?”

그때 붉은 연기가 흩어지며 칼스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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