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03화 (203/307)

# 203

& 긴 여행을 마치고 (4)

“여러분.”

낮은 목소리였지만 신기하게도 아주 멀리 서 있는 병사들의 귀까지 목소리가 뚜렷이 전달되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병사들은 차려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습을 드러낸 세리스에게 최상의 예를 표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세리스가 이미 오래전에 금지한 지 오래다.

모두가 숨을 죽였고,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 소리만이 세리스의 주변에 자리했다.

지금의 그녀는 모두에게 있어 위풍당당한 투쟁의 여신이었다.

그 여신이 이제 고백한다.

“전세는 기울었습니다. 이대로는 승리가 희박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많은 탈영병을 죽였다.

그리고 거침없이 사지로 병사들을 몰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욕하지 않는다.

다들 그녀의 진심을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녀는 언제나 솔직했고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선두에 서서 괴물들을 무찔렀다.

“그러나 우리는 나아가 싸울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자식들이. 형제가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저는 세리스라는 위치의 이름을 버리고, 단 하나. 인간의 이름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뜨거운 울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병사들의 두 눈을 뜨겁게 적셨다.

인간애란 분명 그런 전염성이 있었다.

“오늘. 최선을 다해 저 진실을 매몰시킬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리스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황금과 은으로 만든 검집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의외로 수수한 검이었다.

하지만 그 검을 다른 누구도 아닌 교황이 인정했다.

‘검의 본질을 떠나 빛의 선봉장. 세리스가 드는 검이 바로 성검이다. 우리가 그것을 보증한다.’

그리고 세리스가 든 검 아래 수많은 인간이 몰려들었다.

전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 것은 물론이었다.

탈영자들은 비밀엄수를 위해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그 외에 전쟁터에서 죽기도 많이 죽었다.

그리하여 이제 여기 남아있는 자들은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모두가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각오만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뭔가가 필요하다.

세리스는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두가 검을 우러러보는 가운데, 세리스가 검을 내리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의 형제들. 당신들에게 나는 방금 나의 의지와 나의 심장. 내 모든 것을 보여드렸습니다. 나는 이것을 바쳐 오늘 인간을 위한 거짓말쟁이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이런 저를 따라 선의 앞에 선 배덕자가 되어 주십시오.”

황금의 머리카락을 빛내는 성기사, 세리스.

그녀 앞에서 병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무기를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힘을 주었다.

다들 이를 악물고 세리스의 이름을 외치려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방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세리스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은 허락될 수 없음이었다.

세리스가 단상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수백 명의 기사가 검을 반쯤 뽑았다.

그리고 그 자세로 그녀의 말을 기다린다.

기사들.

그들이야말로 가장 선두에서 오늘 기필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리스는 먼 훗날 힐다에게 건네줄 말을 그들에게 내렸다.

“나는 약점이 없고 완벽한 기사를 바라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상관없어요. 저와 당신들 모두, 그 거짓말로 타인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제겐 오늘 그런 형제가 필요합니다. 싸워주십시오. 거짓말을 하고 목숨을 포기해 주십시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인간을 위해서.”

이 시간, 그녀는 시공을 초월해 자신의 가치관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떤 시간의 채로 걸러내더라도, 변치 않는 믿음이 그녀를 끊임없이 결정했다.

그리고 정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다시 태어나도 변하지 않는 본질이 여기에 있었다.

그때 한 노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전체! 발검!”

그러자 모든 기사가 검을 완전히 뽑았다.

모두의 검이 불길한 하늘 아래에서 번쩍인다.

악의가 가득한 하늘 아래, 노기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은 여태껏 그랬듯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보고 들었다.

“기사는 이익을 좇는 자가 아니다!”

노기사가 선창하자 모든 기사가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기사는 승리를 좇는 자가 아니다! 기사는 약자를 지키고! 목숨을 나눠주는 자이다. 기사여 약자 앞에서 약해지고….”

누구나 죽음이 두려웠다.

끔찍하게 생긴 몬스터가 너무 겁이 났다.

그러나 물러날 수 없다.

이 땅의 뒤에 그들이 지켜야 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훨씬 뒤에는 져버릴 수 없는 인간의 자존심이 있었다.

또 서로가 서로를 지켜 줄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이 있었다.

결코 그 믿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포를 쫓으려는 양 기사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렇게 세리스의 뜻과 노기사의 의지를 좇았다.

“기사여 강자 앞에서 한없이 오만해 져라. 기사여 악 앞에서 거침없이 선을 변호하거라. 기사여 네가 벌거벗어야 할 때는 오로지 약자 앞에서다.”

마지막으로 기사여 한계 없이 명예로워라.

네가 이것을 심지로 품고 매일 아침 일어나.

네 의지를 실천할 수 있다면, 너는 이미 모두가 갈구하던….

“기사다.”

노기사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기사들은 저마다, 선임기사 앞에서 처음으로 선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다졌다.

오늘날의 그들은 전선 뒤의 약자들을 위해 서 있었다.

그러니 죽음이 벌어져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건 최소한 기사다운 죽음이니까.

기사들의 굳은 결의가 끝났을 때, 이 모든 것을 병사들과 함께 지켜보던 세리스가 애써 밝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의 동지들. 이제 갑시다. 가슴 아픈 전쟁을 하러.”

깃발들이 사람의 손에 들리고 움직인다.

곧 벌어질 전투를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외곽 쪽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  *  *

얼어붙은 평원 한쪽에는 인간들을 태우는 악취로 가득했다.

산채로 태우는 곳도 보이고, 시체들을 정리하느라 불을 놓은 곳도 보였다.

화염 속에서, 그보다 더욱 붉은색의 보석들이 빛을 발했다.

훗날 화룡석으로 불리게 될 돌이었다.

빨갛게 빛나는 화룡석.

그걸 여러 개의 눈으로 바라보는 두꺼비였다.

두꺼비는 눈들을 빛내며 이렇게 말했다.

“배고파.”

동시에 두꺼비의 두 손이 움직였다.

불길 속의 인간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두꺼비는 허기를 채운다.

두꺼비 앞에서 게눈 감추듯이 사라지는 인간이었다.

어찌나 허겁지겁 먹는지, 검붉은 진흙 같은 것이 두꺼비의 얼굴에 잔뜩 묻었다.

동시에 주위에서는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에 인간을 포식했는데, 두꺼비의 짓에 다시 허기를 느낀 것이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뼈로 만든 깃대에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흔들렸다.

결국 다른 동료들도 두꺼비의 식탐에 동참한다.

그런 그들의 근처에는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벌레들이 투석기를 끌고 있었고, 드물게 오와 열을 맞춘 몬스터들도 보였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녀석은 물론이고,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는 트롤도 보인다.

활을 들고 있는 여우 같은 놈들은 낄낄거리면서 서로의 어깨를 치느라 한창이었다.

장난질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지휘관 몇은 급조한 목욕탕 속에 모여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기도 했다.

목욕탕에 들어간 액체는 바로 인간의 피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피에 메뚜기 기름을 섞었다.

끈적한 피거품이 그들의 턱 어림까지 올라와 진득하게 엉겨 붙었다.

그 거품은, 괴물들의 꺼끌꺼끌한 비늘 위에서 기하학적인 무늬를 남겼다.

그때 한가로운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듯, 아주 멀리에서 나팔소리가 들렸다.

인간 진영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몬스터들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높게 세운 나무장벽 때문에 그들은 밖에서 진군해 오는 인간들을 볼 수 없었다.

목책으로 만든 진지 안에 몬스터 대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화공이 유리할 것 같지만, 불 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몬스터들이 많았다.

그래서 불에 약한 인간 쪽에겐 오히려 손해였다.

물론 괴물들 쪽에서도 불을 붙이고 달려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면 괴물들도 불에 대한 고통을 느끼긴 하니까 말이다.

길게 귀청을 찢는 나팔소리에, 커다란 쥐들이 부산을 떨며 높게 세운 망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눈을 부라리며 전방을 살폈다.

그 아래에 있는 녀석들은 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기만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공격하는 척하면서 찔러본 것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이번은 이전과 달리 진짜다.

그걸 알아차리고 쥐들이 울어대자, 이번에는 몬스터들 쪽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부랴부랴 갑옷을 챙긴 몬스터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부대별로 모이는 것이다.

지휘관들이 움직이고 호통을 치는 가운데 달려가던 몬스터가 발에 채여 나뒹굴었다.

그렇게 부산을 떨며 움직이던 몬스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지 밖으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몇몇 부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오와 열을 맞추지도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목책 밖으로 나가면 무질서하게 달려나갈 놈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몬스터 쪽에서는 인간 진영의 세리스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대규모 전투가 되면 그녀가 완전히 승리를 좌우한다고 보긴 어려웠다.

물론 세리스가 선두에 서면 그 쐐기 진은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쐐기 진형이 본진을 향한다 해도 일단 가로막는 몬스터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도달하기까지의 거리도 문제다.

또 몬스터 특성상 지휘부가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투항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개인이 전장을 좌우할 때는 대개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형태였고, 적군에게는 공포의 전염일지 언데….

여기는 너무 넓은 곳이고 병사들의 수가 많았다.

어느 쪽으로든 파급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용사나 영웅이 와도 이 넓은 전장을 완전히 지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세리스였다.

범접하지 못할 위엄과 패기가 넘쳤고, 혼자서도 어느 진형이든 뚫어버릴 수 있는 무위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인간들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하나의 전사가 끼칠 수 있는 최대의 영향력을, 세리스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당연히 폭풍의 핵인 그녀를 엄청나게 부담스러워했다.

어느 날 갑자기 밀고 들어와 목책 주둔지 밖에 인간들이 진을 쳤을 때, 정말 몬스터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야음을 틈타 몰려온 인간들을 보며, 이를 간 몬스터 지휘관들은 공격을 지시했다.

그 명령에 몇몇 부대가 진을 치는 인간들을 급습했지만, 곧 세리스가 마중 나왔다.

그 후 벌어진 일은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그걸 본 몬스터들이 방어에만 치중한 것도 이해가 간다.

수비를 굳게 굳힌 그들은, 결국 대마법사인 칼스와 테러 나이트인 케이드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야 간신히 해볼 만하기 때문이다.

칼스나 케이드가 세리스를 지연시키고 있으면, 나머지 병력이 인간을 유린 하는 계획을 짰다.

몬스터에 짓밟히는 인간들, 그들이 전멸하고 나면 세리스의 기세가 한풀 꺾일 것이다.

그 후에 전군이 세리스를 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칼스와 케이드가 나타나야 가능한 계획이 아니냔 말이다.

그 계획은 이미 한 참 전에 어그러진 지 오래였다.

세인 때문에 말이다.

지금 그 사실을 몬스터들이 모른다는 게 비극이었다.

한편 인간 진영 쪽에서는 몬스터들의 압도적인 수가 마음에 걸렸다.

여기는 몬스터들의 근거지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몬스터 진영 쪽으로 가보면 파놓은 함정과 뾰족한 장애물들이 많았다.

게다가 진영 근처에는 해자 정도는 아니지만, 참호 같은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세리스는 엄청나게 강한 창이었다.

그 창은 모조리 찔러 죽일 수 있을 테지만, 이쪽에는 결정적으로 훌륭한 방패가 없었다.

아무리 정예군이라고 하지만, 압도적인 힘과 체력을 가진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공격한다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세리스의 뒤를 받쳐줄 기사들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의 기준에서였다.

바위도 한방에 박살 내는 녀석들이 적 쪽에는 수두룩했다.

거기에다가 상대는 불도 뿜고 날아다니기도 한다.

심지어 독침을 쏠 수도 있었다.

인간 입장에서는 필사의 각오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야만 했다.

목숨으로 공격하고 남겨질 시체로 방패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능력이 월등한 놈들과 싸움이 성립될 수가 없었다.

이쪽도 정예라면 저쪽도 정예다.

게다가 그들의 숫자는 인간 군대를 훨씬 압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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