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 긴 여행을 마치고 (3)
소환물질로 인해 케이드가 사라진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케이드가 허무하게 사라질지 몰랐던 엘라이저의 경악성이었다.
“말도 안 돼!”
엘라이저는 케이드의 증발을 지켜본 직후 레드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세인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모두가 당혹감을 느꼈다.
레드는 공격을 교환하다가 등을 돌려버린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민첩한 그녀를 단숨에 따라잡을 만큼 속력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목표가 된 세인은 피투성이가 되어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엘라이저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인이 마검을 치켜드는데, 그걸 본 엘라이저의 입술에 비웃음이 걸렸다.
지금의 세인이 엘라이저를 막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케이드에게 실컷 당한 후라 눈앞의 다크 엘프를 이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요행이 따라준다면 한 번 정도 막아낼까?
그다음은 죽음일 것이다.
엘라이저는 자신의 한쪽 눈을 사라지게 한 세인을 보면서 비아냥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래 복수란 이런 대사를 곁들여 줘야 깔끔한 법이다.
“멍청한 놈! 이기적인 놈! 방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테러 나이트를 엉뚱한 곳에 보내버린 거야. 거기는 불바다가 되었을 거라고. 너 하나 살자고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 케이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있을까? 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시체의 산을 쌓을걸?”
엘라이저의 검이 세인의 목을 노릴 때였다.
세인의 검은 예상과 다르게 엘라이저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세차게 찍었다.
그러자 케이드가 난리를 피우느라 하얀 균열이 가 있던 바닥이 쩌적 소리를 냈다.
하얀 거미줄 같은 것이 바닥에 나타난 것도 잠시.
두꺼운 지반 중에 유난히 얇았던 층이 부서져 내린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인과 유미리를 집어삼켰다.
남녀가 초록색의 바닷속으로 첨벙첨벙하고 빠질 때, 엘라이저가 짓는 표정이 꽤 봐줄 만했다.
그 표정은 마치 닭 쫓던 개가 지붕 위를 쳐다보는 표정이었다.
“제기랄!”
욕을 뱉어낸 것도 잠시, 엘라이저의 얼굴에 갈등이 서렸다.
이미 세인과 유미리는 초록색의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지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세인과 유미리는 몬스터가 아니니 밑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어딘가로 이동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몸을 던져서 바로 따라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는 지금 엘라이저의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을 엘프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타락했으니까 몬스터로 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자라면 뒤를 쫓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후자라면 일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어디로 이동되어 고립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케이드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분노에 몸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설 것인가?
“빌어먹을.”
이대로 돌아서기에는 눈 하나를 잃은 자리가 아직도 욱신거렸다.
결국 결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던 엘라이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초록색의 물속으로 뛰어들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돌처럼 경직되었다.
“윽!”
엘라이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가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자신의 몸을 관통한 검날이 피에 젖은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입술에서 피를 토해내는 엘라이저가 그렇게 말했지만, 생각해보면 미친 게 아니고 당연한 결과였다.
레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빠른 그녀를 당장 따라잡기 어려웠을 뿐이다.
늦게나마 엘라이저의 뒤를 점한 레드가 검을 날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바보도 아니고 적을 뒤에 두고 정신이 딴 데 팔렸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했다.
쨍그랑.
단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엘라이저의 두 손이 자신을 몸을 뚫고 나온 검날로 다가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이 그걸 잡으려는 찰나.
검이 쑥하고 뒤로 빠져나가 버렸다.
“아아….”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피를 쏟아내는 엘라이저가 옆으로 나뒹군다.
레드는 그때까지도 방심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엘라이저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았다.
검으로 그녀의 목을 찔러 마무리를 한 것이다.
“끝이다.”
깨끗이 엘라이저의 영혼을 거둔 레드는 이제 박살 난 바닥을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 초록색 액체는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글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메웠고, 부서진 바닥에서 번져나간 거미줄 같은 실금이 레드의 발치까지 다가왔다.
그걸 보다가 앞으로 살짝 걸음을 옮길 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만류하듯 그의 소매를 잡았다.
덜컥 정지해 버린 레드가 고개를 돌리자, 멜라니가 침착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둬, 레드. 이미 늦었어.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찾을 수 없어.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야. 네가 그와 교감하고, 같은 남자로서 우정으로 끌렸었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남자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여기서 뛰어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하지만….”
“만약 저게 강한 산성 물질이면? 너도 죽는 거야. 독이라면 어쩔래? 난 그런 너를 지켜볼 수 없어. 그리고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목숨도 장담할 수 없어. 목숨도 걸어야 할 때 걸어야 하는 거야.”
조곤조곤하게 충고해 주는 멜라니 앞에서 레드가 말했다.
“죽었을까?”
“글쎄 피에 젖어 있었지만 쉽게 죽을만한 마족으로는 안 보였어. 같이 움직여 봤으니까 잘 알잖아.”
멜라니가 애써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러자 레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을 가야지. 레드, 이상한 남녀였지만 동시에 싫지 않은 남녀였어. 그들은 우리에게 최후까지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야. 또 그들에게도 우리가 그렇기를 바라야지.”
레드가 수긍하자 멜라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의 소매를 놓았다.
깊이가 어느 정도나 될지 모르는데 저곳에 몸을 던진다는 건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엘라이저와 싸우면서 레드의 몸에 생긴 출혈도 많았고 말이다.
레드는 안심했다는 멜라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멜라니.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잘 부탁해.”
그러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멜라니가 웃었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하자.”
멜라니가 레드의 겨드랑이를 어깨 위에 걸치며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레드와 멜라니는 부글거리는 초록색 액체를 뒤로했다.
* * *
세리스는 자신의 천막 안에서 카드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게 뭘 하고 있는 건지 마창인 미스틸 테인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면서도 굳이 물어보았다.
원래 그의 성격이 그랬다.
“뭐 하는 거야, 세리스?”
세리스는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스틸 테인이 집요하게 물어보자 마지못해 대답해 주었다.
아주 건성으로 말이다.
“오버 더 카드에요. 오늘의 운을 점치고 있어요.”
“지금 그게 할 말이야? 오늘을 점괘에 의지한다고? 병사들이 들으면 깜짝 놀라겠어.”
“재미로 치는 거지 의지한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언제나 비약이 심해요. 미스틸 테인.”
그러자 미스틸 테인이 뭐라고 지껄여댔지만 세리스는 듣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도 일단 듣긴 들어야 하니까, 아예 듣지를 않는 식이었다.
결국, 미스틸 테인은 혼자 떠들어 대다가 제풀에 지쳐 잠잠해졌다.
마지막 카드를 내려놓은 세리스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거기에는 탑 안에 있는 한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주변에는 유령과 검은 그림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이 말이다.
유령이 위쪽에 있는데 아래쪽의 그림자가 쫓아간다.
세 존재가 의미하는 게 뭘까?
확실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미래와는 연관이 없어 보였다.
카드 점은 실패인가?
“미스틸 테인. 큰 탑에 가본 적 있어요?”
“내가 왜 그런 곳에 가봐?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세리스가 만지작거리는 카드 안의 탑, 탑의 밖에는 많은 사람이 서 있었었다.
손을 들고서 말이다.
규탄하려는 걸까?
아니면 찬양하려는 걸까?
그림이 너무 작아서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적당히 때웠으니까 됐어.’
의미 모를 점괘였지만 어쨌든 이걸로 끝났다.
점을 다시 칠 기분은 아니었다.
시간도 없었고 말이다.
카드를 차곡차곡 모아 잘 정리한 세리스는 테이블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선 그녀는 이윽고 갑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은빛 갑옷이 그녀의 굴곡진 몸에 달라붙었다.
파란 망토가 그녀의 뒤에서 육감적인 몸을 가려 주었고, 황금과 은으로 장식된 검집이 그녀의 허리에 자리했다.
방패도 챙긴 세리스는 마지막으로 미스틸 테인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길을 느낀 미스틸 테인이 대답했다.
“세리스?”
“예.”
“나 집에 가고 싶어.”
“….”
세리스는 재미없는 농담에 기분 잡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도 미스틸 테인은 계속 떠들어댔다.
아마 곧 이어질 전투가 미스틸 테인을 힘들게 하는 모양이었다.
물건이라 해도 그 안에 깃든 건 사람의 영혼이었으니까 말이다.
세리스는 그런 그를 무시하며 자신의 막사를 나섰다.
막사를 나오자마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그녀를 반겼다.
멀리에서 인간들을 태우는 냄새였다.
연합군이 만든 진영 건너편에서, 몬스터들이 보란 듯이 포로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이게 벌써 사흘째.
세리스는 무심코 코를 문지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이은 전투로 인해 연합군의 감정은 크게 마모되어 있었다.
위축되거나 흔들릴 감수성 따윈 없는 것이다.
이제 와 이런 수작을 버린다고 해서 위축될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적도 그걸 알면서 심심풀이로 하는 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십 명의 기사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쌌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음을 옮겨놓는 세리스였다.
“세리스. 나는 내가 태어난 숲속에서 자리하고 싶어. 거기에서 내가 맡을 수 없는 나무 냄새를 상상하며 새 소리를 들을 거야. 그게 내 바람이야. 그러다가 어떤 운명적인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이 전투가 끝나면 고려해 볼게요. 평화가 올 수 있다면 무기도 잠들어야 하는 거겠죠.”
세리스는 이상형 타령이 더 길게 나오기 전에 대꾸했다.
“그리고 내 꿈은 언젠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야. 그래서 오감으로 세상을 느낄 거야. 아름다운 여자도 만나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을 거야. 내 상대는 검은 눈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야. 몸은 호리호리하고, 피부는 희고, 옷차림은 산뜻하며 허리에는 붉은 천을 둘렀어. 그녀는 사뿐사뿐 걸으며 내게 잘 웃어준다고.”
하지만 미스틸 테인은 기어코 자신의 이상형을 끝까지 떠들어 댔다.
세리스가 마이 페이스라면, 미스틸 테인도 절대 지지 않았다.
그게 바로 그의 한심한 점이다.
기사들이야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니 무표정을 유지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세리스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미스틸 테인의 수다는 언제 들어도 지겨웠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마창을 만든답시고 화로에 인간을 넣어버린 대장장이가 미친놈이었다.
그때 희생당한 미스틸 테인도 피해자지만, 대장장이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세리스는 미스틸 테인의 계속되는 영양가 없는 수다를 들으며 단상에 도착했다.
기사들은 단상 위로 올라가는 세리스의 뒤에 늘어섰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던 세리스는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눈앞에는 수많은 병사가 몰려 있었다.
홀리 레이크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이 가득했다.
수많은 전투를 거친 병사들은 무기뿐만이 아니라 기세에서도 예기를 뿜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눈빛들이 갈망을 담고 세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앞에서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그녀가 낮고 덤덤하게 자신의 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