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 긴 여행을 마치고 (1)
커다란 공동을 지나자 얼음 절벽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여러 겹의 경사들이 일행을 맞이했다.
투명한 빙벽 너머로 초록색 물들이 가득 차 있었고, 그 안에서 하얀 안개 같은 것이 보일 때도 있었다.
뿌옇게 퍼져 있는 안개 너머로 뭔가가 보였다.
아주 크고 검은 산 같은 것이었다.
호기심에 멜라니는 얼굴을 벽 쪽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후후 불어 입김을 쏟아낸 후 장갑 낀 손으로 닦아 보았다.
하지만 두꺼운 얼음벽 건너편에 있는 검은 형체가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엄청나게 큰 건 알겠는데, 저게 대체 뭘까?”
뒤에서 그걸 바라보는 유미리는 어쩌면 그것이 신화 속의 데스 크라운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머리 위 천장의 높이는 점점 높아졌다.
그렇게 고도를 놓인 천장은 까마득하게 멀어져 초록색 구름 속에 숨어 버렸다.
유미리가 세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저건 소환물질이 기화된 거야. 꼭 액체로 머무르란 법이 없거든. 대륙 곳곳에 저런 것이 목격되지.”
“인체에는?”
“아까도 말했지만 무해해.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아. 사실 그래서 이 끔찍한 계획이 탄로 나지 않은 거지. 저 속에서 많은 인간이 사라졌다가 어딘가에서 다시 나타난다면 누구나 눈치챘을 거야. 저건 몬스터들에게만 작동해. 그들을 이동시키기 위한 거니까.”
램프를 높이 들고 지나가는 그들의 옆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는 기울어진 채 움직이는 일행을 쫓아갔다.
얼음벽에 있는 것은 그림자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선인장 같은 식물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압도적인 크기의 불가사리 같은 것이었다.
검은 촉수를 활짝 펼치고 벽에 들러붙은 불가사리에는 붉은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그 불길한 빛깔의 홍옥 속에서 노란 구가 움직인다.
그리고 그 구에 찍혀 있는 하얀 동공이 일행의 상을 쫓았다.
케이드는 데드 페이스뿐만 아니라 여러 루트를 통해 세인 일행의 위치를 보고 받고 있었다.
원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훨씬 이전에 세인 일행을 접촉했을 것이나,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다소 늦춰진 상태였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케이드는 세인의 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는 절벽의 위에 앉아 있는 케이드다.
어서 볼일을 보고 지상으로 올라가고 싶었던 케이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전투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케이드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레드는, 마치 케이드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정지했다.
그런 그의 행동은 모두의 시선을 붙잡았다.
“왜 그래?”
멜라니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하지 않던 레드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투명한 바위 같은 것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러나 투명도가 높지 않아서 건너편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바위를 통해 검은 뭔가가 어른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드는 손을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려 했다.
팔을 반쯤 들어 올렸을까?
검은 물체가 바위 속에서 크게 확대되었다.
바위 표면에 하얀 균열이 거미줄처럼 일어나는 것을 보며 레드는 멜라니를 밀쳤다.
멜라니는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대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돌조각 사이에서 엘라이저가 나타났다.
안대를 한 반대쪽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그보다 더 날카로운 것은 그녀가 휘두르는 쌍검의 예기였다.
방패를 들 여유가 없었던 레드는 그녀의 배를 걷어차려 했다.
그건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고, 자신에게서 겨우 엘라이저의 검격을 떨어뜨려 놓는 것에 그쳤다.
절반의 성공 후에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구른다.
습격해온 것은 엘라이저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숨어 있었는지 곳곳에서 다크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을 가해왔다.
세인은 유미리를 보호하면서 마검을 꺼내 들고 맞섰다.
그리고 유미리는 멜라니를 챙기려 들었다.
습격해온 엘프들의 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에게는 마법사 칼스가 있었다.
“미안하다.”
이 말이 상대에게 들렸을지 알 수는 없었다.
칼스는 죄책감에 짧게 말을 뱉어내며 순식간에 몇십 미터를 이동했다. 그의 붉은 로브는 희미한 잔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붉게 빛나는 칼스의 손이 유미리의 얼굴을 노렸다.
하지만 이동한 속도에 비해 손이 움직이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덕분에 세인이 충분히 막아설 수 있었다.
다크 엘프들이 밀려들고 무기 휘두르는 소리가 가득했지만 의외로 전투는 거칠게 흐르지 않았다.
다들 마지못해 싸우고 있다는 티가 역력했다.
단 한 명의 다크 엘프만 빼고 말이다.
“치잇!”
엘라이저는 눈앞의 남자를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순식간에 끝을 내고 세인에게서 눈 하나의 값을 받아내고 싶었는데, 예상외로 레드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어떨 때는 믿을 수 없게도 엘라이저가 밀리는 모습마저 보였다.
불똥이 레드의 방패를 긁어내리는 가운데, 레드의 발이 다시 엘라이저를 걷어찼다.
뒤로 데굴데굴 굴러간 엘라이저는 한 손을 땅을 짚었다.
그리고 거칠게 밀어내며 다시 한 바퀴 굴러 균형을 잡았다.
허리를 펴는 그녀가 혀로 자신의 입술을 요염하게 핥았다.
피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너. 꽤 만만치 않구나.”
엘라이저는 왜 자신이 밀리고 있는지 깨달았다.
상대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의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백이 엘라이저로 하여금 결정적인 순간에 밀려나게 하는 이유였다.
엘라이저가 다시 무기를 든 양손을 올리고 있을 때, 다크 엘프들의 공격을 막아낸 레드가 뒤를 힐끔 살폈다.
거기에서는 세인이 붉은 로브를 입은 남자와 싸우고 있었다.
칼스의 손에서 쏟아지는 붉은 빛이 세인의 눈을 현혹하려 달려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칼스의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연기는 그를 제외한 존재들의 움직임을 둔화하는 위력을 보였다.
문제는 그 붉은 연기가 피아를 식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크 엘프들의 움직임도 굼떠졌으므로, 멜라니와 유미리가 그들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같이 느려져 있다면 최소한 육안으로 보고 회피하려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세인의 동작은 붉은 연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칼스는 기본적으로 마법사였다.
아무리 아티팩트로 무장을 하고 있어도, 숙련된 전사인 세인과 호각지세로 육탄전을 벌인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승부를 내려면 큰 마법을 써야 할 텐데 그는 왜 그걸 쓰지 않는 걸까?
그게 바로 절벽 위의 케이드가 혀를 차는 이유였다.
“기회를 줘도 걷어차 버리네.”
그가 말하는 기회가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케이드는 정말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같은 엘프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오래전의 제자를 죽이라는 말인데 그것도 마음에 걸려서 빌빌대니, 이거야 원. 저렇게 티가 나게 싸울 거면 처음부터 싸우지나 말던가.”
생각해보면 칼스를 억지로 전투에 내세운 게 바로 케이드였다.
하지만 케이드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서 칼스를 욕했다.
그는 칼스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리고 고고한 엘프들이 살기 위해 굽히고 들어왔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회색분자처럼 구는 걸 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칼스. 당신은 참 좋은 친군데 말이야. 내면에 좋은 가능성을 가졌어. 그래서 난 당신을 도와주고 싶은 거야. 그걸 모르겠어?”
어차피 몬스터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과감해야 한다.
그런데 칼스는 지금만 해도 더럽게 미적거리고 있었다.
물론 마족처럼 보이는 놈의 실력도 만만치 않지만, 그렇다고 대마법사가 밀린다는 게 말이나 되나?
결국, 칼스는 유미리에 대한 정을 쉽사리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호의를 가지고, 고칠 점을 말해주고, 끊임없이 지적해주고 그렇게 누누이 충고를 해줬는데도 자기 고집만 부리는군. 남이 틀렸다고 말할 때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대마법사라는 오만함 때문인 거지.”
케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칼스의 처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건 당연하다.
그는 테러 나이트니까 말이다.
그냥 자기의 생각에 몰입한 채, 칼스의 틀린 점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상냥하게 틀린 점을 지적해 줘도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게 바로 그의 아집이고 한계야. 아무리 기회를 줘도 변하지 못하고, 그 모습은 태만 그 자체이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케이드가 일어섰다.
마음 같아서는 칼스가 자신의 벽을 넘도록 충분히 기다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지상에서는 전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세리스는 깜찍하게도 붉은 발리스타를 무시하고 병력을 전진시켜 왔다.
그 상식을 넘는 급습에 몬스터 대군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중이었다.
후방에서 거인이 급습하는 바람에 보급선이 위태로워지고, 붉은 발리스타 때문에 발이 묶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세리스는 앞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세리스는 케이드도 얕잡아 볼 수 없는 초강자였다.
그래서 칼스의 도움까지 받아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지금 칼스는 보시다시피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 속이 답답할 만도 했다.
스르륵 하고 움직인 케이드의 꼬리가 그의 허리를 감았다.
눈대중으로 절벽 밑의 거리를 재보던 케이드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주저 없는 그 움직임에 뒤에 있던 몬스터들이 약간 당황했지만, 그들도 곧 뒤를 따랐다.
케이드가 바닥에 착지했을 때 균열이 일어났다.
그러나 투명한 바닥은 엄청나게 두꺼웠고, 여러 층을 이루고 있었기에 무너질 이유는 없었다.
파편들이 위로 떠 올랐다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케이드의 밑으로 붉은 피가 번져 나온다.
박살 난 다크 엘프의 시체 때문이었다.
케이드는 다크 엘프를 깔개로 이용한 것이다.
피가 묻어난 발을 옆으로 옮기면서 케이드가 말했다.
“칼스. 병력과 함께 지상의 교전 지대로 이동하도록 해.”
그러자 세인의 검을 피하며 뒤로 물러난 칼스가 대답했다.
“아무리 나라도 많은 동료를 레드 블레이크로 이동시키지는 못해.”
“가능한 많은 수를 데리고 가달라는 이야기야. 지상에서는 조금 전처럼 무른 모습을 보이진 않겠지? 그렇게 된다면 다크 엘프들은 굉장한 고난을 감수해야만 할 거야.”
케이드의 반협박을 들으며 칼스가 손짓을 했다.
철수 신호였다.
그러나 신호에도 불구하고 엘라이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기를 세운 채 레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가지 않겠어. 이놈을 죽여 버리고 눈을 잃은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고.”
그러자 칼스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케이드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과장된 몸짓이었다.
“들었지?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야! 우리 편이 되었으면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칼스! 너도 이래야 되는 거야. 대체 뭘 망설여?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난 진짜 무책임한 놈들을 보면 짜증이나. 능력이 있는데 망설이는 놈을 보면 더욱 그렇지.”
더 말을 이어가려던 케이드는 간신히 자신을 자제했다.
지금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는 말은 멈추고 귀찮다는 듯이 칼스를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엘라이저를 남겨두고 어서 빨리 사라지라는 신호였다.
이 말도 덧붙였다.
“금방 따라갈 거야.”
물론 네가 아끼는 유미리도 없애버리고서 말이지.
그런 케이드의 말을 들으며, 칼스의 시선이 세인 어깨너머를 향했다.
거기에는 창백한 안색의 유미리가 서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지만, 지금의 칼스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그는 다크 엘프들과 함께 물러나고야 만다.
‘좀 더 시간을 끌어서 유미리를 회유하고 싶었는데.’
돌아서는 그에게는 만감이 교차했다.
솔직히 결정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선택을 했다.
그 결과로 그의 가정은 무너졌다.
엘프들은 타락했고 몬스터의 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앞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 연합군과 싸워야 할 판이다.
그 시간, 레드는 잠시 케이드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케이드는 무서운 분위기를 뿜어내며 세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한 눈이 팔린 사이,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엘라이저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그녀는 단검 하나를 날렸다.
레드가 방패로 그것을 튕겨냈지만, 엘라이저는 실망하지 않았다.
단검 하나를 역수로 잡은 그녀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꽂혔다.
핏방울이 튀고 한쪽 어깨를 깊게 베인 레드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엘라이저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 비웃음을 유지하며 달려나갈 때였다.
그녀가 흠칫하며 날아온 것을 두 팔로 막아냈다.
쾅!
방패가 박살 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런 충격에도 불구하고 엘라이저의 상체는 한번 휘청일 뿐이었다.
팔이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다.
흩날리는 파편 속에서 엘라이저는 오히려 긴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성기사. 네 방패가 날아가 버렸으니 이제 어쩔 거야?”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엘라이저가 몸을 날렸다.
레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몸을 날린 엘라이저가 수평을 이루었다.
그 의미를 알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이 가슴에 전해져 왔다.
두 발을 모은 상태로 레드를 차버린 엘라이저가 웃으며 땅에 착지했다.
그러면서 도발적으로 고개를 번쩍 쳐드는데, 한쪽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거기에 범벅되어 있는 것은 살육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으로 이어지는 쾌감이었다.
“넌 나의 먹잇감이야. 너 다음은 저 붉은 머리 여자애고, 그다음은 여길 이렇게 만든 놈이야.”
안대를 검지로 툭툭 쳐 보이는 엘라이저 앞에서 레드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레드에게서 떨어져 있는 세인은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무서운 기세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케이드가 다가서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