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99화 (199/307)

# 199

& 눈을 뜨기 위해 (8)

아레이즈를 떠난 세인은 은둔 동굴을 선택했다.

크리스탈 동굴과 비슷한 곳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지하에 형성된 동굴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막상 은둔 동굴의 길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크리스탈 동굴에 비교해 그렇다는 이야기다.

브리리 길드에서 구한 지도로 판단하고 결정된 루트였다.

그러나 이 루트는 문제점이 매우 많아 여행자들이 절대 선택하지 않는 길이었다.

그 이유는 동굴 자체보다 동굴의 끝에 있었다.

“미쳤어? 이건 자살 행위야. 여기로 가자고?”

멜라니가 펄쩍 뛰며 말했고 그녀의 목소리가 좁은 동굴 안에서 메아리쳤다.

하지만 정작 세인은 태연했다.

“걱정하지 마. 죽지 않아. 다 잘 될 거야.”

머리를 쥐어뜯는 멜라니의 발치에서 물이 흔들거렸다.

신발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낀 멜라니는 어둠에 잠겨 있는 건너편 쪽을 보았다.

빛 한 점 없는 곳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오로지 물뿐이었다.

아주 멀리 희미한 빛의 잔영 같은 것이 보였지만, 얼마나 밝을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먼 훗날 북의 허리띠 밑에도 존재하게 될 지하의 바다였다.

그 당시와 다른 것은 눈앞에 배가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상태가 썩 좋은 배는 아니었다.

폐쇄된 작은 항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배를 봐. 금방이라도 썩어서 부서질 거 같잖아!”

“그렇다고 지상으로 지나갈 수는 없어. 군대가 주둔 중이니까.”

멜라니는 이렇게까지 해서 북쪽으로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구원을 청하듯 레드를 바라보았는데, 레드는 세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전할 거라고 믿는 이유가 뭡니까? 이 수로가 정말 안전하다면 몬스터나 인간들이 이용했을 겁니다.”

그때 유미리가 끼어들었다.

“과거에 여길 이용한 적이 있어. 내가 속한 파티가 이 뱃길을 사용했거든. 물론 기적적으로 통과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생각보다 안전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그때처럼 운이 엄청나게 좋으면 말이야.”

유미리의 말에 멜라니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지금 그걸 위로라고 말하는 거야?

꽤 상심한 얼굴의 멜라니가 ‘우리에게 그런 기적이 작용할 리가 없어.’라고 중얼거리는데, 세인이 말했다.

“지상을 통해서 가면 주둔 중인 군대의 이목을 피해서 빙 돌아가야 해. 그러면 운도 필요하지만 시간도 엄청나게 걸려. 게다가 전투가 벌어져서 우리 중 하나가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배로 가는 건 어떨까? 유미리는 죽지 않아. 그건 역사니까 틀림없고, 나도 역사대로 흘러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이봐.”

도중에 멜라니가 말렸지만, 세인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누군가가 죽을 수 있지만, 배 안에서는 운명 공동체야. 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말이지. 그러니 북쪽으로 가고 싶다면 한데 모여서 가는 게 좋아.”

비록 이렇게 말은 했지만, 세인은 이제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다.

레드와 충분히 같이했고 어쩌다 보니 그의 도움도 받았다.

세인에게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세인 자신도 방금 한 이야기로 인해 레드와 멜라니가 꼭 배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배에 오른다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니까.

레드와 멜라니, 두 사람과 이별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지금 쌍으로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여기에서 나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냥 이건 죽으려고 환장한 거잖아.”

아니나 다를까.

멜라니가 레드의 옷을 잡아끌었다.

여기까지 했으면 됐다는 것이었다.

낡은 배로 어둠에 잠긴 바다를 통과한다는 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할 만큼 했잖아 레드. 이제 헤어질 때라고.’

멜라니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레드는 그런 멜라니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북부 허리띠 지역 밑의 바다는 무시되었다.

그 공간을 알아도 이용할 엄두를 못 냈다.

그 불가사의한 공간은 마치 마법의 지대처럼 불균형을 이뤘고 매우 위험했다.

길은 열려있었지만 갈 필요가 없는 곳이다.

그러니 거의 폐쇄된 곳이나 마찬가지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몇몇 나라는 지하로 통하는 길목을 아예 막아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는 게, 몬스터들도 이 물길을 이용해 침투할 정도로 미친 것은 아니었다.

넓고 편리한 육로를 놔두고 왜 여길 이용하겠는가?

*  *  *

물길 위를 용감하게 지나고 있는 조각배 한 척이 있었다.

어디선가에서 불어오는 음습한 바람이 돛을 팽창시키고 앞으로 밀어낸다.

어둡게 비어 있던 천장 공간에는 어느새 회색의 구름 같은 것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비를 뿌린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 오래전부터 사방이 물의 지평선이었다.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앞에서는 뱃전에 부딪힌 물이 부서진다.

“와하하하! 하하!”

멜라니는 거센 바람에 제대로 눈도 못 뜨면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외쳤다.

“우린 다 미쳤어! 미쳤다고!”

그러면서 크게 웃어댔다.

아무리 작가가 여러 경험을 해야 한다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멜라니는 자신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는 지금 발목에 줄을 묶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게 하나 있었으니.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아!”

멜라니는 크게 웃으며 하늘에다 대고 주먹질을 해댔다.

“그래! 더 몰아쳐 봐라! 내가 바로 멜라니다! 어차피 죽기밖에 더하겠냐? 짜릿하구나!”

그러면서 다시 웃는 멜라니를, 뒤에 서 있는 유미리가 무섭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세인을 보며 ‘좀 말려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조각배에 몸을 맡긴 후의 멜라니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광기로 옮겨간 것만 같았다.

“이봐 세인. 멜라니 좀….”

하지만 그때 세인은 세리스에게도 살아난 몸이니까 역시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중얼거림을 듣고 있자니 저쪽도 덩달아 무서워졌다.

“이 파티는 아무리 봐도 이상해.”

그런 유미리의 목소리가 몸을 일으키는 회색빛의 바다 위에서 잘게 부서졌다.

몰아치는 회색빛 하늘과 회색빛의 물바다가 서로를 끌어당기며 동시에 밀고 있었다.

물론 그 격렬한 포옹 속에 휘말린 일행은 죽을 맛이다.

회색빛의 물이 배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 레드와 세인은 나무통을 들고 그 물을 바깥으로 빼내었다.

유미리는 돛대를 잡고 웃어대는 멜라니의 몸에 밧줄을 칭칭 감았다.

떠내려갈까 봐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물과 바람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배로부터 멀리, 거인이 지나갔다.

조용하지만 거대하게 몸을 일으킨 삼각형의 해일이었다.

그 물의 절벽에 배가 정통으로 휩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지 않은 여파에 뱃머리가 몇 번 돌았다.

그때 멜라니의 머리가 거세게 좌우로 흔들렸다.

미리 묶어 놓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고도 불안해 유미리가 멜라니의 작은 몸을 껴안았을 때, 멜라니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죽음의 천사가 태어난 장소래. 그래서 이렇게 엉망인 공간이 생겼다는 거야. 마법의 장소! 참 멋지지 않아? 죽음의 천사를 잉태하고 내보낸 자궁이니까, 이렇게 떠들썩한 거야! 죽음의 장소! 그런데 나는 이 죽음의 장소를 지나는 배에 올라탔다고!”

유미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 여기 타기 싫어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흥분한 거야?”

“내가 궁지에 몰리면 흥분하는 성격인가 보지!”

유미리는 이 정신머리 없는 말에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멜라니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낼 때, 멜라니가 다시 말한다.

“그래도 이 정도만 하길 다행이야. 옛날 책에는 가끔 이곳에서 낙뢰도 몰아친다고 나와 있….”

그때였다. 그렇게 말하는 멜라니의 얼굴에 빛이 번쩍였다.

“….”

잠시 둘의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번개가 내는 소리였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빛줄기.

그리고 용트림을 하듯 넘실거리는 물의 평야 위에서, 레드가 세인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기도를 해야만 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난 신을 믿지 않아. 신에게 손을 벌릴 의향도 없고. 그래서 이 순간 신이 여기 이 자리에 없다고 불평할 생각은 없어. 여기에도 없고. 아무 곳에도 없으니까.”

그런 세인의 말에 레드가 대답했다.

“성기사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기분 나쁘다는 투는 아니었다.

물에 젖은 레드의 얼굴을 바라보는 세인이 미소를 지었다.

“대신 망망대해 속의 조각배 안에는 내가 믿는 사람이 있잖아. 그걸로 되었어. 적어도 여기에서 난 혼자가 아니야. 신 따위는 필요 없어.”

이 역시 성기사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최근 저는 죽음을 능동적으로 쫓으려 각오했습니다. 멜라니는 이런 저와 동행을 각오했죠. 즉 우린 이곳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죽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억울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적이 있든 지금 죽을 수도 있어요. 당신과 유미리는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를 돌파하려는 거죠?”

그때 물벼락이 몰아치며 뱃전에서 멸치들이 뛰놀았다.

물속에 있다가 밀려들어 온 것이다.

끝에 날카로운 침이 있는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경쟁하듯 널뛰기하는 것을 보던 세인이 대답한다.

“여기서부터는 정신병자의 이야기야.”

“주위를 둘러보세요. 어차피 이 주변이 다 비현실적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저번에 했던 말은 거짓말이야. 나는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믿고 있어. 이 세상은 구원된다고 믿는 거야. 그리고 유미리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해줄 존재라고 믿어.”

그리고 세인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그걸 다 들은 레드는 그 말을 믿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세인을 보며 멜라니보다 소설을 잘 쓴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에도 배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운명에 떠밀리듯 말이다.

가끔 물로 가득 찬 지대가 기울었다.

아득하게 깊은 아래에서 누군가가 중력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처럼 급경사를 이루었다.

파도가 역류하는 듯한 곳을 배가 지날 때면, 노를 젓는다는 게 아예 불가능할 때도 있었다.

배에 탄 일행은 그저 배를 꽉 붙잡고 산처럼 일어나는 물의 측면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점점 기울어진 배의 옆으로 깊디깊은 골짜기가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마치 데스 크라운의 목구멍을 연상케 했다.

어두운 그늘이 모두의 머리 위에 드리우고 그 속에서 서로의 흰자위만이 도드라졌다.

회색의 영역과 검은색의 영역이 힘겨루기하는 곳도 지나갈 수 있었다.

여러 갈래의 흐름을 머리채처럼 풀어헤친 맹수들이 배 아래에서 싸우고 있었다.

부글거리는 거품이 그들이 내뱉는 숨소리였고, 머리 위에서 치는 천둥이 그들의 고함과 눈빛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마법이라고 말해야 할까?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경이가 그들의 항로에 펼쳐져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정말 세인의 말대로 배는 폭풍우를 뚫고 반대편 해안에 도착했다.

모래톱에 배가 멈췄을 때는 모두가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지만 몸에 이상은 없었다.

처음으로 바닥에 발을 딛는 멜라니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회색빛 물을 머금은 모래사장의 빛은 검은색이었다.

그 검은색 흐름이 끝나는 부분에서 버티고 서있는 것은 눈처럼 하얀 절벽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세계수의 지역인 것이다.

배에서 내리는 일행은 하얀 절벽 곳곳에 찍혀 있는 검은 얼굴들을 보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괴로운 얼굴로 눈 부위에서 피처럼 진득한 액체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중 몇 개는 눈을 부릅뜨고 세인과 나머지 사람들을 노려보기도 했다.

절벽의 갈라진 틈으로 걸어간 유미리의 몸을 그림자가 집어삼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몸도 차례차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절벽의 틈은 매우 서늘했다.

그리고 하얀 얼굴들이 잔뜩 눈을 빛내며 몰려 있었다.

“어두운 힘에 영향을 받아 더욱 활성화된 것 같아.”

쏟아지는 시선들을 받으며 그들이 일렬로 걷는다.

그나마 밑은 사람들이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있었지만,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지형이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실선처럼 가늘어졌다.

거기에서는 서로 만난 하얀 얼굴들이 들러붙을 듯 가까이 자리해서, 끈적한 숨결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가는 빈틈을 지나가는 이상한 소리. 그건 얼굴들이 내는 신음일까?

아니면 절벽 틈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일까?

“유미리! 드디어 왔구나.”

그때 걸어가던 유미리는 위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멈춰서자 등 뒤에서 따라붙던 멜라니의 코가 부딪혔다.

“누구지?”

“기억 안 나? 네 파티에 속해 있던 여자 용병 말이야. 그게 바로 나야.”

입이 움직이는 하얀 얼굴은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 얼굴이 웃는 듯 일그러지며 말을 내뱉었다.

“이 끔찍한 곳으로 왜 돌아온 거야? 유미리? 나를 구해주러 온 거야?”

그때 세인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켰다.

유미리는 그의 충고에 따라 손으로 귀를 막았다.

일행은 다시 좁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과거 유미리와 일행이었던 하얀 얼굴은 계속 유미리를 불렀다.

그러나 유미리가 답이 없자 점점 목소리를 가파르게 올렸다.

나중에는 거친 욕설과 함께 저주를 퍼부었다.

배신자인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게 주 골자였다.

그 얼굴이 자극제가 되었는지 다른 얼굴들도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웅얼웅얼하는 얼굴도 있었고, 흐느끼는 얼굴도 있었다.

큰 소리로 욕을 내뱉은 목소리도 있었는데, 이 모든 소리가 한데 어울려 통곡처럼 변했다.

이제는 유미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귀를 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은 통곡의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가파른 절벽이 끝나자 거대한 지하 공동이 그들을 반겼다.

아름드리나무만 한 굵기의 기둥들이 천장에서 내려와 땅에 박혀 있는 지역이었다.

기둥은 이끼와 하얀 안개에 휩싸여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투명한 광석이었다.

그런 투명한 광석이 천장은 물론이고 지반까지 형성했다.

가장 투명도가 높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바닥이었다.

아찔할 정도로 투명한 바닥은 땅 아래 무엇이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초록색의 액체 같은 것이었다.

덕분에 아주 멀리 있는 지반은 초원처럼 보였다.

“이게 뭐지? 이런 액체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는데? 마치 에메랄드를 물에 녹여버린 것 같아.”

멜라니가 신발을 바닥에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딱딱한 바닥에 이상이 생길 리 없었다.

그러나 멜라니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땅속에서 하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검은색의 털이 붙어 있는 하얀 형체는 녹아내린 몬스터의 사체였다.

원래는 여러 개로 나뉘었을 뼈들이 엉겨 붙은 가운데, 두개골에 붙어 있는 하얀 눈이 멜라니를 올려다보다가 사라졌다.

다시 아래로 잠긴 것이다.

“이… 이게 뭐야? 몬스터?”

“여기에 몬스터가 있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지.”

멜라니는 그렇게 말하는 레드의 정강이를 차려고 했다.

하지만 레드가 앞쪽으로 물러나자 헛발질을 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투덕거리는 둘이 저만치 멀리 앞서고, 세인과 유미리가 뒤따랐다.

멜라니가 섰던 자리에 멈춰선 유미리는 아래쪽을 살펴본다.

초록색의 액체가 털처럼 엉겨 붙어 있는 하얀 물체는 반쯤 용해된 듯 보였다.

초록색의 실 같은 것에 부식된 몸뚱어리가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렇게 아래로 내려갈 때, 몸체가 뒤집히며 뼈로 된 꼬리 같은 게 마디마디로 바닥을 긁었다.

그걸 보고 있던 유미리가 입을 열었다.

“이 아래는 소환물질로 가득 차 있어.”

“소환물질?”

“초록색으로 통일된 물질이야. 보통은 안개처럼 기체로 존재하지만, 밀도가 높으면 액체 상태로 고이기도 해. 이만큼 많은 양은 몬스터를 대량으로 이동시키려 했다는 증거야. 다만 저렇게 시체 상태로 떠다니는 건 소환에 실패했다는 증거지. 발아래의 물질은 다른 생명체에게는 무해한 물질이야. 몬스터들에게만 적용되는 물질이 바로 소환물질이고, 그게 지금 투명한 바닥 아래에 가득 차 있어.”

세인은 그때 유미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시대가 이 시대의 몬스터들을 소환한 흔적인 것이다.

생각보다 유미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어지는 그녀의 가설은 진실과 조금 달랐다.

“극소수만 아는 사실이지만, 이노센트의 군주는 세 자리였어. 엄청난 권능을 가진 존재가 셋이나 됐던 거지. 하지만 어느 날 두 개체가 무모한 계획을 세운 모양이야. 그들은 엄청나게 강했지만, 인내심은 별로 없었어. 세상은 너무 넓고 대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했지. 그들이 아무리 강해도 원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야. 몬스터들은 세상 전체와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세인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유미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몬스터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쌓았어. 엘프들만 빼놓고 말이지.”

찰나지만 그렇게 말하는 유미리의 얼굴에 아픔이 스쳐 지나간다.

엘프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것이었다.

“진격로 위에 겹겹이 만들어진 방어선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수한 전투를 거쳐야 해. 그러다 보면 상황이 고착화 될 때가 많지. 그건 힘이랑은 상관없어. 아무리 강해도 전쟁은 몇몇 개체가 빨리 종식 시킬 수 있는 게 아냐. 세상은 까마득하게 넓고, 한 세력의 승리는 곧 무수한 싸움들의 총집합에 대한 답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지름길에 생각이 미친 거야.”

만약에 거리에 상관없이 적의 본진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만 된다면 엄청난 시간과 전투를 절약할 수 있게 된다.

순식간에 적 수뇌부의 머리를 박살 내는 것이다.

물론 연합군 본진에서 일대일로 붙는다면, 테러로드들이 충분히 승리할 자신이 있었기에 만들어지는 가정이다.

또, 본진이 아니더라도 후방에서 적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면?

케이드가 일으킨 헤카테 왕만 해도 충분히 후방을 교란했다.

그런데 엄청난 숫자가 후방에서 나타난다면?

보급선이 끊기고 몬스터의 적들은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걸 여기에 있는 유미리가 설명했다.

그녀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중요 파티로서 적의 핵심에 다가섰던 세리스와 유미리 정도나 알뿐, 유미리의 스승인 칼스마저도 모르는 사실인 것이다.

테러 나이트가 엘프들을 믿지도 않으니까, 훗날 케이드가 이야기해줬을 리도 없다.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몬스터들의 중요첩자들이 후방에 침투해서 대규모 소환을 준비했다고 보고 있어. 그리고 결국 소환의식이 이루어진 거지. 그런데 도중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분명 기습을 가하려 했고 시작은 되었지만, 소환 이동이 완벽하지 않았던지. 아니면 촉매제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결국 이 꼴인 거지.”

유미리는 그렇게 말하며 발로 바닥을 툭툭 차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가설은 틀렸다.

여기에 있는 몬스터들이 이동하고자 한 장소는 남부가 아니라 미래의 시대였다.

그중 많은 수가 잘못되어 이렇게 초록색의 소환물질 속에 잠긴 것이다.

물론 유미리나 몇몇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노센트들이 이번 전쟁에서 꼭 승리를 거두려는 것으로 보였을 거다.

그래서 소환의식의 목적도 그 범주 안에서 자연스럽게 추리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여기서 얼토당토않게 미래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먼 거리를 이동하려 소환물질을 썼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었다.

세인은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자신의 입 밖으로 꺼내 놓지 않았다.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 판에, 다시 몬스터들에 대해 미래 운운하는 건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유미리는 지금 안 그래도 머릿속이 터질 듯이 복잡할 거다.

거기에 고민 몇 개를 더 얹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지금 정말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이곳을 점령한 테러로드 말고 사라진 테러로드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게 있어?”

“당연하지. 사라진 그들도 정말 강력한 존재였어. 이렇게 실패로 인해 자멸해버린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알다시피 닉스는 몬스터 군단을 만들어내. 끊임없이 생산해 내지.”

유미리는 닉스를 말하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둘째손가락을 펴며 다음 테러로드의 이름을 말했다.

“행방불명된 두 번째 테러로드의 이름은 루시드.”

닉스가 있는 곳이 악의 군대를 생산해 내는 지옥의 산실이라면, 두 번째 테러로드는 다른 쪽으로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드는 하늘에서 떨어진 샛별이라고 불렸어. 그의 능력은 상대와 무조건 일대일을 만드는 거야. 게다가 닉스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어서 몬스터 군단을 만들어내. 닉스보다 빠르고 많이 생산해 낼 수는 없지만 말이야. 그런 식으로 몬스터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치명적인데, 그가 자랑하는 권능은 일대일 전투에 특화된 것이야. 적어도 그와 일대 일로 붙어서 이길 상대는 없다고 보는 게 좋지.”

그때 유미리가 손을 들며 흔들어 보였다.

저 멀리에서 빨리 오라는 듯 손을 흔드는 멜라니에 화답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설명을 계속했다.

“루시드의 첫 번째 권능은 하나의 공간에 적을 가두는 거야. 거기에는 오직 자신과 상대만 존재할 수 있어. 다른 존재는 그곳에 들어오지 못해.”

흘러가는 이야기를 듣자니, 단순히 그 공간 안에서 이기면 되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루시드는 상대보다 무조건 반 배 강해져. 그게 바로 그의 두 번째 권능이야. 이 두 가지 권능은 동시에 빛살처럼 이루어지지. 그리고 그 상태로 상대를 파멸시키는 거야.”

“무조건?”

“그래. 무조건이야.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어. 자신이 만든 영역 안에서 일대 일로 붙는 적보다 더 강해지는 거야. 적이 하늘을 뒤덮는 힘을 가지고 있어도 적보다 반이나 강해지면, 적 입장에선 루시드에게 손쓸 도리가 없지. 루시드의 권능은 그런 거야. 수치화해서 강해지는 것이라면 한계라도 있을 텐데, 그는 그런 것도 없어. 그러니 누가 그를 이기겠어?”

세인의 침묵 앞에서 유미리가 펼친 손가락이 이제 세 개가 되었다.

“세 번째 테러로드의 이름은 마라. 지극히 비밀스러운 존재야. 마라라는 이름도 진짜 이름인지 알 수가 없어. 고문서에서 추출해낸 이름일 뿐이지. 마라는 고대어로 비어있는 자리라는 뜻이야.”

“….”

“온통 베일에 싸인 테러로드가 바로 마라야. 확실한 건 그는 루시드보다 강해. 아주 강해. 루시드가 마라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를 봐도 알 수 있어. 조사하는 입장에서는 참 이상하지? 공백에 경의를 표한다니 말이야.”

유미리는 지금 이렇게 설명하면서도 강한 놈들이 허무하게 죽었다는 것이 황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놈들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닉스의 뒤를 받쳐주거나 앞에 섰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유미리 입장에서는 그들이 죽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

“그 둘이 사라졌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어. 사실 남아 있는 닉스만 생각해 봐도 연합군의 패배는 시간문제일 뿐이야. 상대가 너무 강해. 그게 바로 작금의 현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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