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98화 (198/307)

# 198

& 눈을 뜨기 위해 (7)

세리스는 세인의 몸 위에 위치했던 자신의 손가락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이때 처음으로 그녀의 냉막한 얼굴에 균열이 만들어졌다.

무엇이 그녀를 흔들리게 한 걸까?

세리스는 약간 혼란스러운 얼굴로 한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눈물에 젖은 유미리의 얼굴도 덩달아 세리스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와그작.

굴러다니는 돌조각을 밟고 나타난 것은 바로 레드였다.

그는 굳은 얼굴을 한 채 여기까지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세리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은 그는 유일한 관심사인 세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피투성이인 세인의 모습이 레드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그런 그를 본 세리스는 약간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루세이더?”

그리고 다시 말한다.

“크루세이더가 왜 여기에?”

레드는 세리스 앞에서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매우 용감하지만 레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세리스에게 있어 자기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강함과 약함이라는 이분법으로 따지자면 그랬다.

그러나 세리스는 레드에게 적대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보여준 그녀의 모습과 달리 돌변한 행동을 보였다.

천천히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녀는 세인과 유미리에게서 충분히 떨어진 후 흔들리는 안색을 회복했다.

그리고 레드에게 말을 걸었다.

“크루세이더. 그 검을 뽑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레드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과 맞서기 위해서입니다.”

그 답변을 들은 세리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려고 열심이었다.

힘으로만 따지자면 그녀는 세상 무엇이라도 두렵지 않았다.

설령 테러로드라도 그랬다.

녀석과 맞붙어서 진다면 그 대가가 인류에 전가될 것이라 두려운 것이지, 개인적으로는 겁나는 게 없었다.

세상에서 세리스를 위협할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이 대치상황은 그런 것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만약 교황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기꺼이 크루세이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과 힘을 알아본 교황이다.

당연히 세리스라는 거대한 별이 암흑의 지평선 너머로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때 간절히 크루세이더가 되기를 소망했던 세리스였다.

그래서 눈앞의 크루세이더가 무엇을 감수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게 과연 살아 있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또 그래서 더더욱 크루세이더가 존경스러웠다.

그게 아니더라도 성기사라면 그녀의 형제나 다름없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여자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고, 쓰러져 있는 자는 그녀의 하수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대립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세리스가 온화한 말투로 레드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레드는 검을 쥔 손을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그저 세리스를 향해 의지를 불태울 뿐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데 세리스는 뒷걸음질 쳤다.

믿을 수 없게도 말이다.

‘크루세이더의 적은 악이다.’

세리스는 그런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성기사들처럼 크루세이더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우러러보는 사람이었다.

힘의 크기를 떠나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이 상황이 낯설고 매우 괴롭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자문해야만 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걸까?’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유미리에게로 가서 멎었다.

아마 보통 때라면 어떤 회유나 협박도 지금의 세리스를 흔들리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드가 있는 마당이었다.

결국 세리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로서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복수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러니 물어봅니다. 당신은 저 마족과 어떤 관계입니까?”

그러자 죽음을 각오한 레드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세인을 바라본다.

순간 그의 표정이 혼란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세인은 그에게 있어 누구였을까?

다정하게 웃어주던 사람?

지옥에서 같이 싸워주던 사람?

때로는 형제처럼 어깨를 두드려 주던 사람?

태어나 가족다운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던 레드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어가 가족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의 친구입니다.”

그러자 세리스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당신의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대적자가 아니라 같은 성기사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목 아래를 제게 보여주십시오. 저는 그곳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이 굳은 마음으로도 훗날 다가올지 모를 후회를 예방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세리스의 말에 레드의 눈에는 순간 갈등이 서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상황이 잘 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후였다.

검을 집어넣은 레드의 손이 목 부근에 있는 단추를 풀었다.

그러자 검게 물든 그의 가슴 일부분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세리스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인간을 위한 길을 걸어라. 너는 인간의 검이다. 너는 최후에 쓰러질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바로 여기에서 맹세하라.’

세리스의 얼굴은 이제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버려지는 순간에도 인간의 편에 서서 그들의 변론인이 될 것이며. 변치 않는 인간의 검이 되겠노라. 인간을 위해 최후까지 검을 휘두르겠노라. 인간을 구원할 빛의 그림자로 살겠노라. 괴물이 나를 포식하는 날을 기다리며 기꺼이 걸어가겠노라.’

끝없는 암야의 한복판.

가파른 계곡처럼 버틴 악의의 표적이 되어 그림자로 살아간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레드의 무거운 운명이 세리스를 슬프게 만들었다.

세상 곳곳에서 크루세이더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악마에게 물어뜯기고 넝마가 되어서도, 손에서 검을 놓지 않고 사투를 벌인다.

인간을 위해.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바치고 있었다.

어떤 것이 덤벼와도 두렵지 않은 세리스였지만, 그녀라고 연민과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당신은 너무나도 힘든 길을 가고 있군요. 당신 앞에서 어떻게 내 사연을 주장할 수 있으며, 또 내 분노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나는 기꺼이 당신 앞에서 내 분노를 거둡니다.”

세리스는 이제 유미리나 세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배신자에게 신경을 끄기로 결심한 것이다.

혐오를 멈춘 세리스는 그저 레드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인사를 무시할 수 없었던 레드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세리스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검에는 아까와 같은 엄청난 힘이 서려 있진 않았다.

그녀는 그 검을 들고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나의 형제. 당신의 그 가혹한 운명 안에서 건투를 빕니다. 비록 당신의 끝은 참혹할 테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아름답게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세리스는 몸을 돌렸다.

처음에 보여준 분노에 비하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후퇴이며 매듭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크루세이더란 그만큼이나 무겁고 어려운 의미였던 것이다.

레드는 세리스가 점점 멀어져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종적을 감추자 그제야 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둘러 그에게 응급처치를 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레드 옆에서 유미리의 떨리는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손은 피에 젖은 세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는 여러 감정이 범벅된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  *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심각한 분위기가 일소되는 상황에서 치안대가 따라붙지는 않았다.

아마 아레이즈를 떠나기 전에 세리스가 손을 쓴 것 같았다.

그래서 세인은 간섭받지 않고 여관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되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튼튼한 청년이군. 마족이란 원래 그런 건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어.”

작은 신전에서 온 치료사 노인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다른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언제쯤 일어날 수 있을까요?”

유미리가 묻자 노인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까지 맞추면 돗자리 깔아야지. 점쟁이로 전직하는 게 나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걱정하는 걸 보니, 자네 혹시.”

치료사 노인은 하얀 눈썹과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근엄한 인상이었는데, 그 근엄한 표정 그대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혹시 저 남자의 이건가?”

“….”

이렇게 인상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노인이라고 해도 아레이즈 같은 곳에서 썩기에는 재주가 뛰어난 치료사였다.

세인은 불과 며칠 만에 눈을 떴다.

그때는 이미 그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눈을 깜박이는 그는 가장 먼저 이런 생각부터 했다.

‘커튼을 묶어야 할 텐데.’

활짝 열린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하얀 커튼을 거칠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며 비좁은지, 커튼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얼굴에 그림자 장난을 친다.

“깨어났군.”

그때 늙수그레한 음성이 귓전에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소매 안에 팔을 넣고 앉아 있는 노인이 보였다.

의자에 앉은 채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치료사 노인이다.

그는 소매에서 한 손을 빼내더니 세인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노인의 주름진 손바닥이 이마에 느껴졌는데 매우 따뜻했다.

그 손바닥 아래에서 다시 졸린 기분이다.

“의식을 차렸으니 금방 일어나 행동할 수 있을 거네. 하지만 치료자로서의 소견을 말하자면 한 달 정도 푹 쉬는 게 좋아. 몸 상태를 보아하니 그동안 너무 혹사했더군. 피로가 누적되었어.”

“일정이 있어서 그건 곤란합니다.”

“어지간하면 연기하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몸이 먼저지. 자네 동료들도 많이 걱정하던데.”

“동료….”

세인은 다시 밀려드는 졸음을 이겨내려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자 노인은 그의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어내며 이렇게 말한다.

“뭐가 그리 급한가? 굉장히 피곤한 얼굴로 뭔가에 시달리는 몸 상태를 하고서 말이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세상은 자네 생각에 맞춰 움직여 주지 않아. 정말 현명한 리듬은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맞추는 것일세. 그러다 보면 자네가 지금 인상을 쓰며 고집하는 일도 자연스레 풀릴지도 모르지.”

신전에서 나온 노인답게 자연스러운 충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세인은 그런 충고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 노인은 자신을 치료하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자신은 세리스에게 가볍게 당한 게 아니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였으니까.

‘이 정도 설교는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는 천장을 바라보여 노인의 말을 들었다.

“세상에 와전된 말이 있네, 그게 뭔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신은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는 말이야. 그 말은 잘못된 말이야. 신은 도망갈 수 있을 정도의 시련만 주신다네. 잘 살펴보면 어디든 도망갈 구멍이 있을 거야. 그렇게 바쁘고 힘들게 살지 않아도 말이야.”

이제 노인과 세인은 창가에서 펄럭거리고 있는 하얀 커튼을 같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커튼을 보게나. 저렇게 그냥 내버려 두면 바람은 결국 잦아들 거야. 그리고 순리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걸세. 자네 혹시 종교가 있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각배 안에 혼자 있는 기분이겠군. 그래. 그런 기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망망대해 안에 혼자인 느낌이라, 어떻게든 노를 저어서 지금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기분 말이야. 하지만 자네는 순풍을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그게 바로 현명한 행동인 거지.”

노인은 뭉쳐있는 피가 잘 돌라는 의미로 세인의 발을 주물러 주었다.

너무 시원했다.

다시 달콤한 잠에 빠지고 싶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운데 자장가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대개는 충고였는데 마음에 와닿진 않는다.

세인은 힘든 세상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왔다.

그래서 때로는 운명에 몸을 맡기라는 말이 이해는 되어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때가 있었다.

다시 잠들기 전에 세인은 노인의 이름을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치료해주고 충고까지 해준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었다.

그러자 노인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데스.”

신전의 치료사가 가지기에는 무서운 이름이다.

거기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기도 전에 노인의 물음이 치고 나왔다.

“섬에 사람이 갇혔어. 무인도에 혼자 있는 자가 회개하는 방법을 아나? 거기에는 신도 신전도 없는데 말이야. 물론 신부도 거기에 없지.”

“그건….”

옹알이 같은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답을 해야 할 세인은 이미 단잠에 빠진 후였다.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작게 코를 고는 세인을 노인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서는 이불을 살짝 들어 그의 가슴 어림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노인은 세인이 거의 회복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신전으로 돌아간다며 여관을 나섰다.

물론 다음날 신전을 찾아가도 노인을 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세인은 노인의 충고를 의식 저편으로 밀어 놓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순리 타령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인의 입장에서는 원래 역사대로 흐르게 하는 것이, 곧 운명이며 순리였다.

거리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세인의 계획으로는 이제 목적지가 지척이었다.

드디어 이 시대로 와서 시작한 여행이 끝을 보이려 하는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일행과 함께 아레이즈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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