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 눈을 뜨기 위해 (6)
유미리는 황급히 세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도망가!”
세인과 유미리가 시선을 교환하는 가운데, 세리스가 자신의 손을 허리춤의 검에 얹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은 엄습하는 오한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풍성한 금발 머리가 흘러내려 세리스의 얼굴 한쪽을 가렸다.
드러난 유일한 눈은 아주 차가웠다.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점점 주변을 통째로 얼리는 듯했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대놓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본능이 경고하는 공포감에 몸이 반응한 것이다.
광장에 흐르던 감미로운 분위기는 산산이 조각나고, 살기가 장내에 흐르기 시작했다.
유미리는 세인을 향해 손을 저어댔다.
‘어서 도망가!’
세인은 라이트닝 블러드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한계가 있었다.
과거 군단장을 만나서 처참히 깨진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객관적으로 그가 케이드를 만나 승리할 확률은 제로였다.
케이드는 테러 나이트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다.
마검의 힘을 쥔 세인이라면 모를까 현재의 그는 케이드에게 필패다.
그리고 그 케이드 조차 박살 낼 수 있는 게 바로 지금의 세리스였다.
테러로드만 아니라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그녀를 위협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런 세리스가 적대감을 표시하니, 유미리가 세인에게 도망가라고 외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과거에 세리스와 같이 움직여본 유미리는 세리스의 무서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인 입장에서는 도망가라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다.
그는 검을 빼 들고 유미리의 앞을 막아섰다.
유미리가 세인의 옷을 움켜쥐고 옆으로 밀어내려 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세인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세리스는 유미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웬 마족 놈이 시선을 차단하자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검에 올려놓은 손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다른 손을 앞으로 들었다.
그리고 중지와 엄지를 모았고 그것을 앞으로 튕겼다.
세인은 그때 집채만 한 바위에 직격당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질 듯하다가, 가까스로 다시 자세를 잡는 바람에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틀거리는 것까지는 피할 수가 없다.
세인이 뒤로 튕겨나지 않은 것을 본 세리스는 그제야 세인을 바라보며 눈에 이채를 발했다.
그러나 상대를 인정하는 눈빛은 아니고, 그저 가소로운 것을 바라보듯이 ‘호오? 이것 봐라?’하는 표정이었다.
“유미리. 꽤 쓸 만한 검사를 곁에 두고 있구나. 그런데 그건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고, 내게는 허수아비일 뿐이야. 고작 이런 장난감을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겁도 없이?”
이제 세리스는 손을 활짝 펼쳤다가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세인의 몸이 붕 하고 뜨더니 인어 조각상과 부딪혔다.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조각들이 사방에 튀었다.
그중 몇 개는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와 세리스의 발치에서 멎었다.
“세리스. 내 말을 들어줘. 제발.”
“그건 아냐, 유미리.”
설마 세리스가 이렇게 빨리 자신을 발견하고, 직접 여기까지 올 줄 몰랐던 유미리였다.
그래서 많이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상대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세리스는 정작 그녀 앞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넌 배신자잖아. 그러니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야. 지금 내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그때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너이고 말이야.”
이미 광장은 텅텅 비어서 아주 썰렁했다.
여러 개의 삼각 깃발들이 나부끼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웠다.
그 정적을 깨고 세인이 일어섰다.
그의 몸은 부서진 조각들은 물론이고 물에 젖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짜증 나는 군.”
그렇게 말한 세인이 땅을 디뎠다.
그러자 그의 몸이 긴 선이 되어 세리스를 덮쳤다.
검을 빼내는 시간도 아까워 감행한 육탄 공격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속도를 보면서도 세리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미리가 도주할까 봐 가장 우려스러운 사람처럼 행동했다.
유미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른 손은 여전히 검 위에 얹어진 채였다.
꽝!
사람과 사람이 부딪혔다고 믿기 어려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인의 무시무시한 공격에도 세리스의 발은 지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세인의 팔과 그녀의 팔이 잠시 얽혀들며 힘겨루기를 한다.
세인의 팔 힘도 만만치 않았지만, 세리스의 팔은 마치 강철 같았다.
그녀는 큰 힘을 주지도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관절을 움직인다.
그 거침없는 움직임에 고스란히 끌려가는 세인이었고 말이다.
바람을 가르는 주먹이 세리스의 얼굴을 가격했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세리스의 턱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몇 방의 펀치를 얼굴로 받아내며 여유롭게 움직이는 세리스의 손.
그 손은 어느덧 세인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털자 세인의 신형이 바닥에 처박혔다.
깨진 보도블록들이 날아다니고 먼지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먼지를 직선으로 가르는 검은빛 선이 있었으니, 바로 오버 더 데스의 검날이었다.
마검의 공격에 처음으로 세리스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녀는 가볍게 발을 움직이며 뒤로 물러나 검격을 피해냈다.
그러면서 입을 놀렸다.
“유미리. 만약 도망간다면 이놈을 산채로 불태워 죽이겠어.”
이를 악문 세인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순간 검날이 여러 개로 나뉜듯한 착각이 일어났고, 바람소리를 내며 섬뜩한 예기들이 날아갔다.
하지만 세리스는 여유롭게 손을 움직여 공격을 모조리 쳐냈다.
세인은 그녀의 장갑 낀 손이 검을 두드릴 때마다 가슴이 진탕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제야 세리스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깨달을 수 있었고 말이다.
최선을 다한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감이 왔다.
‘여제구나. 세리스가 바로 역사 속의 여제였어.’
그렇다면 절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힘을 빼놓고 기술로만 봐도 세리스가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 증거로 지금 세리스는 검조차 뽑지 않았다.
그저 귀찮은 파리 다루듯이 라이트닝 블러드인 세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약간 전진한다 싶었을 때, 손이 잔영을 일으키며 수십 개의 충격파를 일으켰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반원들이 무수히 세인의 몸을 때렸고, 유미리의 비명 속에서 그가 허공에 떠올랐다.
“제법이군.”
그때 세인을 지나치려는 세리스가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마검이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뒤를 이어 세인의 몸이 땅에 떨어진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세인의 입가는 피투성이였다.
그걸 본 세리스는, 전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현실을 말해 주었다.
“이봐. 그래도 꽤 실력 있는 검사 같아서 부드럽게 대해주고 있는 거야. 난 유미리에게 볼일이 있어. 그러니 굳이 죽으려고 발버둥 치지 말라고. 내 인내는 무한하지 않아. 네 주제를 알아야지.”
그녀는 그러면서 자신이 아는 마족은 두 가지라고 말했다.
몬스터에 들러붙어 끄나풀이 되는 놈들과 몬스터를 증오하는 마족 말이다.
“그런데 넌 최소한 전자는 아닌 것 같아. 공격이 음험하지는 않거든. 어차피 소용없겠지만 독을 쓴 것도 아니고.”
세인은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는 세리스 앞에서 질문을 던졌다.
답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흐트러진 호흡을 안정시키기 위한 시간 벌기였다.
“유미리를 어떻게 할 거지?”
그러자 세리스가 차갑게 말했다.
“배신자에게 맞는 대우를 해줘야지. 흡혈 나무에게 던져준 후 하루를 기다릴 거야. 그리고는 투석형이지.”
그리고 세리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세인은 정말 최선을 다해 막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작정하고 휘두른 손짓에 그의 팔이 뒤로 꺾였다.
으드득하는 소리가 나고 핏물이 튄다.
그 광경을 보고 뛰어오려는 유미리를 세인이 다른 손을 들어 저지했다.
지금 유미리가 달려온다고 바뀔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세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 한 번만 대화를 할 수는 없겠나?”
세리스는 잠깐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였다.
그녀의 인내심은 말이다.
실력 있는 검사라고 해서 존중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낭패를 봤는데도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유미리와 아주 가까운 사이 같았다.
목숨을 걸고 덤비는 것도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유미리 본인 때문인 것 같다.
다시 턱을 아래로 내린 그녀가 옅게 웃었다.
이 순간 세리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경멸 그 자체였다.
‘용병 정도가 아니라 유미리에 들러붙은 한패구나.’
세리스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고, 이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까지다. 벌레 녀석아.”
그리고 그녀의 검집에서 검이 뽑혔다.
검날과 함께 드러나는 것은 무형의 기운이 아니라 가시화된 힘이었다.
검집 위로 빛줄기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세인은 직감할 수 있었다.
‘저건 못 막는다.’
저 힘에 맞선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다.
도주야말로 현명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유미리가 있었다.
결국 도망갈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바로 그 유미리가 이 시대를 구했다.
그건 결국 그녀가 여제인 세리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직접 맞닥뜨린 세리스는 그야말로 절대자였다.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막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빛의 폭발 속에서 세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피해야 한다는 본능을 무시하고 땅에 박힌 마검을 잡았다.
마검이 정면에 세워짐과 동시에 그가 뛰어들었다.
마검이 부러지지 않는다고 해도 눈앞의 힘에 정면으로 대항한다면 죽음뿐이었다.
그런 예감이 종처럼 머리를 두들기고 두통이 일어났다.
그 두통을 무시하며 몇 발이나 앞으로 떼었을까?
소리도 없는 힘이 세인을 강타했다.
세인은 피 화살을 내뿜으며 뒤로 날아갔다.
유미리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땅이 파이며 미약한 지진이 일어난다.
분수대가 완전히 터져 나가고 세인의 몸이 그 자리에 틀어박혔다.
세리스는 그대로 끝장을 보려고 했지만, 유미리가 뛰어드는 통에 검을 살짝 틀었다.
뭐 지금 이것만으로도 지금의 세인은 기절 상태였다.
세리스는 그걸 눈으로 확인했다.
지금은 세리스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것도 아니다.
그저 아까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손에 검이 들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았다.
검을 수납한 세리스는 천천히 유미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유미리의 얼굴이 세리스의 손을 따라 천천히 뒤로 꺾여진다.
유미리의 얼굴을 보는 세리스의 눈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요절낼 듯싶었다.
하지만 흡혈 나무에 던져야 하니까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유미리? 왜 그래? 슬픈 표정이구나. 너에게도 그런 감정이 있나? 네 배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생이 수포가 되었는지 알아? 난 마법사인 너를 믿었어. 그리고 동료 이전에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가슴에 배신의 비수를 꽂았지.”
매섭게 날아오는 유미리의 손을 세리스가 잡아 저지했다.
그렇게 유미리의 반항을 수포로 만든 세리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절호의 기회는 날아가고, 우리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어. 대체 무엇이 그날 벌어진 좌절의 이유가 될 수 있지? 네가 무슨 변덕을 부렸든 그게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나? 유미리. 네게 최고로 잔인한 벌을 내리겠다. 그게 한때나마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믿음과 우정을 주었던 나의 약속이야.”
세리스는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마족인 남자를 유미리의 눈앞에서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유미리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약간의 수고를 지불할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미리를 밀어 넘어뜨렸고 세인에게 다가갔다.
“세리스! 제발! 내가 다 설명하겠어! 그를 건드리지 마!”
“오냐. 역시나 이놈이 네겐 소중한 사람인가 보구나. 하긴 그러니 아까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려든 거겠지? 이봐, 유미리.”
돌아보는 세리스의 차가운 눈이 유미리를 얼어붙게 했다.
“잘 봐. 이놈이 산산이 부서지는걸.”
세리스의 손가락이 세인의 몸에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