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 눈을 뜨기 위해 (5)
노인.
한 명의 노인이 아레이즈의 성벽에 글을 새기고 있었다.
짙은 송충이 눈썹과 바위처럼 굳은 눈매, 매부리코와 앙다문 입술은 그의 강직한 성정을 짐작하게 했다.
근육질의 노인은 성벽 위에서 드리워진 그네에 앉아 다음 글귀를 고심한다.
「방패를 높이 세워라.
방패를 굳게 잡아라.
그 방패는 무너지지 않는다.
방패는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후세여 주의하라.
방패를 세운 그대가 주의해야 할 것은.」
끌을 든 노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음 문구를 뭐라고 해야 좋지?’
모두가 볼 성벽이기 때문에 대놓고 군중을 조심하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좀 더 돌려서 말할만한 표현이 뭐가 있을까?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의 공포와 불안을 조율해야 한다는 교훈을 새겨야 하는데 너무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방패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부는 산들바람.”
그때였다.
아래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노인은 흠칫 어깨를 떨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에는 언제 왔는지 한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족처럼 보이는 남자는 이상하게도 노인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노인은 남자의 얼굴에서 자꾸 달라붙으려는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고 벽에 끌을 대고 망치를 두드렸다.
아래쪽에 있는 세인은 분명 자신의 할아버지가, 성벽에 글귀를 새기는 것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이 글을 마무리하고 어떠냐? 라는 식으로 고개를 다시 아래쪽으로 돌렸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 훗날 다시 태어나 세인의 할아버지가 될 노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헛것을 본 건가?”
그래도 다시 성벽을 보니 꽤 마음에 드는 글귀였다.
까마득한 시간이 흘러 세인이 그 글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브리리 길드는 아레이즈에도 있었다.
이 시대의 브리리 길드는 돈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줬다.
가끔 도둑들도 드나든다는 흉흉한 소문조차 돌 정도였다.
아레이즈의 지점장인 바그너는 돈만 주면 무엇이든 구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런 그의 소명 정신이 위기를 맞이한 것은 세인의 방문 때문이었다.
“뭐를 구해 달라고?”
순간 바그너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그래서 귀를 쑤시며 다시 물었다.
세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말이다.
“똑똑히 들었잖아. 돈은 얼마든지 지급하겠어. 어때? 길드에서 구하기 어려운가?”
“그게 뭐가 어렵겠어? 그런 생각을 안 해봐서 잠깐 놀랐을 뿐이야!”
자존심이 찔린 바그너는 짜증을 내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넌지시 가격을 찔러 보았다.
꽤 큰 액수인데도 불구하고 세인은 거기에 바로 응해 왔다.
흥정은 격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지 밀고 당기기도 없었다.
그게 바그너에게 작은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바그너는 피식 웃으며 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거 재미있겠군. 좋아. 돈만 준다면 구해다 주지!”
세인과 바그너는 서로 악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리 나가지 않겠어. 물건을 구하면 바로 배달해 줄게. 지금 묵고 있는 여관의 위치를 적어줘.”
“좋아.”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인은 붉은 자루를 받아보게 되었다.
아주 큰 자루는 아니었고, 칭칭 감긴 밧줄로 주둥이가 잘 막혀 있는 상태였다.
붉은 자루의 표면에는 육각형 동판이 붙여져 있는데 브리리 길드의 표식이었다.
세인은 그 자루를 잘 보관했다.
브리리 길드의 바그너는 방금 언급했듯이 세인에게 호감을 느낀 상태였다.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인이 길드에 와서 뭘 원했는지 장부에 적어 넣었다.
그리고 정보 가치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마족 일행이 아레이즈에 왔다라…. 저쪽에서 이걸 알고 싶어 할까?”
그는 문서를 작성해서 군부가 정보의 구매 의사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 문서는 세인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일행에 대한 것도 적혀 있었다.
돈이 아주 많은 마족 두 명. 그리고 남녀에 대한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초점은 마족으로 보이는 유미리와 세인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너무 튀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문서는 매각되었다.
아무래도 마족이라는 단어가 어필된 것 같았다.
대부분 마족은 몬스터를 증오하지만, 예외라는 것도 있다.
몬스터들의 첩자일 수도 있으니 군부에서 사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세인 일행의 인상착의가 상부로 보고되며 마족이란 단어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다른 단어가 급부상했다.
“유미리.”
책상 위에 놓인 고운 손이 서툴게 그려진 유미리의 얼굴을 짚는다.
손의 주인은 바로 세리스였다.
언제나 차가운 표정을 고수하던 그녀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배신자.”
방안의 온도가 내려가는 가운데 벽에 세워진 미스틸 테인마저도 분위기를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리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머리를 굴렸다.
레드 블레이크에서 아레이즈 까지는 상당한 거리였다.
그녀는 아레이즈로 이동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게 아니라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 정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이 이동했을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미스틸 테인이 참고 있었던 수다를 떨었다.
“이봐 세리스. 설마 지금 어딘가로 가려는 거야?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이곳을 비우려고? 그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남부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움직이지 않았잖아?”
“제가 가려는 곳은 남부가 아니라 여기에서 지척이에요. 그리고 꼭 매듭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세리스. 그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 네 위치를 생각하라고. 사람들을 보내도 되는 일이야. 그만둬.”
그러나 미스틸 테인은 세리스를 말릴 수가 없었다.
일단 창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일단 그는 세리스를 말리기엔 너무나도 개념이 없었다.
주인이 무기를 닮았는지, 아니면 무기가 먼저 주인을 닮았는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비슷했다.
시간이 흘러, 나갈 채비를 갖춘 세리스 앞에서 미스틸 테인의 말은 변질되어 있었다.
“아니면 제발 나를 데려가 줘. 앞으로 벌어질 일을 구경하고 싶다고. 요즘 너무 심심해! 심심해 죽을 것 같아, 세리스! 나도 깽판 치는 것 좀 보자! 제발! 데려가 줘!”
하지만 세리스는 대꾸도 없이 막사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마창은 그런 그녀를 원망했다.
“세리스! 이 몰인정한 여자! 악독한 여자! 혼자만 가버렸어!”
이렇듯 시대를 불문하더라도 누군가를 남겨놓고 떠나버리는 일은 그녀의 주특기인가 보다.
아비게일 꼴이 되어버린 미스틸 테인이었다.
* * *
세인은 여관 안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누워있었다.
창문 밖이 점점 어두워졌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저녁인데도 눈이 스르르 감기는데 그런 그를 다시 현실도 인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똑똑.
노크 소리에 눈을 다시 뜬 그가 대꾸하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렸다.
그리고 유미리가 나타났다.
고개만 빼꼼히 내민 그녀는 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건 뭐야?”
붉은 자루를 가리킨 유미리에게 세인은 단지 이렇게 대답했다.
“난 잠을 자야겠어.”
“해가 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벌써 잔다고?”
세인이 이제는 대답 없이 이불을 목 위로 끌어 올리자 유미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붉은 자루를 발로 툭툭 차본 후에 세인의 옆에 앉았다.
덕분에 침대 한구석이 내려앉았다.
“그러지 말고 밖에 나가보자 세인. 나는 네 에스코트가 필요해.”
세인은 남의 눈에 띄는 일은 좋지 않다고 말하려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지금 유미리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이곳을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지금 이 시간이 그녀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것이다.
결국 한숨을 쉰 세인이 이불을 다시 내렸다.
그러자 유미리가 웃는다.
그걸 멍하니 올려다보던 세인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사람은 머릿속에 있는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네 웃음은 한 가지 감정이 아니라 아픈 조각이 섞여 있어서 마음에 들어.”
그때 방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인 까닭은 세인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야.”
내려와 보니 레드와 멜라니는 홀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각자의 방에서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세인과 유미리는 여관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한가롭게 말이다.
밖으로 나오자고 졸랐던 유미리는 정작, 아까 세인이 말한 여운에 빠져 있는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손을 내밀어 세인의 손을 잡아 왔다.
세인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대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어.”
행인들 속에서 유미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어디 있는데?”
“미래에 있어.”
그러자 유미리가 웃었고 세인은 중요한 점을 강조했다.
“여하튼 내게는 이미 함께하기로 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야.”
“그래 알았어. 알아들었다고.”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하던 둘은 중앙 광장으로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노천카페 형식으로 만든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이올린 연주가 함께하는 분위기 좋은 카페였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마주 보며 앉은 둘은 차를 주문했다.
세인이 돌아다니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데 유미리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을 사랑해?”
“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세인이 반문할 때, 유미리가 상체를 숙이며 다시 물었다.
“아까 말한 사람을 정말 사랑하냐고.”
사랑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 경우에 말하고 있는 사랑이, 상대를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르고.
상대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고.
심장을 빼앗아간 상대를 말하는 것이라면 답은 ‘아니오.’였다.
그러나 세인은 거짓말을 했다.
“그래.”
유미리가 다시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댈 때 세인은 끝맺음했다.
“나는 그녀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거야.”
이건 진실이다.
그리고 둘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가 끝날 때까지 의미 모를 눈빛을 교환하며 말이다.
그리고 연주곡이 끝났을 때 종업원이 와서 차를 놓고 자리를 떠났다.
세인은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바이올린을 내린 채 한숨 돌리고 있던 남자가 그 신호를 받고 걸어온다.
멜빵 바지를 하고 둥근 모자를 쓴 남자였다.
그는 앉아 있는 세인에게 물었다.
“손님. 원하시는 곡이 있습니까?”
“사례 할 테니 가장 잘하는 곡을 연주해줘.”
세인의 말에 브레멘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이올린 활을 현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곡의 사전 설명에 들어간다.
“제가 켤 곡은 숲속의 연인들이라는 곡입니다. 정령을 사랑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든 거죠. 결혼식 전날 남자는 숲으로 가서 정령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죠.”
그리고 브레멘은 연주를 시작했다.
매우 아름답고 슬픔이 깃든 곡이었다.
그 연주를 들으며 유미리가 말했다.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지? 이런 상태에서 내가 갖게 되는 마음이 말이야. 너도 눈치챘을 거야.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이 마음대로 되질 않아.”
그러면서 웃는 유미리를 보며 세인은 아까 여관에서 무심코 나온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에 있는 불행한 여자를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고, 서로의 눈을 보다 가까이에서 맞이하고 싶었다.
물론 그가 지금 그렇게 해도 세리스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바보 같지 않아.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원하는 것 정도는 떠올릴 수는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니까.”
손으로 턱을 받친 유미리는 브레멘의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연주를 마친 브레멘에게 세인이 돈을 지급할 때 말을 걸었다.
“원래 숲의 연인들이라는 곡은 듀엣곡이 아닌가요?”
그러자 브레멘이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이 곡을 아십니까? 그렇죠. 중반부에 들어가면 정령이 화답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음색을 인간이 그대로 옮기는 건 힘들어서 따로 만든 악보가 있죠. 그런데 그건 엘프들의 악보입니다. 그래서 맥이라는 작곡가분이 인간도 연주할 수 있도록 책을 냈습니다. 저도 그걸 보고 배우긴 했습니다만 저는 보시다시피 혼자니까요.”
유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대여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벽에 걸려 있는 바이올린들을 가리키며 말이다.
브레멘은 바이올린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짜 주인에게 허락을 맡으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용무를 마친 브레멘은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떠간다.
그가 멀어질 때였다.
갑자기 세인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봐 브레멘.”
“예?”
‘내가 내 소개를 했던가?’
이름을 말해줬었나? 라고 의아함을 느낀 브레멘이 뒤돌아보았을 때 세인이 말해주었다.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아주 좋은 연주였어.”
그러자 브레멘이 웃어 보였다.
칭찬해준다면 마족이든 인간이든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누군가의 인정이 이 가난한 예술가의 오늘을 살게 했던 탓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게 하는 힘이었다.
이가 다 드러나게 활짝 웃어 보인 브레멘이 다시 등을 돌린다.
그리고 다른 손님을 찾아 사라졌다.
세인은 그런 브레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미리는 바이올린을 빌리는 게 아니라 아예 두 개나 사버렸다.
과소비라고 지적하려는 세인에게 바이올린을 던져준 그녀는 턱짓했다.
카페 바깥쪽으로 나가자는 몸짓이었다.
바이올린을 받아든 세인은 그녀를 따라 광장으로 나갔다.
넓은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 그들이 공유하는 삶의 내음 섞인 공기가 세인에게도 느껴졌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간 유미리를 쫓던 세인은, 이윽고 그녀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다.
잠시 멈칫하다가 세인도 활을 잡고 바이올린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한다.
곡명은 아까 브레멘이 켰던 숲속의 연인들이었다.
현을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가 실타래처럼 풀어지고 밤하늘 아래를 맴돌았다.
아레이즈의 광장에서 오가는 연주가 사람들을 귀 기울이게 했으며, 세인과 유미리를 서로 끌어당겼다.
광장의 중앙에 마련된 거대한 분수대.
인어가 든 항아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 사이에, 유미리와 세인이 올라섰다.
난간에 발을 올려놓은 그들은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연주를 주고받았다.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활을 움직이는 두 사람이었다.
날아든 물방울이 손등에 튀는 것도 못 느낄 만큼 처연하고 아름다운 연주가 계속된다.
눈을 꼭 감고 호응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내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나둘씩 주변에 몰려든 행인들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잘 어울리는 연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의 유미리와 세인은 아주 잘 어울렸다.
비록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지만, 눈을 감은 유미리는 그들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세인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에 빠져들었고, 또 다른 세계가 초대한 숲속에서 단둘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다시 빠졌다.
높고 아름다운 나무들 속, 서로의 운명과 입장에 상관없이 마음을 주고받는 교감에 집중했다.
시대를 초월한 음악 안에서의 소통이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사이로 예기치 않게 방해꾼이 난입했기 때문이다.
“잘들 놀고 있군.”
낮은 음색이었으나 묘하게도 강렬한 힘을 가진 음성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차가운 목소리에 세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그건 유미리도 마찬가지였다.
바이올린에 올려놓고 있던 턱을 떼며 유미리의 시선이 바쁘게 주변을 헤맨다.
그러다가 결국 두건을 뒤집어쓰고 있는 인물을 발견했다.
세리스는 석상처럼 굳어져 있는 유미리 앞에서 천천히 두건을 뒤로 내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세리스의 미모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세리스는 살기를 잔뜩 갈무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세리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 새파랗게 질린 유미리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세인도 고개를 돌리며 세리스를 눈에 담았다.
“배신자.”
세리스는 유미리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건 유미리도 그렇지만 지금의 세인에게도 결코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