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 눈을 뜨기 위해 (4)
세계수에서 까마귀라는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진 존재는 가만히 앉아 비참함을 곱씹고 있었다.
유미리를 되살려내고 세상의 흐름을 바꾼 것이 바로 그의 죄였다.
앞으로 그에게 남은 것은 억겁과도 같은 시간과 지옥행이었다.
지옥이라는 거대한 별 안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후의 약속이었다.
그때 갑자기 앞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란 까마귀는 숙였던 머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별안간 눈앞에 나타난 흑기사를 보고 신음을 흘렸다.
“넌… 테러 나이트? 케이드만 남아 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흑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의 투구 속에서 보라색의 빛이 일렁였다.
아주 차갑고 무서운 안광이었다.
* * *
크리스털 동굴은 대륙 곳곳에 존재하는 동굴이었다.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이 동굴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지만 아직까진 건재한 모습으로 많은 여행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에는 편리성 외에도 아름다운 동굴 내부에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털 동굴은 자체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낸다.
게다가 빛의 세기나 색도 부분마다 다르다.
그래서 램프를 끄고 안에 들어서면 빛의 교향곡 속에서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참으로 즐거운 여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호사가들은 돌 안에 반딧불과 정령이 함께 갇혀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아름다운 동굴이었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선 일행이 본 동굴 내부는 충격적이었다.
천장이며 벽이며 가릴 것 없이 데드 페이스가 마구 찍혀 있었다.
검은 얼굴들이 밑쪽의 빛을 받아 더욱 음산하고 섬뜩하게 부각된 양상이다.
마치 악마들이 모여서 킬킬거리며 손도장과 얼굴도장을 찍고 돌아 다닌듯했다.
세인 일행은 무수히 찍혀 있는 검은 얼굴들을 지나쳐 걸었다.
그러나 꽤 오래 걸었는데도 데드 페이스는 끝날 줄 모른다.
흉측한 얼굴로 더럽혀진 동굴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했다.
크리스털 동굴은 원래 색깔도 여러 가지지만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형태 속에서 시간이 만든 기둥들이 잔뜩 자리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종유석과 아래에서 자라나는 석순들이 서로 손을 잡으려는 듯 밀착하고 있는 곳도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데드 페이스가 그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었다.
검은 얼굴에서 흘러내린 검은 액체가 세기의 만남 틈바구니에 끼어들었다.
그리하여 오랜 기다림은 사악한 방해를 받았다.
걸어갈수록 통로는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좁아질 때는 엎드려서 기어가야 할 정도로 좁았다.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염소는 무릎을 꿇고 잘도 기어서 따라왔다.
역시 짐꾼으로는 염소 아니면 삽살개가 최고였다.
좁은 통로를 빠져나온 염소는 울지도 않고 멜라니가 던져주는 땅콩을 받아먹었다.
“착한 녀석.”
멜라니가 염소의 목덜미를 쓸어주고 있을 때였다.
유미리가 그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작은 손거울 좀 빌려줄래?”
“응? 어, 그래.”
멜라니는 의아해하면서도 유미리에게 거울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유미리는 그 자리에 서서 거울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다.
세인과 다른 사람들은 유미리의 행동을 지켜보기 위해 멈춰 섰다.
유미리는 거울로 뒤쪽을 보았다.
일행이 모두 등을 돌리고 있는 방향에서, 벽에 찍혀 있는 검은 얼굴을 손거울 표면에 비춰 보았다.
그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은 거울 속의 검은 얼굴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데드 페이스는 일제히 세인 일행의 등을 향해 얼굴을 움직였다.
그리고 눈을 깜박이기까지 했다.
그걸 지켜본 멜라니가 기겁했다.
“뭐야 이게.”
“지켜보고 있잖아. 마치 살아있는 생물들처럼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세인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아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
유미리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뒤돌았다.
그러자 검은 얼굴들은 눈을 감고 다시 시치미를 떼었다.
유미리는 그중 하나의 얼굴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벽의 표면에 검은 얼굴이 들러붙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입을 벌린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검붉은 혈관 같은 것이 얼굴 주위에 가득했다.
거기로 손가락을 가져다 댄 유미리는 계속 속삭였다.
“안심하세요.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보세요. 동질감이 느껴지시나요?”
그러자 데드 페이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유미리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듯이 말이다.
유미리는 표적으로 찍은 데드 페이스를 계속 구슬렸다.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러자 데드 페이스의 입이 열렸다.
그 입안에서 새어 나온 것은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뒤섞인 음성이었다.
“뭐죠?”
데드 페이스의 대답에 유미리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말했다.
“누구에게 우리를 고발하고 있나요?”
“….”
“대답해 주세요. 누구에게 우리의 위치를 고발하고 있나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데드 페이스가 대답했다.
“성스러운 기사인 케이드 님이십니다.”
“케이드….”
유미리는 새파랗게 변한 안색으로 데드 페이스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일행에게 말했다.
“케이드는 테러 나이트야. 그는 테러로드인 닉스가 신임하는 기사라고. 왜 그가 우릴 감시하고 있지?”
당황한 그녀는 스승인 칼스에게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남자들의 몸이 굳어 있는 가운데 멜라니가 대답했다.
“지금 테러 나이트라고 말한 거야? 그 거물이 여기에서 갑자기 왜 나와?”
“멜라니.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테러 나이트라면 엄청난 거물이잖아.”
“저 얼굴 하나의 말만 믿고 우리가 흔들릴 필요는 없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존재니까.”
보다 못한 레드가 멜라니를 진정시켰다.
“테러 나이트인 케이드는 강해. 그에게 잡히면 죽은 목숨이야.”
유미리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세인이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다독여 주었다.
“그가 가까이 있다면 이렇게 우리를 훔쳐볼 필요도 없겠지. 그는 멀리 있을 거야. 그냥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고 받아들이자고. 그게 공포에 질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저마다 생각이 깊은 가운데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러 나이트인 케이드라면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세리스 같은 존재에게 케이드는 만만한 상대일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세리스가 특별한 존재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테러 나이트는 보통 죽음과 공포의 대변자다.
세인이 라이트닝 블러드일지라도 케이드를 어찌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상황을 이용해 엘라이저와 겨우 호각으로 싸운 그다.
케이드는 그런 엘라이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녀석이었다.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탁 트인 광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여러 개의 기둥들이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장소였다.
데드 페이스는 아직 여기를 침범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황색을 띠는 천장이 신비한 빛을 발했다.
마치 조명처럼 은은하게 아래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라면 주위를 경계할 수 있었기에 쉬어가기로 했다.
바닥에 모포를 깔고 엉덩이를 붙이는 그들이다.
수통의 마개를 따 물을 마시고, 간식을 입에 넣기도 했다.
꿀이 묻어 있는 땅콩이 입안에서 부서진다.
그때 지친 다리를 주무르던 멜라니가 입을 열었다.
아까 흥분했던 게 좀 미안했나 보다.
그녀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를 부른다.
나는 노래를 부르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는 곳에서,
둥글고 높은 탑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부르는 노래,
설원 위로 나의 잊힌 발자국.
쏟아지는 눈과 뒤엉키는 나의 숨.
그리고 너의 뜨거운 눈길.
별이 달에 닿으면 부르는 노래.
아무도 없는 달에 별처럼 네가 떨어지면,
우리가 다시 만나 해후를 나누는 노래.
주인 없는 경배가 닿는 곳.
흘러내린 머리카락 속으로 반짝이는 너의 눈길.
술잔 앞에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나의 친구.
오, 나의 왕.
우린 노래를 부른다.
그가 없는 노래를.」
노래가 끝나자 세인이 무심코 물었다.
“노래 이름이 뭐지?”
“라이트닝 블러드”
노래를 마친 멜라니가 아닌, 유미리의 대답에 세인은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미간을 좁혔다.
그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유미리는 세인의 행동에 그가 관심이 있다고 여겼는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말이다.
“멜라니가 이걸 알고 있을 줄 몰랐어. 엘프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노래야. 스포일러 홀드아이가 불렀던 노래지. 내용은 이상하지만, 음이 좋아서 널리 사랑받았어.”
“제목이 특이하군.”
“생명체는 죽을 때 번개와도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고 해. 그 강렬한 순간 속에서 생명체는 심판을 받는 거지. 그 빛과 소리는 많은 학자에게 죽음 너머를 이야기하는 암시가 되어 주었어. 예를 들어 우르릉이라는 괴물의 이름은 번개가 칠 때 나는 소리지.”
“번개처럼.”
세인의 말에 유미리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번개처럼.”
흥미가 생긴 세인은 계속 귀를 기울였다.
“죽음이나 죽음을 초월하는 그 무엇을 지칭하는 게 바로 라이트닝이야. 그에 비해 블러드는 뜻이 간단하지.”
혈통.
“초월의 피.”
“그래. 여기에서 해석이 갈라질 수 있어. 라이트닝 블러드에게 죽음의 피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죽음의 피에 대해 말하자면 이미 악마 같은 훌륭한 대체 단어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이 경우에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기 마련이지. 첫 번째 해석을 제외하면 죽음을 초월한 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겠지?”
신.
비록 한 음절일 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큰 단어였다.
“엘프들의 각성자. 예언자인 스포일러 홀드아이는 무엇을 본 걸까? 신?”
“그 정도까지 봤다면 세상 최고의 스포일러일 거야. 하지만 난 그를 믿지 않아. 아니 스포일러 자체를 믿지 않아.”
“왜?”
그러자 눈을 뜬 유미리가 웃었다.
“미래는 바뀌잖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뀐다고. 세인, 정해진 미래 같은 건 없어. 그러니 스포일러들이 말하는 건 그냥 육감이나 계산에 따른 예측 같은 거야. 도박에 기인한 거고,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어.”
비슷하지만 알맹이가 다른 견해로는 마법사 스톰이 만든 학설이 있었다.
스톰도 정해진 미래가 없다고 믿었다.
유미리처럼 운명적인 미래를 부인하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나갔다.
그는 미래라는 것은 허구이고, 계산될 수 없다고 말한다.
생명체는 미래를 인지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과거의 선후를 따져 뒤쪽을 미래라 부를 뿐이다.
그 연장선인 과거의 비교로서 미래라는 허상을 구축하고, 견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스톰의 학설 속에서는 미래는커녕, 현실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은 오로지 과거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과거와 연결된 꼭두각시일 뿐이고, 우리가 했다고 믿는 판단과 생각은 다 허구이다.
현실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과거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일 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끝에는 신이 앉아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그 신이 발현한 의도거나, 자아가 복사된 행위라고 보았다.
신이 호수를 찍으면 거기에 따라 파문이 일어날 뿐이다.
거기에는 피조물들의 선택이나 자유의지가 포함될 수 없었다.
신이 만든 현상이니까 말이다.
유미리의 경우에는 정해진 미래가 없다고 보았지만, 신도 없다고 믿었다.
이렇게 같은 마법사라도 신을 믿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존재했다.
유미리의 말에도 불구하고 세인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유미리는 곁눈질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드에게 집중하자고 세인. 그가 우리를 왜 노리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잡히면 우린 전멸이야.”
세인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사실이라 해도 자존심 상하는군.”
유미리는 케이드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생김새부터 힘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냉정히 말해 세인은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유미리도 세인과 여행하며 그의 강함을 깨달았지만, 케이드는 차원이 달랐다.
마주치면 케이드의 기분에 따라 이쪽이 학살당할 수도 있었다.
아니 확실히 학살당할 것이다.
‘이럴 때 세리스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유미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세리스가 나타난다면 케이드는 세리스의 상대가 안 되겠지만, 동시에 유미리도 죽은 목숨이었다.
지금의 세리스에게 있어 유미리는 배신자일 테니까 말이다.
“그와 마주치지 않는 게 우리 여행의 승패를 결정할 거야.”
세인의 얼굴이 굳을 때, 그걸 반발감이라고 느꼈는지 유미리가 재다짐을 받듯 재차 강조했다.
“결국 그를 잘 피해 가는 수밖에 없어. 알겠어? 잡히면 죽는 거야. 그가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면, 그를 피해 가는 게 관건이라고.”
“잠깐. 그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 주겠어?”
유미리의 설명을 다시 들은 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자기 생각에 빠져든다.
그 생각은 휴식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크리스털 동굴에서 세인 일행이 완전히 빠져나간 것은 한참 후였다.
그 시간 동안 서로가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들은 중앙을 관통해 북부 쪽으로 이동한 셈이 되었다.
케이드는 계속 데드 페이스를 이용해 세인 일행을 감시했을 뿐 접촉해 오지는 않았다.
거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었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오랜만의 하늘이 그들을 반겼다.
북쪽의 하늘은 매우 흉측한 색이었다.
밤이 되면 별이 보일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대개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남부와 비교할 수 없는 불온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절망 앞의 긴장감과 투쟁의 흥분이 섞인 냄새가 사방에 만연했다.
남부보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 * *
아무도 없는 산 위에는 거센 바람만 불었다.
그리고 썩은 나뭇잎이 뒹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세인을 비롯한 일행이었다.
경사를 다 오르고 나니, 산 위로 나 있는 길이 보인다.
그때 정상에 선 세인이 잠시 멈칫거렸다.
기시감을 느낀 것이다.
눈을 몇 번 깜박인 그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주변에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생각해본 그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몰라 그저 입을 다물고 구경했다.
세인의 마검이 커다란 돌에 툭 하고 닿았다.
이윽고 검 끝이 돌 속으로 파고들며 움직인다.
스스슥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긴 선들이 위아래로 나뉘다가 만나는 듯하면서 엉켰다.
그러면서 두 갈래의 길을 표시한다.
이렇게 세인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를 완성했다.
가이더의 수도로 진격할 때 도움을 줬던 이정표의 완성이었다.
멜라니가 왜 저러냐는 뜻으로 유미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일행은 구불구불한 산등성이 위를 지나갔다.
모래 섞인 바람 속에서 바쁘게 걷던 세인은 옆을 바라보았다.
멀리 흐린 하늘에 초록색 장막이 층을 만들고 있었다.
초록색 부분을 매우 유심히 바라보는 세인이다.
불길한 하늘 아래에는 나비 모양의 호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네 개의 크고 작은 원이 서로 붙어 있는 호수였는데, 위에서 이렇게 바라보니 마치 나비를 닮았다.
그건 미래와 똑같았다.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이제는 뱀처럼 생긴 계곡이 보인다.
이것도 미래와 똑같았다.
긴 세월 동안 지형이 바뀔 만도 한데 결국 둘 다 보존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 멜라니가 입을 열었다.
“왼쪽에는 나비. 오른쪽에는 뱀. 인정하기 싫지만 여긴 여자의 마음을 닮았어. 변덕스런 여자는 바람에 몸을 맡긴 나비처럼 팔랑거리기도 하고, 뱀이 쥐고 있는 마음처럼 독을 품기도 하지.”
그때 레드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칭칭 감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내 시적 감수성에 토를 달지 마!”
멜라니가 나무 지팡이를 들어 레드를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레드는 몸을 피하지도 않았다.
흥이 샌 멜라니는 콧방귀를 뀌며 시를 읊었다.
여자의 마음과 변덕에 대한 시다.
훗날 뱀과 나비라는 제목이 붙여지고,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시였다.
「여자의 마음에는 뱀이 도사리고 있다.
뱀이 숨을 죽이고 노리는 것은 소녀.
표독스러운 그녀가 과거 잃어버린 소녀.
그 순수를 사냥하기 위해.
기척을 죽이고 땅 위를 기어간다.
스르륵 스르륵.
질투와 증오가 그녀라는 뱀에 무늬를 새겼다.
지워지지 않는 무늬가 나비를 노리고 기어간다.
스르륵 스르륵.
드디어 나비를 잡았을 때.
득의 한 사냥꾼은 자신을 뒤덮는 암운을 느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기엔.
그 뱀을 노리는….」
그때 다들 숨을 죽이고 멜라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끝맺음을 뭐로 할까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멜라니는 주위의 눈치를 잠깐 살피더니 이렇게 끝을 내뱉었다.
남자.
“에이. 뭐야 그야.”
레드와 세인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유미리마저 불평했다.
“남자라니 너무 뻔하잖아. 여성의 뱀 같은 마음이, 자신이 잃어버린 소녀의 순수성을 사냥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결국 남자에게 뒤통수 맞는다는 이야기야? 갑자기 남자가 나오니 너무 이상해. 뜬금없다고.”
그러자 멜라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갑자기 그 단어가 떠오르더라고.”
아쉽게도 멜라니의 시적인 상상은 딱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