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94화 (194/307)

# 194

& 눈을 뜨기 위해 (3)

검은 까마귀는 세인에게서 떠나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마법사 칼스를 눈에 담았다.

마법사 칼스는 무너져가는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성당이 불타는 모습은 이 땅의 인간들이 품은 믿음을 거세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불타는 광경이 달갑지 않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마법사라고 해서 홀가분하게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조직에 묶여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갇혀 있었다.

불길을 바라보는 칼스의 옆으로 케이드가 다가왔다.

케이드에게서는 늪의 역겨운 비린내가 났다.

그러나 칼스는 그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칼스.”

케이드는 웃으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어깨를 매만졌다.

“케이드. 나를 내버려 둬. 우리 엘프들은 이미 너희들 편에 붙었어. 그리고 충성을 맹세했어. 그런데 뭘 더 바라지?”

케이드는 징그러운 입술을 칼스의 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속삭였다.

“세상에는 배신이라는 게 있잖아.”

그 어조에 녹아나 있는 끈적거림은 칼스가 참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칼스는 두 팔을 뻗어 케이드를 밀어냈다.

“배신? 엘프들이 배신할 거라고 믿어? 원한다면 혈서까지 써주겠다. 그러니 이런 수작을 부리지 마.”

“오 칼스. 너무 흥분하는 거 아냐? 마치 속을 들킨 아이처럼 말이야. 혈서? 그건 당연히 받아내야지. 영혼 계약서는 기본이야.”

케이드는 팔짱을 끼었다.

방금 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진지함만 남아 있었다.

“우리 영역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는 엘프가 반란을 일으키면? 대마법사인 네가 우리의 심장부에서 거꾸로 우리 심장을 공격하면?”

‘이놈은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군.’

칼스는 감정이 없는 얼굴로 케이드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가졌다.

엘프들이 그런 짓을 저지를 리가 만무했다.

그냥 케이드는 칼스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원하는 게 뭐냐?”

“증거지. 네 진심을 알 수 있는 증거.”

그렇게 말한 케이드는 마치 칼스의 속을 들여다본 듯이, 한 여자의 이름을 꺼냈다.

“유미리.”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넌 이미 엘라이저를 망가뜨려 놨어. 그런데 왜 그 애가 필요하지?”

케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난 네 딸인 엘라이저가 어둠의 편에 서면 인질이 될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생각보다 부녀의 정이 깊지 않더군. 차라리 남보다도 못한 관계더라고.”

“너는 끝까지 나를 희롱하는구나.”

“내 탓을 하지 마. 이런 정보를 준 건 네 딸인 엘라이저라고.”

케이드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칼스는 엘프들을 위해 오욕을 짊어졌고, 아끼는 이들을 하나둘씩 빼앗기고 있었다.

그것을 두꺼비처럼 날름날름 받아먹는 것은 바로 케이드였고 말이다.

케이드가 처음으로 칼스에게 원했던 것은 그의 아내였다.

칼스는 케이드가 아내를 죽이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물론 그는 대마법사고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엘프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난 유미리를 원하는 게 아냐. 그녀를 죽이는 너의 진심을 원해. 네가 아끼는 존재를 악에 바침으로써 네 충성을 증명해봐. 그 대가는 엘프들의 생존이다.”

케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칼스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의 긴 꼬리가 칼스의 주변에서 원을 그렸을 때, 성당이 완전히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까마귀의 주위가 잠시 그 소란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다시 케이드와 칼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엔,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여관의 일 층에 모인 세인 일행은 지도를 펼쳐놓았다.

그리고 북행 루트를 의논했다.

좀비의 홍수 속을 돌파하며 시달릴 생각은 없었다.

엄청난 숫자의 좀비 떼와 마주치면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개고생이었다.

결국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마차로 이동할 생각이었던 대로는 선택지에서 멀어지고, 대신 산행이 결정되었다.

“좀비들은 추운 곳에서는 당연히 느려지고 약해져. 그리고 산을 잘 타면 검문소들을 패스할 수 있지.”

평지를 걷는 게 나을까.

아니면 산을 타는 게 나을까.

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평지가 최고였다.

멜라니는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될 대로 되라지.”

지도를 접어서 가방 안에 넣은 세인은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오믈렛을 깨끗이 비운 그는 치즈 덩어리를 들고 일어섰다.

성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염소 시장이었다.

거기에는 멍청한 염소부터 똑똑한 염소까지 다양하게 팔고 있었다.

보통 멍청한 염소는 사람의 배로 들어간다.

그리고 똑똑한 염소는 사람의 일꾼이 된다.

“산을 오를 때는 염소가 최고야.”

세인 일행은 알파인을 샀다.

귀가 쫑긋이 서 있고, 눈이 하얀색인 염소는 둥그렇게 말린 뿔을 가지고 있었다.

덩치는 꽤 커서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알파인은 굉장히 똑똑한 품종이었다.

얼마나 똑똑하냐면, 멍청한 흉내를 낼만큼 똑똑하다.

음흉할 정도로 똑똑하다는 뜻이다.

“이놈은 알파인 중에서도 최고라고 여기는 메가 알파인입니다. 물 찾는데도 도사고, 과묵하죠. 지나친 과묵함이 녀석의 장점입니다. 산행이라면 염소가 가장 안정적이죠.”

상인은 그렇게 말하며 돈을 더 요구했다.

세인은 흥정하지 않고 군말 없이 셈을 쳐 주었다.

염소와 함께 성문을 빠져나온 그들은 산길을 탔다.

멀리 높게 치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보였고 그 위에는 보라색의 장막 같은 것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오로라인가?”

멜라니의 질문에, 유미리는 손날을 눈썹 위에 붙이고 산 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녀가 손을 내려놓은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아닐걸.”

무거운 어조에 멜라니가 유미리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았다.

멜라니는 유미리에게 말을 걸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저쪽에 가보면 오로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메이미아 산맥이야. 줄기를 따라 위쪽으로 이동하는 거지.”

세인과 레드는 앞장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뒤쪽에는 염소와 함께 유미리와 멜라니가 걷고 있었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유미리의 손을 멜라니가 잡아 왔다.

그때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길 양쪽에서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향기를 실어다 주었다.

향기로 얼굴과 가슴을 매만지고 지나가는 바람은 마지막으로 유미리와 멜라니의 머리카락 끝을 잡고 흔들었다.

헤어지기 아쉽다는 듯이 말이다.

하얀 돌들이 쌓인 비탈진 길은 서서히 높아지는 산자락을 따라 옆으로 뉘어 있었다.

가끔 한데 모인 포도알처럼 동그라미를 닮으려는 듯 지나친 곡선을 품고 구불구불한 형태를 그리기도 했는데, 그 위를 걸어가는 여행자에게는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심술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일은 없었다.

유미리와 멜라니는 선두에 선 세인의 오른팔이 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은 약간 벌려지며 흐드러지게 핀 꽃의 위쪽을 쓰다듬었다.

여행자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꽃잎이 환영을 속삭였다.

염소 옆에서 걷던 유미리는 멜라니의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슬프다기보다는 흥겨운 노래였다.

그 돌림노래가 몇 번 반복되자 노란색 해가 비탈진 길로 떨어진다.

그리고 낮의 마지막 선물인 오렌지빛이 모두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 빛 속에서 하얀 이를 내보이는 유미리였다.

밤이 성큼 다가오자 그들은 산길 위에서 잠을 청했다.

두꺼운 침낭 속에서 얼굴만 드러내 놓고 보내는 밤이었다.

비탈진 길을 따라 급격히 기울어진 밤하늘 속에서 수많은 별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 빛무리는 금세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며 아찔한 감촉을 선사할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 느낌은 오후에 맛본 꽃들의 감촉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 아찔한 빛들이 가시를 세운 밤송이처럼 매달린 밤하늘은 완연한 검은색이 아니었다.

보라색 파장 같은 것이 은은하게 뒤덮여 있었다.

유미리는 침낭 안에서 눈을 깜박인 채 그 보라색의 오로라를 구경했다.

“저건 마정석이 되지 못한 혼의 조각들이 형상화된 거야.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현상이지. 불운의 징조고. 세상이 많이 아파하는 구나.”

세인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옆으로 누웠다.

그러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유미리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슬픈 목소리에 반응한 걸까?

미약하게 땅이 흔들렸다.

심한 지진은 아니었고 지나가듯이 발생하는 지진이었다.

벌벌 떠는 땅을 느끼며 다시 유미리가 중얼거렸다.

“세상이 많이 아파하는구나.”

*  *  *

아침이 되자 그들은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출발했다.

고도는 높아졌지만, 주위를 산자락이 가둬 버렸다.

그래서 등졌던 성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은 말라붙은 나뭇가지들과 기형적인 바위들이었다.

하얀 이끼에 뒤덮인 바위는 때론 자연이 지은 다리가 되어 봉우리와 봉우리를 이어주었다.

그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일행이었다.

발아래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둡고 비탈진 경사만 보일 뿐 물은 발견할 수 없었다.

천천히 발을 움직이던 멜라니는 유미리를 불렀다.

그리고 아래쪽의 어두운 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길 봐 유미리. 우르릉들이야. 엄청나게 많아.”

그늘진 곳에 검은 형체들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박쥐처럼 벽면에 달라붙어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놈들은 골짜기 아래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부서진 영혼들이 산 쪽으로 흘러들어온 거야. 여긴 어둡고, 크고, 원시적인 곳이라 영혼이 투사되기 좋은 곳이거든.”

유미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우르릉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는 곳을 지나자, 눈앞에 솟아오른 산의 측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는 세인은 물론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거대한 산의 측면으로 인간의 얼굴 같은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

생명체는 분명 아니었다.

그걸 본 세인은 과거 골디온의 성에서 난가의 왕이 팔던 그림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입체감이 존재한다.

지독히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데드 페이스네.”

유미리가 커다란 얼굴의 정체를 말했다.

“정령과 영혼의 찌꺼기가 결합한 거야. 세상에 흘러넘치는 악의 속에서 말이지.”

“위험할까?”

“모르겠어. 단순한 페인팅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것은 토템처럼 내면을 담고 있을 때도 있어서 말이야. 그런데 저렇게 큰 것이라면 오히려 내면이나 자아를 가지기 어렵지 않을까? 군체일수록 밀도 높고 통일된 마인드를 가지기 힘들어. 그냥 모기떼라고 보는 게 맞겠지.”

돌다리가 끝나자 눈밭이 펼쳐졌다.

그리고 거대한 산의 옆구리에 박힌 얼굴은, 이제 더욱 뚜렷하게 일행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고 흉측한 인간의 얼굴은 눈을 반쯤 뜬 형상이었다.

그러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환희에 들뜬 표정 같기도 하다.

홉뜬 흰자위를 보며 유미리가 설명을 더 해주었다.

“사람이 많이 죽은 전쟁터에서 땅을 파보면 검게 변색된 돌이 있거든. 거기에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바로 데드 페이스야. 지옥에 끌려가는 영혼이 돌을 통과하면서 새겨진다고 알려져 있어. 그런 원리로 영혼 찌꺼기가 묻어나는 거지. 그런 게 엄청나게 모여 결정화되면 마정석이 되고.”

그들은 눈밭 위에서 계속 움직였다.

염소의 발자국과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하얀 대지 위에 새겨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뭔가를 깨달았다.

커다란 데드 페이스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눈이 움직이고 있어.”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데드 페이스의 눈이 움직였다.

일행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서 말이다.

착각이나 우연일까?

그걸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다른 쪽으로 한참 이동하면서 다시 눈이 움직이나 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말이다.

유미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인을 고개를 숙였다.

그때 주위에서 작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 옷깃을 세운 세인이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으로 추가 설명문을 짚어본 그가 일행에게 정보를 전해준다.

“크리스털 동굴이 곧 나올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돼.”

세인이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멀리 커다란 입을 드러내고 있는 동굴이 보인다.

*  *  *

까마귀는 작별을 하기 위해 세계수를 찾았다.

어린 소년 모습인 세계수는 모든 일을 마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형벌을 기다렸다.

그의 명예와 모든 지위가 바닥에 추락하는 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세상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흐름, 유미리를 살려낸 벌로 구렁텅이에 떨어질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까마귀는 소년의 머리 위에서 그가 보고 있는 것을 같이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넓은 수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동생과 나는 저 속에서 숨바꼭질하곤 했어. 그땐 참 즐거웠지.”

까마귀는 세계수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노센트들은 우리와 다른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틀린 존재들이야. 그들이야말로 벌을 받아야 해. 누군가가 그들에게 혹독한 벌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서서 심판을 휘두르는 이노센트들을, 역으로 심판하지 않으면 세상은 파멸할 거야. 안배된 신의 순리는 용서겠지?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세계수는 자기 생각을 강한 어조로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며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검은 왕의 잔인한 심판을 원해. 그들은 회개할 시간도 없이 나락에 떨어져야 해. 그때의 울음소리를 상상하니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한 위안이 된다.”

세계수의 말이 끝나자 까마귀는 감았던 눈을 뜨며 자기 생각을 꺼내놓았다.

“오래전에 나는 굳건한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흔들리기 시작했어. 그리고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르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어.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내 마음과 생각은 고립되어 갇혀있는 것만 같았고 부패하는 기분이었다.”

수해에서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이 까마귀와 소년에게 불어왔다.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좌절했다가 다시 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날들 속에서, 이젠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품었던 생각도 이미 흔들릴 대로 흔들려서 멀리 굴러가 버렸는지도 몰라.”

까마귀의 고백에 형벌을 기다리는 소년이 물었다.

“후회해?”

그 질문에 함축된 의미가 검디검은 까마귀에게 순백의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세계수는 충분히 그걸 요구할 권리가 있었고 말이다.

“후회라는 차원이 아니야. 결국 난 검은 왕을 이곳으로 불렀어. 난 오랜 방황 속에서도 결국 결정을 내린 거야.”

이제 작별할 시간이다.

“이 세상에는 검은 왕이 필요해.”

까마귀는 말을 마치고 세계수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런 까마귀의 시선은 절망의 우물처럼 깊었다.

절망위로 오르지 못한 까마귀의 한숨이 이어지고 그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리고 홰를 치다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까마귀였다.

소년은 눈을 감고 떠나가는 까마귀의 날갯짓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멀어져 가는 그 소리는 그의 운명이었다.

까마귀의 모습이 허공에서 점이 되었을 때, 눈을 감은 세계수의 몸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벌을 받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수가 격이 추락하는 벌을 받듯이.

다시 살아난 유미리가 받아야 할 벌은 지옥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죽는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지옥에 도달하면 고통을 받는 게 아니야. 거대한 땅에 홀로 갇히는 거지.”

언젠가 유미리가 죽으면, 그녀는 지옥이란 이름 아래 아무도 없는 별에 갇힐 것이었다.

그 별 안에서 그녀는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아마, 정신이 붕괴하겠지.

그 참혹한 끝을 만들어준 게 바로 세계수였다.

그리고 세계수도 언젠가 별 안에 홀로 갇힐 운명이다.

그도 지옥행인 것이다.

“그게 미안하다, 유미리. 네 운명을 끝없는 고독함으로 채우게 만들어서.”

눈을 감은 소년은 지금 받는 자신의 처지보다, 유미리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미안했다.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는 호수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밑바닥에 가라앉아.”

하지만 과거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대안이 그녀밖에 없었다.

자신의 원한도 원한이지만, 그녀의 강력한 의지와 힘만이 지금 이 시대를 구원하고 길을 열어줄 수 있다고 믿었다.

때론 고행일지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가치 있는 것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길 위에서 홀로서기를 해야만 한다.

“수면 위의 햇살을 상상한다.”

소년의 모습은 이제 완전한 검은색으로 휩싸였다.

몸을 일으킨 검은 연기는 거꾸로 움직이는 폭포와도 같았다.

그 연기는 주변을 집어삼키며 점점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치솟는 그 검은 포효가 세계수를 쥐고 흔들었다.

그가 이렇게 추락하고 나면 잃어버린 지위 때문에 주변도 성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부의 세계수 지역은 엄청나게 축소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세인이 태어나는 시대의 미래다.

세계수가 지은 죄가 세상에서 그의 존재를 흐리게 하고 진면목을 감추게 할 것이었다.

명성과 힘을 빼앗기고 이제 밑바닥의 존재로서 살아간다.

죽음 이후에는 지옥에 떨어진다.

검은 기운은 세계수가 예감했던 내용을 선고했다.

소년의 몸을 휘감은 검은 물결이 꿈틀대며 그의 모든 것을 파먹었다.

그리고 나락에 떨어진 영혼의 씨앗 하나를 내놓는다.

세계수의 지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자.

본 모습을 박탈당한 죄인.

그것은 바로 까마귀였다.

검은 눈을 반짝이는 까마귀는, 이제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늘부터 그는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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