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92화 (192/307)

# 192

& 눈을 뜨기 위해 (1)

헤카테로 향한 인간 군대는 그곳을 봉쇄하기 위해 작전을 짰다.

어쨌든 후방을 수습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진압을 하자니 한 나라를 지옥으로 만든 무지막지한 놈들이다.

빠른 해결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기기 위한 전략보다는 상대의 활동 지연책을 잔뜩 내놓고 움직였다.

대대적인 포위가 진행되었고 헤카테 국경을 병사들이 세운 장애물로 둘러쌌다.

“레인저들을 뽑아 내부를 탐색하게 해라. 그들이 가져온 자료를 보고 차후 행동을 결정하겠다. 지휘관들은 당장 장기 회의를 준비하도록!”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침투에 이골이 난 레인저들이 헤카테의 험난한 산을 올랐다.

산의 능선을 따라 수도로 이동하는 것이다.

잎사귀는 적지만 가지가 많은 나무는 그들의 위장복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길목을 막고 거점의 방비를 굳힐 때도 헤카테 쪽은 잠잠했다.

하지만 그건 겉보기만 그랬을 뿐이다.

*  *  *

시체들이 부패하는 냄새로 가득 찬 땅 위에서, 오연히 서 있는 케이드가 명령을 내렸다.

그의 얼굴은 침착해 보였지만 눈가에는 흥분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시작해라.”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괴물들이 마무리를 위해 움직였다.

드디어 헤카테를 박살 낼 일이 목전이었다.

그 달콤한 결실을 위해 첫 번째로 일어난 것은 미약한 지진이었다.

지진은 점차 강해지며 땅 위의 모든 것들을 뒤흔들었다.

케이드는 몸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성공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석상 하나가 기울어지더니 그를 덮쳤다.

케이드는 무방비 상태 그대로 석상에 맞았다.

쩌저적 소리가 나며 땅 위로 돌덩이가 굴렀다.

하얀 돌가루 범벅이 된 케이드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상태로 눈을 깜박이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소름 끼쳤다.

밀가루를 뒤집어쓴 살인마 같았기 때문이다.

헤카테의 땅에서 커다란 굴곡이 일어났다.

지진 때문에 갈라진 틈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출렁거리는 굴곡이었다.

그 굴곡은 점점 두드러지며 존재감을 뚜렷이 한다.

하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면 사람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은 헤카테의 왕이다.

“성공이다.”

케이드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시체를 집어삼켰던 땅속에서 헤카테의 왕이 일어났다.

“맙소사.”

산의 정상에서 수도에 침입할 계획을 짜고 있던 레인저들은 기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성 쪽에서 거대한 물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듯 이상한 울음을 내며 몸을 일으킨 물체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붉은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거인이,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졸지에 거대한 산이 생겨났다.

산의 정상에는 거대해진 헤카테 왕의 머리가 붙어 있었다.

그 머리는 인간들의 무수한 시체로 이루어진 머리였다.

피에 젖은 거인의 눈알이 천천히 돌아갔다.

부들거리는 손이 자신의 입가를 더듬었지만, 입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거대한 생물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콧구멍에서 피와 함께 끈적하고 하얀 액체가 줄줄이 흘러내려 가슴을 적셨다.

“멋지구나. 헤카테 왕. 가라! 그 멋진 모습으로 당당하게 가는 거다! 더욱 나은 내일로!”

케이드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치며 그렇게 말하자 거인이 움직였다.

그의 발이 거리를 짓밟자 먼지가 일어나며 집들이 박살 났다.

그 모습을 케이드는 기꺼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레인저들은 헤카테를 봉쇄하고 있는 군대에 연락을 보냈다.

그런데 저 엄청난 크기의 괴물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인간의 시체들이 엉겨 붙어, 재탄생한 헤카테 왕은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걸었다.

그가 죽기 전에 꿈꾸던, 신이 된 듯한 기분은 일절 없었다.

분명 거대한 산이 그의 어깨높이에 있었고 넓은 강이 개울처럼 느껴졌지만, 환희는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는 열병을 앓는 듯 지끈거렸다.

눈도 빠질 듯이 아프고 뜨거웠다.

가장 답답한 것은 입이 없는 고통이었다.

마치 악마의 거대한 손이 왕의 입을 꽉 틀어막은 듯이 갑갑했다.

강제로 벙어리가 된 헤카테 왕은 신음과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계속 걸었다.

산맥 아래 흐르는 강 수면에 괴기스러운 그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바람에 넘실거리는 물살 위로 왕의 모습도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왕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걸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내내 지옥에 있었다.

더한 고통을 맛보지 않으려면 바삐 움직여야만 한다.

지금 이게 그가 꿈꾸던 이상향이었을까?

“막아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라!”

국경 지대에서 안개와 구름을 가르고 헤카테 왕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개의 커다란 산 사이에서 몸을 드러낸 붉은 괴물.

거인은 화살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통각이 없는 왕에게는 그게 저항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왕의 발에 인간들의 진형이 짓밟혔다.

그리고 개미들처럼 으스러졌다.

헤카테 왕이 허리를 굽히고 손바닥으로 땅을 쓸었다.

그러자 기마들이 터져 나가며, 진득한 액체가 그의 손에 묻어났다.

그것을 혀로 핥고 싶어 입가로 가져가던 왕은, 입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울부짖었다.

물론 코를 통해서만 나오는 그 신음은 끙끙 앓는 소리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기괴한 소리를 내며, 왕은 네 발 가진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의 주변은 지옥도가 되었다.

죽음과 피의 물결이 가뜩이나 붉은 거인의 몸에 검붉은 물결무늬를 만들었다.

헤카테 왕은 머릿속에 울리는 명령을 따라 북상했다.

그렇게 마주친 나라를 침공했다.

케이드는 물론, 헤카테 왕이 거인일지라도 나라 하나를 점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거인 상태로 형태를 유지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성을 들여 만들어낸 헤카테 왕은, 케이드의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버텨 주었다.

그는 거인의 형체를 유지한 채 고이트의 슬람성을 공격했다.

미리 봉화로 연락받은 고이트인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연이은 화살 비가 쏟아지고 투석기 공격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결국 왕의 팔이 터져나갔다.

그 핏물은 슬람성의 지붕들을 붉게 적셨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얽힌 도로를 따라 헤카테 왕의 피가 파도처럼 흘렀다.

악취를 머금고 끈적거리는 피를 맞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이다.

슬람성의 공격이 거세지자 헤가테 왕은 무릎 꿇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가슴이 갈라지더니 쪼개짐이 목 위로 치달았다.

양쪽으로 벌려지는 거인의 육신에서 무수한 시체들의 비가 쏟아진다.

슬람성은 그 시체의 비를 감당해야만 했다.

이제야말로 전투의 2막이었다.

떨어져 내린 시체들은 땅을 기어 다니며 산 자들을 물어뜯었다.

병사들의 창이 등에 꽂히고, 머리를 도끼나 검으로 난자당해야만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력을 다한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사방에서 좀비들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헤카테 왕은 상반신을 점점 소모하면서 좀비들을 사방으로 쏟아냈다.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좀비들이 쏟아졌다.

그중 태반이 낙하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지만 멀쩡한 놈들도 많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싸우며 좀비들을 해치웠을까?

그들은 문득 머리 위가 시원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늘이 얼굴을 덮은 것이다.

진득한 피가 묻어 있는 얼굴을, 하늘로 돌린 사람들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사람들의 머리 위쪽에는 헤카테 왕의 하반신만이 눈에 띄었다.

동산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게 점점 기울고 있는 중이다.

“안돼.”

“빌어먹을! 안 돼! 안 된다고!”

“피해, 어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바다 속에서 빠르게 뛴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거인의 하반신이 쓰러지며 굉음을 일으킨다.

그 밑에 깔린 사람들의 외마디 비명은 땅속에 묻혀 버렸다.

집들과 인간들을 그대로 깔아뭉갠 하반신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모래알처럼 와르르 무너지더니 다시 좀비들이 일어선다.

결국, 그날 그 좀비들을 다 물리치는 것에 성공했지만 슬람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허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좀비들이 생존자를 물어뜯는 모습은 지옥을 연상케 했다.

케이드는 실험이 성공했음에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자축의 박수다.

그는 남부에 전염되는 공포를 부채질했다.

그렇다면 그 시각, 북부에서 몬스터 대군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군대. 그리고 그 군대를 이끄는 핵심인물들은 남부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  *  *

커다란 군사용 천막 안에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걸치고 있는 옷도 최고급이었다.

그녀 앉아 있는 의자나 주변에 놓인 물건들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황금빛 머리를 뒤로 묶은 그녀는 편지를 쓰고 있다.

우아한 손놀림 아래에서 화려한 필체가 춤추듯 이어진다.

“이봐.”

남부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던 여인은 뒤에서 들리는 남자 소리에 대꾸하지 않았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이봐 세리스.”

세리스는 등 뒤에서 남자가 재차 부르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미스틸 테인. 지금 제가 바쁜 거 안보이나요?”

“그게 지금 창에게 할 말이야? 내게 눈이 어디 있어?”

그녀의 등 뒤에 있는 벽에서 비스듬히 놓인 은빛의 창.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졌다고 일컬어지는 마창이 지금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그의 이름은 미스틸 테인.

성기사인 세리스와 함께 전장을 누비는 동료였다.

“보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녀의 말투는 냉담했다.

누가 이 자리에서 들었다면 혼내는 소리라고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원래 모든 대상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녀였기에 미스틸 테인은 상처받지 않았다.

상처받기에는 여태껏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다.

“남부 인간들을 어떻게 할 셈이야? 그들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뭉쳐 있는 게 최선입니다. 여기서 군의 일부를 돌릴 수는 없어요. 그쪽은 그쪽대로 사람들이 꽤 죽어 나가겠지만…. 뭐, 괜찮을 거예요. 무너지진 않을 테니까.”

“그게 성기사가 할 말이야?”

“제가 안전한 곳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보다 미스틸 테인.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우리가 대화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겠어요. 당신의 말은 너무 영양가가 없으니까.”

미스틸 테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리스. 방금 나 상처받았어. 진실이라고 해서 꼭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

세리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편지를 계속 써 내려갔다.

그녀가 아래쪽으로 내려간다면 남부의 문제는 금방 해결된다.

세리스는 엄청난 강자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그런 취지로, 도움 요청에 대한 답을 했다.

“뭐 하는 거야, 세리스.”

“….”

“세리스 말 좀 해봐. 제발 말 좀 해보라고.”

“….”

“세리스, 제발. 제발, 좀.”

세리스는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짜증 난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쪽은 여기를 지원하기 위해 있는 건데, 헛소리를 하니 짜증 난다고. 그리고 징징대지 말라고 썼어요. 그리고 이 말은 당신에게도 유효합니다. 무기 주제에 징징대지 마세요. 당신이 그럭저럭 쓸 만한 무기가 아니었다면, 당장에 밑의 사람에게 던져줬을 겁니다.”

상처받은 듯한 미스틸 테인이 침묵을 유지했다.

굉장한 힘을 가진 그를 보고 그럭저럭인 무기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세리스로서는 충분히 자신의 주관을 객관인 것 마냥 펼칠 수 있었다.

세리스는 엄청나게 강했다.

그녀는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무력의 영역을 나날이 갱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일을 추진한다.

한결 같은 믿음은 물론이고 카리스마까지 가진 그녀가 모두에게 존경받는 이유였다.

게다가 그녀에게 모이는 기대를 알았기 때문에 국적을 불문하고 아무도 세리스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왕들도 세리스만큼은 절대적으로 믿는 눈치였다.

세리스는 편지를 끝마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미스틸 테인에게 물었다.

“추신은 뭐로 하면 좋을까요?”

그러자 미스틸 테인은 삐친 듯이 ‘나 따위에게 물어봐서 뭐 하려고?’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세리스는 자신이 물어봐 놓고서도 그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혼잣말처럼 그냥 한번 해본 소리였던 것이다.

그녀는 추신을 적어 내려간 후 조심스럽게 밀봉했다.

그리고 인장을 찍었다.

“잠깐. 세리스! 나도 데려가! 밖의 바람을 쐬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스는 푸른 망토로 몸을 가리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하여튼 남의 말은 더럽게도 안 듣는 여자였다.

밖으로 나간 세리스는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주위는 아직 초저녁이었다.

어스름이 주둔지에 깔리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지평선까지 펼쳐진 군영이 사방에 가득했다.

깃발들이 펄럭이는 소리가 바람과 함께 그녀의 뺨을 때렸다.

흐트러지는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넘긴 세리스가 천천히 걸었다.

멀리 성벽이 보였는데 그녀는 일부러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서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자는 중이다.

사색에 잠겨 걷는 그녀를 아무도 방해하지 못했다.

허리에 검도 차지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강한 자가 바로 세리스다.

‘인간으로서.’

세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

인간으로서 강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분명 인간으로서 오를 수 있는 극한의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인간의 한계 내에서였다.

걸어가던 그녀는 시체가 걸려있는 곳에 도달했다.

탈영병들을 잡아 장대에 매달아 놓은 곳이었다.

그녀가 직접 이들을 사형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의 세리스는 장대 위에서 썩어들어 가는 시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상태로 말이다.

“인간이니까 한계가 있어. 바로 그게 문제인 거야.”

인간들이 승리하지 않으면 남은 것은 만물의 죽음뿐이다.

세상 전체를 건 성전을 벌이고 있는데, 탈영자가 나올 만큼 인간들은 약한 면이 있었다.

세리스도 인간이니까, 태생적으로 약점이 있다.

인간인 세리스의 약점은, 바로 그녀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팔짱을 푼 그녀는 자신의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곱고 아름다운 손은 평생 단단한 것을 쥐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굳은살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손은 강철도 쉽게 구부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어마어마하게 강한 테러 나이트와 승부를 겨룰 수도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녀가 압도적으로 이긴다.

문제는 그 뒤에 테러로드를 만났을 때이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면 꼭 마주쳐야 하는 적의 우두머리지. 놈은 강력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인간이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인간세력의 최정예인 세리스는 테러로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테러로드가 가진 권능은 약속과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약속 말이다.

그걸 힘으로 돌파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래전에 테러로드 두 자리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많지 않았다.

애초에 테러로드가 세 자리였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지금 존재하는 테러로드는 그중 가장 무난해 보이면서도, 여전히 난해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닉스는 끊임없이 괴물을 일으켜 자신을 위해 싸우게 만든다.

방패로서, 무기로서 말이다.

세리스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끝없는 공세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테러로드는 권능을 제외해도 그 자체로 무지막지하게 강한 악이다.

‘그래서 유미리를 믿었던 것인데, 설마 그녀가 배신할 줄이야.’

세리스는 남쪽 세계수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파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 그건 테러로드를 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유미리의 스승인 칼스도 몰라본 실력을, 세리스는 약간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유미리의 강력한 마법이라면, 테러로드의 권능에 맞설 수 있는 단초가 될 거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절호의 기회 때 유미리는 나타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수포가 되고야 만다.

고개를 뒤흔든 그녀는 결국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장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하자.”

그리고 그녀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너머.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들의 뒤로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주 멀리 거대한 화산 같은 것이 보였다.

짙고 검은 구름이 유난히 몰려들어 있는 화산은 활화산처럼 붉은 연기를 뿜어냈다.

그 연기가 하늘 위로 치솟아, 검붉은 선을 수직으로 긋고 있다.

섬뜩해 보이는 화산 자체가 바로, 괴물들이 만든 발리스타였다.

세리스는 군대를 이끌고 두 개의 발리스타를 분쇄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남은 발리스타가 눈앞에 있었다.

저 고지를 점령하고 파괴해야만 인간들의 숨통이 트인다.

여기는 아주 먼 미래에, 세인과 그의 기사가 입에 담은 적이 있던 곳이다.

레드 블레이크.

이곳은 인간의 군대와 몬스터들이 대립하고 있는 최전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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